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08/27) 교갱협 제2차 영성수련회 주제특강

요즘 사람들은 이제 지하자원도 다 개발했고 이 땅에서도 더 이상 개발할 것이 없다고 한다. 과학자들 중에는 심지어 Moratorium of Scientific Reserch, 즉 과학의 발견에 종말을 선언하자는 사람들도 있다. 개발할 것은 다 개발했고 발견할 것은 다 발견했는데, 새로운 것을 발견하려면 인류가 혜택을 받는데 비해 발견하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고 한다. 몇 년 전에 미국 텍사스 근방에서 큰 지하 원형터널을 만들었다. 이것은 원자핵을 파쇄하기 위한 것인데 핵을 분해해서 그 핵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알기 위한 장치였다. 유럽에서는 여러 나라가 공동으로 투자해서 파리 근방에 그와 같은 것을 만들었다. 이에 미국이 샘이 나서 더 큰 굴을 만드는 공사에 착수했던 것이다. 그런데, 공사를 하다보니 너무 돈이 많이 들었다. 그래서 미국 국회에서 반대를 했다. 지금 그 굴이 비어있는데, 이걸 어디에 쓸까 하다가 지금은 버섯을 키우는데 사용할 것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이것은 전형적인 예가 될 수 있다. 더 이상 개발할 것이 없다. 더 이상 개발할 것이라고는 인간의 두뇌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뇌 세포를 ‘뉴론’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일반세포와 다른 것은 더 이상 분열을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뉴론’이라고 한다. 우리는 태어날 때 엄청난 숫자의 ‘뉴론’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이 세상에서 그것을 가장 많이 쓴 사람이 40분의 일을 썼다고 한다. 보통사람은 백분의 일 정도를 쓰고 죽는다고 한다. 뉴론은 무진장으로 개발될 수 있다. 학생들이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머리가 터진다고 하는데 그것은 모두 거짓말이다. 지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인간의 능력은 무한이 개발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수련회를 통해 목사님들이 올라오실 때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능력이 개발된다면 성도들에게는 그만큼 더 이익이 될 것이다. 이 모임은 아주 귀한 모임이다. 여기에 오신 목사님들이 이 사회의 정신적인 지도자, 영적인 지도자가 되기를 바란다.

 

교회의 역할 - 구제, 전도

오늘 할 강의의 제목은 ‘현대사회 속에서 교회의 역할은 무엇인가?’이다. 성경에 보면 초대교회는 두가지 일을 크게 강조했다. 사도행전을 보면 나오는데, 하나는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요, 또 하나는 구제하는 일이었다. 사도행전 6장을 보면, 사도들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과 구제하는 것을 다 도맡아서 하다가 일이 너무 많아져서 집사를 세우자고 했고,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 전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고 구제하는 것을 집사에게 맡기자고 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장로 즉, 가르치는 장로와 치리하는 장로 그리고, 집사가 교회의 아주 중요한 직책으로 되어 있다. 오늘날의 교회도 이 두가지, ‘전도’와 ‘구제’를 같이 행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를 보면 말씀을 전하는 일을 세계 어느 교회보다도 잘하고 있다. 우리 경제는 세계에서 가장 빨리 발전했고, 그에 못지 않게 교회성장 또한 빨리 이루어졌다. 사실 한국교회 만큼 많이 노력하고 성장한 교회가 없다. 우리의 문화, 역사적인 상황이 이런 교회성장을 도운 것은 사실이다. 그것을 크게 두가지로 볼 수 있다.

 

한국 기독교의 특수성

먼저는, 우리 나라가 식민지 시대에 반 기독교 국가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은 기독교 국가의 식민지가 되었다. 기독교와 식민주의가 손을 잡고 아프리카 사람들 또는 동남아시아 사람들에게 압제를 가했다.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는 기독교가 압제자들의 종교라는 인상을 주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상하게도 비기독교 국가의 식민지가 되어 오히려 기독교가 식민지주의자들에 대항하여 싸우는 국면이 되었다. 이것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그 유례가 없는 일이다. 그래서 한국 국민들은 기독교가 우리를 압제하는 사람들의 종교가 아니라, 우리를 도와준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가 우리 사회에서 존경을 받는 중요한 역할을 했고, 또 우리나라의 선각자들이 기독교에 귀의하게 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승만, 김규식, 김구, 안창호 같은 사람들은 원래 기독교를 믿었기 때문에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을 하다가 보니까 기독교를 믿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시대에 독립운동을 할만한 사람이라면 의식수준이 굉장히 높은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이 교회에 왔다는 것은 교회의 전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가 지식인들의 종교, 지도자들의 종교라는 인상을 심었다. 지금도 한국교회를 보면 교육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부자이면 부자일수록, 사회적으로 높은 계층일수록 기독교 인구가 많다. 국회의원의 3분의 1이 기독교인이다. 국민전체의 5분의 1이 기독교인인데 비해 국회의원의 3분의 1이 기독교인이라는 것은 그만큼 사회지도계층의 기독교인구 비율이 높다는 것을 말한다.

본인도 시민운동을 하지만, 시민사회운동단체의 70~80%는 기독교 단체다.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초기에 한국의 시민운동을 대표하는 4명의 지도자를 청와대로 불렀다. 본인도 초대되어 갔었다. 점심이 되어 그 유명한 국수를 먹었다. 그런데 국수를 앞에두고 거기에 모인 사람 모두가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때, ‘아... 우리 모두 기독인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통령까지 포함해서 그 자리에 앉은 다섯사람 모두가 기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민운동을 할 때에는 의식을 안했는데, 거기 가서야 모인 사람이 모두 장로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한국 기독교는 이런면에서 성공을 한 것이다. 이것은 다른 나라와 다른 독특한 면이다. 선교학에서 보면 사회지도층이 복음화 되어야 사회가 복음화된다고 한다. 사회의 제일 아래층이 아무리 복음화 되어봤자 사회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예가 인도이다. 인도는 제일 높은 카스트에는 기독교인이 거의 없다. 불가촉천민층에만 기독교인이 모여있다. 그래서 사회에 영향력이 거의 없다. 토마스 사도가 인도에 가서 선교를 했다는 것으로 봐서 인도의 기독교 역사는 꽤 오래 되었는데도 아직 인도가 기독교의 영향을 못받고 있는 반면에, 역사가 비교적 짧은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사회의 중심부에 있다. 독특한 우리의 역사적 상황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탈산업화․도시화의 경향

둘째로는, 우리나라의 급격한 공업화, 도시화 현상이다. 전통적인 마을에서는 다른 종교를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다른 마을로 가면 전도가 쉬워진다. 그래서 선교는 주로 도시에서 이루어지며, 시골에서 교회를 세운다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시골사람들이 도시에 와서 그 수백년 동안 믿었던 종교를 벗어나야 새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60년대부터 갑작스럽게 일어난 공업화로 인해 인구이동이 엄청나게 이루어 졌다. 사람들이 모두 도시로, 공장이 있는 곳으로 모여들었는데 그 새로운 환경에서 외로움을 느꼈던 것이다. 그때 한국교회가 중요한 전략을 썼다고 생각한다. 의도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성경에 충실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인데, 바로 ‘성도의 교제’를 굉장히 강조했던 것이다. 그래서 성도의 가정에 결혼식이 있거나 초상이 나거나 하면, 가서 도우고 하던 일들이 얼마나 전도에 큰 도움이 되었는지 모른다. 옛날에는 옆집에서 하던 일을 교회가 다 한 것이다. 그것은 교회성장에 있어 대단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지금은 교회성장이 주춤해진 것이 사실이다. 왜 이런 교회성장이 주춤해 졌을까? 여러가지 다른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두가지를 들면, 그것은 바로 과거의 그 식민지적인 상황이 슬슬 없어지고 그 영향력 아래서 벗어났다는 것과 또하나는 도시화 현상이 많이 줄고, 사람들이 새로운 환경에 정착해서 안정을 얻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성장이 주춤해진 외적 요인가운데 주요한 요인이다.

 

복음전파의 사명

성장이 주춤해졌다고는 하나 한국교회는 초대교회 사도들의 역할, 즉 복음 전파의 역할을 열심히 했다고 생각한다. 목사님들과 여러분 선배들은 피눈물나는 노력을 했고, 세계 어느나라 목사님들보다도 열심히 일했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한다. 70년대 후반, 홍콩신학교에 가서 한 학기 강의를 했다. 하루는 홍콩에 있는 모든 신학생들이 모인 자리에서 저보고 강의를 하라고 해서 강의를 했고 질문을 받는 시간이었다. 한 학생이 한국교회 성장의 비결을 질문했다. 이것은 의례히 나오는 질문이다. 그래서 “한국의 목사님들이 열심히 믿어 그렇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믿으시느냐? 우리 목사님들은 하루에 4시간 5시간씩밖에 안주무십니다. 저녁에 늦게 집에가고 새벽에 일어나 새벽기도 하려면 4시간 5시간씩밖에 잘 수 없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어느 학생이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사람이 적어도 8시간을 자야 살지, 4시간 5시간 자면 생존이 불가능합니다.” 라고 했다. 그래서 저가 그때 영어로 “That is scientific superstition.”이라고 대답했다. “그것은 과학적인 미신입니다. 한국에 와 보십시오. 그런 목사님들이 건재하는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라고 했다. 우리 목사님들 참 수고를 많이 하셨다.

 

바울의 구제

그런데, 두번째 교회의 역할인 ‘구제’를 보자. 구제는 교회의 영원한 사명 가운데 하나인데, 초대교회가 그렇게 했다. 갈라디아서 2장을 보면 바울이 개종한 뒤에, 아라비아에 가서 기도하고 나서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그래서 교회의 기둥같은 게바와 요한과 야고보를 만나서 여러가지 전략을 이야기 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에게로, 게바와 요한과 야고보는 유대인에게로 선교의 영역을 정했고, 이렇게 정하고 난 뒤에 사도들이 바울에게 요구한 것이 있다.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를 생각할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갈2:10) 바울이 그때 그 부탁을 받고 나서 ‘아 나도 가난한 자를 생각해야지.’ 한 것이 아니고 ‘본래 힘써 행한다.’라고 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말에 상당히 충실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바울이 아가야와 마게도니아의 성도들에게 연보를 거두어서 예루살렘에 보냈다. 또 바울은 1,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우리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만 알았지 무엇 때문에 올라갔는지는 잘 모른다. 다른 곳에는 다 전도하러 갔지만 예루살렘은 바을이 맡은 지역이 아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은 바로 구제 때문에 그렇다. 아갸야 지역과 마게도니아 성도들이 연보한 것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그것은 로마서에도 나와있고 사도행전을 읽어도 나와있다. 물론 바울이 혼자 간 것이 아니라 그지역 대표들과 함께 갔다. 참 지혜로운 일이다. 사도가 돈을 다 가지고 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자칫하면 오해를 받을수 도 있고 하기 때문에 그 지역 지도자들과 같이 예루살렘에 간 것이다. 그런데 올라가려고 할 때 많은사람들이 가지 말라고 했다. 예언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가면 체포를 당한다고 했다. 그리고 죽을 수 있다고도 했다. 아가보는 무슨 끈을 내보이며 이렇게 결박당한다고 재스츄어까지 써가면서 말렸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목을 틀어안고 울면서 가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도 바울은 갔다. 무엇 때문에 갔는가? 구제하러 간 것이다. 바울은 그 구제를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 이라는 식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좀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목숨을 걸고 구제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구제

우리는 목숨을 걸고 전도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목숨을 걸고 구제하는 것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우리 교회는 구제를 전도를 하고 남은 여력이 있으면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구제를 강조하는 것은 불교도 이 세상 사람들도 하는 것이니까 기독교적인 것은 아니지 않느냐’ 라고 생각해서, 구제를 강조하는 사람을 이단이라고까지 한다. 어떤 목사님이 ‘손봉호는 이단이다. 구제를 강조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는 것을 들었다. 물론 다른 종교에서도 구제를 한다. 그러나 우리 성경도 구제를 강조한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구제를 단순히 우리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을 구제하는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 서로 떡을 나누고 성도들이 자기 재산을 다 팔아오면 사도들이 그것을 골고루 나누어 주고 하는 것은 교인들 사이의 구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나 구약성경의 가르침을 보면 그렇게 되어있지 않다. 구약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아와 과부와 객을 돌보라고 요구했다. 그 객이란 것이 누구인가? 이방인들이 아닌가.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 비유를 보면 유대인에게만 구제를 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 자신도 꼭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만 사랑을 베풀라고 하지 않으셨다. 구제란 것은 구제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방인에게도 구제를 해야한다. 예수님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셨고 또 이방인을 구제하셨다.

또 어떤 사람은 구제는 어디까지나 복음을 전파하는 수단으로만 사용해야 한다고 한다. 성경에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복음을 전파하는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구제하는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지만 구제는 항상 전도를 하기 위해서 해야한다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된다. 신구약 어디에도 구제는 복음을 전파하는 수단으로만 사용하라고 나와있지 않다. 이것은 성경의 정신에 위배된다. 초대교회의 교회의 역할에 대한 큰 두가지 가르침에서 우리 한국교회가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 ‘구제’라고 생각한다. 요즈음 한국교회도 구제에 대한 의식수준이 높아져서 예전보다는 많이 하려고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제는 구제를 필요로 하던 시대가 많이 지나가버렸다. 구제를 좀 하려고 하니까 이제 구제할 곳이 별로 없는 시대가 되었다. 참 중요한 기회를 놓쳤다. 우리가 투자 우선순위를 바꿨더라면, 그래서 우리가 구제를 먼저하고 예배당 짓는 것이나 수양관짓는 것을 좀 늦게 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뻔 했다. 그랬더라면 전도도 훨씬 많이 할수 있었을 것이다.

 

미래의 구제와 전도 방향

장애자 구제와 전도를 목적으로 하는 기독교 단체인 ‘밀알 선교단’에서 최근에 학교를 하나 세웠다. 남서울 은혜교회에서 100억을 지원하고 그외의 사람들이 기부를 해서 120억짜리 장애인 학교를 세웠다. 자폐아동들의 학교인데 우리나라에서 제일 예쁜 건물이다. 그런데 그 학교를 세우고 나니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그 운영비 100%를 정부가 보조를 하게 되었다. 심지어는 시에서 큰 버스 두 대를 보내주고, 운전기사와 차장아가씨의 월급까지 대준다. 그래서 학교는 우리가 세웠지만 운영은 정부가 맡아서 해준다. 이것은 어떤 상황이냐 하면 국민이 세금을 내어서 우리 밀알학교로 하여금 예수의 이름으로 사랑을 베풀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부가 장애인 학교가 너무 적다고 생각이 되어 여기저기에 학교를 짓기 시작한다. 그래서 물론 정부가 정부돈으로 짓고 정부가 그 운영비를 줄 것이다. 그러면 어떤 상황이 일어나는가. 예수믿는 사람이 세금을 내면 정부가 정부의 이름으로 사랑을 베푼다. 전체 국민의 5분의 1이 기독교이고, 장애인 학교의 5분의 1이 기독교 학교라면 그건 맞아떨어진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장애인 학교의 5분의 1이상이 기독교 학교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정부가 훨씬 더 많은 장애인 학교를 세울 것이다.

이제는 우리 기독교인이 낸 세금을 정부의 이름으로 사용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얼마나 잘못 생각해 왔는지 알 수가 있다. 만약 우리가 교회당을 짓고, 기도원을 짓고, 수양관을 지을 돈으로 장애인을 위한 학교를 세웠더라면 두고두고 앞으로 우리국민이 낸 세금을 사용해 예수이름으로 사랑을 베풀 수 있었는데, 이제 우리가 세금을 내서 정부가 정부의 이름으로 사랑으로 베풀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멀리 내다보지 못했고, 성경의 정신에 충실하지 못했던 결과이다. 이것은 비단 이 분야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제 모든 분야에서 이런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가톨릭은 우리보다 훨씬 낫다. 가톨릭은 이런 장애인 복지법인이 엄청나게 많다. 우리 개신교는 교회수에 비해 너무나 적은 복지시설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우리가 세금을 내면 가톨릭이 가톨릭의 이름으로 사랑을 베풀게 되었다. 불교가 안하니까 다행이다. 불교보다는 가톨릭이 낫지만 우리 개신교는 참 부끄럽게 되었다. 우리가 이 분야에 대해 실패했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거울삼아 미래를 내다봐야 한다.

 

도덕적 실패의 극복

어떻게 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제는 말로만 예수믿으시오 하는것만으로는 어렵게 되었다. 과거의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쌓아놓았던 교회에 대한 존경심들이 조금씩 사라져 간다. 기독교인들은 자기 속만 채우고 자기 교회당 짓고 자기 멋만 부리지 사회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이 기독교를 존경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고급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미신이다. 변두리 종교다.’ 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면 한국에서 자기가 엘리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 이제까지는 사회에서 존경을 받으려면 교회에 다녀야 한다라고 했지만, 점점 시간이 지나면 교회를 다니는 것이 사회적으로 챙피한 것이 된다. 수준이 낮은 사람이 교회에 간다라는 이런 인상을 심어놓으면 전도는 끝이 나는 것이다.

요즘 시중에 돌아다니는 말 가운데 하나가 “그사람 교회에 다니기는 하지만 사람은 괞찮다.”라는 것이다. 기독교는 사회에서 점점 존경심을 잃어가고 있다. 무속종교처럼 말이다. 사람들은 무당을 겁내기는 하지만 존경하지는 않는다. 어느 목사님에게 들었는데, 한 연예인이 갑자기 예수를 믿겠다고 그 목사님을 찾아왔다고 한다. 그 사람이 과거에는 불교에 심취해서 서울 주변에 있는 절들의 샹들리에를 그 사람이 다 달아주기까지 했는데, 그러다가 어느날 점쟁이에게 갔더니 ‘당신 예수 안믿으면 무당된다’ 라고 그랬단다. 그래서 이 사람이 혼비백산해서 그 목사님에에 달려온 것이다. 무당을 찾아가고, 그 무당이 하는 말을 무서워 하기는 하는데, 무당이 되기는 싫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무당을 존경하지는 않는다. 목사님들 가운데 스스로를 무당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목사님 대접해라. 목사님 마음 거스리면 벌준다.’ 라고 하니까 모두 목사님을 겁을 낸다. 그러면은 그것이 바로 ‘목사의 무당화’이다. 목사라고 하면 두려워 하기보다는 존경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 좋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어야 할텐데, 그 사람 교회는 나가지만 사람은 괞찮다라고 한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전도에 큰 반향을 일으킨다. 바로 교갱협에서 한 설문조사의 결과를 보면, 한국교회의 성장이 느려지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가장 많이 한 답변이 ‘도덕적 실패’라고 되어있다. 한국교회의 도덕적인 실패가 한국교회의 전도를 막는다는 것은 이제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한국교회의 도덕적 실패와 교회의 구제의 역할이 무슨 관계인가를 지금부터 설명하겠다.

 

한국 교회의 사회적 책임

현대의 구제는 무엇인가? 제작년에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그래서 약 600명이 죽고 약 1000명이 다쳤다. 그때 여러 기관들이 유가족들을 돕고 위로하기 위해서 봉사대를 조직했는데,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거기에 기독교 연합 봉사대를 조직했다. 그랬더니 여러 교회에서 약 1억원을 연보를 해주었다. 어떤 교회에서는 식량으로 도와주고, 어떤 교회에서는 돈을 가져다 주고 했는데 전부 계산해보니 1억원 정도가 되어서 그것을 가지고 유가족들의 식사를 봉사했다. 그리고 그중에 예수믿는 사람들을 위해 저녁마다 예배를 드리고, 법률상담도 하고, 정신적인 상담도 하고 그렇게 봉사를 했다. 말이 1억원이지 꽤 많은 봉사를 한 것이다. 그때 그 참사와 자원봉사의 현장을 둘러보면서 ‘아, 이렇게 우리가 사랑을 베풀고 구제를 하는구나!’ 라고 생각은 했지만 한편으로는 가슴이 답답했다. ‘이것이 우리 한국교회가 할 수 있는 사랑의 전부이냐. 이것 뿐이냐.’ 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좋은 구제는 무엇인가? 바로 삼풍백화점이 안무너지게 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유가족들을 밥먹여준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면 이것은 착각이다. 삼풍백화점을 안무너지게 했어야 했다. 그럼 삼풍백화점을 우리가 안무너지게 할 수 있었느냐고 물을 수 있겠다. 지진이 났거나 태풍이 불어서 무너졌다면 우리는 안무너지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것은 한국의 도덕적인 부패 때문에 무너진 것이다. 그 백화점의 주인이 기독교인이 아닌가. 그런데 기독교인이 주인인 그 백화점이 무너져서 6백명이 죽고 1천명이 다쳤는데, 기독교인이 와서 밥을 봉사한다. 이것은 위선중에 위선이다. 만약 저가 비기독교인이고 우리 가족이 거기서 희생되었다면 아마 거기서 밥상을 뒤집으며 ‘이따위 위선 하지 말란 말이야. 너희들은 병주고 약주고 하는데, 병은 많이 주고, 약은 쬐금 주고 있지 않느냐’ 라고 했을 것이다. 우리가 그 백화점을 안무너지게 할 능력이 없었다면 우리는 책임이 없다. 그러나 우리 한국의 기독교인이 조금이라도 관심을 썼더라면 그 백화점은 안무너졌다. 삼풍백화점이 기술이 부족해서 부실하게 지어졌는가? 여러분이 싱가포르나 쿠알라룸푸르에 가보면 한국기술로 지은 건물이 세계 명물이 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을것이다. 쿠알라룸푸르에는 쌍둥이 빌딩이 지어졌는데, 한 개는 일본이 지었고 한 개는 한국이 지었다. 가운데에 다리를 놓다보니까 오차가 생긴 것을 발견했는데, 일본이 지은 건물에 오차가 생겼다고 한다. 한국의 건축회사는 아주 정확하게 맞추었다고 한다. 한국의 건축기술은 세계적이다. 건축기술이 모자라서 그 건물이 무너진 것이 아니라 양심이 모자라서 무너졌다. 우리 사회가 부패해서 무너졌다. 기독인이 인구의 4분의 1 또는 5분의 1이 된다고 자랑을 하는 나라가 건물을 무너지게 해 놓고는, 거기서 기독인들이 구제를 한다니 이건 완전히 착각을 단단히 한 구제이다. 이렇게 해서야 어떻게 사회에 나가서 예수의 사랑을 말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전파한다는 것이 병을 많이 줘놓고 약 조금 주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한국교회가 이 한국사회에 대해 책임을 질 때가 되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 시대의 로마, 기독인구가 전체의 0.1%도 안되는 시대의 로마를 생각하고 있으면 안된다. 그때는 로마제국이 아무리 부패해도 기독교인이 책임을 질 수 없었다. 책임을 질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인구의 0.1%도 안되는데 무슨 책임을 질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스라엘의 부패에 대해서는 교회가 책임을 져야한다. 이미 예수의 제자가 다수이기 때문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한국사회의 부패에 대해서는 한국사회가 책임을 회피해야 할 위치에 있지 않다. 한국교회가 앞장서서 고칠 수 있어야 하고 얼마든지 고칠 수 있다. 지금 한국의 그리스도인이 한마음이 되면 우리 사회의 모든 병을 다 고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무시했다. 본인의 경험에 의하면 고치는 것은 가능하다. 우리 ‘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는 조그마한 단체이다. 회원이 한 만명이고, 매달 200만원씩 빛을 지고 있고, 간사라 해봤자 일곱명 밖에 없는 그 작은 모임이 스포츠신문 세 개를 지금 꽉 잡고 있다. 정부도 겁을 내서 손을 못대는 그 스포츠신문을 우리 조그마한 단체가 컨트롤 하고 있다. 우리가 힘을 합치면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돈안드는 정치와 같은 것 말이다. 지금의 선거법으로는 돈안드는 정치를 할 수 없다. 만약에 지금 법을 안고치면 다음 대통령도 선거자금으로 또 청문회 가게 되어있다. 돈을 안쓰면 절대로 당선될 수 없는 구조다. 이것을 고치려고 우리 시민단체들이 애쓰고 있는데, 국회의원들이 눈도 깜짝 않고있다. 이것은 우리 한국교회가 힘을 합하면 당장 고칠 수 있다. 한국교회의 각 교단 총회장들 한번 모여서 국회의원들에게 성명서를 내고 ‘우리 한국 기독교가 이제 우리 한국 정치를 깨끗하게 해야겠다. 이 법 개정하는데 나서지 않는 정당의 후보는 낙선시키겠다. 여기에 참여하지 않은 국회의원들은 다음 선거 때 낙선시키겠다.’ 이렇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쩔쩔매게 되어있다. 그런데도 그 힘을 행사하지 않고 있다. 그저 백화점이 무너지면 가서 점심이나 주고, 저녁이나 주고 그런다. 그만큼 우리가 사회에 대해서 관심을 안쓴다.

 

변두리로 밀려나는 교회

우리가 사회에 대해 관심을 이렇게 안쓰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영어로 Marginalization 즉, 변두리로 밀려나게 된다. 우리가 일을 할 때에 한복을 입는가? 양복을 입는가? 양복을 입는다. 그러면 언제 한복을 입는가? 생일, 설, 추석같이 일상의 생활과 관계없는 날에만 한복을 입는다. 우리가 먹고 사는것과 직접 관계가 없는 일에 한복을 입고 있다. 한복은 우리 한국 사회에서 Marginalized화된 것이다. 변두리로 밀려났다. 지금 세계에서는 종교가 Marginalized화되었다. 사회, 정치, 문화의 한가운데는 기독교와 관계가 없다. 멀리 변두리로 밀려났다. 종교가 점점 약화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 교회는 일제시대 때는 엄격한 의미에서 사회를 주도했다고 할 수 있다. 독립운동이라는 가장 중요한 일을 한국교회가 가장 중심이 되어서 했다. 해방 후에도 지도층에 비록 수가 적기는 하지만 그래도 기독교인이 들어가서 역할을 했다. 지금은 지도층에 그 수가 많기는 하지만 그사람이 교회에 다니니까 시원치않다는 말을 듣는다. 멀리 쳐다볼 필요도 없다. 우리 김영삼 대통령을 보면, 그가 장로이지만 대통령직을 수행할 때 장로의 역할을 조금이라도 했는가? 기독교인의 냄새를 조금이라도 풍겼는가? 기독교적인 정의에 그가 얼마만큼 공헌을 했는가? 종교따로, 신앙따로, 정치따로 했다. 지금 우리 교회는 정치, 문화, 언론과 같은 분야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결혼식, 장례식, 생일같은 데에만 관심을 쓰고 있다. 우리 소시민들이 하고 있는 그런 일에만 관심을 쏟는다면 우리 한국교회는 Marginalized 된다. 말하자면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한국교회가 당면한 가장 큰 위기이다. 진보적인 교회는 그래도 민주화 운동에 상당한 공헌을 했다. 또 보수적인 교회도 과거 반공운동에는 상당히 공헌을 했다. 지금 민주화도, 반공도 그리 심각하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 한국교회가 할 일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우리 한국교회가 사회에서 가장 핵심적인 공헌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을 우리가 연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훌륭한 지도력을 필요로 하는 사회

공명선거 운동을 해보니 돈을 많이쓰고, 선거법을 가장 많이 어기는 사람은 대개 장로였다. 지금 몇사람이 계류중인데 그중에 적어도 3분의 2는 장로다. 벌써 한사람 유죄판결을 받았고, 아마 며칠 후에 또 한사람이 받을 것인데 둘다 장로다. 무었을 뜻하는가? 우리 목사님들에게 상당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목사님들 역시 사회적인 분위기와 교인들의 성향으로 인해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영적 지도자는 다른 사회적 영향을 가지고 핑계대면 안된다. 지도자는 달라야 한다. 참여적이어야 한다. 사회가 아무리 어렵더라도 일터에 나가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교인들을 어떻게 키웠는가? 우리는 그동안 ‘교회성장’ 이라는 우상을 섬기지 않았는가? 아무나 교회에 오더라도 교회성장만 되면 된다고 하고, 사기치고 거짓말하는 사람도 교회 열심히 나오고 전도 많이 하고 연보 많이 내면 된다고 하지 않았는가? 어떻게 그 삼풍을 무너뜨리게 한 장본인이 교회에서 집사가 되고 치리를 받지 않을 수 있었는가? 교회의 도덕성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왜 교회의 도덕성이 무너졌는가? 교회성장의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다. 교인만 많이 들어오면 된다고 했고, 그것을 복음전파라는 것으로 정당화했다. 한영혼 구원하면 될 것 아니냐고 하는데, 그 영혼은 어떤 영혼인가? 생활과 신앙을 완전히 분리한 그 영혼은 구원받는 영혼인가? 행함이 없는 믿음도 믿음인가?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을 가지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교회가 이래서는 사회에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다. 우리 사회는 정말 훌륭한 지도력을 필요로 하는 사회가 되었다.

 

도덕적 상대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 사회가 지금 어떤 모습을 가졌는지 한번 생각해 보자. 신문이나 잡지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을 것이다. 어떤 철학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을 한마디로 요약을 하면서 이런 예를 들었다. 어떤 어머니가 아기를 안고 있는데, 다른부인이 아기를 보고 아기가 참 예쁘다고 했다. 그랬더니 아기 어머니가 ‘아니에요. 얘 사진은 더 예뻐요.’ 한다. 이것이 포스트 모더니즘의 전형이라고 한다. 진짜 아기와 아기사진을 구분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짜 아기도 아기사진같이 비현실적인, 말하자면 현실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엄연한 현실이 있고 그에 대한 상징, 그에 대한 인식을 말했는데, 이제는 현실이라는 그 자체가 존재하는지 않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가져오는 다른 부수적인 결과는 아무것도 진리라고 할 수 없고, 이것도 저것도 비현실이며, 진리가 있고 거짓이 있다고 할 수 없다는 상대주의와 다원주의이다. 이것이 오날날 철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고, 앞으로 상당히 강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도 점점 그런 모습이 여러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다. 가장 심각한 것이 도덕적 상대주의이다. 이 윤리학자들이 지금 이것 때문에 제일 고민을 하고있다. 다른 면에서는 다원주의와 상대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데, 도덕적으로도 상대주의를 받아들여야 하느냐는 문제 때문에 요즘 책이 많이 쓰여지고 있고, 본인도 대학원 학생들과 거의 매 학기마다 고민을 하고 있다. 어떻게 다원주의 사회에서 도덕적인 상대주의를 피할 수 있느냐는데 대한 여러가지 이론들이 나오지만 그 이론들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그리고 도덕적 상대주의의 모습은 우리 사회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다. 외설서라는 포르노그라피를 자유화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이 우리 젊은 사람들 가운데 상당히 많다. 잡지에 소위 문화문제에 대해 글을 쓰는 사람이 저와 인터뷰를 하자고 전화가 왔었다. 자기는 포르노그라피를 자유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저를 우리 한국의 포르노그라피를 반대하는 보수 중의 괴수라고 생각하고 저와 한번 토론을 벌여보자는 것이었다. 이에 승낙을 했다. 그리고 나서 토론을 했는데, 마치고 나서 그 사람이 하는말이 “저는 손교수님이 고집불통이고 아주 숨막히는 보수주의자인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군요.”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가서 글을 썼는데 글을 아주 잘 썼다. 나와는 정반대의 입장에 있지만 내 생각을 정직하게 요약을 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아주 존경하고, 그런 사람 같으면 얼마든지 토론을 하겠다고 했다. 저가 그 사람을 보고 ‘야 이 지옥 갈 놈아!’ 라고 소리치지 못한 것은 우리사회가 이미 다원주의를 다 인정하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그 사람에게 뭐라고 하겠는가? ‘야 나쁜놈아!’ 라고 하지 못한다. ‘자 당신은 포르노그라피를 찬성하는 운동을 펼치십시오. 나는 반대하는 운동을 펼칠 겁니다. 그래서 우리 한번 싸워봅시다. 공개적으로 토론해서 이기는 사람이 지배해야 할 것 아닙니까?’ 라고 했다. 물론 그 사람이 거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요즘 청소년들이나 대학생들을 보면 혼전 성관계가 괞찮다고 하는 사람이 30~40%나 된다. 동성연애가 괞찮다고 하는 사람들도 대학생들중에 약 20~30%나 된다. 이것은 점점 심해질 것이다. 이 도덕적 상대주의는 사실 우리 기독교에 심각한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의 위기 뿐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를 붕괴시킬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상대주의는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정치에 대해서 이 정당이 좋다고 생각할 수 있고 저 정당이 좋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음악에 있어서도 괴상한 음악도 듣기에 따라서 좋은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것은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데 도덕적 상대주의를 우리는 받아들일 수 있는가? 뭐 사람 좀 죽이면 어때, 뭐 좀 속이면 어때라고 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어떤 도덕윤리학자도 그것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반시민들 사이에서는, 특히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런 것이 점점 수용되고 있다. 이것은 사회와해를 가지고 온다. 도덕적 상대주의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쳐도 된다는 것은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사회는 지금 그렇게 되어가고 있고 지도자는 점점 그쪽으로 타협을 하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 사회를 건지려면 교회가 나서지 않을 수 없다. 본인이 사회구원을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는 함께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아까 삼풍문제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이제 개개인의 도덕적만 가지고 도덕적 수준을 유지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우리는 사회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는다. 이제는 사회를 고치지 않고 개개인이 도덕적으로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약자를 보호하는 종교

그러므로 우리 개인이 우선 하나님 앞에 성결하게 살기 위해서라도 사회의 도덕적 수준을 일으켜야 한다. 또 우리 사회가 무질서하게 되어 우리 사회의 약자들이 억울해지게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사회의 윤리적 수준은 보전되어야 한다. 사회가 무질서해지면 누가 제일 고통을 당하는가? 이상하게도 약자가 고통을 당한다. 예를 들어보자. 교통질서가 무너지면 누가 제일 손해를 보고 누가 제일 득을 볼 것 같은가? 교통질서가 무너지면 제일 득을 보는 사람은 덤프트럭을 몰고 다니는 사람이다. 교통질서가 엉망일 때 덤프트럭이 크랙션 누르고 돌진하면 모든 차가 다 비켜난다. 누가 제일 손해를 보는가? 걸어다니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길바닥에 나갈 수 없을 것이다.

질서란 엄격하게 분석하면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강자는 질서가 필요없다.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질서가 무너지면 항상 강자가 득을 보고 약자가 손해를 본다. 물론 이것은 질서가 정당할 때 하는말이다. 질서자체가 정당하지 못하면 문제가 다르지만 질서가 올바르다면 그 질서는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있다. 정부가 존재하는 것도 엄밀히 따지면 약자를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성경 로마서 13장에 세상의 권세가 무엇 때문에 있다고 나오는가? 착한 일을 한 사람을 상주고, 못된 일을 한 사람을 벌주게 위해서 세상의 권세가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것이 없어지면 약육강식이 된다. 약한 사람의 고기를 강한 사람이 먹어버려서 약자가 피해를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가 질서를 지킨다는 것은 약자를 보호한다는 것이다. 참 종교는 항상 약자를 보호한다.

 

교회의 도덕적 가치판단

오늘날 약자를 보호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물론 배고픈 사람을 먹이는 것이어야 한다. 북한동포를 먹여야 한다. 한국교회가 이번에 북한동포 돕기에 앞장선 것은 참 잘한 일이다. 정부가 반대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도와야 한다. 이 분야에 대해서는 정부의 정책에 반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굶는 사람을 먹이는 그 의무는 나라의 법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 한국 교회는 정부가 뭐라고 하든간에 북한동포를 먹여야 한다. 대상이 일본사람이라도 좋고, 중국사람이라도 좋고, 아프리카사람이라도 좋다. 신명기 23장에 길을 가다가 남의 밭에 들어가 이삭을 베어먹고, 포도나무밭을 지나가다가 포도를 따먹어도, 감람나무 열매를 따먹어도 괞찮다고 했다. 다만 낫을 대거나 그릇에 담아가지는 말라고 되어있다. 참 이상한 가르침이다. 왜 남의 밭에가서 먹어도 된다고 하는가? 성경에 도둑질 하지말라고 한 것은 사유재산을 인정한 것인데, 그 사유재산을 인정해 놓고는 왜 남의 밭에 가서 곡식을 따먹을 수 있게 했는가? 그것은 배고픈 사람을 전제로 한 것이다. 배고픈 사람은 남의 사유재산이라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배고픈 사람은 먹여야 한다. 성경은 그것에 대해 아주 치밀하게 배려한다. 그러나 낫을 댄다는 것은 배고픈 정도를 넘어간 것이니까 그것은 안된다. 그러나 배고픈 사람은 남의 것을 먹을 수 있다.

미국의 콜 벌그라고 하는 유명한 교육심리학자가 있었다. 그사람은 인간의 도덕적 판단력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발전한다는 이론을 만들었다. 그리고 도덕적 판단력이 가장 발달한 것이 제7단계인데, 그 단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아내가 병이 들었는데 돈은 하나고 없고, 그 병을 고칠수 있는 약은 약뱡에 있다. 자기의 아내는 이 약을 먹으면 살고 안먹으면 죽는다. 그럴 때 이 사람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도둑질 하거나 아내가 죽거나 둘 사이에 하나를 택하라고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이때 가장 도덕적인 사람은 유리창을 깨고 약을 훔친다고 한다. 도덕적 수준이 낮은 사람은 정직하게 아내를 죽게 내버려 둔다고 한다. 도둑질을 하면 절대로 안되지만, 죽는 것이 정직한 것보다 낫다고 한다면 가치판단을 잘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적 법보다 한단계 낮은 나라의 법 때문에 사람을 굶겨 죽이는 일은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나라의 법을 어겨서라도 북한동포를 먹여살려야 한다. 우리 한국교회가 이정도의 판단력은 가져야 한다. 지금 사람이 굶어죽고 있는데 손하나 까닥하지 않는다면 아마 우리 후대에게 한국 교회가 면목이 없을것이다. 무슨 면목으로 우리가 나중에 북한에 가서 선교를 하겠는가? 일단 먹여놓고 그 다음에 전쟁을 걸어오면 그 전쟁을 막아야 한다. 우리가 음식을 보낸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북한이 힘을 얻어 남침해 올 것이라는 생각은 근본적으로 판단을 잘못 한 것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이럴때 사회적 지도력을 행사해야 한다.

 

행동하는 크리스챤

그리고 또 한국교회가 이 사회에서 할 일은 무엇인가? 한국교회는 도덕적 상대주의가 판을 치고 쾌락, 돈, 권력에 눈이 어두워진 이 상황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야욕을 불태우는 이때에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 목사님들의 위치가 엄청나게 중요하다. 사실 대학교수보다 목사님의 영향력은 엄청나게 크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체로 힘이 있고 또 교인들은 목사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므로 목사님의 책임은 엄청나게 크다.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책임이 큰 것이다. 그래서 오늘 목사님들에게 호소하고 싶은 것은 목사님들이 훌륭한 지도력을 발휘해서 이 사회의 지도자를 많이 만들어 달라고 하는것이다. 우리 교회의 청년들을 Marginalized된 변두리에 있는 사람으로 만들지 말고, 사회 중심에 서서 예수그리스도의 사랑과 그 가르침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정치도 하고, 경제도 하고, 언론도 하고 사회운동도 하도록 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그렇게 하고 있지 않다. 복음주의 교회가 청년들을 변두리로 몰고 있다. 사회에 대해 관심을 쓰지 못하도록, 정치에 대해 관심을 쓰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왜 교회에 오면 시간을 안주는가? 교회에 오면 대학부 청년부가 너무 많은 시간을 성경공부만 하고 있다. 우리 교회 여전도회 회원들은 일주일 내내 성경을 배운다. 그러면서 이들은 손도 까딱 안하고 있다. 이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한국교회는 너무 성경을 많이 알고 있지만 하나도 행동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배운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성경이 말하는 그 가르침을 배운다는 것은,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실행해야 배우는 것이지 지식적으로 알고 달달 외우는 것을 배운 것이라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것은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고 저런분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다. 우리 청년들이 사회에 나가서 무능한 사람이 되게 하지 말아야 한다.

어느 목사님 중에는 자기 교인을 칭찬하면서 ‘아무개 집사는 하루종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 라고 한다. 참 교인을 잘가르쳤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사람 하루종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 일은 언제하나?’ 라는 생각이 든다. 그 사람이 일을 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우리가 현실적이 될 필요가 있다. 이렇게 가르치지 아니하면 우리 젊은이들이 사회에 나가서는 전부 변두리로 밀려나고 만다. 믿는 사람은 말씀 읽는데에만 시간을 쓰고 중요한 직책은 안믿는 사람이 다 차지해 버리면 이 사회에서 어떻게 지도자가 될 것인가? 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를 하면서 와서 자원봉사 하자고 해도 ‘자원봉사할 시간이 없어요. 성경공부 해야 하는데 언제 자원봉사해요?’ 라고 한다. 그런데 그 성경공부라는 것도 십분에 할 것을 사십분, 오십분을 한다. 한시간 배우고 두시간 행동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렇게 배워야 그것이 진짜 배우는 것이다. 성경말씀을 한시간 배우더라도 우리 주변의 병원, 고아원, 양로원에 가서 봉사하고, 정 할것이 없으면 길거리의 쓰레기라도 줍도록 해야한다. 그렇게 해야 그것이 살아있는 말씀이다. 그리고 사회의 지도자가 되려면 사회에 대하여 정확한 판단과 이해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연습이 필요하다. 교회 안에서 그 연습을 시키지 않으면 사회에 나가서 완전히 무능한 사람이 되고 만다. 사회에서 부대껴야 그것을 배울 수 있다. 그 속에서 부대끼면서 어떻게 성경적으로 정치를 할것인가, 경제를 할것인가를 고민하고 그것을 교회에 가져와서 함께 고민하고, 또 그 결과를 가지고 다시 사회로 나가서 부대끼고 해야만, 그 인격이 성경적으로 자라가고 그 활동이 성경적으로 되어간다. 목사님들은 우리 자라나는 세대에게 시간을 주고 사회에 나가서 교회에서 배운 것을 실천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교회에 너무 오래 있게 하지 말아야 한다.

 

제자를 키우는 지도자

그래서 교회 와서 성경말씀도 묵상해야 하지만, 이 성경말씀을 오늘날 이 사회에서 어떻게 실천해야 할 것인지를 토론하도록 해야 한다. 사회․경제적인 상황, 북한문제와 같은 것을 토론하도록 해야한다. 교회에서 이렇게 연습을 해야 사회에 나가서도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리고 사회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교회에 와서 아멘, 아멘하는 사람을 키우는 것이 아니다. 소위 예스맨이 지도자가 된 적이 없다. 위대한 지도자는 반항하는 제자를 키운다. 위대한 지도자는 제자에게 상당히 넓은 공간을 제공한다. 울타리를 넓게 쳐서 이 밖에는 나가지 말아라, 그러나 이 안에서는 네 마음대로 뛰어놀아라고 한다. 옹졸한 지도자는 끈을 꽉 조아 놓아서 이 안에서 뱅뱅뱅 돌도록 만든다. 여기서 무슨 창조력이 나오고 무슨 지도력이 나올 수 있겠는가? 위대한 지도자는 자기에게 반항하는 사람, 자기에게 거역하는 사람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조금 너그럽게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에 그 한계를 지어서 ‘이 밖에는 나가지 말아라, 그러나 이 안에서는 너의 마음대로 해라’ 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이 무엇인 줄 알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절대로 지켜야 한다.

그러나 목사님의 개인의 말을 강조하면 안된다. 과거의 훌륭한 지도자들은 제자들을 키우는데 관심을 많이 썼다. 예수님은 이땅에 오셔서 예수님 혼자서 이세상 사람들을 전도하려고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아주 전략적인 접근을 했다. 열두제자를 키우신 것이다. 신약성경을 그 관점에서 읽으면 정리가 잘 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키우는데 주로 시간을 보내셨다. 그 제자들이 또 제자를 삼고 또 제자를 삼아서 복음을 전파하려고 했지, 예수님 혼자서 다 하려고 생각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이제 목사님들은 제자키우는 일을 해야 한다. 요즘은 전도한다고 하지 않고 제자삼는다고 하는데 훨씬 좋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목사님들은 교인들 특히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사회 한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빛을 나타내고,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도록 키워야 겠다.

 

절제할 수 있는 지도자

그리고 그렇게 하려면 여러가지가 필요하지만 인내할 수 있는, 절제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들어야 한다. 절제할 수 없으면 지도자가 될 수 없다. 절제한다는 것은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억제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선한 것을 절제한다고 하지 않는다. 우리의 이기심, 악한 충동, 비겁한 충동을 억누를 줄 알아야 한다. 모든 지도자는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목사님 자신들도 지도력을 발휘하려면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 우선 물질적인 것부터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 낭비하고 사치하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는 법은 절대 없다. 앞으로 올 사회는 더군다나 그럴것이다. 특별히 도덕적 지도자는 돈과 명예와 권력과 색에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 색이라는 것은 우리 한국 교회에 이런 문제들이 좀 있기 때문에 덧붙인것이지만, 사실 인간을 가장 유혹하는 것은 돈과 권력이다.

우리 교회에는 명예욕이 작용한다. 그것도 올바른 명예가 아닌 헛된 명예인데 그것은 바로 자기가 주장하는 명예이다. 진정한 명예는 다른 사람이 높여주는 것인데, 자기가 찾으려고 하는 것은 참 추하다. 목사님들이 총회장이 되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추한지 모른다. 얼마나 추한지 본인들이 모르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 나 총회장 되겠다. 찍어달라. 세상에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얼마나 추한가? 고려파와 합동측이 통합을 할 때 그때 총회에 한번 가보았다. 당시 한상구 목사님을 총회장으로 투표해서 결정했는데 이분이 기어코 안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님들이 가서 그분을 들고 사회하는 단으로 올라갔다. 참 은혜로왔다. 그때는 노회하거나 총회할 때 우리 성도들이 많이 갔다. 그 뒷자리에 앉아서 참 은혜를 많이 받았다. 그 당시의 노회하는 모습, 총회하는 모습은 얼마나 은혜가 되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지금은 될 수 있는대로 가지마라, 큰일난다고 한다. 명예라는 것은 그렇게 얻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종들의 명예는 그렇게 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낮아질수록 높아진다고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고 있는데 왜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는가? 낮아지려고 하면 틀림없이 높아진다. 성경을 못믿으니까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목사님들이 돈에 비겁해지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이세상에서 왜 하나님의 종들이 돈 때문에 비겁해 지는가? 돈은 던져버릴 수 있어야 한다.

연세대학의 한세동 박사가 남산의 어느 교회에서 겪었던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상당히 오래전 일인데, 어떤 집사가 돈 일백만원을 기명으로 연보를 했다. 그 교회의 목사님이 그 집사를 칭찬을 했다. 그랬더니 이 집사가 교만해져서 교회를 흔들게 되었다. 그때문에 그 목사가 교회를 나가게까지 되었다. 그래서 임시당회장으로 한태동 박사가 그 교회에 부임을 했다. 부임한 첫날 당회를 했는데, 그 교회 재정을 담당하는 집사에게 백만원짜리 수표를 하나 만들라고 했다. 백만원짜리 수표를 만들어 오자 그 아무개 집사를 불러라고 했다. 그래서 그 집사가 왔다. 한태동 박사가 그 집사 앞에 백만원짜리 수표를 던졌다. “주워가, 주워가.” 그러자 그 집사가 쭈빗쭈빗 했다. “잔소리 말고 주워가.” 라고 했다. 그러자 주워가지도 못하고 도망을 쳤다. 얼마나 통쾌한가? 하나님의 종은 그 정도의 권위가 있어야 한다. 그정도의 자존심이 있어야 한다. 절대로 돈에 자존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절대로 아부하지 말아야 한다. 돈있는 사람을 완전히 무시해야 영적권위가 올라간다. 목사님들은 누가 연보했는지 아예 보지를 말아야 한다. 거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 그 연보 많이 하는 성도에게 더 관심이 가게 되고, 그 사람이 떠날까 눈치보게 되는 것이다.

 

도덕적 권위를 가진 지도자

권력이 교회에서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섬기기 위한 것이지 누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교인들에게 돈, 권력, 쾌락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가르쳐야 한다. 그것을 추구하면서 절대로 지도력을 가질 수 없다. 우리 사회가 아무리 어리숙하지만 그런 지도자를 지도자로 모시지 않을 것이다. 다만 투표를 해서 표를 많이 얻었으니까 형식적인 지도자로 볼 수는 있겠지만, 아무도 그를 지도력을 가진 지도자로 보지 않는다. 지금 김영삼 대통령을 보면 그는 아직까지 법적으로는 대통령으로서는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지도력은 전혀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런가? 도덕적으로 지도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우리 목사님들은 도덕적 권위가 있어야 한다. 영적인 권위라는 것을 병 고치고 기도를 많이 하면서 하나님과 신령한 관계를 가지는 그런 것에만 국한시켜서는 안된다. 영적권위란 도덕적인 권위까지를 포함시킨다. 그런 도적적 권위를 목사님들이 행사하면 똑똑한 젊은이들이 그것을 보고 배운다. 그런 목사님 아래서 그 영향을 받아 많은 지도자가 나온다.

목사님들은 많은 제자를 만들고 그 제자가 또 제자를 만들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이 사회의 중심부에 가서 정치를 바꾸고 문화를 바꾸어 이 사회를 질서있는 사회로 만들면 그것이 바로 우리 성도들의 경건에도 도움이 되고 전도에도 도움이 되고, 또 약자들이 보호를 받는 것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교회가 해야할 일은 너무나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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