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 사회는 대형사고의 빈발과 도덕 부재의 편만 때문에 총체적 붕괴를 우려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 현정부 출범 이후의 양상만 하더라고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를 비롯하여 열차 전복사고, 항공기 추락사고, 여객선 침목사고, 유람선 화재사고, 성수 대교 붕괴사고 도시가스 폭발사고등 대형사고의 연발이 있었고 더불어 부모살해의 인면수심, 지존파의 극악무도, 온보현의 후안무치, 백주의 살인활극, 부녀자 인신매매, 오렌지족 야타족의 행태등 막가는 세상에다가 인천 부평 등지의 도세사건, 각종 교육비리, 금융비리, 검찰비리, 재벌비리, 권력비리등 어느 한 구석 곪지 않고 썩지 않은 곳이 없다 할 만큼 부패구조와 현상이 만연, 심화되어 있다. 여러 해 전 TV드라마에서 유행시킨 바 있는 '민나 도로보 데스'(모두가 도둑놈이다)라는 말 그대로이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는 수 천년 가난의 한을 씻고 잘살아 보겠다며 '민족 중흥, 조국 근대화'의 기치 하에 정신없이 달려 오느라고 공기단축, 실적 위주의 입장에서 여간한 시행착오나 부실 공사쯤은 필요악으로 여긴 점과 경제적 효용과 능륙의 확대를 최선의 미덕인냥 예찬하되 과정의 정당성과 윤리성에 대하여는 짐짓 간과하여 버린 점이 지금까지 누적되어 온 결과라고 본다. 경제 지상주의, 성장제일주의의 그늘에 가리어 인간사회의 본성이며 근간인 영성과 도독성이 경시된 까닭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되니 물질주의, 성공주의, 출세주의, 한탕주의등 오도된 가치관이 우리사회를 지배하게 되었고 각 사람의 뇌리엔 이것들로 꽉 차서 바른 가치관이 비집고 들어갈 공간이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인간의 의식과 심성이 옳게 정립되지 않은 인간사회란 삶의 터전으로서 토양이 아닌 콘크리트 바닥이나 그 구조물과 다를 바 없기에 여기엔 생명의 숨결, 사랑의 체온, 창조적 사고, 환희의 감정, 나눔의 의지등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가 물량적 성장을 위해 정신없이 바쁘게 내닫을 때 한국 교회는 어디서 무엇을 했는가? 교회는 영성적 단체로서 신앙과 윤리를 기본으로 하는 공동체임에도 불구하고 과연 우리 사회에 신앙의 생명력과 윤리의 실천력을 보여주며 또 부여하였는가? 유감스럽게도 한국 교회는 국가 사회의 시대적 흐름에 편승하여 소위 제2경제의 역할을 해왔을 뿐이다. 정부가 주도하는 고도성장정책에 발맞추어 너도나도 대형 교회, 종교 왕국을 꿈꾸며 성장위주, 성공 지상으로 무한 경쟁을 감행했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단기간에 경이적 성장을 이룩하여 외형만 놓고 볼 때 이 나라 최대 세력이라 할만큼 비대해졌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한국 사회의 제록스라 할만큼 동일 선상에서 성장 과정을 답습했다. 성장을 위하여는 꿩 잡는게 매라는 입장을 취했고 인간의 의식과 심성보다 경영과 기능을 중시했고 효율의 극대화를 위해 유신 체제와 같은 종교 왕국을 구축했다. 성장에 도움이 된다면 상업적 세속 주의와도 손잡았고 주술적 무속 주의도 끌어들였다. 이렇게 성장한 한국교회였기에 사회의 진정한 향도와 목탁이 되기엔 역부족으로 자기자체도 추스릴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현재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과 난맥은 사회가 안고 있는 경우보다 더 어렵고 심각하다. 사회는 교회보다 범위가 넓으므로 자정기능이 용이하며 행정권의 관할 통제가 가능하나 교회는 사회보다 훨씬 범위가 좁은데다가 수백 갈래로 교파가 나뉘어져 단일 통제력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교회의 속성상 물리적 강제력을 발휘할 수 없으니 독버섯처럼 표출하는 종교의 역기능적 현상들에 대하여 속수무책일 따름이다. 누가 누구에게 충고하고 질타하며 돌을 던질 수 있으랴 할만큼 교회의 순기능이 역기능에 가리어 제구실을 못하는 형편이니 그저 난감하고 가슴이 답답할 뿐이다. 그렇더라도 에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말씀을 새겨 교회의 사회적 책무를 저버려서는 안된다. 더구나 한국교회는 이 나라 사회의 제 집단중 최대 세력이 아닌가?

몇 해 전에 나온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한국의 종교 인구는 불교 27.7%, 기독교 18.6%, 천주교 5.7%로 나오되 주1회 이상 참여하는 신도는 기독교 76.1%, 천주교 67%인데 비하여 불교는 4.25%이므로 기독교가 종교인구나 집회인구면에서 명실상부한 최대 종교 세력인 셈이다. 이는 바로 기독교가 이 나라에서 제일 큰 세력임을 뜻한다. 흔히 이 나라의 중추 세력은 집권 정당이라고 말하나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엉성하기 짝이 없다. 거기 모인자들은 정권의 부침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철새들로서 선거철에 기껏 부풀려야 기백만명이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정권의 향방에 관계없이 1천만 명이 넘는 성도들로 구성된 집단이다. 자발적으로 헌금하고 정기적으로 회집하고 조직적으로 훈련받고 열성적으로 활동하는 공동체이므로 엄청난 잠재력과 가능성을 지닌 집단이다. 흔히 바닷물은 3.3% 이상의 염분이 함유되어 짜다고 하는데, 우리 사회가 세상의 소금인 25%의 성도들이 있으면서도 부패와 비리가 여전하고 도덕 실종의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도 한국교회가 언제까지나 목청을 높여 권리만 주장하고 위세만 과시하고 네 탓이라고만 넘길 것인가, 이같은 행태야말로 맛 잃은 소금의 모습이요 불꺼진 등의 모양이며 제 눈 속의 들보인 경우이다.

한국 교회는 이 나라 민족사회에 이제부터라도 올바른 책임과 역할과 사명을 다하므로 희망의 등불이 될 수 있어야 한다. 나무도 3년생이면 열매를 맺는 것이 창조의 법칙이고 사람도 장성하면 자립과 동시에 가족 부양 및 사회 기여의 책임을 지는 것이 인생의 도리이듯이 이 땅의 교회도 1세기의 연륜이 경과하고 이 정도로 외형이 커졌으면 마땅히 연륜과 태구에 걸맞는 풍성한 열매를 맺음과 더불어 희생의 짐을 지고 앞장서야 할 것이다. 민족사회 앞에 고난의 십자가를 진 한국 교회의 상을 각인 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면 조국 광복 50주년이 경과한 시점에서 21세기의 미래 사회와 통일 시대의 민족사회를 전망하며 준비해야 할 한국교회는 과연 어떻게 신뢰를 회복하며 이미지를 개선하여 희망의 존재로 탈바꿈 할 수 있는지 그 방안을 몇 가지 제시해 보고자 한다.

첫째, 군살 빼기와 제살 깍기를 통해 체중 감량을 단행해야 한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너무 비대하고 방만하다. 그것도 근육체질이 아닌 비계체질로서 쓸데없이 살만 잔뜩 찐 경우로 무기려과 비활동, 무능력과 비능률의 기형적 모습이 되어 버렸다. 여기에 굳은살과 물살을 제하여 버리는 군살빼기운동 제살깎기 운동이 요청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는 진통과 아픔을 무릅쓰고 체제 정비란 일대 수술을 단행하므로 쓸데없는 군더더기들을 깎아 내고 도려내야 한다. 특히 교회 혼란의 주범은 이명서 제도가 사문화된 데에 있으므로 이것부터 되살려야 한다. 교인의 전입, 전출에 그의 신분을 확인해 주는 어떤 증명이나 자료 없이 올 수 있고 갈 수 있는 것이 한국 교회의 현실이 아닌가? 또한 교역자의 신분에 대한 객관적 심의와 검증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가 언제 어떤 신학교를 졸업했고 어떤 교단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는지 명확히 규명하므로 사이비가 횡행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현재의 한국 교회는 체중을 늘이는데 주력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체중을 줄이는데 힘쓰므로 경제의 거품을 제거하듯 군살을 제거하여 정체를 극복하고 활동력과 경쟁력을 강화함이 시급하다고 본다.

둘째, 영성과 도덕성을 지닌 경건 지향의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

교회 안에 물밀 듯이 밀어닥친 세속 주의와 무속주의 현상을 극복하고 교회 본연의 모습을 되찾으려면 무엇보다도 교회의 영적권위를 회복하고 도덕적 귀감이 되어야 한다. 경건을 지향하는 교회가 되므로 신성한 면과 성결한 면을 지닌 교회의 상을 가져야 할 것이다. 교회는 교회답고 성직자는 성직자답고 성도는 성도다운 성별이 있고서야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도 가능한 법이다. 노아시대처럼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하나가 되는 혼잡 속에서 교회의 위상이란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셋째, 외형보다 건전성이 높게 평가되는 목회풍토가 되어야 한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교회의 내용보다 외형에 따라 목회의 성공과 실패를 평가하므로 정상적 목회보다 특수적 목회 풍토가 조성되었다. 목회정도와 목회윤리를 외면하고 온갖 수단과 방법, 세속적 무속적 사이비성을 배합, 가미하여 오직 교회의 외형을 키우려고만 한다. 일단 대형 교회에 진입하면 그때부터 그는 성공한 목회자의 귀감이 되고 선망의 대상이 된다는 식이다. 대형 교회 안에 물질, 명예, 권력등 모든 것이다 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니 희생하며 건실하게 목회하는 분들이 이같은 목회풍토에서 좌절하고 갈등을 느끼게 된다. 모름지기 한국 교회는 우리 사회의 음지와 소외 지대에서 고난의 짐을 지고 목회하는 그분들을 높이 평가하며 그 앞에서 도덕적 열등감을 가질 수 있는 풍토가 형성되어야 하리라고 본다.

넷째,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육이 옳게 자리를 잡아야 한다.

한국 교회의 미래는 신학교육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회와 목회자가 불가분의 관계라면 그 교회를 사역하는 목회자의 자질과 능력은 대체로 신학교육에서 비롯된다. 물론 학문적, 인격적, 제도적 차원에서 교육하되 한국교회를 이끌 수 있고 한국 교회가 수용할 수 있는 지도자로 양성해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사설 신학교와 무자격 신학교의 정비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또한 교육 요건의 강화와 더불어 교계 에서 인정할 수 있는 신학교와 인정할 수 없는 신학교로 끊임없이 평가와 판정을 가해야 할 것으로 본다.

다섯째, 대의명분이 뚜렷한 경우에는 보수와 진보가 단결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통일에 대한 준비에서 공동 전략이 요망된다. 너도나도 북한 교회를 재건하고 그 땅에 선교하겠다고 한꺼번에 몰려갔을 경우, 그 북새통을 상상해 보라. 이는 선교가 아니라 난리일 것이며 치유가 아니라 오염일 것이다. 기미년 3.1운동 당시 종파를 초월하며 대동단결 하였듯이 한국 교회는 이 문제에서 교파를 초월하여 단결해야 하며 교회의 인적, 물적 역량을 여기에 유효적절하게 사용할 때 사회의 공신력 회복과 박수갈채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더불어 21세기란 시대적 큰 전환기에 지구촌 선교 전략 면에서도 한국 교회는 정보 교환과 공동전략이 요망된다. 그리고 주일 시험 문제 등을 비롯하여 교계의 공동 관심사에 대하여는 앞으로 더욱 연합과 단결을 강화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할 때 사회의 시각도 달라지는 법이다. 모쪼록 한국교회가 지금부터라도 초대 교회의 선구자적 역할을 회복함으로 우리 사회에 생기를 불어넣고 희망의 등불이 될 수 있기를 정말 간절히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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