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08/27) 교갱협 제1차 영성수련회 주제강연

고린도후서 10장 4~5절

교회갱신을 이야기할 때 신학을 생각한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있는 일이다. 교회갱신을 이야기하면서 신학적인 기초를 다지지 않는다면 방향을 잘못 설정할 수도 있고 잘못 갈 수도 있다. 신학을 생각한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또 교회갱신을 하기 위해서는 신학이 바로 되어야 하고 신학의 자기반성이 필요다. 특별히 지금 21세기를 앞에두고 우리가 20세기의 신앙과 신학의 유산을 정리해서 21세기의 우리의 후손들에게 넘겨주어야 할 시점에 있다. 이런 시점에 교회갱신을 위한 신학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대단히 의미있는 일이다.

신학을 이야기할 때는 상황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데 지금 상황은 급변하고 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변하고 있다. 용산전자상가에 가보면 몇달 만에 한번씩 깜짝깜짝 놀랄만한 제품들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빨리 급변하고 있는 이 상황 속에서 신학이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겠는지는 참으로 의미있는 일이다. 그러나 제가 부탁을 받고 나서 이 강의를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교단신학의 정체성을 진단하고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데 이 진단을 하는데 있어서 여러 각도에서 관찰을 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한국교회의 신학적 관심사 면에서 본 교단신학

- 신학교의 커리큘럼의 분석

현재 한국교회 신학의 관심사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 이론의 일번지를 찾아가면 된다. 그 이론의 일 번지가 신학교이므로 신학교의 커리큘럼을 보면 무얼 가르치고 있고 어디로 가는지 대충은 파악하게 된다.

총신 : 구약/ 신약/ 교의/ 역사/ 실천/ 선교
장신 : 구약/ 신약/ 역사/ 조직/ 기독교와 문화/ 실천/ 선교
한신 : 구약/ 신약/ 조직/ 역사/ 기독교윤리/ 실천/ 기독교교육
감신 : 구약/ 신약/ 조직/ 역사/ 실천/ 윤리와 사회/ 기독교교육/ 성서언어
서신 : 성서신학/ 조직신학 및 종교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 및 기독교교육학/ 선교신학
침신 : 구약/ 신약/ 조직/ 종교철학/ 기독교윤리/ 역사/ 실천/ 기독교교육

분석 : 성경/ 조직/ 역사/ 실천의 틀을 가진다. 조직신학의 경우 관심에 따라 총신대의 경우 기독교윤리와 철학을 조직신학에 포괄하기도 하고 실천신학과 선교신학이 따로 한 분야로 나와있다. 장신대은 기독교와 문화라는 분야가 들어있다. 학생들은 간혹 어째서 우리 합동측 교회에는 통합측 교단처럼 큰 교회가 많지 않은가? 어째서 한국의 최대 교단이면서 한국 사회에서 발언권이 강하지 못한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이러한 질문과 연관해서 커리큘럼의 특징을 분석해 보면 의미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한신대를 분석해 보면 선교신학이 한 분야로 따로 나와있지 않고 기독교 윤리분야가 따로 들어가 있다. 이것도 역시 그 교단의 신학과 연관해서 의미가 있다. 최근의 학도들 가운데 윤리와 연관된 연구를 많이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감신은 윤리와 사회, 기독교교육이 따로 들어가있다. 서울신대는 선교신학도 따로 있으면서 특징이 조직신학 및 종교철학으로 되어 철학이 들어가 있음을 볼 수 있으며 실천신학 및 기독교교육학으로 나와있다. 침신의 특징은 종교철학, 기독교 윤리, 기독교교육이 들어가 있다. 어느 분야를 개설하느냐하는 문제가 관심의 방향을 인도하므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총신의 경우에 기독교와 문화, 기독교윤리, 종교철학, 기독교교육 등이 한 분야로 들어있지 않다는 것이 특징으로 발견된다.

- 커리큘럼이 지향해야 할 방향

위의 분석을 보면서 우리의 방향을 생각할 때 신학교육과 교회와의 괴리현상이 지적되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많은 목회자와 신학교 졸업생들이 목회와 신학의 괴리를 이야기한다. 그래서 방향을 설정할 때는 신학이 한국 교회를 위한 신학이 되어야 한다.

방향 : (1) 신학대학원의 커리큘럼인 한국교회의 관심과 요구에 맞추어져야 한다 : 신학을 위한 신학(상아탑, 학문적인 호기심 충족, 관념과 사변)이 아니라, 교회를 위한 신학 (삶의 신학)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당장 써 먹을 수 있는 자료공급의 차원이 아니라, 교회의 필요성에 맞는 교육을 목회자들이 할 수 있도록 능력 계발하는 차원으로 심도 있는 학문성이 동시에 갖추어져야 하는 것이다. 교회의 관심과 요구에 맞추지만 그 관심과 요구를 자기나름대로의 능력을 가지고 분석을 하고 거기에 대해서 대응해 나가면서 교인들을 키워나갈 수 있는 능력을 계발할 수 있는 신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2) 교회를 위한 신학의 의미: 성경적 시각으로 정립된 신학에 근거한 교회의 정체성(Identity)이 분명해야 한다. 교회의 정체성이 성경에 근거해야 하고 건전한 신학에 근거해야 한다. 세상에 함께 발을 딛고 살고 있으므로 세상과의 관계 면에서 세상 사람들로 복음으로 돌아오게 하는 복음화(Evangelization)가 잇어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복음화되지 않는 세상에 복음적 영향을 미쳐 변화시키는 사회변화 (Transformation)를 실현해야 한다. 이것을 약자로 IdET라고 표현할 수 있다. 정체성과 복음화와 사회변화가 함께 맞추어져야 한다.

(3) 정체성에만 매달릴 경우는 정통보수는 할 수 있으나 그것이 죽은 보수가 될 가능성이 많다. 신학과 교회/사회와의 괴리, 사회와 문화의 정황 무관심이 증대된다. 설교가 정체성에만 맞추어지면 청자는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So what)?'라는 질문을 던진다. 반대로 상황에만 매달릴 경우는 정체성 약화 내지 상실된다. 알맹이 빠진 신학이 되고 만다. 복음화의 능력과 사회변화의 능력을 상실한다. 미국의 교회는 사회에 대한 관심을 가지면서 침체되었다고 타임지가 지적했는데 그것은 복음의 핵심이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맛 잃은 소금, 광채 잃은 빛이 되고, 자칫 혼합주의 종교다원주의가 될 가능성이 많다. 기독교라는 이름이 필요없는 정치신학이 될 우려가 있다. 보수신학이 T(변화)가 약하고, 상황에만 매달리면 IdE(정체성과 복음화)가 약하다.

(4) 위의 커리큘럼을 보면 총신은 정체성은 강한데 상황은 약하다. 감신과 한신의 경우는 상황은 강한데 정체성이 약하다.

- 한국교회의 신학적인 이슈

한국교회의 교인들이 관심을 가지고 던지는 질문들은 창조와 진화, 율법과 복음, 유아진멸 (여리고성), 저주시, 구약예언의 해석, 산상보훈의 적용, 메시야의 정체, 하나님 나라의 성격, 신국과, 교회와 국가, 축복관, 성령세례, 방언, 예언, 신유, 성령은사와 악령 및 심리 작용의 구분법, 천년왕국, 666, 기독교 공동체의 성격, 제자훈련, 영성, 그리스도의 유일성, 기독교와 타종교의 관계, 기독교 지도력, 기독교와 전통문화, 기독교인의 제사관, 낙태문제, 안락사, 성직자의 납세, 예배관, 성경관, 삼위일체관, 타락 이후의 하나님의 형상 (불신자의 경우), 하나님의 뜻 파악방법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참된 교회의 표지, 교회와 파라쳐치, 공산주의에 대한 기독교적 시각, 일치와 연합, 이단의 정의, 공부와 신앙생활, 가정, 직업, 죽음 이후의 문제, 교회와 지역사회, 기독교적 통일관, 통일 이후 북한교회의 재건, 지방색, 기독교 지도자의 생활윤리, 주일문제, 신학교의 난립과 미래교회의 지도자, 신학교 커리큘럼, 교세확장과 교회 간의 갈등, 기독교 사회윤리 등의 문제들이다. 매우 현실적인 질문들이다.

신학적인 이슈와 교단신학

- 구체적인 제의

(1) 교회가 이런 현실적인 문제 혹은 기타 문제를 신학교와 신학자에게 맡겨 연구 출판하게 하여 한국교계의 문제 정리해야 한다.

(2) 신학교 커리큘럼에 교회의 관심사 반영해야 한다. 교단신학에 잇어서 교단과 신학이 분리되면 21세기의 생존을 약속할 수 없다. 신학자의 교회에 대한 기여와 목회자의 신학교에 대한 기여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3) 신학교수의 신학의 정통성에 대한 관심도 중요하지만, 신학자의 신학적 지식과 경륜을 활용하고 연구를 지원 자극하는 방향으로 활성화 되어야 한다.

(4) 신학[교]과 교회의 연결 작업: 신학과 교회가 분리되면 현재 교회의 신앙의 정통성과 심오성이 미래에 보장되지 않는다. 교단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신학교에 던져주고 교수들로 하여금 그것을 연구하고 집필할 수 있는 지원을 해주고 지원교회의 이름으로 발표하여 우리 앞에 있는 난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교회의 목회자들이 주제를 정하고 담당교수를 정해서 신학교에 지원하여 출판하도록 해야한다. 신학자의 경험이 교회에 유익을 주고, 목회자의 경험이 신학교안에 과감하게 들어와야 한다. 목회자들이 실제로 목회하는 것을 신학교에서 많이 배울 수 있도록 해야한다. 이것이 분리되면 교단과 신학 모두가 살아남을 수 없다.

앞에서 현재 한국의 신학적 관심사를 살펴보았다. 이제 한국 교회 정통신학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성경주석가 박윤선 박사와 교의신학자 박형룡 박사의 신학을 고찰하면서 거기에 비추어 우리의 신학을 점검해 보고자 한다. 박윤선 박사는 신구약 주석 총 11,602면(1934-1988)을 저술했는데 이것은 매년 240면 씩을 저술 한 셈이다. 그리고 영생의 원천, 응답되는 기도, 주님을 따르자, 성경신학, 헌법주석,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해석 및 270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교단신학을 점검하기에 앞서서 우리는 박윤선 목사님의 주님에 대한 충정에 주목해야 한다. 사실 오늘날 그와같이 기도하며 연구하는 신학자를 쉽게 찾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박윤선의 성경관

박윤선 박사는 정경, 사본비평등 다양한 분야에 대해 폭넓은 관심을 가지고 성경 연구에 몰두했으며 성경의 절대권위에 대한 강한 신념이 그의 혈관에 피처럼 흘렀다. 그는 예수님의 성경관, 사도들의 성경관, 개혁교회 성경관을 매우 강조했으며 바르트의 성경관을 가차없이 비판하고 리델보스의 성경관(축자영감 부인, 성경은 완전하지도 영원하지도 않다는 견해)도 비판하였다.

<평가> 포괄적인 것에 관심을 가질 것과 성경의 절대권위, 예수님과 사도들의 성경관 및 개혁주의 성경관을 강조하고 그릇된 성경관을 비판한 것은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칼빈의 성경관을 전체적으로 발굴하지 않고 워필드의 성경관에 지나치게 치중함으로써 성령의 역동성이 약화된 면이 있다. 즉 워필드는 현대주의의 도전에 직면하여 논리와 변증위주의 성경관을 세우는 일에 집중하였으므로 성령을 강조하기보다는 치밀한 논리 위주의 성경관에 치우쳤던 것이다. 따라서 이 영향을 받은 박 박사는 성경의 생명성과 생활실천성을 평소 설교와 강의에서는 강조하였으나 이를 학문화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칼빈은 성경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성령을 강조하는 성경과 성령의 두 기둥을 그의 신학 속에서 세웠다. 그래서 성령의 역동성이 강조된 것이다.

- 박윤선의 성경해석사관

그는 전통적인 해석사관을 그대로 단순화하여 요약하였다.

- 박윤선의 성경해석 원리

개혁주의적인 성경해석 원리를 이야기 하면서 문법적, 역사적, 심리적, 학문적, 영적, 해석자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그의 특징은 계시의존사색(자율주의경계)에 있다.

(1) 그의 공헌은 성경관과 걸맞는 성경해석을 했으며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경건한 학문을 위해 성령에 다이알이 맞추어지고 경건한 생활을 하는 해석자의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한국교회를 위한 성경주석을 이루어낸 그는 한국교회를 성경의 기초 위에 세워 놓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2) 여기서 우리 후학의 과제는 해석원리를 보다 심도있게 하고, 역사비평에 대해 평가하며, 학문의 도구를 충분하게 사용하여 성경의 지평과 해석자의 지평을 융합하고, 성경이 하나님의 창조적 숨결의 책이라는 것을 학문적으로 정립해야 하는 것이며, 각권 주석을 보다 심도있게 집필해야 한다는 것이다.

- 박윤선 성경신학 평가

그는 계시의존사색을 지속함으로 한국 교회를 성경의 기초위에 올려놓는 작업을 하였다. 특별히 이 작업을 함에 있어서 그에게는 주님을 사랑하는 정신이 있었으며 우리의 정체성을 논할 때 이것은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 그리스도인의 깨달음을 주체적으로 학문화하지 못함으로 번역신학과 요약신학을 탈피하는데 부족하였다. 이것을 IdET모델로 설명하자면 IdE(정체성과 복음화)는 강하나 T(사회변화)는 약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설교에서는 T를 많이 강조했으나 학문적으로 정립하지는 못했다.

박형룡 신학 면에서 본 교단신학

그는 교의신학 7권, 현대신학 선평 상하권, 비교종교학, 변증학, 험증학, 주석, 학위논문, 세계견문록 등 총 7600페이지의 집필을 하였다. 그도 역시 충성스런 주님의 선비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 박형룡의 교의신학과 설교에서의 성경 사용방법

(1) 그는 교의신학에서 주로 증거본문 제시(prooftexting)의 방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성경은 단순한 교리교범이 아니라, 드라마틱하고 흥미로 가득찬 역사적인 삶의 현장에서 주어진 책인데 그의 방법으로는 그 숨결을 살리는데 약점이 있다.

(2) 성경인용에 있어서 문맥을 잘 드러내지 못하는 약점이 있었다. 예를 들면 "추수할 일군"(마9:35-38)을 다룰 때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신 예수님의 심정과 제자파송과는 관계없이, 첫째 대지로 일군이 부족하나 하나님이 보내신다. 둘째로 하나님이 보내시나 일군이 가까이 있다. 셋째로 하나님이 보내시고 사람이 보내시는 것이 아니다 라고 설교를 함으로써 문맥이 잘 드러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 성경해석 테두리로서의 박형룡의 교의신학

(1) 교리(교의신학의 정통교리들)를 잘 정리하고 변호(자유주의 신학, 리출/슐라이엘마허 신학, 신정통신학, 비신화화 신학, 존재의 신학, 신자유의신학, 비교종교 신학, 종교심리 신학, 사회적 복음 신학, 에큐메니칼 운동신학, 신복음주의 신학, 고등비평, 진화론, 막스주의 종교론, 유한신론, 신비주의, 무교회주의 등을 비판함)하셨다. 정통교리가 아닌 것을 비판하면서 정통교리를 바로 세웠던 것이다. 이것은 그의 훌륭한 공헌이다. 그것은 값진 "꽃다발"이었던 것이다. 성경관 혼란, 익명의 그리스도, 영혼 멸절설등 신학이 혼란한 이 시대에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정통신학의 "꽃다발"을 선물하였다.

(2) 그러나 그의 약점도 역시 삶의 변혁 차원의 아쉬움이었다. 선교사들이 전해준 서양의 정통신학을 한국적 삶의 차원에서 재검토, 재평가하는 작업을 하지 못한 것이다. 보수정통을 사수하려는 의지는 계속 강조되어야 할 것이지만, 사회변화를 위한 신학적 시도를 과격하게 정죄한 -당시 상황에서 이해는 되지만- 것이 문제이다. 그는 "비록 사람과의 화목은 하나님과의 화목이 아니며 정치적 해방이 구원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는 오히려 전도와 사회정치적 연루가 아울러 그리스도인 의무의 부분임을 긍정한다"는 로잔언약의 문구에 대해서도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여 신복음주의의 사회복음주의적 경향을 뚜렷이 나타냈다."고 논평하였다. 칼 헨리가 신근본주의의 신학적 역사적 전망의 결여와 문화나 사회와의 관련결여 등을 비판하자 "근본주의에 대한 가혹한 비평은 비평자의 정통성을 의문케 한다"고 비판하였다. <크리스챠니티 투데이>, 칼 헨리, 로잔 언약, 한국복음주의 연맹, 빌리 그래함 등을 비판하면서 "성경적인 정통신앙을 지키기에 천신만고를 무릅써온 한국 보수주의 교회들은 결코 이 '신자유주의'에게 자리를 내어줄 수 없다"고 결론내린 것을 오늘날 계속 고수할 때 많은 문제가 제기될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3) 간하배 교수는 해방 후 한국장로교회 보수주의 신학의 위험성을 지적하였다. 그것은 자유주의에 대한 반동에만 몰두하여 소극적으로 흐를 위험, 기독교의 모든 진리를 고찰하기 보다는 몇 개(성경무오나 기타 교리 몇 개)에만 관심을 집중하여 하나님의 총체적인 주권을 등한시 할 위험, 신앙과 생활(경제, 사회, 과학문제등)의 분리 위험, 그리고 대체로 반지식적인 분위기의 위험 등을 지적하였다. 이것은 물론 박형룡 박사에게 그대로 적용될 비판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 박형룡의 성경무오 사상

그는 성경무오사상으로 성경영감과 무오를 강조했고 김재준의 고등비평(모세저작권부인) 성경관을 비평했으며, 성경해석에 틀을 제공하는 공헌을 했다.

- 박형룡의 성경해석관

1934년 한국 개신교 선교 희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성경 전권주석을 내기로 했는데 박형룡 박사가 편집장이었다. 그의 <표준성경주석 창세기>에 나타난 편집방침은 1)학구적 주석 2)비판적 방법의 취사선택(관계 제설의 취사선택) 3)사상적 통일 (보수와 진보의 사상혼합이 아니라 신학사상의 통일) 4)실용적 주석 (성경 본문에 옳게 발굴된 진리의 교회 대중적 적용) 5)정통 신학사상에 근거한 주석 등이다. 그러나 실제 주석에는 그것이 잘 반영되지 못하였다.

- 박형룡의 성경주석

그의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전도서 주석 등에는 사본과 역본에 대한 관심과 문법/역사적/신학적 해석의 시도가 드러나 있으나 문맥적 관찰의 결여가 나타나며 running commentary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 박형룡 신학 평가

그가 박윤선 박사와 마찬가지로 '높은 성경관'을 제시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끝까지 사수해야 할 것이다. 그는 정통신학의 토대와 틀을 제공하고 변호하였다. 그러나 사회벼화에 대한 관심과 신학정립이 결여되어 IdET에서 Id는 강했으나, ET가 약했다. 그것은 신학작업에 있어 부정적/ 소극적인 태도여서 한국 현실에 맞는 신학 발전에 대한 우려를 낳았다. 정통신학은 상황에 대한 대응을 하면서 건설해야 한다. 우리는 정통을 지키되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한다.

21세기 전망 면에서 본 교단신학

앞에서 교단신학을 현재적인 관심사(I)와 그 뿌리(II-III) 면에서 살펴보았는데, 이제는 21세기의 전망 속에서 관찰하고자 한다. 그러면 왜 이런 관찰이 필요한 것인가? 미국에서 앞서가는 43개 회사의 경영을 분석, 연구한 <탁월성의 추구>가 베스트 셀러가 된지 2년 만에 그 중 14개의 기업체가 경제적인 난관에 빠졌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변화에 대한 대응과 적응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어제의 성공이 내일의 생존의 보장이 아니다. 신학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므로 21세기를 내다보는 지금, 우리의 신학의 정체성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

- 21세기 사회의 분석

(1) 정보와 기술이 첨단화된다. 제1의 물결이라고 하는 농업과 제2의 물결인 제조업을 하면서도 컴퓨터(제3의 물결)를 이용한 정보관리가 이루어진다. 우리는 어떤 단계에서 목회를 하는가?  21세기의 사회는 정보를 가진자가 주도한다.

(2) 인간관계(개인, 가정, 공동체)가 파괴된다. 교회도 개인적 지도(personal geography)에 의해 움직이게된다. 모든 것이 사용하는 사람들의 세계로 분화되어 개인화되고 있다.

(3) 인간의 생활환경의 파괴는 모두가 목격하고 있다.

(4) 인간의 핵심인 영성의 대혼란이 온다.

교회도 역시 외딴섬이 아니므로 이러한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를 통해 21세기 교회의 변화를 예측해 볼 수 있다.

- 21세기 교회의 분석

(1) 교회 전체가 지구촌 교회 의식을 가진다. 전세계에 대한 관심과 동시에 중국에 대한 관심이 증대될 것이다. 중국이 변화되면 세계가 변화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며 중국 복음화의 가능성을 높게 보는 시각이 있다.

(2) 생동적인 성령 운동과 역사에 의한 부흥이 없이는 교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

(3) 제도적 전통에서 공동체 신학으로 넘어간다. 성직자/평신도 구분에서 사역공동체로, 남성지도에서 남녀 동반자로, 피라미드 형태의 구조가 붕괴된다. 평신도와의 사역공동체 구조가 수립되지 않으면 안된다.

(4) 현대주의 시대의 세속화 문제가 후 현대주의 시대의 종교상대주의로 변화된다. 18세기부터 일어난 합리주의는 이성으로 모든 것을 비판하여 종교, 영성의 필요를 부인하였으나 이제는 합리주의 이후 후현대주의로 흘러서 종교와 정신의 영역이 강조되어 다양한 종교가 일어남으로서 종교상대주의의 시대가 될 수 있다.

(5) 가정과 국가의 형태가 달라진다. 동성애자들의 가족, 범죄자들만의 가족 등 다양한 가족의 형태가 생겨나고, 국가와 교회의 분리가 정치행동주의로 나타날 것이다. 복음주의도 능동적인 정치적 참여로 나타날 것이다.

- 21세기 신학교육의 전망

(1) 정통신학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 일어난다. 총신과 같이 정통신학을 사수하려는 신학교들이 적어질 것이다. 하비 콕스 박사는 내한 강연에서 과거의 억압되었던 영성운동이 제기된다고 지적하였는데 그 증거로 종교다원주의, 여성의 참여, 오순절주의, 지구촌의 단일시장화 속에서 기독교공동체의 그 탐심윤리에 대한 대처, 그리고 환경윤리 등을 이야기하였다. 이것은 21세기의 정통신학에 대한 신학적 도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2) 21세기는 체험주의 및 신비주의의 도전이 있을 것이다. 신학면에서 체험신학이 강조될 것이다.

(3) 교단신학이 약화될 가능성이 높다.(예: 여성목사 안수 반대, 교단의식) 평신도들에게 교단 구분의 개념이 약화되었다. 21세기에는 복음주의와 비복음주의라는 커다란 2개의 집단이 나타날 것이다. 현재는 복음주의와 비복음주의가 겹치는 부분이 많은데 특히 사회참여부분에서 두드러진다. 우리 교단이 고수하고 있는 여성안수 반대의 입장도 큰 도전에 부딪힐 것이다. 우리는 여성의 존엄성과 역할을 존중하되 성경이 말하고 있는 역할의 차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세계적인 흐름은 우리 교단의 판단과 역행하고 있기에 많은 어려움이 예상된다.

(4) 전통적인 신학교육(지식전달)에 대한 도전이 있을 것이다. 지식만을 전달하는 전통적인 교육은 21세기에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단순한 지식의 전달은 컴퓨터가 대신할 수 있다. 인터넷을 통해 강의보다 훌륭한 정보를 언제든지 얻을 수 있다. 앞으로의 신학교육은 인간과 인간의 부딪침, 가치관 그리고 목회적 현실이 강조되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5) 21세기의 신학에서는 지도력(Leadership), 상담과 치유에 대한 관심이 매우 증대될 것이다.

- 21세기와 교단신학의 방향

(1) 정통신학의 변화와 발전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2) 정통신학의 생활화 및 생동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삶에 적용되고 설교의 영성이 살아나야 한다.
(3) 거시적(과거/현재/미래를 내다보는) 신학을 해야한다.
(4) 지구촌 신학을 해야한다. 정보매체와 국제적인 활동을 통한 정체성의 국제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총신대학교의 4대 발전방향이 정체성, 국제화, 정보화, 교학협동이다. 우리의 정통신학을 세계에 내보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정보화가 따라가야 한다.
(5) 하이테크/하이터치 목회를 위한 신학을 해야한다. 인간성을 다시 회복시켜주는 신학을 해야 한다.
(6) 미래적 전망을 가진 IdET의 신학을 정립해야 한다.

사각지대(blind spots) 면에서 본 교단신학

이상에서 현재 한국교회의 신학적인 관심사(I), 교단신학의 뿌리(II-III), 미래적 전망(IV)을 살펴보았다. 지금부터는 그 동안 교단신학이 등한시한 부분을 살핌으로써 교단신학의 방향을 잡아보고자 한다.

- 성경신학의 사각지대

성경의 영감과 무오는 바로 보나 성경의 생동성(생명)과 생활성의 학문작업은 등한시하고 있다. 성경비판에는 치중하면서 거기서 개발된 학문적 도구를 사용하는데는 약하다. 또한 반대로 성경의 학문적 연구라는 명목으로 성경무오를 등한시할 가능성도 엿보인다.

- 역사신학의 사각지대

민중사관에 대한 응전을 등한시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교회/사회의 현재와 미래(통일)에 대한 역사신학적인 평가를 등한시하고 있다.

- 실천/선교신학의 사각지대

제자훈련, 영성훈련, 지도자론, 치유목회 등 일반 목회자들에게 호소력을 지닌 분야에 대한 관심과 학문적 상호작용이 등한시되고 있다. 자칫하면 신학과 목회가 별개로 분리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이 통합되고 상호작용하도록 정리되어야 한다. 감신과 한신 및 WCC 측의 선교관(觀)에 대한 대응작업도 미흡하다. 성경대로 믿는 신앙이 반지성적 태도나 사회적 문화적 무관심으로 오해되지 않도록 분명히 밝혀주는 대응을 해나가야 한다.

- 조직신학의 사각지대

조직신학의 한국적 정립(한국인의 사고와 이해의 틀)을 등한시하고 있다. 서구적 관념과 분석을 그대로 한국 교회에 적용하면 현장의 평신도 신학교육이 이루어질 수 없다. 조직신학의 방법이 상호작용의 측면에서 정리되어야 한다. 또한 고착화된 신학의 틀로 인해서 신학의 역동성을 등한시 할 가능성이 있다. 예를들면 성령론에 있어서 성령세례는 중생과 일치하지만 신자의삶 가운데서 현실적으로 나타나고 성경에도 나타나는 역동적인 경험에 대한 신학적 설명이 필요하다. 중생 이후의 성령의 역사가 점진적 인격의 변화와 결정적 체험이 병행되는 것을 설명해주는 성령세례론이 나와야 교회에 적용될 수 있다. 성령에 의해서 움직이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신학이 나와야 한다. 이제까지의 조직신학은 한국교회의 신학적인 이슈들에 대한 신학작업을 등한시했다.

- 사각지대와 교단신학의 방향

왜 이런 사각지대가 나타나는가? 라는 질문을 제기하면서 신학작업의 의미를 재고해야 한다. 신학방법론에 있어서 새로운 사고의 틀이 필요하다. 정통신학이 죽은 신학이 되지 않도록 활력화와 적실화의 노력을 해야한다. 성경의 지평과 현대의 지평이 녹아서 하나되게 해야한다. 설교가 은하수 세계에 머무르지 말고 '땅으로 내려와야(Down to Earth)' 한다. 설교가 성도들의 삶에 적용되지 못할 때 'So What(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이라고 반문하게 된다. 특히 우리 교단의 강단현실이 이러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문제들을 해결함과 동시에 사각지대에 대한 관심이 정통신학의 정통성을 흔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면서 신학의 정(正)(IdE)에 대한 관심 못지 않는 삶의 폭(幅)(T)에 대한 관심과 병행되어야 한다.

결론

현재 한국교회의 신학적인 관심사를 살피고, 교단신학의 뿌리(박윤선, 박형룡)를 살핀 후, 이것을 미래적 전망과 현재적 사각지대 면에서 재조명해 보았다. 21세기 지구촌 정보화 시대를 내다보면서 교단신학이 정통성(Identity)을 계승 발전시키면서 지구촌의 복음화(Evangelization)와 총체적 삶의 변화(Transformation)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1) 교단신학이 본질 면에서는 성경적 정통을 절대사수하고 이것을 파괴하는 도전("다른 복음")에 대해서는 아나테마(anathema, 갈1:6~10)를 선언하되, (2) 비본질적 신학작업과 신학방법 면에서는 과감한 신축성에로의 의식전환(paradigm shift)을 해야 하고, (3) 과거, 현재, 미래 면에서 시간적 관심과 미래의 통일조국과 지구촌 면에서 공간적 관심의 폭을 넓혀야 할 것이다.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손에 있고 지구촌을 포함한 우주의 1평방 센티미터도 하나님의 주권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총포괄적인 하나님의 주권이 교단신학을 통해 정립되고 전파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세계 전체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하신대로 정통성의 입장에 서서 분석해주고, 평가해주고, 정리해주면서, 21세기를 주도할 수 있는 교단신학이 되기위해 교단과 신학이 분리될 수 없다. 교단은 구체적으로 신학을 지원해주고 신학은 교단을 지원해주면서 21세기 다원화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높이면서 우리의 교단을 통해서, 신학작업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온 천지에 널리 선포되는 귀한 역사가 일어나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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