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사가 비행기를 잘못 몰고 엉뚱한 데로 갈 때 소리치지 않을 승객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승객은 조종사를 위해서도 아니고 비행기를 위해서도 아니고 바로 자신이 걱정되고, 자신이 살기 위해 소리를 치는 것입니다. 교갱협을 시작하게 된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입니다. 지금의 교계 상황은 너무나 답답합니다. 생활환경이 바뀌었고 평신도들의 의식도 많이 변했는데 목사님들이 꽉 막혀 있습니다. 돈 봉투가 왔다 갔다 하는 가운데서도 통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사실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을 때는 결코 없지만 피상적으로 현실을 보면 성령께서도 손 드신지 오래인 것 같습니다. 한국교회가 이대로는 어렵지 않을까 하는 위기의식이 느껴집니다. 앞으로 10년을 놓고 볼 때 지금 목사님들의 의식을 가지고는 목회하기가 힘이 들겠다는 생각을 가집니다.

이러한 영적인 침체는 어디에나 있었습니다. 한시대가 영적으로 은혜가 충만하여 부흥, 개혁, 각성하고 나면 그 다음엔 꼭 영적인 대립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상황 역시 70년대 부흥기를 지나 이제 침체기를 맞이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도 종교개혁이후 100년이 지나지 않았을 당시에 기독교가 내리막으로 갔음을 봅니다. 당시를 신학적으로 <신앙고백시대> <정통주의시대>라고 합니다. 이는 결코 좋은 말이 아닙니다. 입으로만 고백하지 실제로는 죽은 시대, 교리와 전통에만 매여 바리새적인 위선만 있는 시대를 말합니다. 당시 주류신학은 <논쟁신학>이었습니다. 영이 죽어버리니 입씨름만 남았습니다. 영국의 어느 신학자는 이 시대를 가리켜 <죽어버린 가식이 판을 치는 시대>라고 평가했습니다. 이러한 시대를 나타내는 5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권, 교리, 위선, 고집, 논쟁입니다. 우리 시대와 너무나 닮아있는 모습을 그 당시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하나님 께서는 위대한 운동을 일으키셨습니다. 그것은 경건주의 운동입니다.

1630년 피립 야콥 슈페너로부터 시작한 경건주의는 1670년에서 1740년 사이에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이 경건주의 운동은 유럽에서 미국가지 완전히 틀을 바꿔놓았습니다. 그 발자취는 워낙 강해서 19세기 대각성운동과 공동체 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대각성운동은 영국에서는 청교도로 네덜란드에서는 경건주의와 엄정주의로, 프랑스에서는 얀센주의로 그리고 동유럽에서는 차시드주의로 나타났습니다. 교회의 생명이 죽어버린 시대를 성령의 불꽃으로 되살렸던 경건주의 운동을 살펴보는 것은 이 시대에 의미하는 바가 많습니다. 경건주의 운동의 특징을 살피는 것으로 우리는, 지금 우리가 이 시대에 대한 위기의식을 가지고 시작한 교갱협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고, 무엇을 우선순위에 두고, 어떻게 실행해 가야 하는가에 대해 상당한 통찰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첫째, 평신도 운동. 만인제사장의 교리를 실제로 활용한 것입니다. 당시 지도자들은 평신도를 교육하여 그들로 하여금 교회에 성령운동의 새바람을 몰고오게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도자들마저 너무 굳어있습니다. 그래서 과연 갱신할 수 있을가를 고민하거나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소그룹운동. 이는 소수를 중심으로 교회를 개혁하고 새대를 바꾸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인가 일 하실 때 항상 소수를 사용하십니다. '에클레시오라인 에클레시아(Eddlesiola in Ecclesia)'라는 말은 교회 중의 교회 즉, 진짜 소수를 가리키는 말로써 교회에서 이들을 찾아 훈련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말씀공부 운동. 당시는 모든 평신도들에게 성경말씀을 읽고 마음의 변화를 통해 그리스도를 알고 교제하는 삶을 살도록 장려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더 자주 우리 가운데 가져오라"는 당시 유행하던 슬롬건 이었습니다. 어떠한 갱신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넷째, 신학교육의 개혁. 당시 신학교에서는 신앙고백주의적 논쟁이나 논쟁술, 아리스토텔러스 철학등 사변철학이 주류였는데 경건주의는 여기에서 벗어나 '성경해석학'에 비중을 두었습니다. 지식위주가 아니라 목사들의 경건생활을 강조함으로 목회실제를 가르치는 방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신학적 논쟁을 소명처럼 생각하고 머리로 성경을 알고 머리로 목회를 하면 자기도 죽고 교회도 죽습니다. 당시 경건주의 운동이 성공한 이유는 기성 목회자는 차라리 포기하고라도 신학교에서부터 참신한 목회자를 키우는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갱신을 한다고 했을 때 금방의 효과만을 바라지 말고 10,20년후를 내다보아야 합니다.

다섯째, 삶의 신앙운동 말씀의 적용이 따라가는 신앙을 강조했습니다. '삶의 신앙'은 청교도 운동의 본질입니다. 청교도운동들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첫째로는 회개운동입니다. 그들은 설교를 통해 회개를 강조했습니다. 이는 내적으로 회개하면 사회나 환경이 바뀐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두 번째로 자기 부정을 통한 성화와 세 번째 자기 긍정을 통한 참다운 성도의 삶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거룩한 제사장이라는 자기 아이덴티티(identity)를 세우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세상과 결별한 수도원적 생활이 아닌 <세상 속에서의 수도원적 경건의 삶>을 살았습니다. 한국교회는 청교도 정신을 이어 받았다고 하면서도 세상 속에서의 삶을 부인해 왔습니다. 그래서 지금 교회가 세상 속에서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섯째, 문서운동. 그들은 경건생활에 필요한 지식들을 문서를 통해 평신도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책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깨우침을 얻었던 것입니다. 경건주의 운동은 분리주의 운동으로 오해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에큐메니칼 운동입니다. 슈페너는 '교리의 상이점에 대해서는 되도록 말을 적게 하자'고했습니다. 그는 '서로의 상이 점을 인정하고 겸손해 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또 개신교 선교의 장을 연 진첸도르프는 '세상의 다양함을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의 교파별로 공동체를 둔 것으로 안다'고했습니다. 우리의 갱신은 돌팔매질을 하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품고 차이를 인정하고 내가 받지 못한 은헤를 남에게 배우는 정신을 가지기 위한 것입니다.

위에서 본 경건주의의 특징들은 오늘날의 제자훈련과 참 많이 닮았습니다. 이미 경건주의 운동은 시작된 것입니다. 평신도들 사이에는 이것이 이미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제 문제는 목회자들의 갱신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힘을 모으고 노력하면 경건주의 운동은 본격적으로 가동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교회갱신운동을 시작하기 전에 몇 가지 생각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우리의 운동이 내일의 일꾼을 키우는데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우리와 같은 목회중진들의 개혁에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인지를 결정하여야 하겠습니다.

둘째, 과거의 경건주의 운동자들은 체제개혁을 염두에 두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교갱협은 이 시대의 상황을 감안해서 평신도보다는 목회자와 체제개선에 목적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이것을 어떠한 방향으로 이끌고 나아가야 할지를 숙고해야 하겠습니다.

셋째, 청교도들은 먼 훗날을 바라보며 그들의 경건주의운동을 실행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너무 빠른 결과를 보려고 하고 있지 않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삶을 바꾸고 사람을 바꾸는 대안들을 마련해야 하겠습니다.

넷째,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전한 방향과 올바른 목표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감당할 자세인지를 계속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다섯째, 통일이 되면 북한에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교회가 이렇게 분리되어서는 이루기가 힘이 듭니다. 우리는 통일에 대비하여 지금부터 양질의 토양을 일구어야 합니다.

여섯째, 21세기에 한국교회가 크게 쓰일텐데 거기에 대비해서 우리가 더욱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합니다. 서로 마음을 열고 정보를 나누며 함께 연구하는 장을 마련해야 하겠습니다.

모두 내 자신이 교갱협의 대표라고 생각합시다. 하나하나가 갱신의 주축이 되어 각자 잇는 처소에서 적극적으로 노력합시다. 하나님께서 가라는 데로 가고 머물라는데 머물러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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