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8/25) 교갱협 제9차 영성수련회 새벽기도회

창세기 23:1~9
사라가 일백 이십 칠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의 향년이라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그 시체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에게 말하여 가로되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 청컨대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지를 주어 소유를 삼아 나로 내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하시오 헷 족속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중 하나님의 방백이시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우리 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 장사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 아브라함이 일어나 그 땅 거민 헷 족속을 향하여 몸을 굽히고 그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나로 나의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하는 일이 당신들의 뜻일찐대 내 말을 듣고 나를 위하여 소할의 아들 에브론에게 구하여 그로 그 밭머리에 있는 막벨라 굴을 내게 주게 하되 준가를 받고 그 굴을 내게 주어서 당신들 중에 내 소유 매장지가 되게하기를 원하노라

 

누가 중요한 인물인가?

우리가 가진 성경에는 약 2,930명의 실명인물이 등장하고 약 1,551개의 지명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나는 인물이라고 해서 다 중요한 것은 아니며, 지명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면 어떤 인물이 중요한 인물일까요? 이를 체크하는 여러 포인트가 있습니다만 그 중에 하나는 그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성경이 어떻게 평가하며 얼마나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느냐는 점으로 얼마나 중요한지 또 중요하지 않은지를 판가름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사람이 죽었을 때에 '죽었더라, 떠났더라, 자더라' 이렇게 간단히 한 줄로 처리해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람일 경우는 그렇게 처리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보면 성경에서 죽음을 가장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사람은 두 말할 필요없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성경은 대단히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신구약 전체는 예수님에 관한 기록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죽음에 대해 놓칠 수가 없기 때문에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지요. 세례 요한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하는 말씀대로 그는 대단히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그 결과가 비참하기는 했지만 그의 죽음에 대해서 성경은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죽음

오늘 우리는 사라라는 한 여인의 죽음에 대한 기록을 보고 있습니다. 사라를 평범한 사람으로 보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모세와 비교해 볼 때, 또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살펴볼 때 사라가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라고 보기는 좀 힘들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성경은 사라의 죽음에 대해서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창세기 23장 전체를 이 사라라는 여인의 죽음과 관련된 사건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라의 죽음을 성경은 왜 이렇게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가? 이런 의문을 가지고 본문으로 들어가야 될 것 같습니다.

창세기 23장 1~2절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사라가 일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의 향년이라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이 1절과 2절은 아내의 시신 앞에서 슬퍼하는 아브라함을 그리고 있습니다.

'평생을 함께 했던 아내가 세상을 떠났는데 이 정도 슬퍼하지 않을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하고 가볍게 이 본문을 처리해서는 안 됩니다. 이유는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은 특이하게도 자신의 감정을 대단히 잘 조절하는 은사를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긴 생애를 살았습니다. 그 생애 동안 정말 기막힌 인생,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일들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보십시오. 사랑하는 아들 이스마엘과 하갈을 광야로 내쫓을 때의 심정이 이해되십니까? 그 당시 광야로 내쫓는 것은 곧 죽음으로 내모는 것과 일반이기 때문입니다. 연이어 그는 하나밖에 없는 이삭을 칼로 친히 죽여서 불에 태워 하나님 앞에 제사를 올려야 하는 있을 수 없는 일을 직접 자행해야만 했습니다. 그 때 칼을 높이 들었던 이 아브라함의 심정을 이해하십니까?

그러나 그런 모든 상황 속에서도 아브라함은 자신의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습니다. 묵묵히 속으로 삭이면서 그 상황들을 극복해가는 것이 아브라함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아내의 죽음 앞에서만은 예외가 아닙니다. 이 아내의 죽음 앞에서 대단히 슬퍼하며 애통해 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는 아내의 시신 앞에 쓰러져 버렸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가 이 아내의 죽음을 일생일대 최고의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아내의 소중함을 깨닫다

사실 그는 젊은 시절, 한창 잘 나갈 때에는 아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아내를 자신의 구속물 정도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고 얼마든지 조달할 수 있는 존재 정도로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자신의 생명과 안위를 위해서는 자기의 아내가 남의 남자의 품에 안기는 것조차도 개의치 않던 사람이 아브라함 아닙니까? 그리고 나서는 그 대가로 재물을 받아 챙기면서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였지만 세월이 흘러 점점 나이가 들어가고 신앙이 깊어지면서 그 누구보다도 아내의 소중함을 깨달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내가 갑자기 눈 앞에서 싸늘한 시체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진정 충격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아내의 시신 앞에서 슬퍼하며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주제넘은 이야기 같습니다만 우리 목사님들, 사모님들한테 좀 잘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경상도 지역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들은 특별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경상도 지방의 사모님들 사이에서는 이런 심각한 얘기가 오가고 있다고 합니다. "경상도에 사는 목사의 경우에는 사모가 먼저 세상을 떠난다" 믿거나 말거나 이게 정설입니다.

늙고 병들었을 때에 목사님 혼자 계시면 보기가 딱하죠. 저희 집 아이가 중학교 1학년 때 일인데 애가 농구를 좋아했습니다. 형들이 덩크슛을 하는 걸 보고 자기도 하고 싶어서 키가 작으니까 교실에서 의자를 가지고 와서 그 의자를 잡고 덩크슛 넣는 연습을 하다가 넘어져서 뼈가 부러져 입원을 했습니다. 병실이 2인실이었는데 옆에 할아버지 한 분이 입원해 계셨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은퇴하신 목사님이셨습니다. 사모님은 안계시고 간병하는 분이 대소변을 받아내었는데 연로하신 목사님이 몸을 잘 움직이지 못하니까 간병하는 분이 막 때리면서 '이 놈의 영감태기 먹기나 적게 먹지, 그래야 적게 싸지' 하면서 대소변을 받아내며 얼마나 그 목사님을 구타하는지 참 안타까운 마음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소설가 김홍신씨가 <인간시장>을 써서 유명해졌는데 그가 생애 처음으로 시집을 하나 냈습니다. 특별히 목사님들은 꼭 한 번 사보시기 바랍니다. <한 잎의 사랑>이라는 시집입니다. 이 사람의 아내가 어느 날 갑자기 암 선고를 받습니다. 그리고 투쟁을 하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아내가 세상을 떠나는 모습과 떠난 뒤의 자신의 심정을 절절하게 연시 형태로 시집 전체를 아내에게 바치는 시로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그 중에 '지금 거신 전화는'이라는 시(詩)가 있습니다.

"네가 떠난 뒤 그리움에 북받쳐
네가 세상에 없는 줄 알면서 그냥 걸어봤다.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입니다.
그래 너 없는 세상, 난 어쩌란 말이냐?
그곳에 없는 줄 알면서도,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줄 알면서도,
영원히 부재중인 줄 알면서도"

사랑하는 아내가 사용했던 전화의 핸드폰 번호를 누르고 있는 이 외로운 한 남자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이 이렇게 슬퍼했던 이유는 젊은 시절에 아내를 아비멜렉의 품에도 주고, 바로왕의 품에도 주고 그러면서도 자기는 재물을 챙기고 살았던 그런 생각들이 많이 떠올랐기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슬픔의 눈물을 그치고 일어서다

그런데 오늘 본문 3절에서는 대 전환이 갑자기 일어납니다. 여러분 3절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 시체 앞에서 일어나' 그 시체, 자기에게 한없는 슬픔과 절망을 안겨주었던, 울부짖게 만들고 애통하게 만들었던 그 시체 앞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여기 일어났다는 말은 히브리어법으로 그냥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전기 스파크 같은 것에 의해서 본능적으로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놀라운 대전환이 아닙니까? 그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체 앞에 쓰러져 있던 사람입니다. 삶의 의욕을 잃은 채 슬퍼하며 눈물을 짓고 있던 사람입니다. 마치 로뎀나무 아래의 엘리야처럼 뒤따라 죽고 싶은 심정으로 그가 아내의 시신 앞에 쓰러져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런 그가 갑자기 그 슬픔을 떨치고 그 시체 앞에서 벌떡 일어났다고 성경은 소개합니다.

무엇이 그를 그 시체 앞에서 이렇게 일어나게 합니까? 그 시체 앞에 쓰러져 있던 아브라함이 어떤 중요한 깨우침을 받았던 것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 깨우침이 그를 시체 앞에서 일어나게 만들었습니다. 이 깨우침이 눈물을 그치게 했습니다. 이 깨우침이 일생일대의 슬픔에 젖어있는 그로 하여금 그 환경을 훌훌 털고 일어나게 만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내의 시체 앞에서 도대체 무엇을 깨달았기에 그 충격적인 자리를 벗어나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인가요?

4절을 보면 아브라함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 아브라함이 시체 앞에서 깨달았던 깨우침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나그네이며 우거하는 자라는 깨우침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깨우침 이상의 그 무엇입니다. C. S. 루이스의 말대로 아마 확성기와 같이 그의 귀에 들렸던 하나님의 음성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이 메시지를 시체 앞에서 주셨던 듯합니다.

"아브라함아, 너는 이제까지 나그네로 살았다. 그리고 잠시 우거하는 자로 살았다" 이 음성이 책망일까요? 아니면 칭찬일까요? 아브라함의 깨우침, 아니 이 고백, '나는 당신들 가운데서 나그네요, 그리고 우거하는 자입니다' 라는 고백이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자랑스럽게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고백일까요? 아니면 부끄러운 마음으로 하는 고백일까요?

 

잠시 우거하는 나그네의 삶

사랑하는 여러분,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어떠한 마음으로 살아야만 합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가나안 땅에 밀어 넣으실 때에 어떤 마음으로 이 가나안 땅에서 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까? 창세기 13장 14~15절의 말씀을 보십시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는 말씀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어느 땅을 놓고 이렇게 하시는 말씀입니까? 그리고 이 말씀의 뜻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지금 가나안 땅을 놓고 이 말씀을 아브라함에게 하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이 가나안 땅을 너에게 주노라. 너에게 줄 뿐만 아니라 너의 자손들에게도 주노라. 주되 영원히 주노라' 이런 말씀이지 않습니까? 이 말씀 속에 깊이 감추어져 있는 뜻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아, 너는 이제 이 땅을 너의 고향으로 삼아라. 너뿐만 아니라 너의 후손들도 이 가나안 땅이 고향이 되어야 하리라. 이제 이 곳만을 고향으로 생각해야 한다. 여차하면 이 곳을 떠날 생각은 말고 나그네처럼 잠시 우거하는 자처럼 이 땅에서 살지 말고, 이 곳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라." 하나님께서 지금 아브라함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이 말씀을 받은 후에 지난 세월 동안 가나안 땅에서 어떤 마음의 자세로 살았습니까? 진정 이 곳 가나안을 자신의 고향으로 생각하며 살았나요? 나와 내 후손이 영영히 머물 땅처럼 생각하며 살았나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고백대로 지금까지 그는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잠시 우거할 자처럼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 그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란 사람에서 가나안 사람으로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지금까지 도대체 어디를 그의 고향으로 생각하며 살았습니까? 창세기 14장 13절에 보면 '히브리 사람'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히브리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히브리'라는 말이 어디서 나왔는지 아십니까? 이 말의 어원은 '에블라'입니다. '에블라'는 도대체 어디냐? 바로 아브라함 시대에 하란을 중심으로 세워졌던 왕국이 '에블라 왕국'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아브라함을 '히브리 사람'이라고 부르는 뜻은 '하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 자신도 '하란 사람'으로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사는 주변의 이웃들도 아브라함을 '가나안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아니하고 '하란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다는 말입니다. 그의 몸은 지금 분명히 여기 이 땅 가나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하란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그야말로 그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는 나그네로 살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머물고 있는 이 가나안을 언젠가는 떠나야 할 곳, 잠시 우거하는 곳으로 생각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하필 하란을 고향으로 생각하며 살았던 이유는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그는 원래 갈대아 우르 사람입니다. 메소포타미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갈대아 우르에서 출발하여 하란을 통과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왔는데 여기서 놓칠 수 없는 것은 리더입니다. 이 아브라함 패밀리가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옮길 때의 리더는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였습니다. 그리고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들어올 때의 리더는 아브라함으로 바뀝니다. 왜 바뀔까요? 데라가 죽었기 때문일까요?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올 때에 그의 아버지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창세기 11장 32절에 보면 "데라는 이백오 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 그리고 12장 1절에 이어집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 데라가 죽은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이 말씀을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사도행전 7장 말씀도 이 말씀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내가 의지했던 것, 내가 가장 귀하게 생각했던 것을 하나님이 빼앗아 가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기어이 순종하게 하신다고 메세지를 전할 수도 있겠지요? 문제는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떠날 때에 정말 그의 아버지가 죽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1장 2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고 소개합니다. 데라가 아브라함을 70세에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의 나이는 75세였습니다. 그러면 이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올 때에 아버지 데라의 나이는 145세입니다. 11장 32절에 다시 보시면 데라는 205세까지 살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내려올 때에 그의 아버지 데라는 분명히 살아 있었습니다. 살아 있어도 펄펄 살아있었습니다. 그 이후에 60여 년 동안 데라는 살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11장 32절에 "데라는 죽었더라"고 표현하는가? 그건 간단합니다. 이 11장에서 데라를 완전히 정리하기 위해서 데라는 205세에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머물고 있을 때 아버지 데라는 하란 땅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식솔들을 이끌고 하란까지 올 때에 리더 역할을 했던 아버지였습니다. 그 아버지가 지금 하란 땅에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계시는 이 하란을 아브라함은 늘 고향으로 생각하며 그리워하면서 자신은 이 곳에 비록 몸 담고 있지만 자신을 하란 사람이라고 자처했던 것은 충분히 이해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그는 가나안 땅에 잠시 살고 있지만 나그네이며 잠시 우거하는 자라는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그가 이렇게 '나그네로 살았다'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그가 가나안 땅에 들어와 살면서도 그 땅에 자기의 재산을 투자한 흔적을 발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가나안에 들어와 단 한 번도 땅을 구입하지 않았습니다. 돈이 없어서입니까? 그는 거부였습니다. 가나안에서 땅을 구입하려고 하면 얼마든지 구입할 수 있는 거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나안 땅에 들어와 땅을 구입하지 않습니다. 이상하게 땅을 구입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이 곳에서 잠시 머물다가 언젠가 떠날 텐데 땅에 투자할 필요가 무엇이냐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투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대대손손 묻힐 묘자리를 마련하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눈앞에서 싸늘한 시체로 변합니다. 충격을 받아 엎드려져 있는데 그에게 세미한 음성이랄까 충격적인 메시지랄까 하는 것이 들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나그네로 이 곳에 사는 것, 잠시 우거하는 자처럼 이 곳에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깨우침에 그는 벌떡 그 시체 앞에서 일어났습니다. 이 깨우침이 그로 하여금 그 시체 앞에서 슬픔을 훌훌 털고 일어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시체 앞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의미있는 액션을 취합니다. 그것은 바로 4절부터 20절까지의 내용입니다. 아브라함은 헷 사람들에게 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입니다. 원합니다.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지를 좀 주시오. 그래서 내 아내를 매장할 수 있게 해주시오." 그러니까 헷 족속들이 뭐라고 합니까? 6절을 보면 "자, 뭐 그럴 필요 없습니다. 땅 좀 줄 테니까 그 땅에다가 당신 아내를 장사 지내시요."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헷 족속은 땅을 공짜로 쓰라고 제안하는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감사하다며 받아들일 법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저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8절과 9절을 봅시다. 계속 실랑이가 오갑니다. 그들에게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내게 주게 하되 대가를 받고 그 굴을 내게 주어서 당신들 중에 내 소유 매장지가 되게 하기를 원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아브라함은 돈을 주겠다는 겁니다. 사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11절에 보면 헷 족속은 그냥 공짜로 쓰라고 자꾸 우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매장지를 공짜로 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값을 주고 그 땅을 사겠다고 합니다. 이 주장을 굽히지 않습니다. 이렇게 밀고 당기는 일이 한참 동안이나 진행된 후에 아브라함은 당시 시세대로 은 400세겔을 땅주인에게 주고 막벨라 굴이 있는 그 지경을 자신의 소유로 삼은 후에 그 곳에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를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23장은 끝을 맺습니다.

우리가 이 본문을 향해서 던져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 아브라함이 공짜로 주려고 하는 땅을 고맙다고 그냥 받지 않고 굳이 자기 돈을 주어서 사려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아브라함이 하고 있는 이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영적으로 오늘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는가? 자기 아내를 너무 너무 사랑하기에 남의 땅에다가 자기 아내를 묻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에 마지막에라도 아내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기 위해서 땅을 사서 아내를 매장하려 한다고 봐도 되겠지요. 그러나 여러분, 더 깊은 뜻이 여기에 숨어 있습니다. 지금 그가 아내의 매장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일종의 구실입니다. 여기에는 더 깊은 어떤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 아내의 매장지를 구입하는 선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매장지를 마련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묘자리를 마련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대대손손이 묻힐 묘자리를 마련하고 있는 것입니다. 23장 19절에 아브라함이 땅을 사서 사라를 그곳에 묻습니다. 후일에 자신의 뼈도 그곳에 묻습니다.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의 후손들이 대대손손 그 땅에 다 묻힙니다. 그의 아들인 이삭이 묻히고 그의 자부 리브가도 그곳에 묻힙니다.

그의 손자 야곱을 기억하십니까? 그가 기근으로 말미암아 본의 아니게 저 애굽 땅으로 들어가 살게 됩니다. 그곳에는 출세한 아들 요셉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호화롭게 살고 있던 어느 날 마지막 유언을 남깁니다. 그 유언은 창세기 47장 28절입니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되었던지 그는 다시 유언을 재창합니다. 그것이 창세기 49장 29절입니다.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내가 내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부여조와 함께 장사하라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 소유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야곱이 마지막 저 애굽에서 남긴 유언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당시 요셉은 대단한 실권자였기 때문에 이 아버지의 유언을 그대로 준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50장에 보면 야곱이 죽었을 때에 거대한 장례행렬이 저 애굽으로부터 가나안까지 이어지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서 멈추지를 않습니다. 더 크고 거대한 장관이 온 세상 앞에 펼쳐지지 않습니까? 그 곳에서 총리대신을 하던 요셉도 110세에 세상을 떠납니다. 요셉이 세상을 떠나면서 마지막 남기는 유언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50장 24절과 25절에 이런 유언을 남기고 있습니다. "나 죽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여 먼 훗날 가나안 땅으로 가게 할 것이다. 그 때 너희들은 내 해골을 파서 이 해골을 메고 올라가라." 이렇게 유언하며 약속하라고 말합니다.

그로부터 40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모세라는 지도자가 나타나 애굽의 압박에서 해방시키는 이 일을 감행합니다. 열 가지 재앙과 함께 마지막 장자의 재앙에서 유월절을 행할 때의 긴박했던 상황을 출애굽기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모두 다 일어서서 허리에 띠를 띄고 쓴나물을 먹고 그냥 도망쳐 나오는 아주 숨가쁜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인도해 나가야 할 모세가 그 바쁜 상황에서 한 일이 도대체 무엇이었습니까? 출애굽기 13장 1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급박하고 긴박한 상황에서 지도자 모세가 한 일은 이것이었습니다.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취하였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케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필연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나의 해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었더라" 수백 년 전에 죽었던 조상 요셉, 그 요셉의 유언을 모세가 떠올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죽으면서, 죽으면서,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손손 한 가지 구전을 가지고 내려왔는데 하나님이 어느 날 우리를 데리고 나가게 하실 것이다. 그 때에 우리의 위대한 선배 요셉의 해골을 파서 나가야 된다. 이것을 모세가 들었기 때문에 입관해 두었던 요셉의 해골을 파서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출애굽 행렬은 어떤 것입니까? 200만 명이나 되는 거대한 사람이 40년 동안이나 광야를 헤매면서 가나안으로 나아가는 행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들에게는 도대체 무엇이 있었습니까? 그것은 요셉의 해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출애굽 행렬은 다른 행렬이 아니라 거대한 장례행렬이었습니다. '간다. 간다. 우리는 우리의 고향으로 향하여 간다.' 이 메시지를 온 세상 앞에 보여주는 행렬이 이 출애굽 행렬인 것입니다. 지도자 모세가 모압 지방에서 세상을 떠나고 지도자가 여호수아로 바뀝니다. 이 때 인수인계식이 이루어지는데 모세와 여호수아가 교환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서로 나누어 가졌던 것은 바로 요셉의 해골이었습니다. 여호수아 24장 32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이끌어낸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여호수아서의 마지막 장면이 요셉을 장사지내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땅을 사고 아내를 묻고, 남편이 묻히고, 자식들이 묻히는 이들의 행동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제 우리가 이곳을 고향으로 삼겠다. 더 이상 다른 곳이 고향이 아니라 이곳이 우리의 고향이라는 것을 온 몸으로 실천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가나안 땅 충정교회

그러면 가나안은 어디이며 무엇을 상징합니까? 가나안을 우리가 장차 갈 천성으로 보아도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이 나타나는 현장을 가나안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동시에 저는 이 가나안을 하나님이 오늘 우리로 하여금 머물게 해주신 삶의 현장, 바로 여기가 오늘 우리의 가나안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가나안에 머물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사역의 현장이 하나님이 머물게 하신 가나안입니다. 이 가나안에서 여러분들은 도대체 어떤 자세로 사역을 감당하고 있으며, 어떤 태도로 지금까지 달려오고 있습니까? 혹시 아브라함처럼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후 62년 이라는 긴 세월 동안 '나는 떠날 것이다. 나는 잠시 후면 떠날 것이다. 어디 갈 곳 없나? 더 좋은 곳이 없나?' 하는 마음의 자세로 지금 이 가나안에 머물고 있지는 않습니까?

개인적인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사랑의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있을 때에 그렇게 긴 기간은 아니었습니다마는 그 기간을 보람과 배움과 그리고 감격, 이 세 단어로 요약해보고 싶습니다. 참 보람찬 부교역자 시절이었습니다.

이 사랑의교회 안성수양관이 은혜롭게 쓰입니다만 여기에 저도 일부 기여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을 기부한 분이 김진석 집사님으로 지금은 장로님이신데 그 분이 기증을 하셨습니다. 근데 이 분은 원래가 스케일이 크고 호탕하고 큰 손인 분이 아닙니다. 평범하고 아주 조용한 분이십니다. 근데 그 분이 제게서 제자훈련을 받으셨습니다. 이 분이 제자훈련을 받으면서 은혜를 입더니 이 땅을 기꺼이 기부를 했습니다. 옥한흠 목사님과 둘이서 저수지 저 아래에다가 차를 세워놓고 올라와서 현장을 둘러본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보람을 느꼈습니다. 저는 사랑의교회에서 배움의 기회를 가졌습니다. 지금까지의 내 생각이 철저하게 깨어지는 경험을 하면서 참 감사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감격이 있었습니다. 설교 시간에 사촌 형의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만 참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그러던 중에 이력서 한 번 내본 적도 없고 사람을 넣어서 얘기해 본 적도 없는 충정교회라는 곳에서 저를 청빙했습니다. 과정은 생략하고 제가 그 교회에 부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형(옥한흠 목사)이 저를 보내면서 "가서 잘해 봐라" 하더군요. "내가 기도해 줄께" 하면 좋은데 그때는 정말 섭섭했습니다. 왜냐하면 가지 말라고 하는데 갔기 때문입니다. 충정교회에 가서 사역을 하면서 젊은 나이에 뭔가 하면 되겠지 했는데 형이 왜 말렸는지 이해가 되었습니다. 7년 동안 지리하게 법정투쟁을 한 교회, 세퍼드를 풀어놓고 교회 정문에 철조망을 쳐놓고 내 편이면 봐주고 다른 편이면 돌멩이를 던져서 쫓아내는 교회, 누군가가 올라와 두드려서 강대상이 금이 간 교회, 당회장 방 책상 위에 유리가 깨어져 있는 교회, 누군가가 와서 때려서 깨졌답니다. 제가 가니까 그것도 하나 안 바꿔 놨더라구요. 야외용 마이크를 쓰는 교회, 90년대 초에도 나무를 때서 밥을 짓는 교회. 여러분 이해가 됩니까? 51세부터 60세까지 남자는 단 2명인 교회, 침체될 대로 침체된 교회. 우리 서울노회 목사님들께서는 제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아십니다.

뭔가 되겠지 생각하고 지하실에 제자훈련실을 마련하고 밖에도 나가지 않고 제자훈련을 했습니다. 7년 안식년도 포기하고 땀을 쏟아 부었습니다. 제가 처음 충정교회에 갔을 때 애들이랑 어른을 다 합쳐서 182명이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그 지역에서 300명이 안 넘어가는 것입니다. 철벽이었습니다. 나이는 점점 들어가고 세월이 흘러서 7년, 8년 되면서 너무너무 답답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그 때 변해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인상이 항상 굳어져 있고 말을 잘 하지 않고 사람들 만나기를 싫어하고 세미나 같은 곳에 가면 도전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허탈해서 돌아왔습니다. 영적으로 탈진되었습니다. 제 모습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은 더 이상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도심의 공동화 현상으로 젊은이들은 다 빠져나가고 7년 동안 싸우고 싸웠으니 그 동네 사람들이 충정교회는 가지 말라며 싸늘한 시선들을 보냈습니다.

내가 이제 버림을 받았고 더 이상 소망이 없다는 생각에 몸부림을 치면서 그래도 이 상황에서 내가 해야될 것은 무엇일까? 기도라도 해보자 하고는 강대상에 이불을 갔다 놓고 40일 동안 계속 강대상에서 기도했다기 보다는 그냥 거기서 머물렀습니다. 밤에 문을 잠궈 놓고 혼자 많이 울었습니다. 그래도 성이 차지 않아서 곤지암에 있는 소망수양관에 가서 뒷산에 올라가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어느 날,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르는 비를 맞으면서 나무 밑에 기대고 앉아서 울고 있는데 새벽 3시쯤 되었을까 저에게 그림 두 장이 딱 보였습니다.

하나는 제가 10여 년 전에  그 교회에서 위임식 할 때의 사진 한 컷이었습니다. 뒤에 옥한흠 목사님, 장차남 목사님, 옥치상 목사님이 앉아계시고 제가 앞에 서서 위임식 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답사할 때 제가 두 가지를 말씀드렸는데 하나는 여기 계시는 많은 분들 제가 잘 묻어드리겠습니다. 두 번째로는 나도 여러분들과 같이 이 곳에 묻히겠습니다. 제 나이 36살, 위임식 때였습니다. 그 얘기가 떠올랐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너 여기 묻힌다고 하지 않았느냐?" 주말이 되면 기독신문의 담임목사 청빙 광고를 보던 나에게 "너 여기 묻힌다고 하지 않았느냐?"가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바라보라

그러면서 또 하나 저에게 그림을 보여주시는데 그것은 마태복음 13장 44절의 그림이었습니다. 밭의 비유입니다. 내가 밭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향해서 나로 하여금 자꾸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13장 44절의 비유에서 나타나는 주인공은 밭주인이냐? 아니면 소작농이냐? 여기에 감추인 보화는 도대체 언제부터 감추어져 있었다고 생각하느냐? 그리고 이 보화가 어디쯤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런데 왜 지금까지 이 보화가 발견되지 않았느냐? 그러면 어떻게 이 본문에 나타나는 주인공은 보화를 발견하게 되었느냐?' 저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게 만드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밭의 주인공은 소작농, 그 보화는 오래 전부터 숨겨져 있었다. 그 밭을 경작해 온 다른 소작농들은 그 보화를 발견하지 못했어. 그런데 본문의 주인공은 그 보화를 발견했어. 이유가 무엇일까? 주인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밭의 주인처럼 조금 더 깊게 팠더니 뭔가 걸리는 것이 있었고 그래서 그 보화의 주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보여주신 그림은 두 가지였습니다. '묻혀라. 그리고 조금만 더 깊게 파라. 조금만 더 깊게 파. 조금만 더 깊게 파. 너의 연약함과 너의 부족함을 내가 알고 있어. 보화는 깊은 곳에 있지 않아. 조금만 더 깊이 파면 나와.' 이것이 제게 들린 음성이었습니다.

돌아와서 하나님의 뜻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말씀 두 개를 붙잡고 지내는 중에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은혜를 저와 우리 교회에 베풀어주셨습니다. 일산으로 교회를 옮기게 하시고, 건축을 하게 하시고, 은혜 가운데 지내게 해주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결코 보통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교회는 너무너무 싸우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장로님 여덟 명 가운데서 두 명만 현장에 가보고 여섯 명은 교회를 어디로 옮기는 지도 모른 체 동의와 재청을 하고 통과했습니다.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법, 법 하는 교회에서 교회를 옮기는 중대사를 놓고 제직회도 공동의회도 하지 않고 결의를 하고 진행했습니다.

지금도 우리 장로님들은 그 때 일을 놓고 얘기합니다. "목사님, 우리가 그 때 좀 돌았었어요." 진짜입니다. 이미 입주가 다 된 지역에 왔습니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2001년도에 약 570명이 등록을 했습니다. 2002년도에는 764명, 2003년도에는 약 1,100명, 그리고 2004년 지난 주일까지 약 880명 됩니다. 이대로라면 금년도(2004년)에는 1300명이 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조금만 더 파고 조금 더 기다리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배추 한 포기가 김치 맛을 제대로 내려고 해도 5번을 죽어야 합니다. 땅에서 뽑힐 때 한 번 죽고, 통배추가 쩍 갈라질 때 또 한 번 죽고, 소금에 절여질 때 세 번째 죽고, 매운 고추와 짠 젓갈에 뒤범벅이 될 때에 또 한 번 죽고, 마지막으로 독에 담가져 땅 속에 묻힐 때에 또 한 번 죽어야 그 때 비로소 김치 맛이 나는 것입니다.

 

여기가 바로 나의 묘자리다

오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하나님께서 이 곳에 보내셨다. 이곳이 나의 고향이며 나의 땀과 눈물과 물질을 쏟으리라. 이 곳이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영원히 머물게 하시는 고향이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신 사역의 현장에서 조금만 더 판다면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보화를 발견하는 은혜와 복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동역자 여러분, 우리는 이제 산 아래로 내려가야 합니다. 기막힌 현실 앞에 우리는 또 서야 합니다. 그 곳에서 여러분들은 이렇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른발을 들고 땅을 치면서 여기에 나를 위한 보화가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시면서 '조금만 더 파자. 조금만 더 기다리자. 조금만 더 최선을 다하자. 여기가 바로 나의 묘자리다.' 하는 마음으로 사역을 감당할 때에 신실하신 하나님이 분명한 은혜를 베풀어 주실 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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