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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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 옥한흠 목사
  • 승인 1997.08.26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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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08/26) 교갱협 제2차 영성수련회 저녁집회

본문: 누가복음 11장 1~13절

성령을 다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몇 권의 책을 읽었다고 해서 성령에 대해서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사람만큼 제가 볼 때 성령을 모르는 사람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격이라는 것은 사람끼리에도 10년을 사귀어도 잘 모르는 것이 인격입니다. 우리가 부부생활을 해서 30년을 저와 같이 살아도 아직도 부인을 볼 때 어떨 때는 몰라가지고 한참 멍하게 쳐다볼 때가 있습니다. 인격이라는 것은 그만큼 심오하고 그만큼 영역이 넓고도 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다 알았다는 것은 사람끼리도 안 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물며 하나님이시요, 영이시요, 완전하신 인격이신 성령을 우리가 다 알고 있다 그것만큼 천하에 교만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신학이 아니고 성령입니다. 오늘 이 시간, 저의 입을 통하여 여러분에게 말씀 전하실 때에 성령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임하시고 각자를 만나주시고 여러분 각자에게 필요한 응답 주시고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꼭 작업하셔야 될 것들은 작업해 주시는 시간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힘을 잃어버린 사역자

만일 하나님께서 지금 당장 종이와 펜을 건네주면서 빠른 시간 안에 응답받았으면 하는 기도제목이 있으면 한가지만 적으라고 하신다면 무엇을 쓰고 싶습니까? 사람따라 소원하는 내용이 다를 수 있습니다. 이러기도 하고 저러기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점에서는 동일할 것입니다. 가장 절실한 것, 시급한 것, 밤낮 골똘히 생각하면서 사모하는 그것을 적을 겁니다. 틀림없이 그럴 것입니다. 여리고성의 소경 바디메오는 자나깨나 생각하고 바라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내가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생각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밤낮없이 사모하고 기다리던 것이기에 질문이 떨어지자마자 지체하지 아니하고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이와 같이 절실한 문제를 가지고 “오! 하나님! 응답해 주옵소서. 내가 이것을 구합니다.” 그럴 것이 분명합니다. 교회를 맡아서 목회하고 있는 저에게 하나님이 종이를 내미시고 “네가 지금 당장 응답받기를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신다면 저는 당장 두말 않고 “오, 주여! 성령을 주옵소서! 성령을 주옵소서! 저에게 성령 좀 주옵소서! 믿음으로 충만케 해주옵소서!” 라고 말할 것입니다. 저는 우리 동역자 여러분들이 다 이와같은 절실한 기도제목을 하나님께 내어놓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영적으로 진단할 때 우리 한국교회, 특히 우리 사역자들한테 성령만큼 절실한 기도제목이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매일매일 그것을 느낍니다. 겉으로 보면 성령받은 사람입니다. 겉으로 보면 경건합니다. 겉으로 보면 조금도 어떤 문제가 없는 것같이 보입니다마는, 그러나 조금만 헤집고 들어가 보면 너무너무 영적인 문제와 질병을 안고 시름하는 사역자들을 많이 봅니다. 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채찍

제가 이 성령을 달라고 특별히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되겠다고 느끼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누구나 다 사역을 하다보면 영적인 슬럼프라고 할까요. 영적침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영적침체에 깊이 빠졌다가 하나님 앞에 호되게 매를 맞은 것이 1989년부터 1993년까지였습니다. 얼마나 제가 무서운 채찍에 호되게 매를 맞았는지 제가 그 내용을 다 이야기하려면 아마 시간이 모자랄 것입니다. 저는 매를 맞으면서 ‘아버지, 용서해 주옵소서.’ 바그닥바그닥 빌면서 어린애가 아버지를 붙들 듯이 저는 하나님 앞에 매달려 ‘내가 죽으면 죽으리라. 이러다가 죽으면 강단에서 죽는다.’ 하고 1990년도에 일년 쉬고 1991년도에 강단에 섰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계속적인 채찍은 그 다음해 일년, 이년, 삼년 동안 끊임없이 멈추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저 자신이 깊이 저의 사역을 들여다보고 울기도 하고 탄식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미국의 모 신학교의 저명한 교수이며, 또 목회자였던 어느 목사님의 글을 읽다가 제 심정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눈물을 억제할 수가 없어서 그냥 막 울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저처럼 성경을 열심히 가르치는 목사였습니다. 성도를 말씀의 진리 위에 굳건히 세우는데 정성을 쏟았습니다. 상당히 좋은 성과를 거둔 성공적인 지도자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목회와 교회를 놓고 이렇게 진단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 분의 글을 그대로 읽어 보겠습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나는 나의 설교를 충실히 듣고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는 교인들의 삶에 뚜렷한 변화가 없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영적으로 침체된 사람들은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집을 비우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계속 세상적인 것에 정신이 팔려 있었고, 환자들은 약을 쓰지 아니하면 낫지를 아니했다. 다른 사람을 전도하기가 너무 힘들었고, 신경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상담자의 장기치료를 받는 것 말고는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렇게 김 빠지고 능력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왜 우리가 이토록 적은 능력만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

저의 아픈 것을 예리한 칼로 사정없이 찌르는 한 마디 한 마디였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제가 목회하는 교회의 영적상태를 적나라하게 보는 것 같았고, 치부를 드러내는 것 같은 고통을 맛보았습니다. ‘왜 사역자들은 자주 영적으로 갈증을 느끼고 있을까? 왜 우리 평신도 지도자들은 다 뜨겁게 일하다가 금방 식어버리는 일들이 가끔 있을까? 왜 환자들은 늘어만 갈까? 교회규모에 비해서 너무 무력하다는 탄식이 나옵니다. 바로 앞의 유흥가는 왜 갈수록 더 번창하고 사랑의교회가 여기 있으므로 해서, 이 유흥가가 달라졌다고 하는 어떤 기미가 왜 도무지 10년이 지나도 보이지 않을까? 왜 나는 하나님이 엄청나게 부어주시는 축복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이렇게 다운(down)되어가지고 나중에는 매까지 맞아야 되고, 정말로 헤어나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 수년을 시름해야 되느냐? 왜 나는 이래야 되나?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이요, 이것이 오늘날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서 바라시는 현상인가?‘ 이것을 느끼면서 많이 괴로워했습니다. 너무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제가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님을 찾았습니다. 전화해서 좀 만나자고 했더니 그 바쁜 양반이 토요일을 특별히 빼가지고 자기 서재에서 저를 만났습니다. 한 서너시간 같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제 사역의 허와 실, 장로교 목사의 허와 실, 이것을 솔직히 털어놨습니다. 헛점이라고 할 수 있는, 허상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을 제가 솔직히 고백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은 성령에 대해서 특히 많은 은혜를 받은 분 아닙니까? 신학은 조금 틀릴지 모릅니다만 왜 내 영이 이렇게 자주 다운(down)이 됩니까? 왜 우리 교회 평신도지도자들이 뜨겁게 일하다가도 자주 슬럼프에 빠집니까? 제가 비유를 든다면, 우리교회 안에서 제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평신도지도자들이 가끔 영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면, 그 어려움을 당하는 영적 지도자들의 가슴 속에 참 은혜의 불길, 성령의 불길을 새롭게 좀더 지피기 위해서 마치 저는 무엇과 같으냐 하면 아궁이 앞에서 엉덩이를 하늘로 쳐들고 후후 불어대는 농부와 같습니다. 그래서 그 꺼져가려고 하는 불꽃을 꺼지지 않도록 몸부림치는 사람같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목사님은 목회하면서 그런 거 느낀 적이 없습니까?” 저는 제가 이렇게 저의 허상을 드러내놓고 이야기를 하면 그 분도 그런 자세로 나오리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운동 하시는 분들의 허와 실을 제가 너무도 잘 알고 있거든요. 그런데, 그분은 아마 하나님께서 그날 그분을 통해 그렇게 말씀하시라고 한 것 같았습니다. 뭐라고 하시는가 하면, “아니, 옥목사님 그러세요? 저는 정반대예요. 우리 순복음교회 평신도지도자들은 어떻게 뜨거운지요. 내가 할 일은 날마다 물통에 물을 잔뜩 담아가지고 가서 끼얹는 거예요. 너무 뜨거워지지 말라고.” 그러니 게임이 안되는 겁니다.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게임이 안돼요. 나는 지금 불이 꺼질까 싶어서 엉덩이를 하늘로 쳐들고 후후 불어대는 목사라는데, 자기는 불이 너무 뜨겁게 붙어가지고 그냥 문제가 터질까 싶어서 날마다 물통을 가지고 물을 끼얹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비유를 하니 이게 무슨 대화가 될 수 있겠습니까? 공통점이 아예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속 안에서 뭐가 푹푹 일어나는데, 그래도 하나님께서 ‘아마 저에게 뭔가 깊이 깨달으라고 이런 말씀을 하게 하시는구나.’ 하고는 그 말씀을 접어두고 사적으로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했습니다. 그리고, 둘이 함께 손잡고 기도했습니다. 솔직히 그분이 제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 해주려고 하면 나는 눈 딱 감고 받으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정말로 하나님께서 그분을 통해서 나에게 성령의 은혜를 다시한번 힘있게 충만하게 채워주시기를 원하신다면, 나는 어린 아이 앞에서라도 무릎 꿇을 자신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이 손을 얹어 꼭 기도하시겠다면, 저는 기도해 주십시오 그럴려고 했는데 한사코 자기는 손을 얹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냥 손잡고 같이 무릎꿇고 기도했습니다. 오죽 답답했으면 제가 그렇게 했겠습니까? 저는 그분을 개인적으로 존경합니다. 아마 그분은 사역을 그만두고 나면 한국 기독교 역사가 다시 평가를 해야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

여러분에게는 이와같은 영적인 갈등이 없습니까? 성령에 대한 간절한 사모함이 없습니까? ‘이래서는 안되겠다. 정말 주여! 살려주옵소서!’ 하는 절규가 여러분 가슴에는 없으십니까? 장로교 목사는 그거 없어도 됩니까? 우리가 성령의 은혜를 다시 한 번 알고, 그 은혜 속에 흠뻑 젖어야 되는 이유는 목회상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복음의 감격과 능력은 식어버리고 말만 요란한 목사가 아닙니까? 그러면 당신은 성령 받아야 합니다. 죄인줄 알면서도 어떤 죄를 계속 범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당신은 성령 받아야 합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 순종 안돼는 것이 없습니까? 그러면 당신은 성령 받아야 합니다. 예배가 지겹습니까? 찬양하고 감사하는 기쁨이 없습니까? 그러면 당신은 성령 받아야 합니다. 말씀 듣기가 힘듭니까? 강단에 서서 전하기는 쉬워도 앉아서 듣기가 지겹습니까? 입이 무거워서 기도가 잘 안됩니까? 그러면 당신은 성령 받아야 됩니다. 열심히 봉사하지만 심령이 답답하고 갈급합니까? 그러면 당신은 성령 받아야 돼요. 아무리 가르치고 아무리 애를 써도 열매가 별로 안보입니까? 그러면 성령 받아야 합니다. 전도가 힘듭니까? 죽어가는 영혼들을 향해서 안타까운 심령이 타오르지 않습니까? 저나 여러분이나 성령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목회가 건강하지 못합니까? 10년, 20년 씨름해도 교회가 병들어 있습니까? 성령 받아야 합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우리 모두가 성령 받아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안돼는 일을 해내시는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입니다. 성령은 에스겔 골짜기에 흩어져 있는 마른 뼈다귀들을 살릴 수 있었고, 성전을 짓다가 14년 동안 내팽개치고 첫믿음 첫사랑 다 식어버리고 이제는 세상사는 맛에 흠뻑 젖어가지고, 아무리 발로 엉덩이를 차도 일어날 줄을 모르던 귀한 자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같이 일으켜서 성전을 달려가 돌을 옮기며 하나님의 전을 향한 열정을 불태우게 했던 자가 누구냐? 성령이십니다. 힘으로도 안되고 능으로도 안되었지만 하나님의 신으로 그 일이 가능했습니다. 이것이 성령입니다. 세 번이나 예수를 부인하던 베드로, 의욕도 자존심도 다 이제는 깡그리 무너져버린 그를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부활의 증인으로 내세우신 그 능력이 어디서부터 왔느냐? 성령이 주시는 능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능력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계획

누가복음 11장 11절부터 13절까지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이 말씀에 대한 실제적인 의미를 좀 곡해하고 있었다고 할까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믿는 자는 다 성령 받았는데 뭘 또 성령 받아야 된다고 하느냐? 저는 한동안은 그렇게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제가 몸담고 있고 여러분이 몸담고 있는 장로교의 신학이 사실은 그런 것입니다. 성령 달라고 기도하면 신학적으로 좀 유치한 것처럼 보는 풍토가 사실 우리 주변에 깔려 있었습니다. 이 본문, ‘너희가 악할 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이 본문을 놓고 주석을 여러번 찾아보았습니다. 우리가 참고하는 주석은 대부분이 개혁신학을 배경으로 한 학자들이 쓴 주석 아닙니까? 그런데, 누가복음 11장 1절부터 13절까지 내용을 주석하는 거의 전부가 어디에다 포커스를 두고 주석을 하느냐 하면, 간청한다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만날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열어주실 것이니 간청하는 기도에 대해서는 설명을 많이 늘어놓고 또 간청해야 된다고 하는데, 왜 하나님께서 무엇보다 성령 주시기를 원하시는가 하는데 대해서는 설명을 잘 안하고 있습니다. 그냥 슬쩍 지나가버려요. 심지어 개혁신학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칼빈 자신도 이 13절을 해석하면서 성령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주석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와같은 신학적인 배경 때문에 사실 이 말씀을 적당히 넘겼습니다. 그런데 이미 성령 받았는데 우리 모두가 예수 믿자마자 다 중생해서 성령 받았고, 그 후로 자주자주 성령은 우리와 함께 계셔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는데, 뭘 성령을 주신다고 하시고 우리는 뭘 성령 달라고 구해야 하느냐? 우리에게는 그런 약간의 교만끼가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이 구절을 좀 냉정하게 살펴보면 이 말씀이 오순절 성령강림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라고는 볼 수가 없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간청해서 얻은 응답이 아닙니다. 120문도가 간절히 부르짖고 구했기 때문에 그 공로로 얻은 것이 오순절 성령입니까? 그래서 오순절에 성령에 임하셨나요? 그렇게 해석하면 그것은 신학의 ABC도 모르는 사람이 성경신학의 흐름을 전혀 모르고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이지요.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선하신 우리 주님의 약속에 의해서 임하신 강림입니다. 오직 제자들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다린 것 뿐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약속한 것을 기다리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다려서 그 약속 때문에 임하신 성령이지 간구해서 간청해서 문을 두드려서 얻은 성령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오순절 성령강림을 염두에 두고 주님이 주신 말씀이다 그렇게 해석을 한다면 그 해석은 분명히 저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는 본문을 오순절 성령강림에 포커스를 맞추고 해석을 한다면, 이 본문은 이미 시효가 끝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이미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본문이 시효가 끝났다면 1절부터 13절 전체가 시효가 끝난 말씀이 됩니다. 우리는 신학적으로 그 사실은 분명히 믿습니다. 오순절 사건은 반복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일회성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성육신하는 것을 두 번 세 번 반복하실 필요가 없는 것처럼, 제 삼위의 성령께서 한번 세상에 임하시는 것 또한 반복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교회 안에 거하십니다. 우리 마음에 거하십니다. 우리는 성령을 모시고 사는 성령의 전입니다. 이 성령은 세상 끝날까지 떠나지 아니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령을 주시옵소서 하는 이 본문의 기도,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이 자세는 필요가 없다.“ 이렇게 말을 한다면 아마 손해를 엄청나게 볼 것입니다. 우리 장로교가 불행하게도 이런 약간의 어딘가 모르게 오해한 이 자세 때문에 많은 손해를 지금까지 보아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가장 절실한 문제

성령은 임하셨지만 성령을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본문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목회하면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 않습니까? 힘으로도 안돼요. 능으로도 안돼요. 정말 안됩니다. 사역, 아무리 잘해도 안되더라구요. 제자훈련 2년 동안 소그룹에 앉혀놓고 씨름을 해도 안돼는 것은 안되더라구요. 방법론을 동원해도 안되고요. 원리와 이론을 아무리 귀 아프도록 떠들어도 안되고요. 정말 안돼요. 안돼는 영역이 목회에 너무나 많아요. 아무리 열심을 다해서 목사가 그야말로 지쳐서 쓰러질 정도로 일을 해도 사람의 힘으로 안돼는 것은 안돼요. 이런 영적 문제를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와같이 사람의 힘으로 능으로 안돼는 것을 처리해 주시는 분이 성령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성령을 달라는 기도가 안나오겠습니까? 여러분, 목회 자신있으면 이 기도가 필요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와 같이 자신이 없다고 벌써 저 스스로를 판단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너 무얼 원하느냐 하면 두말 않고 성령 주옵소서! 입니다. 성령 주옵소서!

추운 한겨울 갑자기 밤에 난방이 꺼졌다고 합시다. 그날 밤에 가장 시급한 것이 뭡니까? 다시 불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불이 들오올 때까지 그 추운 밤을 오들오들 떨고 앉아있는 식구들에게는 불이 들어오는 것 이상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부부간에 약간 감정적인 대립이 있는 것 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녀들이 숙제 때문에 걱정하는 거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전날, 중요한 거 있었던 거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직 난방이 들어오는 것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 목회현실을 보면 성령 다시 받고 성령의 삶되고 성령에 사로잡혀서 주님의 손에 쓰임받는 것 그 이상 우리에게 절실한 문제가 없다는 것을 저는 고백하고 싶습니다.

 

기도의 자세

말씀을 좀더 검토를 합시다. 본문의 말씀을 우리가 볼 때에 물론 누가가 편집을 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굳이 이것을 순서적으로 된 것이다 하고 고집을 한다면 저는 동의할 수도 있고 고개를 갸우뚱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슷한 주제를 놓고 누가가 편집을 한 것으로 우리는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꼭 순서를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할 지라도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 1절부터 이 말씀이 차근차근 정리가 되어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11장 전반부는 기도와 성령이 주제가 되어있습니다. 기도와 성령이 주제가 되어있고 그러면서 제일 먼저 첫 번째로는 기도의 내용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기도의 자세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기도내용의 표본입니다. 간청은 기도자세의 표본입니다. 그리고, 응답의 대명사는 성령이라는 말로 요약이 됩니다. 하나님의 응답의 대명사. 이렇게 볼때 우리가 이 세상 다할 때까지 하나님 앞에 간청하는 기도의 자세를 흐트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기도의 자세를 보시고 하나님이 귀찮아서라도 응답하실 수 있는 응답 중에 가장 최고의 응답이 성령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성령을 어떻게 구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어린애가 엄마한테 밥 달라고 졸라대듯이 하나님 앞에 밤이고 낮이고 엎드려 주여 성령 충만케 하옵소서! 이렇게 구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가장 귀한 선물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가장 먼저 주고 싶어하는 선물이 성령이라는 것을 이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하나님이 가장 먼저 주기를 원하시는 기도의 응답이 성령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자주 자주 체험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는 기도요청 중에 성령 달라고 하는 기도를 하나님이 참 좋아하신다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이 말씀을 들으면서 “주여 옳습니다. 나를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성령입니다. 성령을 다시 충만케 하옵소서!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옵소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응답이라면 주여! 이 시간 주시옵소서!“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이 못난 놈’이라고 하실까요? “당연하다. 성령만큼 좋은 응답이 나에게 없느니라 내가 내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있다면 성령이니라.” 우리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줄 믿습니다.

 

성령의 은혜

또 하나, 우리가 이 본문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성령 안에 좋은 것이 다 들어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마태복음 7장 11절하고 이 본문하고 비교해 보면, 이 본문에서는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마태복음 7장 11절에는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이렇게 말을 바꾸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 안에 좋은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성령충만하면 평소에 달라달라 하는 것을 그 다음에는 달라고 할 필요가 없어지는 때가 참 많습니다. 여러분 이미 아실 것입니다. 은혜 받아보신 분들은 ‘아, 하나님 아버지 마음이 답답해 죽겠습니다. 주여! 내 마음에 기쁨을 주옵소서! 왜 마음이 시원하지 않습니까?’ 이런 기도를 평소에 하던 사람이 성령의 은혜만 받으면 그 기도가 없어져 버립니다. 성령이 오셔서 그 마음에 기쁨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막혔던 것을 푹 뚫어 주시니까 그 기도가 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 안에 좋은 것이 다 들어있습니다. ‘오, 주님! 내 남편이 왜 저렇습니까? 왜 이렇게 나를 괴롭힙니까? 주여! 내 남편 고쳐주옵소서!’ 하던 주부가 성령충만 받으면, 그 다음에는 남편을 보는 눈이 확 달라져 버립니다. ‘아, 모든 잘못이 나에게 있었구나!’ 그래서 성령충만한 부인으로서 남편을 위하여 참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봉사해 주고, 남편이 약간 기분 나쁘게 해도 오히려 그 마음에 기쁨이 충만해지니까 ‘오, 하나님! 남편 고쳐주옵소서!’ 하는 기도가 싹 없어져 버리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성령 안에 모든 좋은 기도의 응답이 다 들어있습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에서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그래놓고, 오늘 본문에서는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 안에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모든 좋은 것이 다 들어있기 때문에 성령충만하면 우리의 기도가 참 단순해집니다. 복잡하던 기도가 단순해집니다. 왜냐하면 내가 복잡하다고 생각하던 것들이 다 해결돼 버리니까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충만하면 주여, 주여, 우리교회 당회가 왜 이렇습니까? 주여 왜 이렇습니까? ‘어느 장로, 어느 장로 고쳐주옵소서!’ 하던 기도가 성령충만하면 그 다음에 없어져 버립니다. 성령을 통해서 주의 은혜가 흘러넘치면 당회원들이 감염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인간관계가 서로 달라지고 보는 눈이 달라지니까 과거의 문제가 다시는 문제로 남아있지 않는 것을 우리는 자주 체험을 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니 어떻게 성령 달라고 우리가 기도 안하겠느냐 그말입니다. 여기에 무슨 신학이 있고 여기에 무슨 교회전통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주신다고 약속하셨는데, 구하기만 하면 준다고 했는데 왜 안주겠느냐 그말입니다. 왜 기도 안하겠느냐 그말입니다.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성령

셋째는 성령을 아무나 주시는 것이 아니라 구하는 자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구하는 이라는 말은 간청한다는 말로 표현을 합니다. 간청한다는 의미는 귀찮을 정도로 못살게 군다는 말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비유까지 들어서 우리가 알아듣도록 설명을 하셨어요. 불행하게도 우리는 기도를 하되 이 간청하는 기도를 못해가지고 많은 손해를 봅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결혼주례 요청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담임목사가 결혼주례 다해줍니까? 못해주지요. 해주면 선물도 가지고 오고 어떤 때는 봉투도 갖다주니까 수입이 좋긴 좋지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부교역자들에게 80% 이상을 맡깁니다. 네가 좋아하는 부교역자, 네가 존경하는 부교역자 보고 해달라고 그래라 그러면 대부분이 수긍을 하고 듣습니다. 그런데, 가끔 가다가 보면 생명 걸고 매달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사님, 저는 목사님을 사랑합니다. 저는 목사님이 제 결혼에 축복 안해주시면 저 결혼 안할래요.” 그래서 한번 거절해서 갔습니다. 그런데 한 일주일 후에 또 달려옵니다. “목사님, 우리 집안은 안 믿습니다. 그날 우리 부모님이 옵니다. 우리 목사님이 주례해 주시면 우리 부모들이 감동을 받을 거에요. 그러면 내가 전도하기가 쉬워요. 목사님, 꼭 해주세요. 목사님이 혹 바쁘시면 겨울이든 여름이든 좋으니까 목사님 시간 있는 그때 제가 결혼시간을 맞추겠습니다.” 이렇게 하고 매달리는 사람, 이런 경우는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해줘야지요. 별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간청하는, 귀찮게 하는 그것 때문에 감동을 받아가지고 제가 주례해 준 것이 아마 열건은 될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것을 보면서 ‘아, 하나님도 이것을 놓고 말씀하시는구나!’ 그런데, 결혼주례 청하러 왔다가 제가 스케줄을 내어놓고 “집사님, 아무래도 안되겠네요. 스케줄 좀 보세요. 제가 해드리기 싫어서가 아니고 참 제가 부득불 이러니까 집사님 양해하시고 우리 부교역자 중에 어느 분이든지 주례를 해달라고 부탁을 하세요.” 그러면 뭐라고 그러는 줄 아십니까? “제가 목사님을 위해주지 않고 누가 위해주겠습니까? 참, 제가 보니 주례해 달라는 제가 체면이 없네요. 목사님, 알겠습니다. 제가 목사님을 위해드리고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하고 갑니다. 참 얼마나 고마운 사람입니까? 그러고 나서 그런 사람 보내고 나서 제 생각에 ‘내가 하나님 앞에 저 식으로 기도하고 나면 맨날 결과가 똑같겠다. 하나님, 너무 귀찮게 구는 것 하나님께서도 불편하실 테니까 딱 한번만 주님 앞에 구하고 대답이 없으면 하나님이 안주시는 걸로 제가 알겠습니다.’ 이러고는 응답 없으면 다시는 그 기도 안한다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편안하실까요? 그런데 이 말씀을 놓고 가만히 보면 그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보고 “귀찮도록 달라고 해라. 특별히 성령에 대해서는 그렇게 해라.”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왜 자꾸 얌전을 떱니까? 하나님 위해준다고 얌전을 떠는 겁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봐주는 겁니까? 어느 쪽입니까? 대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러십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녀가 달라고 하면 주시지 않느냐 하물며 내가 안주겠냐 내가 가장 주고 싶어하는 것 왜 안주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왜 우리는 그렇게 얌전합니까?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교단의 쇠퇴현상과 부흥현상

전세계적으로 보면 약 8억이 넘는 크리스챤들은 하나님 앞에 귀찮을 정도로 집요하게 성령 달라고 소리소리 질러서, 그래도 성령충만이 무언가를 아는 크리스챤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나머지 10억은 너무 점잖아서 성령이 오셨는데 하고 하나님 앞에 성령 달라고 매달리지 아니한 까닭에, 그 심령이 식어있고 그 삶에 힘이 없다고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그 10억 중에 한국 장로교도 포함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오정현 목사가 저에게 참 좋은 통계를 주었는데 저는 아직 ‘Christianity Today' 책을 오늘 받지 못해서 보지 못했는데 아마 미국에서 보았나 봅니다. 최근에 미국의 주류교단의 쇠퇴현상과 교회부흥현상을 수치로 데이터를 낸 글이 발표가 되었나 봅니다. 1978년부터 93년 동안 약 15년 동안 미국의 장로교회와 회중교회를 위시해서 감리교와 대교단들이 얼마만큼 감소되었느냐 하는 자료가 나왔는데, 미국 장로교는 17.9%, 약 18%가 감소되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교단은 25%가 감소된 곳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가 놀란 것은 오순절 계통의 교회는 530%가 성장했습니다. 오순절 계통의 사람들 특징이 무엇입니까? 성령 달라고 기도하는 데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특징입니다. 우리는 얼마동안은 그 사람들을 조소했고 무식해가지고 저런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한 삼사십년 세월이 흐르고 보니까 우리는 그들로부터 성령에 대해서 배워야 할 처지가 되어버렸습니다. 집요하게 구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바로 성령이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배우는 것입니다.

 

21세기를 주도하는 세가지 요소

21세기를 주도하는 중요한 세가지 요소, 이것은 진실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합리주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21세기도 합리주의의 세상이 될 줄 아는데 그렇지만 아닙니다. 벌써부터 교회 안에 다음 세대를 통해서 무서운 힘으로 밀고 들어오는게 무엇입니까? 영성과 감정과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를 납득할 정도로 깨달을 정도로 설명해가지고는 이제 안 통합니다. 한참동안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하나님은 유일하신 신이라는 것을 성경적으로 다 설명하고 나서도 그 다음에 질문이 뭐가 나오는 줄 아십니까? 그래서 어쨌다는 겁니까? 자기에게 어떤 감동이 없으면 모두 별문제가 안되는 것입니다. 그게 옳으냐 그르냐 별 흥미가 없습니다. 자기에게 강한 뭐가 와서 터치가 될 때 아! 하고 나오는 것이 지금 신세대요, 우리 앞에 여러분의 목회현장에 일어날 많은 현상들입니다. I.Q가 E.Q로 바뀌는 것이 어느 학자가 하는 이상한 얘기인 줄 아십니까? 그러니까 잘못하면 장로교는 점점 다운(down)될 수 있는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장로교는 지성이 앞서는 교단입니다. 합리주의적인 사고에 바탕을 둔 교단입니다. 성경을 합리적으로 잘 설명해서 아, 그렇구나! 하면 그것이 은혜인 줄 알고 그렇게 깨달은 그것이 바로 성령의 감동인 줄 알고 그 다음에는 아무 상관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감정에 어떤 불을 질렀느냐? 그 사람의 삶에 어떤 역사가 일어났느냐 하는 Follow-up에 대해선 오늘날까지 별로 신경을 안쓰는 것이 장로교를 지배했던 합리주의의 성향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우리 앞에 오는 세대가 영성과 감정과 체험을 앞세우는 세대라고 한다면 성령 주옵소서! 성령이여 임하시옵소서! 성령이 내 가슴을 가득히 채우시고 성령이 나를 붙들고 다시 새롭게 빚어주시고, 성령이 나에게 기름 부어주셔서 내 안에 있는 더러운 것은 다 타버리고 하나님 안에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는 감동과 체험과 새로워짐이, 계속 사람들에게 증거되어지는 성령의 운동은 더 발전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신차려야 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악한 친구보다 못한 분이 아닙니다. 문 두드리는 친구에게 귀찮아서 떡을 내어주는 그 정도의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악한 아비가 귀찮아서 자녀에게 할 수 없이 주는 그런 아비와 같은 분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떡 달라는데 돌을 주는 그런 악한 아비와 상대해서 생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선하신 하나님, 좋은 것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무엇이든지 간절히 소원하면 부스러기라도 얻겠다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소원하던 어느 여인처럼 간절하게 소원하면 하던 일 멈추고 돌아서서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하시고 그냥 쏟아부어 주시는 좋으신 우리 하나님이 바로 우리 아버지 하나님 아닙니까? 이 하나님 앞에 성령 달라는 것은 부끄러운 일도 아니요 그건 신학이 잘못된 것도 아니요 너무나 너무나 당연한 기도인데 우리가 왜 구하지 않습니까? 저는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이것을 세가지 기도라고 해석하지 않습니다. 어떤 분은 이것을 세가지 기도라고 해석을 하더라구요. 들을 때는 그럴 듯 하지만 본문 전체의 흐름을 보면 세가지 기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간청하는 기도를 계속 세 번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입니다. 간청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저 점잖게 구해서 안되면 막 찾는 사람처럼 하나님 앞에 매달리라는 말입니다. 그것도 안돼면 꽝꽝 두드리면서 발로 차면서 떼를 쓰는 어린애처럼 그렇게 기도하는게 간청이라는 것을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달라고 하는 사람은 이와같은 집요함이 있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승화된 목회

우리는 이런 면에서 많이 뒤져있습니다. 제가 아는 오순절 계통의 성도들을 보면 확실히 다르더라구요. 다른 데가 있습니다. 인천에 있는 최성규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순복음교회 집회를 하고 온 오정현 목사님을 통해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걸 느꼈습니다. 다른 데가 있습니다. 장로교 신자들처럼 말만 많은 사람들이 별로 없답니다. 머리만 크고 아는 체하고 거드름 피우는 사람이 없답니다. “성령 주시옵소서!” 하고 시시때때로 그냥 하나님 앞에 매달리니까 하나님이 그들에게 채워주시니까 성령충만한 사람은 다른 것입니다.

제가 명성훈 목사님 설교를 듣다가 재미있는 개구리 우화를 들어서, 하도 들으면서 웃어서 여러분들도 다 들으셨을 줄 믿습니다. 한 마리 개구리가 우유통에 빠졌습니다. 사느냐 죽느냐 기로에 놓였습니다. 한 마리는 어떻게 여기 빠져가지고 재수없게 죽게 되었는고 하고 절망을 하고는 네다리 쫙 뻗고 허우적거리다가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다른 개구리 한 마리는 아니야, 나는 살아야 돼 하고는 막 헤집고 돌아다닙니다. 성령충만한 개구리입니다. 밤새도록 막 헤집고 다녀요. 성령충만한 사람은 그런 사람이랍니다. 막 헤집고 다녔더니 우유가 그만 나중에 자꾸 굳어져가지고 치즈가 되어서 통 밖으로 벌떡 뛰어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참, 그 말이 옳다. 정말 옳구나! 우리 장로교 신자들은 그런 배짱이 없고 그런 기질이 약합니다. 그런데, 성령충만함을 체험한 사람들은 어떤 상황 속에 빠지던지 간에 내 팔자가 왜 이렇나 하고 다리 쭉 뻗고 죽는다는 사람이 아닙니다. “정말로 하나님 이래서는 안돼요! 도와주세요. 주님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고 발악을 하니까 우유가 나중에 치즈로 바뀌는 그런 체험을 자주자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는 과정을 통해서 영적으로 터치(touch)가 오는 것입니다. 성령의 터치(touch)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이 감동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느낌이 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체험으로 나중에 승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이 생각이 달라지고 하나님이 내게도 응답하셨다고 하는 그런 큰소리를 치는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눈빛이 반짝반짝 하고 달라집니다. 우리에게 앞으로 그런 시대가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라도 무언가 하나 주는 목회가 살아남지, 요란하게 고상한 설교를 가지고 사람들의 머리만 잔뜩 만족시켜주는 그런 목회 가지고는 절대로 앞으로 목회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벌써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목회를 위해서도 어찌 주님 앞에 성령 달라고 안하겠느냐 그말입니다.

 

일본교회의 성령의 역사

그러나, 성령의 충만은 어떤 한 가지의 틀을 통해서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충만, 성령 달라고 기도해서 그 성령의 은혜를 받는 형태만큼 다양한 것이 없습니다. 저하고 여러분하고 다릅니다. 여러분끼리도 다를 수 있습니다. ‘무까이 세이코’라고 하는 일본 목사님 사모님이 계세요. 그는 일본에서 개척을 했습니다. 여러분, 일본 교회 목회가 얼마나 어려운가 제가 한 10여 년 동안 일본 목사님들하고 교제를 나누며 일본을 들락거리고, 또 일본 목사님들이 우리교회 세미나에 와서 한주간 훈련받고 돌아가고, 또 돌아간 그분들이 매년마다 모이는 컨벤션에 여섯 번 일곱 번 참석하다 보니까 일본 목회와 일본 목회자들을 조금씩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그들에 대한 연민의 정이 많습니다. 무까이 세이코 사모님이 개척한 지 6년이 되었습니다. 일본은 부부가 같이 사역을 하는 것이 통례입니다. 그래서, 부인이 목사가 된 사람도 많습니다. 개척 6년이 되었지만, 교회가 조금씩 성장을 했습니다만 나중에는 너무 지쳐가지고 편지에 이렇게 썼어요. 제게 보낸 편지입니다.

“괴로움에 지쳐 최근 몇 년 간은 낙담 중에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 세미나가 한국 사랑의교회에 있다고 해서 어려운 중에 돈을 준비하고 참석을 결심하고 이 세미나에 오면서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만일 이번에 빛이 보이지 아니하면 목회를 포기하리라. 그렇게 마음 먹었습니다. 목사님, 사랑의교회에서 뜨거운 마음이 되어 돌아온 다음날 아침 저는 꿈 속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눈을 떴습니다. 아,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에 내 마음은 뜨거웠고 눈물을 흘리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사람들이 들어도 듣지 않아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나는 목회를 하는 것이다. 하지 않는다, 목회를 그만둔다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한국에서 돌아오고 첫주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첫주일에 예배를 드리는데 사모가 사회를 보고 남편이 설교를 했습니다. 그 사모가 남편을 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충만해진 남편, 변해버린 남편을 보게 되었어요. 부부가 같이 세미나에 참석했거든요. 예배가 끝난 다음에 뜨거운 기도가 이어졌고 마음이 굳어졌던 형제들이 마이크 앞에 나와서 눈물을 흘리며 영적인 해방감을 고백하는 감격을 맛보았습니다. 월요일 아침이 되었습니다. 목사님, 저의 내면에 기쁨이 넘치고 있었고 지금까지 불평하던 것들이 기쁨으로 변하고 있었습니다. 제 속에는 큰 해방감과 자유가 있어서 무엇을 해도 하나님은 사랑이니까 하는 이유를 붙이기만 하면 문제가 문제로 보이지 않게 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내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 흐르는 것과도 같았습니다. 마치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리는 것과도 같았습니다. 그날따라 창가학회에 빠져있는 부모의 반대로 교회를 나오지 못하고 있는 초등학교 2학년 여자아이가 생각이 나서 전 같으면 귀찮아서 꿈도 꾸지 못할 사랑의 편지를 써서 그 부모님한테 문전박대를 각오하고 찾아갔습니다. 놀랍게도 부모는 저의 이야기를 듣더니 딸애에게 교회에 나가도 좋다는 허락을 해주었습니다. 할렐루야!”

이러면서 감격의 편지를 썼는데 제가 그걸 읽으면서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방법은 참 다양하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세미나를 인도하던 저는 전혀 모르는 사이에 그 부인에게 하나님의 영이 그토록 넘치도록 역사하셔서, 가슴에 샘솟는 그 은혜가 며칠이 가도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질 정도로 강하게 역사하신 그 은혜, 바로 이것이 성령의 충만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번 수련회도 얼마든지 개인개인마다 이와같은 은혜는 임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마음을 여세요. 마음을 비우세요. 간청하세요. 하나님이 주십니다. 저도 받아야 되고 여러분도 받아야 합니다.

 

펜사콜라의 부흥

이렇게 조용하게 남도 모르는 틈바구니 속에서 이렇게 엄청난 하나님의 충만함을 체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세상을 완전히 뒤집어놓는 역사도 요즘 가끔 있지 않습니까? 플로리다 펜사콜라 이야기를 여러분들도 들으셨을 거예요. 저는 거기에 다녀오신 목사님을 통해서 여러가지 자료를 얻었습니다. 그 교회는 60년된 교회입니다. 150명 내지 200명 모이는 미국의 전형적인 전통교회요, 어떤 면에서는 힘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1995년 6월 18일에 미국에 아버지 주일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 주일에 강사를 모시고 왔습니다. 그리고, 특별집회를 했는데 그 강사가 인도하는 특별집회 시간에 성령이 초자연적인 힘으로 임하셨다고 합니다. 한시간 반 예정이던 예배가 네시간이 지나도 그칠 줄 모를 정도로 이어졌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 강사는 그 교회 부목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함께 동역하는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는 4명의 목사가 일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담임목사요, 하나는 원로목사요, 하나는 부목사요, 하나는 음악목사입니다. 그 후로 만 2년이 넘도록 그 교회에서는 주중에 화수목금 나흘 동안 연속집회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화요집회는 이미 그 교회 교인들과 예수 믿고 돌아온 8천여 명이 모여가지고 저녁 7시부터 10시까지 다음날부터 이어지는 집회를 위해서 중보기도 모임을 하는 것입니다. 그 시간은 모두가 모여서 찬송도 안 부르고, 성경봉독도 없고, 설교도 없답니다. 깃발 열두개 밑에 각 깃발마다 기도제목을 다 썼는데 자기가 기도하고 싶은 제목을 따라 그 깃발 밑에 가서 전부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화요일 저녁에 기도로 중보하고, 수요일부터 집회가 시작되는데 밤 6시부터 시작해서 새벽 1시까지 집회가 이어진다고 합니다. 이 저녁 6시에 시작하는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아침 6시부터 와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어요. 초창기에는 새벽 4시부터 와서 줄을 서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장소가 그렇게 크지 못하니까 더 그렇지요. 그런데, 그 집회의 특징은 회심입니다. 요란하게 은사 때문에 허허 떠들고 웃고 하는 그런게 아니고 그야말로 죄인들이 돌아와 통회자복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새사람으로 태어나는 회심의 역사, 회개의 역사 이것이 주를 이룬다고 합니다. 매일 저녁마다 4백명 내지 5백명이 결신을 하는데 지금까지 2년 동안 10만 8천 여 명이 회개하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 도시 인구는 10만 명 내외입니다. 지금까지 연 예배 참석자는 17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경찰이 마약중독자나 범죄자를 잡으면 이렇게 묻는대요. “너, 감옥 갈래? 펜사콜라 교회 갈래?” 그러고 펜사콜라 교회를 간다면 펜사콜라 교회를 보낸대요. 그러면 틀림없이 그 사람은 회개하고 새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에 임하실 성령

제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약간 오기가 났습니다. 미국에 있는 교회는 새벽기도 없는 거 잘 알지 않습니까? 우리처럼 요란을 떨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무엇이 잘 났기에 그 교회는 그와같은 은혜를 주시느냐 그말입니다. 그와같은 성령의 역사를 그 교회는 그토록 부어주시고 365일 새벽기도 하는 한국교회는 왜 이렇게 냉랭하게 내버려 두시는가 그말입니다. 우리에게 뭔가 잘못이 있지 않을까? 구하는 태도에 뭔가 잘못이 있지 않을까? 받은 은혜를 쏟아부어 버리는 잘못된 부분이 있지 않을까? 뭔가 위선이 있는 것이 아닐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 한국교회는 무엇이 문제이길래 하나님은 이 놀라운 성령의 충만을 어떤 지역에는 그처럼 풍성한 은혜를 주시는데 오늘 한국교회는 왜 안주실까? 하는 마음에 탄식이 우러나오는 것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극성맞게 해도 뭔가 잘못된 기도를 하고 있지 않은가 저는 그렇게도 생각을 해봅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순종 안하면 그 기도는 허공을 치는 기도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오늘 한국교회가 기도하는 것만큼 순종하고 있다면 분명히 하나님이 이 좋은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펜사콜라에게만 부어주실 것이 아니라, 오늘 가장 문제가 많고 가장 민족적인 서러움과 한을 많이 가지고 있는 이 나라, 이 교회에 분명히 부어주실 것이 틀림이 없는데, 왜 그렇게 새벽마다 요란하게 기도해도 왜 밤새도록 기도하는 사람 많아도 왜 하나님은 그와같은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시지 않는가 우리 이거 반성해야 됩니다. 우리 지도자들이 반성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요하신데 자녀된 우리가 가난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능치 못할 것이 없는데 자녀된 우리가 무능하고 무력해서 세상 사람 발 밑에 짓밟혀서도 안됩니다. 다른 것 다 옆으로 제쳐놓고 성령을 구합시다! 성령을 주옵소서!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옵소서! 성령이여, 오늘 이 시간 임하시옵소서! 오늘 모인 곳을 진동하시고 우리의 심령을 깨뜨리시고 주여, 임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에게도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었던 일을 성령께서 해치우시어 그와같은 역사가 우리 한국교회에 일어나야 합니다. 분명히 하나님 주실 줄 믿습니다. 왜나햐면 하나님이 가장 주시기를 기뻐하시고 기다리는 선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로 구하고, 열심히 구하고, 힘을 다하여 구하면 우리 주님 분명히 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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