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리더십을 통해 흐른다

리더십은 타인에게 영향을 미쳐 원하는 방향으로 인식과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힘을 말한다. 이러한 리더십의 정의에 따르면, 기독교 복음은 믿지 않는 자들의 생각과 행동을 넘어서서 영적인 변화를 도모하는 것이기에 복음의 전파는 리더십을 필요로 하며 복음은 리더십을 통해서 전파된다. 한 기독교인이 믿지 않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리더십이 있어야 하며, 한 교회가 지역사회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그 교회는 지역사회에 대한 리더십이 있어야 하고, 한국사회의 복음화를 위해서는 한국사회에 대한 한국기독교의 리더십이 필요하다. 리더십이 없다면 한 개인을 전도하는 것도, 지역사회와 한국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도 어렵다. 따라서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에 앞서 우리에게 세상을 변화시킬 리더십이 있는 가 혹은 세상은 우리의 리더십을 수용하고 있는가를 점검하지 않으면 안된다.

리더십은 강제력이 동반되는 권력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따르도록 하는 영향력이 본질이다. 영향력은 권위에서 비롯되며, 권위는 신뢰에서 나오고, 신뢰는 팔로워들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을 충족시킴으로서 생성된다. 따라서 기독교와 교회는 그 필요를 충족시킴을 통해서 리더십을 갖게 된다. 기독교가 채워야 할 필요는 크게 세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다: 개인, 지역사회 및 한국사회, 그리고 기독교가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의 영역 또한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영적 필요와 물질적 필요, 그리고 개념화하기 어렵지만 개인 및 집단적인 의식, 문화, 가치, 제도, 원리 등의 측면에서의 필요. 이 세 번째 영역은 영적 및 물질적 필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상호작용한다. 이를 매트릭스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전통적으로 이웃의 필요를 채워주려는 교회의 관심과 행동은 늘 있었다. 그들의 영적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 전도를 하고, 기존의 낡은 의식과 습관과 가치체계를 바꾸려고 대화하고, 그들의 경제적 어려움에 대해서도 관심들이 기울여져 왔다. 이에 반해 지역사회 혹은 더 나아가 한국사회 전체 차원의 필요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과 행동이 덜 기울여져 온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영적 필요 영역에 대해서는 개인, 지역사회 및 한국사회 전체 차원에서 항상 관심을 기울여 왔다. 물질적 필요에 대한 관심은 그보다 약했고, 의식/가치/문화/제도상의 필요에 대한 관심이 가장 적었다. 한국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초기 기독교의 모습은 이와는 달랐다.

위 매트릭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균형과 조화라고 생각한다. 각 란에 해당하는 필요의 긴급성과 중요도에 따라 그에 맞는 적절한 수준의 관심과 행동이 있어야 한다. 세 차원이나 세 영역 중 어느 한 곳의 필요를 채우는 데 있어 소위 과락(科落) 점수가 나오면 다른 곳에서의 성과는 그만큼이 아니라 현저하게 감소한다. 이는 다른 점수가 아무리 좋아도 한 곳이라도 과락이 발생하면 떨어지는 시험과 같다. 과락이 나오지 않는 상태에서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곳에 그만큼의 관심이 기울여져야 한다. 그리고 그 관심의 크기는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개별 기독교인들이 노력한다 하더라도 한 지역사회에서 교회가 혹은 우리사회에서 기독교가 부정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면 그 노력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적합하지 않은 비유일 수 있으나 개별 기독교인들은 보병으로, 개 교회들은 포병으로, 그리고 전체로서의 한국기독교는 공중전을 수행하는 비행기로 볼 수 있다. 적절한 공중지원 및 포격지원 없이는 보병들의 노력은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혹여 잘못된 포격은 아군의 머리 위에 포탄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 그동안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한국사회와 지역사회 차원에서 의식/가치/문화/제도상의 필요에 대해 보다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왜 팔로워들의 필요를 충족시켜야 하는 가? 성경은 반대급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 때문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우리에게는 그러한 사랑이 없다. 따라서 하나님께 사랑을 달라고 구하고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사랑이 그들에게 흘러가게 해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문제는 사랑은 희생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이웃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는 나의 것을 희생해야 한다. 물질을 채우기 위해서는 물질을 희생해야 하고, 그들의 의식과 가치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정신적 에너지를 희생해야 한다. 영적인 필요조차 나를 위한 기도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기도를 올려야 하는 우선순위의 희생이 있어야 한다. 지역사회의 필요를 채우려는 교회나 한국사회의 필요에 대응하려는 한국기독교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치러야 할 희생은 추상적이지 않다. 매우 구체적인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기독교가 세상에 대한 리더십을 가져야 한다. 그 리더십은 세상의 필요 - 그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 - 를 균형되게 충족시켜야 한다. 이는 때로 희생을 요구한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지난 3-4년간 우리나라의 땅값과 집값이 평균 2배로 폭등했다. 지난 1988년부터 1990년 사이에 17명의 세입자들의 목숨을 앗아간 부동산투기가 재연된 때문이다. 이러한 투기를 가져온 핵심은 아파트 가격의 거품과 불로소득에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최근 서울시 SH공사의 원가공개에 의해서 명확히 밝혀진 것처럼 아파트 가격의 절반은 거품이다. 이러한 부동산투기의 폐해는 단지 사회, 경제적 측면에 국한되지 않는다. 성실과 근면의 가치를 비웃고 한탕주의와 황금만능주의를 만연시키며, 우리사회를 탐욕과 절망으로, 반성경적 가치가 횡행하는 사회로 몰아간다. 모든 국민들이 고통스러워했다. 그러나 기독교는 침묵했거나 무관심했다. 성경은 땅에 대해 명확한 메시지를 갖고 있다. 적어도 땅은 자산증식이나 최소한 투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필자는 교회가 나서서 구체적인 정책대안을 제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땅이 탐욕의 대상이 되는 것은 옳지 않다. 땅은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투기를 부추기는 제도는 개선되어져야 한다”라는 메시지는 던져야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부동산 투기를 하는 기독교인들에 대해 회개를 촉구해야 하지 않았을까? 만일 그러했더라면, 기독교 복음의 정체성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고, 하나님을 알지는 못하지만 무주택 서민이나 비록 집이 있더라도 양심적인 시민들에게 기독교는 희망을 줄 수 있지 않았을까? 필자는 기본적으로 우리사회가 하나님의 형상에 가까워지도록 노력하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적 사명 중에 하나라고 믿는다.

통합된 리더십만이 세상을 통합할 수 있다

오늘의 주제는 ‘한국사회와 통합의 리더십’이다. 그러나 통합은 통합된 리더십을 가져야만 이룰 수 있다. 최근 수년 동안 우리사회는 갈등과 분열이 끊임없이 확대재생산되어 왔다. 올 12월 대선과 내년 4월 총선을 거치면서 클라이막스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정치적 민주화 이후 각 이익집단 간의 갈등과 대립을 차치하고, 최근 우리사회의 갈등은 보수와 진보 간의 이념갈등이 중심갈등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필자 개인적 의견으로는 각 진영이 내세우는 이념은 추한 이해관계를 가리고 국민들을 호도하기 위한 가면에 불과하다. 이념의 가면을 쓴 과거의 정치적 이해관계의 충돌일 뿐이며, 정치적 헤게모니와 그에 따른 부산물을 둘러싼 싸움에 불과하다. 내세우는 주장과 정책은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뒤바뀐다. 이런 우리사회를 어떻게 통합할 것인가?

통합은 기계적 중간값을 취하는 것이 아니며, 서로가 만족할 수 있는 적절한 선에서 양보하는 타협의 결과물도 아니다. 진정한 통합은 현재의 안들을 절대화하거나 고정된 것으로 보지 않고 그것들을 넘어서는 보다 상위의 원리와 시각에서 - 성경적 시각에서 - 새로운 대안을 찾아감을 통해 이뤄진다. 그런 의미에서 통합은 ‘BETWEEN & BEYOND'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한국기독교가 우리사회 통합의 희망이 될 수 있다. 기독교에는 모든 것을 상대화할 수 있는 하나님과 성경의 가르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기독교가 한국사회의 통합에 희망을 주기 위해서는 한국기독교 자체가 통합된 리더십의 질을 가져야만 가능하다.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목사님께서 설교시간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성경의 가르침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며 이 둘은 따로 떨어질 수 없다. 그런데 한국교회에는 이웃사랑이 없는 하나님사랑과 하나님 사랑이 없는 이웃사랑으로 나뉘어져 있다.” 전적으로 공감한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진정한 통합과 그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원리의 모색 없이는 한국기독교의 통합적 리더십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오늘 대화마당의 주제는 통일시대를 염두에 두고 있다. 통일이 다가오면 이와 관련된 또 다른 갈등과 분열이 일어날 것이다. 예를 들어, 북측에 두고 온 땅의 소유권 문제가 필연적으로 발생할 것이다. 그 땅은 과거의 소유주에게 돌려주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현재 그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몫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성경으로부터 이러한 갈등을 통합할 수 있는 가르침을 배울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우리에게 사회통합의 컨텐츠는 마련되어 있는가?

리더십은 소통을 통해 이뤄지며, 소통에는 전략이 필요하다

소통이 없는 리더십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교회가 개인이든 집단이든 어떤 변화를 이끌어내고자 한다면 그들과 소통하지 않으면 안된다. 소통은 단지 일대일의 의사소통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개인차원에서, 교회, 기관, 기독교NGO 그리고 전체로서의 한국기독교 차원에서 세상과 소통한다. 명동 상업은행 앞 사거리에서 붉은 글씨로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고 쓰여진 검은 십자가와 주위를 아랑곳하지 않은 채 쉼 없이 울려 퍼지는 성경과 찬송소리를 통해 소통한다. 언론사 앞에서 이뤄지는 방언집회를 통해서도 소통하며,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리는 반북․반김정일 집회를 통해서도 소통하며, 길거리에서 혹은 지하철에서 탁발승과 언쟁을 벌이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기독교는 사회와 소통한다. 때로는 사회적 이슈와 연관된 목사님의 설교가 그 교회 교인들의 범위를 넘어 수백만의 시민들과 소통되기도 한다. 한국 기독교와 교회는 모든 방법으로 세상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소통들을 통해 기독교의 사회적 정체성이 이미지의 형태로 시민들의 머릿속에 형성되며, 기독교의 실재가 어떠하든지와 별로 관계없이 그들에게는 그것이 기독교의 모습이 되어 실제의 기독교를 규정한다.

세상에 무의미하고 목적 없는 소통은 없다. 소통은 수단이다. 메시지는 내용이다. 그리고 그 메시지를 통한 상대의 변화가 목적이다. 따라서 수단으로서의 소통은 목적의 효과적 달성과 내용물인 메시지의 손상과 왜곡 방지를 위한 전략을 필요로 한다. 정밀하게 설계되어지고 통제되어야 하며 그 결과에 대해 피드백 되어야 한다. 한국기독교와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던지는 메시지는 통일성과 일관성을 갖춰야 하며, 그 소통의 방식은 최소한 메시지의 수용을 용이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개인으로서의 크리스찬들은 끊임없이 소통방식에 대해 고민한다. 술자리에서 술을 마셔야 할지 아닌지, 권하는 술을 어떻게 거절해야 상대에게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을 주지 않을 수 있는지, 직장에서는 혹여 내 말과 행동이 “기독교인이 뭐 저래?”라는 반응을 가져오지는 않을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보다 나은 대안적 소통방식들을 찾아 나간다. 그러나 내부에서의 고민과 모색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바깥에서 보기에 한국기독교와 교회의 세상과의 소통에 대한 고민은 개별 기독교인들에 비해 한참 부족한 것으로 비쳐진다.

전체로서의 한국기독교와 한국사회를 생각하는 움직임이 일어나야 한다

기독교의 개교회주의가 가지고 있는 자율성, 다양성과 창의성을 살리면서 필요한 수준만큼의 통합성을 이루어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는 개별 기독교인이나 개별 교회에서 감당할 수준을 넘어선다. 한국기독교 차원에서의 체계적이고 조직적이며 장기적인 노력이 요구된다.

이번 대화마당의 논의주제와 관련하여 간략하게 몇 가지 의견을 밝히면,

첫째, 위기에 빠져 있는 한국사회에 필요한 통합적 리더십은 무엇보다 △자신이 속한 그룹 -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지역적 등 모든 분야에서 - 의 부분이익을 넘어선 전체이익을 추구하는 관점을 견지해야 하며, △실사구시 정신과 창의성에 입각하여 기존의 것들을 보다 높은 차원에서 통합할 수 있는 비전과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사회적 원리와 가치, 그에 따른 구체적이고 효과적인 정책수단이 준비되어야 하며, △다양한 이해관계에 기초한 제반 갈등들을 합리적으로 해소하고 생산적인 사회발전 에너지로 전환시킬 수 있는 역량과 국민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높은 도덕성을 갖추어야 한다.

우리사회의 통합과 관련하여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통합은 특정한 개인이나 정치집단의 리더십에 의해 이뤄지기 어렵다는 점이다. 사회의 통합은 통합을 가능케 하는 폭넓은 사회세력이 존재할 때 이뤄질 수 있다. 우리사회는 현재 소위 ‘보수 vs 진보’의 양 진영으로 나뉘어 있다. 실제 국민들의 가치체계나 의식이 이렇게 나뉘어져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국민들을 대변해야 할 위치에 있는 정당, 언론, 시민단체 등은 이렇게 양분되어 있다. 보수와 진보가 편이 갈려 ‘전부 아니면 전무’식의 정치적 및 사회적 헤게모니 장악을 위해 사생결단으로 달려드는 상황은 각 진영 간의 구심력만 강해질 뿐 사회통합에는 원심력으로만 작동하기 쉽다. 따라서 우리사회를 서구 선진국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Conservative - Liberal - Progressive'가 비슷한 세력으로 공존하는 사회로 전환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러한 삼각구도에서는 통합의 구심력이 훨씬 강하게 작용하며, 보수 혹은 진보진영이 자신들만의 부분이익에 지나치게 매달리기 어렵게 된다. 여기에서 말한 Liberal이 우리사회에서 가끔 회자되는 정체모를 소위 중도를 의미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이 그룹의 사상적 기반을 굳이 이야기 하자면 ‘실사구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Liberal 계열의 정당, 언론, 시민단체 등이 우리사회에 조속히 등장해야 하며, 이러한 사상적 흐름을 함께 하는 지식인과 여론주도층이 형성되어야 한다. 이들이 사회여론의 중심에 서거나 혹은 캐스팅보드를 쥐게 될 때 우리사회가 끊임없이 좌우의 극단을 오가는 오류를 줄이고 사회통합의 비용은 현저하게 줄어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그룹들을 준거집단으로 삼으려는 정치집단도 등장하게 될 것이다. 

둘째, 2007 대선을 앞두고 정치영역에 대해 한국교회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양보할 수 없는 자세는 한국교회가 특정 이념집단이나 정치집단과 동일시되거나 그 집단에 편향되어 있다는 사회적 인식이 형성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온 국민들의 눈과 귀가 집중되어 있는 대선국면에서 한국교회가 이러한 행위를 한다면, 그로 인한 왜곡된 이미지는 다른 시기에 비해 훨씬 강하게 머릿속에 각인되어 오랫동안 기억된다. 그리고 첨예하게 편이 갈려 있는 상황에서 반대편에 속한 시민들은 기독교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입장을 갖게 한다. ‘기독교인 후보이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지지해야 한다.’는 메시지들이 여러 교회 혹은 교회지도자들로부터 던져지고 있다. 이는 기독교가 대단히 비합리적이고 ‘연고주의’에 빠진 당파적 집단으로 여겨지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개인적으로는 한국교회가 대선시기에 우리사회가 지향해야 할 미래의 비전과 추구해야 할 가치에 대해 의미있는 메시지를 던지기를 희망한다. 대선국면은 향후 5년간 우리사회가 나아가야 할 비전과 정책에 대해 대통령후보/정당과 국민 간에 합의를 모아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 이러한 노력을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진 것으로 보인다. 한국교회가 나서서 성경적 가르침에 기초한 우리사회에 적용 가능한 사회의 원리와 가치를 지속적으로 제시하고, 후보/정당과 국민들이 이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도록 이끄는 역할이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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