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이런 자리에 초청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몇 년 전에도 한목협의 초청을 받고 독설 비슷한 것을 한 적이 있어서 죄송한 마음이 있습니다. 한목협이 있는 것에 대해서 소망을 갖습니다. 이런 단체가 있기에 한국 교회가 소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좋은 말씀을 많이 하는 목사님들 앞에서 제가 무엇을 말하겠습니까마는 대학 강단에 있을 때는 한국교회에 바라는 요구를 하게 되었는데, 이제는 내가 있는 위치를 생각해 보니까 요구할 위치가 아니라 책임질 위치에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때문에 책임지지 못할 말을 한다는 것이 부담스럽고 스스로 견책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조용한 가운데 독설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혹시 실수를 하더라도 넓은 아량으로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제목이 '진통하는 한국사회 속에서 한국교회의 나아갈 길'라고 했는데 이것은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진통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정도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빠른 변화의 시대에 적응하는 한국교회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외형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상황적인 것이 의식 자체를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교회에서는 상당히 삼가야 할 문제이고, 목사님들은 이런 말들을 잘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 생활은 경제적, 물질적 요인들이 인간의 의식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더 이상 상세하게 이야기할 필요도 없이 지금 교회를 다니는 30대 가운데 많은 이들이 매주일 맞이하는 양상이다.



이런 시대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첫째, 변화되는 사회와 세계관에 눈을 떠야 합니다. 3주전에 고위 공직자 110명이 하루 종일 대통령을 모시고 연수를 했습니다. 대통령이 첫마디로 말한 것이 '변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작년보다 두배, 세배로 변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이 시대의 위기감에서 나온 말일 것입니다. 대통령이 왜 먼저 그 말을 해야 하는가를 내가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한 말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삼성의 해외 사장들을 모두 불러놓고 이 말을 했습니다. "마누라와 자식 이외에는 다 바뀌라." 모든 것이 변화하는 시대에 대처하기 위한 경제의 위기감, 절박감을 가지고 이 말을 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삼성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바꾼 것입니다. 바뀌고 변화되는 세계관에 대해서 좀더 눈떠야 합니다. 석기를 사용하는 시대에서 청동기를 사용하다 보니까 몇 배의 무기의 세력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배와 피지배의 세력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생산력에서도 상당한 차이가 나게 됩니다. 그래서 부의 축적이 생김에 따라 권력이 생기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청동기에 나라라는 것이 생기게 됩니다.

오늘날에 와서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가전 제품이 발달하게 됨으로 여성의 가사 노동시간이 줄어들었습니다. 의약품의 발전이 아이 생산을 통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성이 시간의 여유를 갖게 되고, 육아임신으로부터 해방이 됩니다. 과거에 육아, 출산과 가사에 해방되면서 여성인권운동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긍적적인 효과이지만 부정적인 영향은 사회구조를 변화시키지만 성쾌락이라는 것이 즐기는 것으로 변화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회구조의 변화뿐만 아니라 의식까지 변화를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에 대해서 한국교회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회 변화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비근한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작년부터 주5일제 근무가 나왔습니다. 그때 가장 극심하게 반대한 집단이 한국교회입니다. 왜 반대를 했는냐 하면 하나님이 6일을 일하고 쉬라고 했기 때문에 주5일제를 반대하고 있습니다. 이게 맞습니까? 그런데 근무하는 날짜가 5일이고, 6일째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일하는 것과 쉬는 것을 함께 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는 주5일근무제가 가정과 시간을 보낼 수 있으므로 가족을 보호하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러한 것들을 보지 못하고 반대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주5일제를 연구하면 오히려 교회에 이로움이 생기게 되는데 무조건 반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구의 주5일제를 보면 물론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이 없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서구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연구를 해야 합니다. 교회가 주5일제로 가는 것은 불가피한 추세입니다. 교회는 이것을 어떻게 대처하는냐를 연구해야 합니다.

불변과 변화를 말할 때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으신 분이다라는 강조합니다. 이것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 안주하면 안됩니다. 언제나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에게 새로운 모습으로 임하신다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이 옛모습 그대로 나타나지 않으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불변성을 강조하는 것이 진리의 교회와 교직자의 불변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합니다.

많은 인류학자들이 사회학자들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말하는 것에는 의미와 형식이 있습니다. 의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형식을 바뀌야 합니다. 형식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의미를 바꿔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의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내용을 바꿔야 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을 바꿔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변화하는 추세 속에서 교회가 가져야 할 자세가 아닌가 합니다.



또 하나는 개체욕구가 여과없이 표출되는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돈과 쾌락입니다. 노사간이든 어떤 집단이든지 개체의 욕구가 여과없이 표출되고 있습니다. 책에서 보면 칼바르트가 원초적인 범죄가 무엇이냐라고 말할 때 거짓과 게으름과 욕심, 이 세가지가 인간 범죄의 원인이 된다고 말합니다. 이 세가지가 서로 얽히고 섥혀서 범죄를 만들어 낸다고 말합니다. 우리 사회를 보면 원초적인 범죄에 각종 문제들이 얽혀서 범죄를 만들고 있습니다.

교회를 보면 쾌락은 모르지만 돈에는 집착하면서 자신의 욕구를 표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유대인들이 바알풍요의 신을 원합니다. 이것은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광야 40일 동안에는 풍요로움이 없습니다. 하루에 하루분량만 주어집니다. 안식일 전날에는 이틀분이 주어집니다. 풍요가 아니라 그날 그날에 공급을 받습니다.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루에 만난 한끼 받는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런데도 풍요의 신인 바알 신을 연모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보니가 몇 년의 풍요를 약속하는 바알 신이 눈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바알이 있는 곳에는 항상 아세라신이 있습니다. 기드온의 이야기를 보면 바알과 그옆에 있는 아세라 신을 헐고 나아가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선민인 기독교가 바알과 아세라를 다스리고 정복해 나아가야 할 대상인데 한국교회는 오히려 여기에 넘어가고 있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심한 이야기로 말하면 한국교회는 십자가 걸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바알 신을 섬기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이런 오명에서 벗어냐야 한다. 결국 한국교회가 자기의 욕심을 절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장의 이름으로 그 욕심을 정당화 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욕심을 내도 별로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시대입니다.

많은 경제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70년대 이후 한국이 근대화로 성장하면서 남긴 것은 재벌구조라고 말합니다. 60년대 이후 한국교회의 성장의 비결이 뭐냐... 대형교회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결국 경제사회에서도 약육강식의 논리가 판을 치는 것처럼 교회에서도 대형교회라는 것으로 약육강식의 구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장이 일어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대형교회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수평이동 현상에 의한 이유가 많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개체욕구가 여과없이 표출되는 사회현상에서 대형교회도 이런 것을 바로 수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성장의 이름으로 정당화 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것입니다.

이재정 의원의 수감에 대해서 참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 이광훈 씨가 "진흙땅 속에 빠진 백로"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습니다.

"몇해 전까지만 해도 존경받는 성직자이자 한 대학의 총장이었던 이재정 의원이 구속되었다. 정치의 입문한지 채 4년이 안되어 수의를 입어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한 기업으로부터 10억원을 받아 당에 전달한 것이 정치자금법을 위반했다는 혐의이다. 국회의원의 임기 4년도 채 채우지 못하고 영어의 몸이 된 그는 아마도 지금쯤 가눌 길 없는 회한으로 몸을 뒤척이고 있을 것이다. 더욱 참담하고 허망한 것은 아무리 선의로 해석해도 그의 구속에서 순교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의 구속은 종교적 신념을 관철하려다고 받는 핍박도 아니요, 민주화 운동을 하려가다 받는 정치적 탄압도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경세의 지식, 세상을 경고하는 지식인이나 성직자로, 실천적 시민운동인으로 구속되었다면 감옥으로 가는 발걸음이 훨신 더 당당하고 떳떳했을 것이다. 서릿발처럼 선명한 대의명분이 그이 이름 석자를 순교자로 빛나게 해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이 감옥행이 참담하고 허망하다는 것은 그런 순교자의 장렬함 마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글에는 그가 참회했다는 글이 좀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위안을 받습니다. 70년대부터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성공회 신부이자 교수였으나 이번에 불법대선 자금에 수수혐의로 구속수감된 이재정 전 의원은 수감전 미리 써두었던 "국민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참회록 같은 내용의 글을 공개했습니다.

"참으로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상대적으로 작은 허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리고 저의 행위는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당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항변해 보았지만, 이미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은 그것조차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 다소 억울하고 서운한 점도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비록 그 작은 허물마저도 단죄하라는 국민의 요구를 수렴한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하겠습니다. 그리고 저에 대한 사법부의 판단이 우리 정치의 작은 허물조차 청산하고 정말 깨끗한 정치, 투명한 정치를 실현하는 출발이자 밑거름으로 작용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저의 허물을 밟고 우리 국민 모두가 바라는 깨끗하고 투명한 정치, 부패에서 자유로운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면 저는 사법부와 검찰의 판단을 기꺼이 감수하겠습니다."

그는 자신의 행위를 인정한 난 후에 공당의 책임있는 정치인으로서 부적절한 행위라고 사죄했습니다. 그는 4년 동안 기존 질서를 극복하려고 애썼지만 저 자신이 기존 질서에 갇혀 좌초하기도 했고 상황에 안주하고 타협하기도 했다고 했습니다. 이런 글을 보면서 저는 이재정 의원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도 일말의 양심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나는 결백하다고 하면서 들어가는 상황에서도 이런 참회의 글을 남기면서 들어가는 것이 과거의 성직자답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범죄하고도 오히려 떳떳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년에 몇억씩 쓰고도 당당하게 말하는 신문기사를 보면서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좀더 진지하게 반성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생각합니다.

다음의 우리 세대는 갈등과 분열의 세대라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이런 갈등에서 한국교회는 자유롭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사를 볼 때 서북지역과 경춘지역의 갈등이 상당히 심했습니다. 특히 장로교의 경우, 장로교가 분열될 때 그 현실이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고신이 그렇고 통합이 그렇고, 기장이 그렇습니다. 여기에 이념적 색깔과 신학적 색깔을 넣었지만 지역적 갈등이 한국교회를 분열시킨 주된 이유입니다. 여기에 신학적 색깔이 덧붙여졌습니다. 지역적인 갈등이 결국에는 한국교회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총회장 선거를 할 때 지역별로 돌아가면서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지역주의의 산물이 아니고 뭐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다 보니까 한국교회가 분열과 갈등을 통해서 이런 통합력을 잃어갔습니다.

한국교회가 숫자는 많고 사업들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세의 20%밖에 되지 않는 천주교가 오히려 더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현상을 대신 말해주고 있습니다. 통합력을 갖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목회자의 부패를 통합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이런 상황은 교단적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한국교회의 분열상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틀린 것과 다르다는 것이 혼동이 되고, 진리라는 이름으로 배타주의가 확대되면서 수용과 관용이 폭이 매우 좁아지는 현실, 이것은 더 나아가서는 한국사회와 문화적 갈등을 일으키는 현실, 특히 단군 문제에서 더욱 나타나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단군문제가 나왔으니 말씀드립니다. 한국 교회가 단군상 철폐라는 문제를 가지고 접근을 하였습니다. 단군신전을 만들 때 한국교회가 반대를 하였습니다. 정부의 비용으로 하는 것에 대해서 정당하게 반대를 했기에 정부가 철회를 하였습니다. 아무리 단군이 나라의 시조라고 해도 신격화해서는 안됩니다. 그 때 한국교회는 단군의 신격화나 단군을 신성시하는 것을 반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단군의 역사화, 이것조차도 반대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단군의 신격화나 신성시는 반대를 해도, 역사화하는 것은 역사가의 몫입니다. 목회자의 몫이 아닙니다.

이것은 일제 식민사관의 영향입니다.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서 일본은 조선의 자주성을 잃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단군의 시조를 부정하게 만들었습니다. 조선은 타율에 의해서 지배되어지고 만들어졌다는 관점에서 단군의 시조를 부정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일제의 식민사관에 근거한 것입니다. 타율성의 논리를 주장하기 위해서입니다. 단군상의 문제가 나왔을 때도 제대로 접근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단군상을 세우면서 그 아래에 세우는 목적을 기록하였는데 역사에서 검증이 되지 않은 내용을 적어놓고 있었습니다. 한국교회가 접근을 하려고 하면, 이런 논리에서 출발을 해서 역사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것을 가지고 단군상을 세우려고 하는 부분을 반대를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열심있는 분들이 단군상을 파괴하는 것을 먼저 함으로써 한국교회는 민족성도 모르고, 민족의 정체성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라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단군의 신격화와 단군의 역사화는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아마 이 후유증이 한국 민족사에 한국교회의 상당한 부분으로 영향이 남을 것입니다. 개천절 행사에 개천절의 유래에 대해서 말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개천절의 유래에 대해서 역사적인 자료를 근거해서 설명을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당장 이메일로 항의메일이 왔습니다. 온갖 욕설을 해대면서 당장 국사편찬위원을 그만두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젊은이들도 이런 상황 속에 있습니다. 진리라는 이름으로 배타주의를 확대하고 관용의 폭을 좁히면서 이것을 한국교회에 적용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한국 사회의 정직과 정의에 대한 기독교의 공헌은 어느 정도인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초기에는 역동적 힘을 가지고 봉건사회에 대한 개혁을 추진한 것은 사실입니다. 기독교인들은 관원들의 부정과 부패에 부단히 항거했습니다. 선교사들이 그 사실을 알아서 조치를 취해서 빼내주기도 했습니다. 어려움을 겪어도 부정과 부패와 싸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1/4이 넘는 기독교인이 있습니다. 4명중에 한명이 기독교인입니다. 사회 지도층으로 갈수록 크리스찬의 퍼센트가 높습니다. 그러면 4명중의 한명이 아니라 더 많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한 사람이 뇌물을 먹이면 그 중에 한명은 기독교인이 있을텐데 한사람이 그 뇌물을 끊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왕따는 당하겠지만 그런 사람이 나와야 한국교회가 바로 서지 않겠습니까?

80년대까지만 해도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사람들이 바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개혁의 주체가 바로 한국교회였습니다. 물론 보수세력은 제외되어야 하지만 말입니다. 서구의 상황과 비교해 보면, 물론 서구역사가 몇백년이라서 단순 비교는 힘들지만, 서구의 기독교가 자본주의를 탄생시켰다는 연구들이 있습니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에 의하면 자본주의가 성한 지역은 프로테스탄트가 성한 지역이고 그 중에서도 칼빈주의가 성한 지역에서 자본주의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첫째, 자본주의의 정신은 합리주의를 기본 정신으로 합니다. 자본주의를 일으키는 데 중요한 것은 신용입니다. 그 신용을 창출하는 것이 정직입니다. 프로테스탄트에서 강조하는 것이 정직이었습니다. 그것이 일치한 것입니다. 둘째, 자본주의에서 또 강조하는 것이 근면입니다. 프로테스탄트도 근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일치하고 있습니다. 셋째, 자본주의의 절제의 정신, 프로테스탄트의 정신도 하나님의 선한 사업을 위해 절제해야 합니다. 이것도 일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양문화를 받아들이는데 어떻해야 하느냐라는 것에 대해서는 동양의 일치된 생각이 있습니다. 이것이 동도서기론입니다. 옛날에는 자기의 주체성을 살리면서 서양의 것을 이용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나라가 지향하고 있는 것이 자본주의입니다. 그러면 서양의 자본주의 정신을 가져와야 합니다. 자본주의 정신은 놓아둔 채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돈잘쓰고, 낭비하는 것만 가져오다 보니까 천민 자본주의가 되고 말았습니다. 서양의 자본주의는 정직, 근면, 절제의 정신을 가져와야 합니다.

서양의 교회를 보면 교인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제도와 윤리 속에서 기독교정신을 넣어놓았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없어졌습니다. 이것을 잘한 것이라 논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의 정신을 제도와 윤리 속에 심어놓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교회는 늘어났지만 사회 안에 기독교적 정신은 전혀 심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2000년에 들어서면서 감소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교회는 서구의 길로 갈지도 모릅니다. 서구는 사회 곳곳에 기독교의 정신을 심어놓고 없어졌지만, 잘못하면 한국교회는 기독교의 정신을 심어놓지도 못하고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몇 년 전에 기독교윤리실천운동과 대형교회 세습의 문제를 가지고 복상토론을 할때 제가 기조발제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강남의 한 교회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뒤 한달 후에 다시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교회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 교회에는 교수도 많다. 학박사도 많다. 고위 공직자도 많다. 이런 사람들도 다 합의해서 세습을 하는데 너희가 뭔데 이런 짓을 하느냐?"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때 제가 예수님의 글을 인용해서 말했습니다. 예수님께 이땅에 오실 때 누가복음 4장 18~19절에서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면서 눈먼자에게 자유를,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서 이땅에 오셨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분명히 이땅에 오신 이유를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회에서 멀쩡한 사람들이 교회에만 가면 바보가 되고 있습니다. 유아 상태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눈먼 자에게 보게 하고, 포로된 자를 자유케 하기 위해서 오셨는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교회에 끌어다 모아서 못보게 하고 있다, 포로되게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자기 교회 안에서 교회에 대한 비판이 일고 있다면 심기가 불편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심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가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것, 장로와 집사를 꽉 붙잡고 있어서, 교인들을 유아상태로 만들어야만, 모든 것을 자기가 돌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태의 유아교인들이 사회에 나아가서 왕따 당할 각오를 하고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눈을 떠야 합니다. 우리가 눈을 떠야 사회를 눈뜨게 할 수 있습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저는 한국교회와 기독교에 대해서 가능성과 희망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한국교회 만큼 나눔에 앞장서고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많은 NGO들 중에는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습니다. ARS로 후원금을 모을 때 참여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습니다. 이것은 가능성이요, 희망입니다. 그러기에 한국교회는 나눔에서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작년에 민간에서 북한에 약 700억 정도를 후원했습니다. 그런데 남북 나눔운동에서 250억 정도를 후원했습니다. 이렇게 통일과 화합의 노력에서도 한국기독교회가 많이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에 대한 나눔의 가능성에서 한국교회는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한국교회는 개혁적인 전통을 가지고 있고 개혁적인 전통에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바로 그 주체가 한목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개혁적인 기치를 더욱 확산하기를 원합니다. 불교는 한국의 오랜 세월동안 정신적 지주가 되어 왔습니다. 교종이 타락할 때는 선종이 들어오면서 불교를 개혁하면서 불교를 민중화시키고 민중의 세력을 일으키면서 고려로 넘어 왔습니다. 그러나 결국 불교가 자체의 개혁의지가 꺾였을 때 부패되었고 또 배척되어졌습니다.

유교는 조선의 500여 년 동안 불교를 배척하면서 한국의 "예"문화를 만드는데 역할을 했습니다. 유교의 기간 동안 병자호란, 임진왜란의 외침이 있었습니다. 그후에 실학이라는 학풍을 통해 유교를 개혁해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유교는 우리나라의 예전의전에서 많은 역할을 했습니다.

기독교는 한국에 들어와서 봉건제도를 개혁하는데 앞장선 것은 사실입니다. 한국 사회를 이끄는 중추세력을 만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적 이념과 사상을 제도화시키는데, 문화화 시키는데는 미흡하다는 결론입니다. 한국교회는 부흥은 성공했지만 복음화는 실패했습니다. 성장에는 성공했지만 성숙에는 실패했습니다. 이 가운데서 한국교회를 이렇게 만든 것은 왜곡된 축복관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삼박자 축복이 교회 성장을 이루기에는 도움을 주었지만 성숙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마태복은 5장 1절 이하에 가난한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으므로 한국교회는 성장을 했지만 성숙은 하지 못하고 만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복을 받는다는 것만 강조한다면 한국의 기독교는 고급화된 무속 종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첫째, 기독교는 유교가 예전문화에 영향을 준 것처럼 기독교도 개혁문화에 영향을 주어야 합니다.

둘째, 균형성에 노력해야 합니다. 사랑과 정의의 균형성, 용서와 권징의 균형성을 가져야 합니다. 구원의 기쁨의 특별은총과 일반은총의 균형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성장과 성숙의 균형성, 내재와 초월의 균형성, 진보와 보수의 균형성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한국교회가 갖고 있는 많은 물질을 목적에 귀속시키는 균형성을 갖어야 한다.

셋째, 나눔문화에 앞장서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한국교회가 해왔던 교육, 사회사업이라는 것은 정부가 거의 다 맡아버렸습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좀더 그늘지고, 좀더 소외된 곳을 찾을 때 한국교회의 새로운 활로가 생길 것이다. 그런 곳은 38선 북쪽의 북녘동포일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 기독교는 좀더 가난하게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이걸 통해서 결국 한국 기독교의 영성도 회복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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