1. 들어가는 말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 재직하시는 두흐로 교수의 글을 논찬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특히 칼빈 탄생 500주년이 되는 해에 칼빈에 대한 글을 읽게 되어 나름대로 기쁨이 되었다. 두흐로 교수는 독일의 신학계에서 경제윤리와 해방신학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WCC 라인의 학자로서, 나름대로의 위상을 지니고 계신 분이다. 오래 전부터 그의 신학적 전개에 관심을 가진 한국 신학자들이 있어, 그의 책 몇 권이 이미 한국에 번역되기도 하였다.(1) 이런 책들에서 보는 대로, 그는 오늘의 자본주의와 세계화의 논점들을 성경과 신학적 입장에서 조망하여 왔다. 두흐로 교수는 이 글을 쓰며 앙드레 비엘러(Andre Bieler)가 쓴, 『칼빈의 경제 및 사회사상』(Calvin’s Economic and Social Thought)을 주로 참조하였다고 말한다. 1961년에 프랑스어로 처음 출판된 이 책은 거의 50년 후인 2009년에 칼빈 500주년 기념으로 영어로 번역된 바 있었다.(2)

두흐로 교수는 이 글을 통해, 종교개혁자들인 칼빈이나 루터가 초기 자본주의의 문제되는 테제들을 그대로 승인하고 있지 않음을 설명한다. 오히려 그들은 당시 새롭게 발흥하려는 자본주의적이며 제국주의적인 도시경제를 견제하는 발언들을 많이 하였으며, 그 내용들을 신학화하였음을 두흐로 교수는 언급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막스 베버(Max Weber)가 그의 책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3)에서 말한 바와 같이, 칼빈주의가 자본주의 정신을 발전시켰다는 주장은 그 타당성을 결여한다.(4) 두흐로 교수는 칼빈이 자유방임의 시장경제(5) 및 통제가 없는 금융수익에 대해 반대 의견을 가졌음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자본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종교개혁자들을 이용할 수 없다는 점을 두흐로 교수는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그는 오히려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은 이후에 마르크스가 상품, 돈, 자본에 대한 물신숭배(fetishism)라 언급한 내용에 간접적인 기여를 한 것이라고 말한다. 먼저 그의 글을 전체적으로 요약하였다.



2. 경제윤리와 연관된 칼빈의 신학적 기반: 창조-타락-회복

칼빈은 먼저 성경의 말씀을 통해 인간이 본래 성스러운 연대성의 질서(the order of solidarity)를 갖고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동료 인간을 위시한 다른 피조물들과 관계를 맺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로 섬기도록 창조되었다. 이러한 관계적 성격은 자기 사랑과 분열을 유발하는 타락과 죄를 통해 왜곡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의 교통을 통해 지음을 받은 새 생명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뿐만 아니라, 교회와 사회 가운데서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적인 생활을 회복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경제 문제도 이러한 연대성의 논리에서 조율되어야 한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필요 가운데 있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그 사람을 ‘하나님의 사랑의 보살핌’으로 돕고자 노력해야 된다. 결과적으로 칼빈은 사회를 연대성 가운데 세워져 있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에 부는 모든 사람에 의해 공유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는 일을 최후의 심판의 핵심 기준으로 삼으셨으며, 가난한 사람들과 자신을 완전하게 동일시하셨다(마 25:31 이하).

그러나 인간의 타락은 이 같은 삶을 불가능하게 했다. 타락한 부자들이 이러한 무질서를 만들어내는 수단은 독점과 허비와 투기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풍족함을 주도록 되어있었던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이 망쳐지게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맞서셔서 창조세계와 사회를 회복하시기 위해 일하신다. 그리스도 안에 성육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자유와 재창조를 향해 구속하시고 감동하신다. 전체 창조세계가 이 회복을 대망한다. 하나님은 개인의 구원과 함께 사회 전체의 변화를 요구하신다. 칼빈은 우리의 구원을 영적인 구원만으로 환원하지 않았다. 영과 육은 이원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영적인 구원은 우리의 육의 삶 및 경제생활과 상관되어 있다.

3. 칼빈의 부와 빈곤에 대한 이해: 빈곤을 위한 부

칼빈은 부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빈곤을 하나님의 징벌로 단순하게 보지 않는다. 칼빈은 불행을 하나님의 배척과 단순하게 동일시하거나, 번영을 하나님의 은총과 동일시하는 일을 배격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육체의 소욕들로부터 정화시키시기 위해, 믿는 자들에게 경제적인 역경도 겪게 하신다고 칼빈은 말하였다.

칼빈은 부자들이 소유한 부는 빈곤한 사람들을 위해 쓰여야 할 재화임을 강조한다. 그는 사적으로 획득한 사유재산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러한 부는 평등의 창출을 위한 것이라고 그는 언급한다. 교회는 연대성을 통해 더불어 살아가는 바, 본성적 질서의 회복이 일어나는 곳이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능력에 따라 기여하며, 자기의 필요에 따라 받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는 부자들의 부유함이 가난한 자들에게 착취와 억압의 조건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다. 그와 같이 칼빈은 이후로 전개될 자본주의 폐해를 나름대로 비판하였던 것이다.

4. 경제정의를 위한 칼빈의 법적 제도적 대응: 공동선을 위한 국가의 개입 강조

법률에 대한 많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던 칼빈은 다른 어떤 종교개혁자들보다 교회와 국가 내에 나눔과 연대의 질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당국자들은 사람들이 죄에 의해 지배를 받지 않도록 예방하기 위해, 경제적인 문제들에 개입하는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 국가는 공동선을 위해 경제적인 문제에 과감히 개입해야 한다. 공동선을 위한 과세 및 금융시장 개입, 기업과 상공에 대한 규율 등이 핵심 쟁점이었다. 칼빈은 오늘의 용어로 말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제3의 길을 옹호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사유 재산은 인정했지만, 부의 축적에 대해서는 명확한 제한을 두면서 사회적으로 규제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런 견지에서 노동, 교역, 은행이라는 몇 가지 구체적인 경제적인 문제에 대한 칼빈의 의견들을 검토하도록 하겠다.

1) 노동의 문제: 노동은 의무이자 권리

노동은 하나님의 소명이다. 아무도 게을러서는 안 된다. 누구도 직업이 없이 실업 상태로 있게 해서는 안 된다. 노동은 공동선에 기여해야 한다. 진정으로 하나님께서는 전체 공동체(community)에 유익하고 도움이 되며 이웃에게 선한 영향을 주는 직업들만을 인정할 것이다. 칼빈은 안식일을 노동자들을 수탈과 압제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장치로 해석하였다. 칼빈은 임금이 노동자들의 실제 필요와 관련해서 계산되어야 함을 말한다. 노동쟁의가 있는 경우 칼빈은 중재 메커니즘(arbitration mechanism)을 동원할 것을 언급한 바 있다.

2) 상공업의 문제: 연대성의 시각에서 상공업의 문제를 다룸

칼빈은 공업과 상업(trade)을 농업과 똑같은 무게로 취급했던 종교개혁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칼빈은 농업과 함께 상공업의 활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이다. 비즈니스를 포함하는 모든 측면에 대한 핵심 기준은 공동체에 미치는 효과이다. 모든 경제는 연대성이라는 시각에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칼빈의 사상은 오늘의 사회적 기독교(social Christianity) 사상과 연결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3) 금융의 문제: 이자수익에 대한 원칙적인 반대했으나 조건적으로 허용함

루터와 칼빈은 원칙적으로 이자수익에 대해 반대했다.(6)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가 소비자금융(consumer credit)과는 다른 생산적 금융(productive credits)이라 부르는 사업을 위한 대출에 대해서는 약간 다른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궁핍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위한 소비자 금융에 대해서는 결코 이자를 부과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만일 그 대출이 생산이나 교역을 통해서 결실을 맺는다면, 엄격한 조건 하에서 이자를 물리는 것이 허락될 수 있다.(7) 이 점에서 우리는 성경과 교회 전통의 언급들에서 현대의 성장 경제에 적용될 수 있는 주장들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인간에게 약간의 자유가 주어질 때 그 자유가 주어지자마자 본성적으로 욕심에 기울어지는 것에 주목하면서, 칼빈은 그 같은 이자수익에 대한 다양한 규제의 울타리를 친다. 돈을 빌려주는 일이 고리대금업이 되지 않기 위해서 그 대출금을 생산적이라고 부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그는 강조한다. 누군가를 돕는 일에 할당되어야 할 어떤 돈을 부당하게 사용하려는 사람은 자신을 고리대금업자의 대열로 전락시키는 한다.
칼빈은 정상적인 이자율을 정하는 객관적인 기준이 전혀 존재하지 않음을 강조한다. 만일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사람의 영적 도덕적 판단이 그 비율을 결정할 수밖에 없다. 이자율의 결정은 복음에 의해서 이해된 대로의 정의와 자선에 의해 지배되어야 하며, 다른 사람들의 필요(needs)에 따라 정해져야 할 것이다.

돈(money)은 실물 경제에 기여해야 하며 동시에 공동선에 기여해야 한다. 돈은 전문적인 머니 딜러(money dealers)(8)의 이윤을 만들어주는 상품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칼빈은 어떠한 타협도 하지 않는다. 고리대금업에 투자한 돈으로 이윤을 얻는 사람은 사악함이 흘러넘치는 약탈자가 될 것이다. 이 관점에서 현재의 금융위기는 급진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필요로 한다. 공동선에 기여하지 않는 어떠한 재정조직이나 금융메커니즘도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파생 금융상품이나 헤지 펀드 및 사적 에퀴티 회사(private equity firms)(9) 등은 금지되어야 하는 것이다.



5. 중국의 경우: 금융 자율화에 대해 국가적인 통제 필요

중국인들도 전반적으로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따르고 있지만, 일면으로 다른 정책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1998년 중국 사회과학부의 세계종교 연구소(the Institute of World Religions of the Chinese Academy of Social Sciences)(10)는 이웃 나라들로부터 대표들을 초청하여 또 하나의 자문 위원회를 조직했다. 이 위원회는 “중국이 어떻게 해서 금융 위기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했다. 그에 대한 답변은 명확했다. 중국은 금융시장을 자유화하지 않고 자본의 흐름에 엄격한 통제를 유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중국의 선택은 칼빈의 입장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와 같이 칼빈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보다는 일종의 자본에 대한 통제경제 체제를 선호하였다는 것이 두흐로의 설명이다.

6. 칼빈의 경제윤리에 있어 부족한 점: 토지자본수익과 금융자본수익의 문제

칼빈의 이론과 실천에는 두 가지 약점이 있다.

1) 재산(property) 문제: 토지공개념

칼빈은 한 사회에서 재산을 형성하는 다양한 가능성들을 차별화 시키지 않고, 초기 자본주의 사회의 사실에만 착목하였던 것이다. 토지를 사고 팔 수 있는 상품으로 보았으며, 심지어는 공공재와 서비스까지도 사유재산으로 하려는 충동이 오늘에 있어 핵심적인 문제 중의 하나이다. 이 같은 문제들에 대해 칼빈은 적절한 답을 주지 못한다. 하지만 희년사상 등의 성경말씀들은 우리에게 이런 문제들에 대해 상당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2) 칼빈은 부가 빈곤을 야기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함

돈과 신용대부(credits)에 이자를 매기는 것이 또 다른 쟁점이다. 칼빈은 재산축적을 향한 자본주의적 충동을 제약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장에는 약점이 있다. 첫 번째 약점은 그가 부의 불평등 분배를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해석하였다는 것이다. 칼빈은 경제적 메커니즘들을 통해 부가 빈곤을 창출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는 빈곤을 막기 위한 대안적인 구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5%의 이자율만 넘지 않는 신용대부들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승인하고 있는 바, 이 정도의 제한으로는 자본을 통한 재산 축적의 충동을 막기는 어려울 것이다.

7. 간단한 논평

1) 두흐로 교수의 칼빈에 대한 해석의 타당성

두흐로 교수의 칼빈의 경제윤리에 대한 해석은 막스 베버(M. Weber)의 입장과 대치된다. 칼빈이 자본주의의 옹호자인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는 논의할 여지가 많다. 칼빈은 크게 볼 때 사유재산이나 부의 차이를 인정했다. 그리고 생산재를 국유화시키는 문제에 대해서도 칼빈은 찬성한 바가 없다. 이런 각도에선 볼 때에는 우리는 칼빈을 자본주의를 반대하고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적인 입장을 가졌다고 평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자본주의의 폐해가 되는 문제에 대해,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과 동일한 견해를 갖고 있다. 그런 의미에선 일면 그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자라고 볼 수도 있다.

두흐로는 칼빈을 평가하며 사유 재산은 인정했지만, 부의 축적에 대해서는 명확한 제한을 가지고 사회적으로 규제하였다고 말하면서, 자본주의도 아니고 사회주의도 아닌 제3의 길을 선택하였다고 설명하였다. 그럼에도 두흐로 교수는 칼빈이 사회주의적인 입장을 상당히 지지하고 있는 것과 같은 표현을 하기도 하였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두흐로 교수의 더 명확한 설명을 듣는 것이 좋을 것이다.

2) 두흐로 교수의 오늘의 자본주의 및 신자유주의적 경제체제에 대한 비판의 타당성

2004년 가나의 수도 아크라에서 열린 세계개혁교회연맹(WARC) 24차 총회에서는 ‘아크라 신앙고백’(Accra Confession)이 채택된 바 있다. 이 신앙고백은 ‘정의, 평화, 창조의 보전’(JPIC)에 대한 공동의 헌신을 위한 협의 과정”의 일환으로, 경제를 그 논의의 중심 쟁점으로 만드는 데 있어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아크라 신앙고백의 18, 19조엔 다음의 문장이 나타난다.

18.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창조세계의 주권을 가지고 계심을 믿는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편 24:1).
19. 그러므로 우리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와 절대적 계획경제를 포함하여 그 경제구조가 어떤 형태를 띠든지 간에 가난한 자와 연약한 자 그리고 모든 피조물이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도록 제외시킴으로써 그들과 계약을 맺으신 하나님에게 도전한 현 세계의 경제질서를 거부한다. 우리는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뒤엎고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통치에 적대적 행위를 하는 모든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제국을 거부한다.(11)

두흐로는 이 고백이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하는 것으로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신앙고백은 동시 절대적 계획경제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있다. 19세기의 영국의 기독교 사회주의, 독일의 종교사회주의, 미국의 사회복음운동 등의 사회적 기독교는 20세기 들어 신정통주의 신학으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받은 바 있다. 이러한 비판에 따라 우리는 이전의 기독교 사회주의를 정당한 것으로 보기 어렵게 되었다. 또한 20세기 말의 공산주의 국가들의 붕괴는, 그러한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모순을 드러냈는바, 이제 그러한 공산주의를 다시 하자는 주장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시장경제 체제를 견지하면서도, 그러한 자본주의의 약점을 극복하는 방안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를 하는 것이 작금의 정황이다. 그런 견지에서 두흐로 교수의 주장을 실재화하는 데에는 약간의 무리가 있을 것 같다. 토지공개념과 이자수익의 강력한 제한, 실업이 없는 사회 만들기, 주식과 펀드 투자에 정부의 강력한 통제 등의 주장들은 이상적인 입장에선 좋은 의견이지만, 그것이 과연 오늘의 시장경제 체제를 유지하면서 구현될 수 있는 논의들인지에 대해서 약간의 의문이 간다. 이에 오늘의 현실을 감안한 보다 균형적인 대안이 마련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상적인 경제적 대안도 중요하지만, 현실 가능한 경제논의를 하는 것도 긴요할 것이라 생각한다.

2) 두 가지의 질문

먼저는 칼빈의 경제윤리 사상이 자본주의(capitalism)를 더 옹호하는지, 아니면 사회주의(socialism)를 더 옹호하는지에 관한 교수님의 견해를 듣고 싶다. 예를 들어(12) 막스 베버나 트뢸취는 칼빈이 자본주의적으로 더 기울어졌다고 보는 반면, 비엘러는 칼빈이 자본주의에 많은 영향을 준 것이 분명하나, 그러한 발전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하였다고 평가하였다.(13) 또한 그레이엄(14)은 사회주의적인 경향이 더 큰 것으로 보고 있다. 리이드(W. Stanford Reid)나 월리스(Ronald S. Wallas)(15) 등도 칼빈을 자본주의의 입장으로 보는 견해에 대해 반대하고 있다. 이에 비해 부스마(William J. Bouwsma)(16)는 칼빈의 양면성을 강조한다. 칼빈은 과연 두 가지의 입장을 다 지니고 있었는지, 아니면 그 양자 모두가 아닌 나름의 독자적 사상체계를 가지고 이상적 대안을 말한 것인지 우리는 평가해보아야 할 것이다. 

둘째로, 과연 오늘날 중국의 금융 및 경제정책적의 전반적 입장이 서구의 금융과 경제정책들보다 더 성경적이며 우수한 것인지에 대한 교수님의 평가를 듣고 싶다. 또한 한국을 위신한 다른 나라들이 중국과 다르게 자본시장을 현실적으로 더 개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지 설명이 되어야 할 것 같다.

<주>
1) 울리히 두흐로, 『하나님의 정치경제와 민중운동』, 강원돈 역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0). U. 두크로, 『성서의 정치경제학: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대안』, 손규태 역 (서울: 한울, 1997). U. 두흐로, G. 리드케, 『샬롬』, 손규태, 김윤옥 역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9). 기타 영어로 번역된 그의 주요 책으로, Global Economy: A Confessional Issue for the Churches, trans. by David Lewis (Geneva: WCC Publications, 1987), Ulrich Duchrow, Franz J. Hinkelammert, Property for People, Not for Profit: Alternatives to the Global Tyranny of Capital (New York: Palgrave Macmillan, 2004) 등과, 그가 편집한 책 Colloquium 2000: Faith Communities and Social Movements facing Globalization (Geneva: WARC, 2002)가 있다.
21) André Biéler, Calvin’s Economic and Social Thought, trans. by James Greig (Geneva: WARC, WCC, 2005). 이 책은 홍치모 교수에 의해 발췌 번역되어, 『칼빈의 경제윤리』 (서울: 성광문화사, 1985)란 제목으로 간행된 바 있다.
3) 베버의 책은 칼빈 자신보다는 칼빈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후대의 칼빈주의자들의 입장을 말한 것으로, 칼빈의 생각과는 차이가 있다는 비판들이 있다.
4) 베버 테제에 반대하는 두 가지 기본적인 논증이 있다. 1) 자본주의는 칼빈 시대 이전에 이미 출발했다는 것이며, 2) 베버가 자기의 테제를 입증하기 위해서 칼빈 자신보다는 17세기와 18세기의 텍스트들(특히 “시간이 돈이다”라는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의 말, 그리고 리처드 박스터(Richard Baxter)의 매우 엄격한 노동 동력론)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칼빈에게는 부의 목적이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인데 비해서, 청교도들에게는 그 목적이 개인의 구원의 표시이자 목표였었다.
5) 두흐로는 이를 사적 자본주의(private capitalism)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6) 칼빈에 비해 루터는 이자수익을 반대하였다.
7) 칼빈은 사업은 위한 대출에 이자수익을 갖는 것에 찬성했지만, 이에 대해서도 고리대금은 반대하였다. 이자수익을 인정했다는 것은 금융업을 인정했다는 말이 된다.
8) 대부업자 혹은 외환딜러
9) 지분투자회사나 벤처캐피털 같은 회사를 말한다.
10) 약어로 CASS라고 함.
11) [출처] 아크라 신앙고백 전문(세계개혁교회연맹 24차 총회 아크라)
12) 이하의 글은 이양호의 책, 『칼빈: 생애와 사상』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7), 255-277에서 주로 인용하였다.
13) André Biéler, Calvin’s Economic and Social Thought, 453-454.
14) 그레이엄(W. Fred Graham)의 책 『건설적인 혁명가 칼빈』은 번역이 된 바 있다. W. Fred Graham, The Constructive Revolutionary: John Calvin and His Socio-Economic Impact (Atlanta: John Knox Press, 1978), 193.
15) 로날드 S. 월레스, 『칼빈의 사회개혁 사상』, 박성민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5).
16) William J. Bouwsma, John Calvin: A Sixteen Century Portrait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8), 191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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