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럼] 한국교회 성장과 그 둔화 현상의 교회사적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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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 한국교회 성장과 그 둔화 현상의 교회사적 고찰
  • 이만열 교수
  • 승인 1997.06.19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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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06/19) 교갱협/기독신보 공개포럼

1. 들어가는 말

한국의 복음전도는 일찍이 복음을 들고 입국한 한 선교사가 “씨를 뿌리러 왔으나 열매를 거두고 있다”고 고백한 것과 같이 세계의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빠르고 또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그래서 한국선교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유례없는 성장’이라고 지적해 왔다. 한국교회의 성장이 세계 선교사상 이렇게 괄목할 만한 것이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선교사들은 이를 학술적으로 정리하려고 시도한 바가 있다.(대표적인 연구로 Wasson A. W., Church Growth in Korea, New York ; I.M.C., 1934와 Shearer R. E., Wildfire: Church Growth in Korea, Seoul ; C.L.S., 1966(이승익 역,《한국교회성장사》) 등이 있다.) 이러한 업적들은 그 뒤 선교학을 연구하는 학도들에게 큰 자극을 주어 해외에서는 물론 국내에서도 한국교회 성장에 관한 대소의 연구들이 계속되었다.(유동식 외 <한국교회 성령운동의 현상과 구조>(1986)를 비롯하여, 이호문 <목회혁명>(1992), 황방남 <한국교회 성장의 이론과 실제>(1990), 이종윤 외 <교회성장론>(1983), 한경철 <한국교회의 성장 어디까지 왔나>(1984), 아시아연합신학대학원과 풀러신학교 공동학위과정의 박용식 <한국감리교회 성장에 관한 연구>(1986)과 전광석 <교회성장과 평신도교육에 관한 연구>(1986), 석사학위논문으로 남백현 <성령운동을 통한 교회성장>(1984), 서정주 <한국교회 성장에 대한 비교연구>(1980), 박성복 <한국교회 성장에 관한 일 연구>(1988)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교회의 성장이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둔화 내지는 정체현상을 보이고 있다. 1995년 독일의 선교학지(Zeitschrift fuer Mission)에 한국교회에 관하여 “성장의 끝인가?”라고 기고한 논문에서 루츠 드레쉬(Lutz Drescher)는 한국교회의 성장이 1990년대 들어와 한계에 도달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Lutz Drescher, "Ende des Wachstums?-Die Protestantischen Kirchen Suedkoreas in der Krise", in:Zeitschrift fuer Mission (Jahrgang XXI, Heft 2, 1995), pp. 105~116.- 김영한, “한국교회의 성장둔화 요인에 관한 개혁신학적 연구”(제10회 숭실대 기독교문화 및 신학 세미나 자료집, 1996, p.5)에서 재인용.)

1945년에 382,800명이던 교인이 1955년 1,000,482명, 그리고 1965년 2,255,193명에 이르는 10년 동안 거의 교인의 수가 2배가 되었다. 1967년에는 2,899,108명, 1979년 5,986,609명에 이르는 기간에도 거의 2배의 증가를 보였다. 1980년대도 거의 2배에 가까운 증가세를 보였다. 이러한 증가세가 1990년대 들어오면, 다음과 같은 성장 둔화의 현상이 보인다.

개신교 신자수 연평균
1990년 11,427,485명 10.8% +
1991년 12,091,837명 5.8% +
1992년 12,571,062명 4.0% +
1993년   3.0% +*

*(“개신교 교세 작년 3% 성장”. 〈조선일보〉1994년 10월 23일 13면 ; “한국교회 성장둔화, 교단간 교인 쟁탈로 파행”, 〈기독교연합신문〉1994년 10월 2일 5면 ; 기독교문사,《기독교대연감》, 1993년.)

이 점은 한국교회의 대표적 교단이라고 일컬어지는 6개 교단의 지난 3년간의 성장을 비교해 보아도 1%이상 성장한 교단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6개 교단의 3년간의 성장비교 ※예장통합: 1993년/2,049,117명·1994년/2,101,295명(2.4%)·1995년/2,103,295명(0.01%) ※예장합동: 1993년/2,147,642명·1994년/2,158,794명(0.5%)·1995년/2,158,908명(0.05%) ※기장: 1993년/328,048명·1995년/334,473명(0.99%) ※예장고신: 1993년/349,208명·1994년/363,620명(0.96%) ※감리교: 1993년/1,289,242명·1994년/1,289,626명(0.003%)·1995년/1,294,330명(0.07%) ※기하성: 1994년/1,214,798명·1995년/1,266,569명(0.4%) (이종윤, “한국교회성장둔화-그 원인과 대책”, 로잔위원회 보고자료, 1996년))

한편 한국통계청의 표본조사에 의하면 1991년 한국개신교 신도는 전체인구의 18.6%를 차지했는데 1994년에는 18.2%로 0.4% 가량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한국교회 성장률 급감속, 개척교회수는 증가”, 〈크리스챤신문〉1996년 5월 18일 1면.) 이상의 통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1990년대 들어서 한국교회는 신도수에 있어서 성장둔화 내지 성장 정체 및 감소의 현상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이 비단 개신교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표1]

  개신교 가톨릭 불교

1985년(A)
총인구 40,806,000
종교인구 17,203,296
종교인구비 42.6%


15.9%
6,489,282
37.7%


4.6%
1,865,397
10.8%


19.8%
8,059,624
46.8%

1991년(B)
43,268,000
23,364,720
54.0%


18.6%
8,037,464
34.4%


5.7%
2,476,660
10.6%


27.1%
11,729,089
50.2%

1994년(C)
44,851,000
22,380,649
49.9%


18.2%
8,146,556
36.4%


5.9%
2,640,916
11.8%


24.4%
10,921,756
48.8%


총인구 증가율 6.0%
종교인구증가율 35.8%

B-A

23.9%



32.8%



45.5%


총인구증가율 3.7%
종교인구증가율 -4.2%

C-B

1.4%



6.6%



-6.9%

(인구 및 주택 센서스(1985), 통계청, 《한국의 사회지표》(1991), (1995)의 자료를 가지고 이원규, “한국교회의 성장과 그 둔화 요인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에서 재정리)

이상의 결과를 종합해보면 1990년대 이전까지는 모든 종교가 급성장을 했다고 볼 수 있으나 1990년대에 들면 대부분의 종교가 성장률 면에서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그 예를 찾아보기 드문 한국교회의 성장을 역사적으로 살펴본 다음 1990년대 이후 한국교회의 성장둔화 현상의 요인을 검토하여 가능한 범위내에서 그 대안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2. 한국교회의 성장 과정(이 장의 서술은 필자의 <한국 교회의 성장과 그 요인에 관한 일 연구>(靑坡淑明史論 창간호, 1993)를 대부분 요약한 것이다.)

1) 기독교 수용과 교회의 성장(1879~1910)

한국기독교는 1832년의 귀츨라프(Karl Guetzlaff)의 내한과 1865~66년의 토마스(Robert J. Thomas)의 선교와 죽음에 이어, 1870년대 스코틀란드 연합장로교회(United Presbyterian Church) 선교사의 만주지역 진출에 힘입어서 시작된다.(종래의 한국기독교사 인식에서는 귀츨라프와 토마스를 이어서 미국계 선교사가 내한하는 것으로 정리되었으나, 근래 여러 자료들의 발굴로 선교사의 입국에 앞서 만주로부터 기독교가 주체적으로 수용되었음을 거의 정설화하고 있다(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편,《한국기독교의 역사 I》, 기독교문사, pp.142~156 참조).) 비교적 초기에 만주에 진출한 스코틀란드 선교사들은 로스(John Ross, 羅約翰)와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 馬勤泰) 등이었다. 이들은 만주 선교를 개척하는 한편 대원군 때에 강화된 쇄국정책으로 선교의 문이 거의 닫혀있는 조선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선교사들은 당시 여러 가지 목적으로 만주에 온 한국인들을 만나 말과 글을 배우고 역사와 문화를 익히며 그들에게 기독교 진리를 전하려고 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 결과 1879년 네 사람의 한국인이 만주에서 이들 개신교 선교사로부터 세례받게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신약성경의 한글번역 작업이 활발히 전개되어 1882년에는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각각 3천부씩 간행되었고, 1887년에는 신약성경이《예수셩교젼셔》라는 이름으로 번역 간행되었다. 그 이후 기독교는 한국인들의 적극적인 노력에 의해 한반도에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초기에 간행된 복음서들은 앞서 거명된 수세자들에 의해 한국인들에게 반포되었다. 성경 간행 때에 식자공으로 활동했던 김청송(金靑松)은, 당시 압록강을 건너와 만주지역에 살고 있던 한국인들에게 전도하여 한꺼번에 75명과 25명이 로스 등의 선교사들에게 세례를 받도록 하였다. 이들 수세자들은 뒷날 중국인들의 핍박을 받아 압록강 남쪽으로 옮겨왔는데, 1885년부터 한국에 들어왔던 선교사들이 북한지역을 여행하여 이들을 접촉하면서부터 선교의 문이 넓어지게 되었다. 한편, 번역된 복음서들을 들고 한반도로 들어갔던 백홍준(白鴻俊), 이응찬(李應贊), 서상륜(徐相崙) 등이 뿌린 복음의 씨앗들도 빠르게 자라고 있었다. 특히, 1883년 초에 서울에 도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서상륜은 로스로부터 받은 성경과 전도책자들을 가지고 비밀리에 복음전도활동을 전개한 결과 1885년 초에는 70여 명의 세례청원자들을 확보하게 되었다. 1885년 3월 8일자로 로스가 영국성서공회(BFBS)에 보낸 서한의 일절은 이렇다.

그(서상륜을 가리킴--필자)가 2년 동안 노력한 결과 현재 70여 명이 넘는 세례 청원자가 있으며 그 가운데 몇 명은 주목할 만한 사람들입니다. 그가 개종시킨 사람들 중의 한 명이 세례받기 위해 함께 이곳으로 왔는데, 그의 말을 빌리면 그는 서울의 서쪽에 있는 한 도시에 ‘설교당’을 개설하였고 그곳에 18명의 신자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서울 남쪽의 한 도시에 있는 다른 한 개종자는 20명 이상의 세례 청원자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이 편지는 필자가 1986년 8월 영국 캠브리지 대학교의 중앙도서관에 있는 영국성서공회 고문서실(archives)의 편지철에서 발견하였다. 이 편지를 쓴 로스는 1882년에 성경반포를 위해 한국으로 갔던 서상륜이 1885년 초, 2년간의 사역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의 보고를 듣고 BFBS에 이같이 편지를 띄었던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필자의 ‘서상륜의 행적에 관한 몇 가지 문제’(《한국기독교와 민족의식》에 所收)를 참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서한이 미국계 복음선교사가 한국에 도착한 1885년 4월 5일보다 약 1개월 앞서 작성된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가 한국에 처음 수용된 것은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서가 아니고, 이들 복음에 자발적이고 민감하게 반응한 한국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점은 그 뒤의 한국 기독교의 성장, 발전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요인이 된다.

만주에서 성경이 번역되어 한국에 도입된 것과 함께 주목되어야 할 것은 일본에서도 비슷한 사실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1882년 말에 도일한 이수정(李樹廷)이 1884년에 현토한한신약성경(懸吐漢韓新約聖經)을 출판한 데 이어 1885년 초에는 마가복음을 한글로 번역, 출판하였는데, 이 무렵 첫 선교사로 한국에 부임하던 아펜젤러(H. G. Appenzeller)와 언더우드(H. G. Underwood)가 이것을 가지고 들어왔다. 이 점 또한 세계선교사상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일면이다. 즉 선교사의 도래에 앞서서 자국인에 의해서 성경이 번역, 보급되었다는 점이다.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이렇게 성경을 번역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이 그동안 쌓아온 불교 유교 등의 경전 번역의 전통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성경번역의 이러한 독특성은, 그 뒤에 보이는 성경연구에 대한 열심과 함께 결국 한국교회의 성장, 발전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한국기독교의 성격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선교사가 들어왔기 때문에, 그들은 한국에 입국한지 얼마 되지 않아 선교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수 있었다.

1885년 선교사들의 입국은 한국기독교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890년이 되기 전에 한국에는 100명 이상의 교인이 모이는 교회가 이미 두 개나 생겼다. 복음을 수용하는 한국인들의 열심과 사명감에 불타던 선교사들의 정열이 어우러져서 이룬 성과였다. 그 뒤 19세기말에서 1910년 국권상실의 기간동안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의 수가 “폭발적인 증가”(서명원 저, 이승익 역,《韓國敎會成長史》, 大韓基督敎書會, 1966, p. 53.)를 보이게 되었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중에 언급할 네비우스(Nevius)정책이나 권서들의 활동 외에, 다음의 몇 가지 부연적인 설명이 우선 요청된다.

우선 이러한 성장을 가능케 한 사회적 요인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한말’이라고 하는 시대가 처한 사회적 상황이 당시의 교회성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한국의 봉건사회가 안고 있는 내부적 요인을 지적할 수 있다. 그 요인으로서 전통적인 종교가 사회지도이념으로서의 위치를 상실했다는 점과 관료들의 부패를 흔히 거론한다. 조선조의 통치이념으로서 기능했던 유교의 성리학은 조선후기의 예론(禮論)논쟁을 야기시킨 이래 점차 공허한 이론으로 전락하였으며, 불교 또한 그 생명력을 상실한지 오래 되었다. 새로 수용된 기독교는 종교성향이 강한 한국인들의 공허한 심성에 파고 들 수 있었다.(이 점과 관련, 초기의 의료선교사로 왔던 C.C.Vinton은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Sept.,1894,p.838)에 기고한 Obstacles to Missionary in Korea에서 “우리는 (한국에서) 국가종교가 없다는 사실에서 아직도 또다른 이점을 갖고 있다”고 하면서 당시 한국의 종교적인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한편 조선후기의 누적된 파벌정치와 개항이후의 민씨 정권의 세도정치는 관료집단의 조직적 부패를 만연시켰다. 관리의 선발과 인사에서 공정성이 깨어지고 매관매직 현상이 노골화되었고, 권력남용과 뇌물이 횡행하게 되었다. 부정한 방법으로 획득한 관직은 더 이상 백성들을 위한 봉사의 직분이 될 수 없었고, 오히려 인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강탈하는 이른바 ‘가렴주구’의 수단으로 오용되었다. 이 때 생명과 재산을 위협받는 의지할 데 없는 가련한 백성들은 이 새 종교에 의지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서구세력과 함께 수용된 기독교와 선교사들이 잔학한 관리들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선교의 ‘제국주의성’과 한말 선교사의 ‘양대인화’(洋大人化)를 함께 거론해야 한다. 여하튼 한말에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회로 몰려든 것은 이러한 사회적 정황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는 점만 확실히 해 두자.(필자는 한말 기독교인의 입교의 동기로서 종교적인 것 외에, 치외법권적인 권리를 누리면서 ‘양대인’으로 행세하던 선교사들을 의지하여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으려던 민중들의 외세의존적인 동기도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런 점에 관해서는 필자의 “한말 기독교와 관련된 외세의전의 문제(1)(〈동방학지〉제61집,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89, 3.)와 한말 기독교인의 민족의식 형성과정“(〈한국사론〉제1집, 서울대학교 한국사학회, 1973. 5)참조하라.)

둘째는 대외적 요인으로 청일전쟁(1894~95)과 노일전쟁(1904~05)을 들 수 있다. 다음의 표에서 우리는 이 무렵의 교인의 증가추세를 읽을 수 있는데, 한말 우리나라를 사이에 두고 전개된 두 차례의 전쟁이 기독교성장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아래의 통계에서 우리는 1894~95년과 1904~05년에 교인들이 뚜렷이 증가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이것은 이 두 전쟁이 교인들을 증가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Park, Chung-Shin, Protestant Christians and Politics in Korea,1884~1980‘s ( A Dissertation of Ph.D.,University of Washington,1987) pp.50,59) 전쟁 중 교회는 마치 피난민 수용소와 같았는데, 이는 교회가 ‘외국인의 소유’로 간주되고 치외법권적인 영역으로 인식되어 외국인 특히 일본군에게 위협받고 있던 한국민중들이 그곳으로 찾아왔기 때문이다. 교회를 통해 보호받았던 민중들은 전쟁 중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교인들의 깊은 신앙을 보고 그 후에도 계속 교회를 찾게 되었다. 청일전쟁 중 가장 피해가 컸던 평양을 그의 선교지역으로 갖고 있던 마펫(S.A.Moffett)의 증언은 경청할 만하다.

교인과 그 가족들, 구도자들, 그리고 하나님이나 예수의 이름을 들어 본 정도에 지나지 않았던 자들은 박해와 그에 따른 형벌을 목격하고, 또 그같은 시련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은 교인들의 모습을 본 후에 사방에 흩어졌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예수교리의 소식을 전했다. 교인들이 정착하는 마을 마을마다 자기네 가족들을 모아 기도회를 가졌다. 전에는 냉소하며 교인되는 것을 저주했던 부모,아내와 자녀들도 이제는 말씀 전하는 것을 경청했고 하나님께 구해 달라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릅꿇고 기도했다. 그 중 상당수는 교회로 들어오기를 원했고 거의 대부분은 전도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한국기독교의 역사 I》, p. 257에서 재인용.)

[표2] 감리교와 장로교의 신자 통계

  감리교 장로교 총계
  세례 학습 세례

1893
1894
1895
1896
1897
1898
1899
1900
1901
1902
1903
1904
1905
1906

68
68
122
223
353
556
649
792
1,440
1,750
2,108
2,617
3,208
4,027

173
167
288
588
1,182
1,502
1,967
3,106
3,977
4,936
5,771
5,391
5,896
11,098

241
235
410
817
1,535
2,058
2,616
3,897
5,417
6,686
7,879
7,988
9,104
15,125

-
40
180
2,000
2,344
2,800
3,426
4,000
7,481
6,167
6,468
6,946
8,431
12,161

-
-
-
-
6,800
7,500
9,364
13,569
14,784
19,327
24,971
26,554
37,407
56,943

-
-
-
-
8,355
9,558
11,980
17,466
20,201
26,093
32,850
34,542
46,511
72,068

* 이 표는《한국기독교의 역사 I》, p. 254의 표를 재작성한 것임.
**일반적으로 통계는 당해 연도의 것이라기보다는 1년 전의 것을 제시하고 있음.

노일전쟁 때에는 이같은 교인증가 현상이 더 뚜렷이 나타났다. 전쟁 중 일본군은 군용지 확보와 경의선 철도를 부설한다는 명분으로 경의선 연변의 농토와 가옥 등을 강제로 수용하여 이 지역 주민들의 “태반인이 실소(失巢)에 처하여 길가로 쫓겨나는” 극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平壤監理報告書> 議政府訓令 제15호. 光武10년 5월 8일) 이렇게 일본군의 잔학성이 더욱 포학스럽게 나타났고 전쟁의 공포와 위험이 더 실감되었기 때문에 많은 민중이 교회를 찾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일전쟁 전후에 일본군의 포학성에 시달리던 거의 2만명의 의지할 데 없는 선천의 백성들이 교회로 들어왔다는 것은(James S. Gale, Korea in Transition(New York : Eaton & Mains, 1909), p. 195 "Last year in our station of Syenchun we had 6,597 adherents ; this year there are 11,943.") 그 표현이 과장되었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분위기를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을 준다.

셋째는 일제에 의해 국권이 강탈당하는 민족적 상황을 들 수 있다.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일제는 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군대를 해산하였으며, 행정권·사법권·경찰권 등을 차례로 빼앗아 갔다. 주목되는 것은 이 기간동안에 ‘대부흥운동’과 ‘100만명 구령운동’(Million Souls for Christ)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당시의 민족적 위기를 두고 부흥집회에 참석한 한 지방관리가 “지금 우리는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는 길 외에는 달리 아무 도리도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고 선교사 샤프(C.E.Sharp)가 증언했듯이(장희근,《韓國長老敎會史》, 亞成出版社, 1970, p. 101.), 한국 민족의 절망적인 상태가 이러한 교회성장의 새로운 계기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한국교회에 성령강림을 체험케 했던 이 부흥운동은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보다는 죄의 깨달음과 용서를 체험케 한 영적 신생과 성결에 더 큰 의미가 부여되고 있다. 대부흥운동기간에 교회의 양적 성장에 대하여는 엇갈리는 평가가 있어 쉽게 단정하기 힘들다. 그러나 아래의 표는 당시의 성장추세를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된다고 본다.

[표3] 대부흥 운동기의 성장

  교회 선교기지 세례교인 학습교인
1905 321 470 9,761 30,136
1907 642 1,045 18,964 99,300
% 200 223.3 194.2 329.5

* C.S.Park,Protrstant Christians and Politics in Korea, 1884-1980's, p.58
** 앞의 【표1】이 정확하다면 이 통계는 1년 전의 것인 듯하다.

백만명구령운동은 10만에 달하는 전도일수와 수백만권의 소책자, 70만권의 마가복음이 투입된 거창한 전도운동이었다. 더구나 국가의 존망이 매우 위태로운 시기에 백만명이 그리스도에게 나아오기만 한다면 국권을 보존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세지는 이 운동을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운동이 진행되는 때에, 대구 등지에서 매일 저녁 비기독교인 천명에 가까운 청중으로 예배당이 가득 차고 4, 5백명의 개종자가 무더기로 생겨났다는 보고(James E.Adams, Annual Personal Report to the Board of Foreign Missions of the Presbyterian Church U.S.A.(Taegu, Korea ; 1910-1911) ; 서명원 저, 이승익 역,《한국교회성장사》, p. 79~80에서 재인용.)가 있었지만, 이 운동은 “교회들의 영적 생활에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교회의 큰 성장을 가져오지는 못하였다”고 지적된다.(서명원 저, 이승익 역,《한국교회성장사》, p.64) 이는 백만명구령운동이 그 거창한 구호만큼의 양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이 운동이, 앞서의 대부흥운동과 함께, 전도운동에 일대 전기(轉機)를 마련하게 되어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을 촉진시켰던 점은 간과할 수 없다. 한 연구에 의하면, 1905년~1910년간에 한국에서 선교하고 있던 미북감리회가 180%, 미북장로회가 250% 성장하였음에 비해 미남감리회는 700%나 성장했다는 것이다.(서명원 저, 이승익 역, 앞의 책 p.218)

 

2) 일제치하의 기독교회의 성장

일제의 강점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기독교인들 중에는 ‘매국원흉제거’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통해 민족독립운동에 나서는 사람도 있었지만,(한말 일제의 침략에 맞서서 무력적인 투쟁을 감행하여 ‘매국원륭’들을 제거하려고 한 기독신자들은 스티븐스를 제거한 장인환, 국내에서 이토오를 제거하려 한 정재홍, 만주에서 이토오를 제거한 안중근(천주교인)과 그와 협력한 우연준, 이완용을 제거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이재명과 그의 동지들을 들 수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필자의 “한말 기독교인의 민족의식 형성과정”(〈한국사론〉제1집 소수)과 그 논문을 보충한 “한말 기독교인의 민족의식 動態化과정”(《한말 기독교인의 민족의식》, 지식산업사, 1991)을 참고하라.) 한국교회의 주류는 평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선교사들이 일제 통감부의 의도에 따라 정교분리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한 데다가 대부흥운동과 백만명구령운동을 통해 한국기독교인의 강력한 항일민족의식을 누그러뜨릴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 한국교회는 비교적 조용한 성장을 기할 수 있었다. 장로교회만 하더라도 1907년에 노회를 조직하면서 7인의 한국인 목사를 한국교회의 지도자로 세웠으며 1912년에는 전국적인 총회를 조직하여, 비록 종교적인 기구이지만 식민통치하에서 가장 강력한 조직체를 갖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은 비교적 교육받은 식자층이어서 어느 정도의 비판의식을 갖고 있었고, 선교사들들과의 교감을 통하여 세계정세를 파악하고 그 움직임에도 일정하게 기맥을 통할 수 있었으며 또 한말 이래 강열한 항일민족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었으므로 강점 후 한국기독교계에 대한 일제의 감시와 탄압은 여러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기독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1910년대에 감리교와 장로교의 경우를 들어 한국 기독교의 성장이 둔화 내지는 퇴보했다는 지적(Alfred W.Wasson, Church Growth In Korea (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New York,1934) p.78.<In both the Methodist Episcopal and the Presbyterian churches,there is an increase in the number of missionaries and Korean workers and a falling off number of baptisms per year, and in both the total number of members and probationers in 1919 is less than in 1911.>)이 있다. 그러나 왓슨(Alfred W.Wasson)박사가 ‘정적(靜的)인 시기’라고 말한 1912~19년의 기간에도 평안남북도 지역에서는 교회의 성장이 침체상태에 빠진 것이 아니라 ”꾸준하고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던 것이다.(서명원 저, 이승익 역, 앞의 책 p.132, 167. 이 책 pp.64ff에서 저자는 왓슨 박사의 주장에 대한 반론을 펴고 있다.)

이러한 성장은 일제초기의 기독교탄압에 대해 한국 기독교인들이 국망(國亡)의 설움과 시련을 하나님께 의지하는 신앙으로 전환시켜 갔기 때문에 가능했다. 일제강점 후에 정교분리를 고수하고 있던 선교사들의 정책 때문에 민족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나타낼 수 없었던 장로교 총회가 대대적으로 비정치적인 복음화사업을 계획하고 이를 조직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전도대조직과 축호전도(逐戶傳道)를 본격화시켰던 것도 이 성장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이 점과 관련, 1910년대 일제의 강점과 거의 동시에 한국에 파송된 영국과 미국 계통의 감리교 장로교 교단이 전국의 선교지 분할을 완료하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축호전도는 이보다 전에 성서공회 소속의 권서들이 실시하고 있었으나, 교단적 차원에서 실시하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이다.) 그 결과 복음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조직적으로 노력한 그만큼 개종의 역사가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다.

국망 이후의 부흥운동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교회부흥운동이 민족의식과 일부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1910년부터 싹이 터서 1915년부터는 매년 부흥회로 발전하여 1950년경까지 계속된 강화도의 마니산 부흥회가 그 대표적인 케이스로, 강화도가 “가장 성공적인 선교” 지역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이 부흥회를 통해서이다. 처음 이 부흥회는 옹암교회의 새벽기도에서 시작되어 정기적인 부흥회로 정착하였고, 차차 강화도내의 여러 교회들이 참여하여 자연스럽게 도내 교회들의 정기행사로 발전하였다. 이 부흥회의 마지막 날에는 참석한 모든 교인들이 남여를 불문하고 돌 하나씩을 가지고 마니산에 올라가 참성단을 보수하면서 부흥회를 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두고, “감리교의 마리산(sic) 부흥회는 단군의 건국정신 즉 ‘하나님 숭배’와 ‘홍익인간’정신을 존중하는 동시에, 조상 때부터 하나님께 제사드리던 참성단을 보수 재건하는 것을 도리어 기독교인의 마땅한 의무로 확신했던 것이다. 단군정신과 기독교 신앙의 공존지대로서는 마리산 부흥회를 제일 먼저 꼽아야 할 것이다.”(전택부, ≪한국교회발전사≫ (1987, 대한기독교출판사) pp.231~233)고 한 것은 퍽 흥미있는 지적이라고 생각된다. 이 부흥회가 일제강점과 더불어 시작되었다는 것과 마지막 날에 마니산 참성단에서 부흥집회를 마무리했다는 것, 그리고 일제하의 전 기간을 통하여 계속되었다는 것은 이 부흥회의 민족의식적 측면을 표출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부흥회를 통해 영적으로 각성된 기독교인들이 전도에 힘썼을 뿐아니라 ‘한 동네에 학교 하나씩’이라는 구호아래 각처에 학교를 세우고 교육에 힘쓴 것도 바로 그들의 신앙이 민족의식에 기반했다는 증거라고 생각된다.

3·1운동은 복음전파의 새로운 통로를 제시하여 기독교가 “두번째 급속한 성장 시기”(Alfred W.Wasson, Church Growth in Korea, New York, 1934, p.98. 저자는 여기서 3.1운동 이후 1920~1924년간의 교회성장을 “Second Period of Rapid Growth"라고 하였다. 이는 1906~1910년간의 소위 대부흥운동을 ”Five Years of Rapid Growth"라고 명명한 것과 대조가 된다.)를 맞도록 만들었다. 그것은 우선 3.1독립운동에서 기독교인들이 보여준 놀라운 활략상과 관련이 깊다. 3.1운동 때, 기독교인들은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을 차지하였을 뿐아니라 이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때 곳곳에서 주동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 선교사들은 비록 정치적 중립이 요청되었지만 비무장 시위군중과 수감자들에 대한 일제의 대처방식에 강력하게 항의하였다.(Alfred W.Wasson, Church Growth in Korea, pp.101~102) 3.1운동에서 보여준 기독교계의 이같은 활동상은 많은 한국인들을 기독교에 대해 호의적인 자세를 갖게 하였다. 때문에 복음전파는 벌써 옥중에서부터 이뤄지고 있었다. 서명원(R.Shearer)이 이미 지적했듯이, 한국인들이 옥고를 치르는 상황 속에서도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고 있었다는 사실은 복음에 대한 이 민족의 민감한 반응을 보여준 것일 뿐만 아니라 그 후 몇년 동안에 이루어질 신속한 교회성장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고도 하겠다.(Roy E.Shearer, Wildfire: Church Growth in Korea, p.60)

1920년대에 들어 교회가 성장한 또 하나의 계기는 부흥운동이다. 이 때의 부흥운동은 그 전 (1903년과 1907년의 부흥운동, 그리고 1909년의 백만명구령운동) 과는 달리 특정한 개인의 카리스마적인 영적 지도력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 전에는 부흥운동의 불길이 집단적 신앙체험의 형태로 나타났지만, 1920년대에는 장로교의 김익두(金益斗)와 길선주(吉善宙) 같은 부흥사들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것이다.(길선주 목사는 40년 교역생활 중 설교 2만여회, 청강자 380여만명,그에게서 세례받은 자 3천여명, 개종자 7만여명을 내었고, 김익두 목사는 한국과 만주 시베리아에 걸쳐 776회의 부흥회와 설교 2만 8천여회, 새로 세운 교회 150여개소, 신유 인원수가 1만여명, 그의 설교로 회개하여 목사가 된 사람이 2백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전택부,《한국교회발전사》, pp. 227~231 참조).) 이들은 각각 ‘신유(神癒)와 기적을 수반한 부흥운동’ ‘내세지향적 부흥운동’을 불러 일으켰고, 이들보다는 뒤에 등장한 감리교의 이용도(李龍道)에 의해서는 ‘신비주의적 부흥운동’이 한국교회를 풍미하였다.(《한국기독교의 역사 II》, p. 187.) 주목되는 점은 길선주, 이용도 같은 부흥운동 지도자들이 그 전에 민족독립운동에 참여한 경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길선주는 ’독립협회‘ 평양지부의 지도자였고, 1905년 9월 장로회공의회에서는 그해 11월 전국교회가 나라위해 1주일간 기도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 이듬해부터 그는 거교회적으로 새벽기도회를 시작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그의 구국이념과 관련되었슬 것으로 생각되며 1907년을 전후한 시기의 대부흥운동은 바로 이 새벽기도회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보여진다. 그 뒤 길선주는 3.1운동 33인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고 옥고를 치룬 후 부흥운동가로 활동하게 된다. 이용도도 3.1운동때 송도고보 학생으로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2개월간 구금되었고 1920년에도 ’기원절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체포되는 등 1924년 봄 감리교협성신학교에 입학하기까지 4차례에 걸쳐 3년 이상 감옥살이를 했던 민족주의자였다(《한국기독교의 역사 II》, pp. 187~190).) 이 점은 1920~30년대의 부흥운동의 성격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 시기의 부흥운동은 단순한 개인적 신앙체험이나 교회성장만을 추구한 것으로 해석되기보다는 1920~30년대 한국이 처한 민족적 시련을 딛고 일어서려는, 말하자면 암울한 민족현실을 극복하려는 기독교신앙의 한 표현형태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한국기독교의 역사 II》, p. 187.)

1920~30년대에 부흥운동을 인도한 인물들은 김익두, 길선주, 이용도 외에 성결교회의 이명직과 정남수, 감리교회의 김종우, 유석홍, 신홍식, 장로교의 김인서 등이 있었다. 이 때의 부흥운동이 “암울한 민족현실 속에서 나름대로 민중의 희망을 선포”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말세’․‘재림’을 강조하는 타계적․내세지향적 성격과 ‘회개’․‘신생’을 주제로 한 내면적․신비주의적 성격은 당시 고양되고 있던 사회주의 계열이나 교회 내의 진보적인 청년계층으로부터 몰역사적이고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한국기독교의 역사 II》, pp. 189~192.) 당시 부흥회를 통해 정착된 한국 기독교인들의 ‘내세지향적’ ‘신비주의적’ 신앙성격은 오늘날까지도 한국 교회의 존재양식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이 사실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1920년대의 교회 성장에는 일제치하의 민족운동과 영적 능력을 가진 인물들이 주도한 부흥운동이 있었음을 보았다. 여기에 덧붙여 거론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감리교와 장로교가 교단적인 차원에서 추진한 복음 전도운동이다. 감리교에서는 이 운동을 ’백년전진‘(The Centenary Advance)이라 불렀고, 장로교에서는 ‘부흥’이라는 용어 대신에 이를 ’진흥‘(振興, The Foward Movement; 전진운동)이라 하였다.

1918년 9월, 감리교(남)에서는 선교사들과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모여 ‘백년전진’의 개괄적인 계획을 세웠다. 이것은, 미국 감리교회에서 1919년에 설립 100주년을 맞는 ‘미국 감리교 선교협회’(the Methodist Missionary Society in America)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5개년계획과 관련이 깊다. 개괄적인 계획은 “각 회의, 기관, 엪워드 연맹, 주일학교 및 선교사집단을 발전시켜 교회의 영적 자원을 증가시키기 위한 것으로“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1)중보기도 (2) 생명과 물질의 청지기 정신 (3) 개인전도 (4) 자급 (5) 선교헌신(Missionary giving)으로 정했다.(Alfred W.Wasson , Church Growth in Korea(New York , 1934), pp. 87~88.) 이 계획은 3.1운동으로 잠시 중단되었다가 1920년에 재개되었다.(감리교회의 ’백년전진‘에 대해서는 A.W,Wasson의 책 pp.105~124를 참조하라.)

장로교의 경우, 1919년 10월의 총회에서 ‘진흥부’를 신설하고 각노회에 3인씩 총 36인의 위원을 선정하여 진흥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록》제8회(1919) 회록 p.9.) 선교사 방위량(William N. Blair)이 책임자가 되어, 한국교회를 위한 새 생명활동으로 한국교회의 복음전파의 활동을 증가시키고 주일학교 교육에 새로운 자극을 주는(Annual Report of the Board (New York: 1923)--Roy E.Shearer, ibid, p.67) 것을 목표로 삼았다. 방위량은 한 특별한 캠페인을 위해서 열권의 소책자(tracts)를 준비하였고 모든 장로교 선교지부를 여행하며 집회를 인도하였다. 거의 4천여개의 장로교회들은 ’진흥운동‘을 위한 집회를 개최하였으며, 1920년 한해 동안에 5,603명이 신앙을 고백하고 교회에 들어왔다. 이 숫자는, 신자의 수가 약간 줄어들었던 그 전해에 비해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Roy E.Shearer, ibid., p.67)

3·1운동 후 한국교회는 일제의 압박과 사회주의 계열의 비판을 받으면서도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다. 1920년부터 1925년까지 5년간의 성장율은 30%에 달하였고 세례교인도 69,000명에서 89,000명으로 증가하였다. 1934년도 감리교와 장로교를 합한 교세는, 교회수 3,498, 한국인 전도인수 1,458, 선교사수 335, 교인총수 367,220(그 중 세례교인수 127,067, 세례아동수 33,102, 학습인수 44,692명이었다고 한다.)이었는데, 세례교인은 9년 전에 비해 거의 배이상 증가하고 있었다.

1930년 장로교 선교부의 보고서의 일절은 이렇다. “지난 해 동안 한국교회의 성장은 선교 역사의 처음 이 삼십년 동안처럼 그렇게 괄목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세례는 줄어들었고 새로운 신자들은 이전처럼 많은 수효로 몰려들지 않았으며 교회들은 전국에 걸쳐서 전날처럼 일어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의 양적 성장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교회의 질적 발전, 즉 교회가 그 조직과 자급(自給)과 진리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 발전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서명원 저, 이승익 역, 위의 책, p.79.) 여기서 우리는 1920년대 초에 보았던 것과 같은 활발한 양적 성장은 감지할 수 없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가장 큰 교단으로 등장한 장로교회의 경우, 꾸준하게(steadily)는 아니지만, 1928년부터 1938년까지 전체적으로는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교회핍박이 가속화되던 1938년 이후에는 그 성장이 저지되었고 2차대전이 발발하던 1941년 이후에는 세례교인수가 급속히 줄어들었다. 장로교의 경우 1939년에 세례교인 134,000명이던 것이 1942년에는 110,002명으로 줄어들었고, 5,000개의 한국 개신교회 중에서 1,200개가 문을 닫게 되었던 것은 이를 잘 말해 주었다.(Roy E. Shearer, ibid., p.207)

일제하의 혹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볼 때 한국교회는 세계에 유례없는 성장을 기록했다. 우리가 일제하의 한국교회 전체의 정확한 통계를 갖지 못해 장로교만으로 말한다는 것은 속단의 위험이 없지 않지만, 장로교의 세례교인 수로만 따진다면 1910년에 39,384명이던 것이 1942년에는 110,002명으로 나타나 32년간에 279.3%나 증가했던 것이다.(Bong-Woon Jeon, Pastoral Counseling for Church Growth (A Dissertation of D.Min.Presented to the Faculty of Asian Center for Theological Studies and Mission,Seoul and Fuller Theological Seminary,Pasadena,1987) p.208)

 

3) 해방 후 한국교회의 성장

해방은 한국민족에게 생존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일제 하에서 가장 많은 핍박을 받았던 한국교회로서는 신앙의 자유라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맞는 계기가 되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투쟁하던 ‘옥중성도’들이 출옥하여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면서 한국교회를 재건하는 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해방이 되기 전 옥중에 있던 기독교인들은 출옥 후에 한국교회를 재건하기 위한 방법으로 “대전도운동을 일으키기 위하여 전도자를 양성할 것”이라는 복안을 세운 바 있는데, 이것은 해방직후 신학교 설립과 전도운동으로 구체화되어 갔다. 해방이 되고 국토가 분단되자, 남과 북에서는 각각 교회재건에 착수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먼저 전도운동을 일으켰다. 1945년 12월 초에 열린 ‘이북 5도연합노회’ 는 6개항의 결의안을 통해 그 조직의 성격과 방향을 정했는데 그 중에는 해방을 기념하는 전도운동을 일으키자는 내용도 있었다.(그 결의안 제 5항에 “조국의 기독교화를 목표로 독립기념 전도회를 조직하여 전도 교화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한다.”는 내용이다.) 이 전도운동을 통하여 북한에서는 대대적인 성과가 있었다.(전택부,《한국교회발전사》, p.273.) 한편, 남한에서는 1945년 9월 8일 새문안교회에서 ‘남부대회’가 열렸으나 감리교회의 재건을 주장하는 측의 퇴장을 계기로 각 교파의 환원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어서 감리교는 재건․복흥파로 분열되었고, 장로교에서는 신사참배 회개문제와 ‘신신학’(新神學) 문제 등으로 고신(高神)과 기장(基長)이 각각 분열하게 되었다. 이 와중에서 한국교회의 성장을 위한 전도운동이 구체적으로 계획될 수 없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긴 하지만, 결코 바람직한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교단분열이 교회성장의 한 계기가 되었음도 부인할 수 없다. 1950년대의 한국교회의 분열을 두고 선교학자 맥거브란(Donald A.McGavran)의 다음 지적은 분열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학자의 말이라고만 간주할 수 없다.

종종 교회는 찢게지고 찢겨진 부분들은 자란다. 1950년대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은 비관론자들에 의해 암울한 날과 퇴보의 증거로서 폭넓게 인용되었다. 그러나 1950년대에 두개 이상으로 분열된 한국의 장로교회는 수백개의 교회 건물들을 건립했고, 1960년대에는 그 땅에서 1950년대보다 훨씬 많은 영향을 끼쳤다.(Donald A.McGavran, Understanding Church Growth(Grand Rapids : 1970), p. 13.)

교단의 분열조짐들이 들어나는 상황 속에서도 기독교계의 성장을 가져올 수 있는 외적인 분위기는 조성되고 있었다. 남한에서 미군정이 시행되고 그것을 이어 이승만 정권이 들어선 것은 기독교계로서는 성장의 좋은 기회를 만난 것이었다. 한국인들에게는 정서적으로 미국이 기독교 국가인양 인식되어 왔었고, 이승만이 기독신자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해방직후에 기독교계는 한국사회로부터 상대적으로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었으며 이러한 기독교적 정권의 등장은 그 후의 전도와 기독교 세력의 외형적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한국교회의 성장운동은 한국전쟁(1950~1953) 중의 여러 부흥운동을 통해 이루어져 갔다. 전쟁 중에 기독교회는 구국봉사활동과 피난민 구호활동을 벌이는 한편 교파별로 전도 부흥운동도 전개하여 큰 성과를 올렸으며 따라서 전쟁중에 교세가 증가하게 되었다.

먼저 장로교의 경우, 총회는 1952년을 전도의 해로 정하고 교인들을 총동원하여 ① 1월부터 3월은 자체의 신앙부흥 ② 4월과 5월은 개인전도 ③ 집단전도 ④ 교회지도 등의 단계로 나누어 부흥운동을 진행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954년에 장로교회는 선교 70주년 기념사업으로 전국 500 무교회 면(面)에 교회세우기 운동을 전개하였다. 감리교는 1953년 웨슬레 250주년 기념 대부흥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100교회 세우기운동을 실천했다. 성결교회도 1952년 3월에 대부흥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 한국전쟁의 발발에서부터 1955년까지 장로교에서 1,200여개의 교회를 설립한 것을 비롯하여 감리교 500, 성결교 250, 기타교파 100여개 등 전체 약 2,050개가 설립되었던 것이다.(전택부,《한국교회발전사》, pp. 314~315 참조.)

한편, 이 무렵에 범기독교세력의 성장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뒷날 한국교회의 질적 성장에 반드시 긍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만 평가될 수 없는 현상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쟁의 혼란기를 틈타, 서구계 여러 교파가 전쟁구호물자와 함께 대거 이식되었던 것이다. 1958년경 ‘루터교회’의 선교활동이 시작된 것을 전후하여, 1953년에는 ‘하나님의 성회’, 1954년에는 ‘그리스도 교회’와 ‘나사렛교회’ 및 ‘성서침례교회’ 그리고 1965년에는 ‘오순절교회’와 ‘하나님의 교회’가 각각 포교활동과 교단설립을 서둘렀다. 그 밖에 ‘모르몬 교회’와 ‘여호하의 증인’ 등의 이단 외래종파도 들어왔다. 이런 교파들이 경쟁적으로 포교활동을 벌이는 과정에서 한국교회는 세계에서 유례없는 수많은 교파들의 전시장으로 변화되어 갔을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기존의 교파들이 발견하지 못했던 교리와 운동방법을 통해 전도운동을 활성화해 갔던 점도 부인할 수 없다. 그 예로, 뒤에서 다시 보겠지만, 오순절 계통의 성령운동이 종래 합리성을 강조하여 상대적으로 냉냉했던 장로교 중심의 한국교회를 활성화시켜 한국교회의 급속한 외형적 성장을 가져오게 한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960년대에 들어 한국교회에 새로운 기풍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4.19혁명은 세계냉전질서 위에서 권력을 유지하던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리고 한국의 새로운 민족주의를 가능케 하였다. 미 군정 이래 정권에 유착하여 그 시녀노릇을 하던 한국교회, 또 외세의 조종과 자체의 지방색 등으로 분열과 파쟁을 거듭하던 한국기독교계는 새롭게 태어나야 했다. 한국교회의 새로운 각성은 그 때까지 민족 앞에 보였던 분열과 파쟁의 추태를 지양하고 단합된 모습으로 민족에 봉사하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일시적으로 교단 교파간의 연합(에큐메니칼)운동을 가능케 함과 동시에 민족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고자 하는 ’민족복음화운동‘으로 일치 정신을 고양시켜 나갔다.

1964년에 발기된 ’한국복음화운동추진회‘는 그 해 10월 김활란 박사의 주도로 75명의 기독교계 지도자들이 모여, “종합적이고 적극적인 민족복음화 방안을 검토”하고, 몇차례에 걸친 회합 끝에 ’삼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운동표어를 정하였다. 그 해 12월 3일 YMCA에서 발기인 총회와 창립총회를 열고 천주교와 희랍정교까지 포함된 21개교단 300명의 복음화운동 전국위원 을 중심으로 임원진을 조직하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1965년부터 본격화된 이 운동은 지도자 훈련,전도집회, 월간지 간행 등에 힘쓰는 한편 당시 세계적 부흥사로 알려진 중국인 조세광을 초청하여 서울과 전국 중요도시에서 집회를 가졌다.(조세광은 1965년 5월 1일부터 46일간 100회 이상 설교했고, 1967년 10월에 2차로 와서 부산기독교 연합집회를 인도했으며, 1969년에 3차로 와서는 ‘삼천만 가슴마다 그리스도를 심자’라는 표어로 진행되던 전도 부흥운동에 초청되었으나, 그의 학위문제가 제기되어 부흥운동의 열기가 주춤해졌다.) 민족복음화운동은 그 해 11월 5일 서울 운동장에서의 전국신도대회와 12월 30일 서울 후암교회(각 지방은 지역별로)에서의 민족복음화운동 봉헌예배를 드림으로 한해 동안의 운동을 마감하였다. 그 해에 동원된 인원은 1백만명이었다.

‘민족복음화운동‘과는 그 주최측이나 조직이 다르지만 1970년대에 들어와서 민족복음화를 위한 대전도대회가 있었는데 1973년의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와 ’엑스폴로 74‘가 그것이다. 특히 1973년의 전도대회는 ‘오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표어를 내걸었는데, 이는 1965년의 민족복음화운동 때에 내건 ’삼천만‘이 남한을 의식한 것임에 비해 이 때의 ’오천만‘은 남북한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내세운 표어에서 그만큼 ’민족‘의 폭이 넓지고 있었다. 이 대회 중 5월 30일부터 6월 3일까지 5일간 열린 여의도 집회는 연 320만명 이상이 동원되었고, 부산(29만 4천) 대구(13만 8천) 광주(32만) 대전(87만 5천) 전주(25만 5천) 춘천(4만 3천)까지를 합하면 총 442만 5천이 넘었으며, 결신자도 서울의 37,455명을 비롯하여 부산(5,233) 대구(1,161) 광주(3,082) 대전(1,178)) 전주(3,452) 춘천(1,339) 등 54,158명이 나오게 되었다.(양달모,〈한국교회 사경회와 부흥회에 대한 역사적 고찰〉(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77) p. 53.) 한번 설교에 3천명이나 회개하던, 초대교회 베드로의 설교 때와 같은 부흥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1977년 8월 15일부터 18일까지 여의도 민족광장에서 ’77민족복음화를 위하여‘라는 대전도집회가 열렸다. 1965년과 1973년의 것이 외국인 부흥사들을 초빙하여 거행한 것이라면 이 전도대회는 한국인 강사진들에 의해 추진된 것이었다. 1907년 대부흥운동이 일어난지 70년이 되는 이 해에 우리나라에 다시 부흥운동이 일어나야 하겠다는 간절한 열망이 이 집회를 계획토록 하였다. 발기취지문에서 그들은, 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명령에 따라 ② 복음전도만이 우리 민족을 살리는 길이므로 ③ 한국인이 주도하는 데에 의의가 있으므로 이 ’민족성회‘를 개최한다고 하였다. (김진환,《한국교회 부흥운동사》, p.295.) ”민족복음화를 위하여, 한국인에 의해서, 오직 성령으로“라는 주제 아래 연 인원 150만명이 동원되었던 이 집회는, ”첫째, 일체 외국의 도움이 없이 이 집회를 치루었고, 둘째, 금식을 선포하고 밤낮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도 자리를 뜨지 않은 교인이 수십만명이었으나 한건의 사고도 또 환자도 발생치 않았으며, 셋째, 8만 명의 결신자가 있었고, 넷째, 상설 국제선교 협력기구가 탄생했다“는 것이 특기할 만한 것이라고 지적되고 있다.(양달모, 위의 논문., p.54)

1984년경, 종래의 선교사(宣敎史)적 개념에 따라 한국기독교가 ‘선교 100주년’이 된다고 하고 있을 때, 한국의 기독교인이 천만에 이른다는 말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실제로 당시의 통계가 보여주는 것도 그 수치에 가까왔다.

[표4] 한국기독교 교세

연도 교단 교당수 교직자수 신도수 참고
1982 - - -

7,567,830

기독교문사 집계, 1982
1985 - - - 6,489,282 정부통계, 1985,11,1 현재
1987 74 30,321 48,334 10,337,075 기독교문사 집계, 각교단 제출자료
1989 87 29,820 55,989 10,312,813 종교단체제출자료 집계, 1989,6,30
1990 - 35,689(교회수) 56,286 12,091,837 문화부 <한국의종교,1990.12> 및 각교단 제출자료 종합

위의 표에서 우리는 먼저 통계의 신빙성에 강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우선 1982년과 85년, 87년과 89년의 신도수를 비교할 때 감소현상이 보인다. 아마도 그런 현상은 실제 신도수의 증감 때문이라기보다는 서로 다른 기관이 다른 기준 위에서 조사했다는 점과 취합한 자료에 일관성이 없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일 것이다. 그런 점들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한국교회는 1987~89년 어간에 1천만을 돌파한 것은 거의 틀림없다고 보인다. 이와같은 성장은 앞서 말한 민족복음화대회 등 대부흥집회가 그 선도적 역할을 감당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밖에도 다음에서 지적할 몇가지 성장의 잠재적 및 실제적 배경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각 교단들이 취했던 교회성장 정책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에서는 1970년에 이미 5천교회 150만 신자 확보를 목표로 하는 3차 5개년 계획을 수립하였는데, 이 운동은 매년 3백교회를 새로 개척, 설립한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이 끝날 무렵인 1974년에 639,605명이던 신자가 1977년애는 811,737명으로 증가하였는데 3년간 172,132명이 늘어 매년 평균 57,377명의 새 신자가 생겼던 것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측)에서도 1975년에 교세확장을 위해서 1만교회 증설을 목표로 한 10개년 계획을 수립한 바 있었는데, 이 계획 실행시기는 그 3년전인 1972년에 607,870명이던 신자수가 1975년에는 668,618으로 불어나 매년 평균 20,249명의 신자가 증가되고 있던 때였다. 예수교장로회측의 이런 교회성장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성장이 뒤지고 있던 감리교측도 1975년 총회에서 ‘5천교회 100만신도’ 운동을 제창하고 나서게 되었다.

각 교단의 교회성장정책은 때로 그 실행면에서 목사후보자들의 강인한 훈련과 성취욕을 요구하였다. 예를 들면, 1980년대를 전후하여 몇몇 교단은 내규에 신학교를 졸업한 목사후보생이 목사안수를 받기 위해서는 최소한 3년간의 단독목회 경력을 요구하는 의무조항을 두었다. 그 결과 이곳 저곳에 개척교회가 많이 일어나게 되어 교회성장에 전기를 마련한 점도 없지 않았으나, 훈련되지 않은 목회자들과 자립적 토대가 튼튼치 못한 교회들을 양산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도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기독교의 외형적 교세는 확충되었을런지는 모르나, 사회에 대한 교회의 이미지와 목회자 윤리는 말이 아니었으며, 이것은 1990년데에 들어 교회성장 둔화의 한 요인이 된다고 생각한다.

1980년대에 이르러 교회성장이 이루어진 것은 전두환 군부독재정권의 출현으로 비판세력이 전면적으로 봉쇄당하는 상황에서 종교심의 내면화와 보수화의 경향이 짙어지고 있었던 점도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도자들은 아파트군을 찾아 들어가, 이제는 경제적 기반도 어느 정도 구축했을 중산층 가정주부들을 상대로 성경공부를 활성화시키고 다양한 교재를 개발하여 심령의 공허를 메꾸어 가기 시작했다. 여기에다 이들의 현실도피적 종교심리를 해외선교의 열심으로 집중시켜 나갈 수 있게 만들어 갔던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1980년대의 학원내의 파라처치(parachurch)운동과 보수, 복음주의 계통에 의해 끈질기게 추진되어 온 학원 성경공부운동도 범기독교 세력의 성장에 공헌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에 와서 1970~80년대에 진보,보수로 양분화되어 갔던 한국 기독교계를 두고, 당시 진보계통이 인권보호와 반독재투쟁 등 사회구원적,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고 있을 때에, 보수측이 개인구원의 차원에서 국내전도와 해외선교에 힘썼다고 일반적으로 평가되는 것은 이런 문맥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1980년대에 한국교회의 성장을 설명하는 데에 빼놓아서는 안될 요소가 있다. 그것은 ‘오순절’계통의 성령운동이다.(한국성령운동의 과정과 그 문제점에 대해서는 유동식 외 편,《한국교회 성령운동의 현상과 구조》, 크리스챤 아카데미 대화출판사, 1986 참조.) 1950년대 6.25전쟁의 때에 소개된 오순절계통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 것은 1960년대로서 그것이 한국교회에 불러 일으킨 역할은 과소 평가할 수 없다. 이들의 성령운동은 뜨거움을 바탕으로 신유의 은사와 물질적 축복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나서 경제적 번영과 불안으로부터의 해방을 갈망하는 한국인들에게 큰 충격과 매력을 주고 있었다. 한편 6.25전쟁의 참상을 어느 정도 벗어난 후 1960년대 초에 군부정권이 ‘조국근대화’를 부르짖으며 경제부흥을 목표로 성장정책을 추구할 그 때에 기독교계에서 성령운동이 본격화되었던 것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닌듯 싶다. 왜냐하면 기독교계의 성령운동은, 그 무렵 한국 사회에서 ‘새마을운동’을 통하여 고취했던 “하면 된다”라고 하는 새로운 신념을 격려하는 한편 그것을 확산, 심화시키는 종교적 열정으로서의 역할도 감당했던 것으로 풀이되기 때문이다.

 

4) 한국교회의 성장을 가능케 한 요인(이 점에 관해서는 필자의 <한국 교회의 성장과 그 요인에 관한 일 연구>(靑坡淑明史論 창간호, 1993) 참조)

① 수용과 함께 전개된 한국의 복잡, 다기한 위기적 상황을 들 수 있다.

② 네비우스정책과 그것을 구체화하여 추진한 일련의 선교 사업과 교육 의료 등에 연계된 선교 사업의 효율성을 들 수 있다.

③ 복음화를 위한 한국 기독교계와 교회들의 계속된 관심과 노력과 1960년대 이후의 성령운동을 들 수 있다.

④ 한국 기독교의 ‘성경기독교’(Bible Christianity)적 성격을 들 수 있다. 한국 기독교는 선교사 입국에 앞서서 성경을 먼저 번역하고 번역된 성경을 수용하여 교회 성장의 확실한 기초를 마련하였다. 성경 보급의 열성과 성경 공부(査經會)의 열심은 선교사들이 한국 기독교를 ‘성경기독교’로, 한국 기독교인들을 ‘성경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Bible-loving Christian),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Bible Lover)으로 부르게 했다. 영의 양식인 성경을 제대로 공급받았기 때문에 세계 선교사상 유례없는 교회 성장을 가져왔다고 하는 것은, 한국 교회 성장의 가장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라이면서, 성장둔화의 대안을 생각해야 하는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이기도 하다.

 

3. 한국교회 성장둔화의 요인

1990년대 들어서서 한국교회의 성장 둔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이구동성으로 걱정하고 있다.(전용재, <성장과 중화의 분기점에 선 한국교회>(《기독교세계》1997.2. p.11)에는, 국민일보 부설 교회성장연구소가 발표한 다음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한국 교회는 1960-70년에는 연평균 증가율이 41.2%에 달했으나 1970-80년에는 12.5%, 1980-90년에는 연 4.4%로 되었으며, 1991년부터는 성장 자체가 둔화되었다는 것이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 교회수가 27,190개에서 358개가 줄었고 교역자수도 400명 이상 줄어든 것으로 집계되었다고 한다. 1990-95년 사이에 교인수의 증가율은 오순절교단인 기하성이 0.5%, 예장통합이 0.45%, 감리교 0.4%, 예장 합동이 0.06% 성장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성장에 따른 통계가 과학적으로 규명된 바가 없기 때문에 ‘둔화 현상’도 엄정한 과학적인 검증을 거쳐 보편화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1990년대에 들어서서 ‘둔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 검증을 거친 주장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역사적으로 규명하는 것은 아직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한국 교회의 성장 둔화의 문제에 접근하려면, 인과관계를 종합하고 펑가를 가해야 하는 역사학적인 방법으로는 아직 시기상조라고 생각하고, 성장둔화의 요인을 열거하는 것으로 책임을 면하고자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한국 기독교계에서 학술적인 토론을 거친 바 있었고 이 글도 일정하게 거기에 의존한 바 있음을 먼저 밝힌다.(이 점과 관런하여 다음 몇가지를 특히 참고하였다.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한국교회 성장 둔화 분석과 그 대책》, (제10회 숭실대 기독교문화 및 신학 세미나 자료집, 1996): 《목회와 신학》1997년 1, 2월호: 《기독교세계》1997년 2월호)

1990년대에 들어서서 종교인구가 감소하는 것은 비단 개신교만의 문제는 아니고 종교 일반의 현상이라는 사실은 앞에서 타종교와의 비교 분석을 통해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1990년대 한국교회 성장의 둔화 요인은 모든 종교에 해당될 수 있는 것으로, 거기에는 사회 일반적인 요인과 기독교회에만 적용될 수 있는 교회 내적 요인으로 크게 구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래에 거론하는 것은, 한국 교회 성장이 둔화되었다고 보고 그 문제를 거론하고 있는 여러 선학(先學)들의 주장을 종합하여 정리해 본 것이다.

 

1) 사회 일반적인 요인

① 경제 성장에 따른 긴장감의 해이: 앞에서 우리는 한국 교회가 성장과 발전을 거듭했던 과정과 요인에 관해서 그 시기별로 잠시 살펴보았다. 그 결과, 성장의 요인을 환경적 요인을 중심으로 따진다면, 한말에는 새로운 종교와 가치관에 대한 열망이 있었고, 일제하에서는 민족해방의 열망과 교회의 성장이 어느 정도 관계가 있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한 요인은 또한 해방 후의 성장에서도 어느 정도 감지될 수 있는 것이었다. 즉 6.25 이후의 어려웠던 현실과 민족 분단이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복음화하는 데에 큰 효과를 거두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와 함께 한국 교회가 급성장하는 시기는 ‘조국 근대화’의 기치를 걸고 경제적 성장을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을 때였음도 주목해서 좋을 것이다. ‘잘 살아보세’라는 슬로건이 방방곡곡을 누비고 있을 때, 기독교계는 ‘성령운동’과 ‘삼박자 구원’을 강조하는 한편 ‘삼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슬로건을 같이 내세웠다. 양측은 타이밍을 맞춘 듯 절묘하게 서로를 격려하고 서로에게 도움을 주었다. 경제가 일어나는 것은 ‘삼박자 구원’에서 강조하는 물질적 축복과 맞아 떨어졌고, ‘잘 살아보세’는 설교와 기도에서 강조하는 ‘금생(今生)의 복락과 내세의 천당’과 아우가 맞았다. 기독교는 그래서 1970-80년대의 국가의 기본정책을 종교적으로 뒷받침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던 것이다.(기독교는 이 때에 경제적 성장을 추구하는 국가의 정책에만 도움이 된 것이 아니고 유신체제의 유지나 제 5공화국 탄생에도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세력의 하나였다. 이 점에 관해서는 필자의 <과거청산과 한국 기독교> (神學思想, 1996, 봄호)를 참조.) 그 결과 무역고는 세계 11위를 마크하고, 1인당 국민소득은 1만 달러를 넘어섰으며, 약간 불안하긴 하지만 OECD에 가입함으로 선진국 문턱에 올라섰다. 가히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빨리 경제성장을 이룩했던 나라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가 정신적 풍요와 병행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그 물질적 중요는 정신을 황폐화시키는 종종 있어 온 예다. 현세가 배부르고 따뜻해지면 내세에 대한 간절함이 덜하거나 사라지게 된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의 기본적인 속성이다. 선민 이스라엘 백성도 살만 하면 하나님을 떠나 그 진노를 불러일으켰다. 우리보다 앞서간 서양의 여러 나라들이 극명하게 보여준 현상이다. 그들의 기독교회와의 관계는 우리 보다 훨씬 가까웠고 생활과 문화가 바로 기독교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의 교회는 더 이상 우리에게 성장을 가르쳐 주지 않고 있다. 따라서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면, 한국 교회 성장의 둔화현상은 기본적으로 경제성장의 여파에 있다고 생각한다. “배를 하나님으로 삼는다”는 것이 바로 경제성장이 이루어진 사회의 배교적 현상을 적실하게 가리킨 것이라고 본다.

② 종교의 기능적 대행물의 출현: 교회성장을 둔화시킨 사회적 요인의 하나는, 한국 사회에서 경제성장에 따라 교회가 수행해 왔던 기능을 대신해 주는 대행물이 급속히 발달하였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즉 여가산업의 발달(이원규,《한국교회의 사회학적 이해》, 성서연구사, 1992, pp. 242~243.)도 그 중의 하나다. 한국사회에서는 경제성장의 한 부산물로 1980년대 후반기부터 여가산업이 괄목할 만한 수준으로 발달하였다. 관광지, 휴양지, 오락을 즐길 수 있는 공간들이 급격히 증가되었으며, 특히 서울 근교와 지방 곳곳에 콘도와 호텔이 세워졌고 각종 위락시설, 유흥시설이 마련되어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자가용 승용차도 급증하였으며(1970년 29,000대, 1980년의 179,000대, 1990년에는 190만대, 1994년 4백 93만대, 1997년 7월 세계에서 15번째로 1천만대 돌파 예정), 도로망도 크게 확충되어 고속도로와 국도를 메우는 주말의 차량행렬과 행락 인파가 늘어났다. 이제는 주말이나 연휴를 맞아 고속도로의 정체를 걱정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로 되었다. 자가용과 여가는 서로 손잡고 인간의 향락성을 부추기는 반면 그 종교성은 점차 소멸시켜 가고 있다. 자가용과 고속도로의 발달은, 뒤에 보이는 비행기의 발달과 함께, 물질적 속도감을 만끽케 함으로써 종교적 정적성(靜寂性)을 빼앗아 버리고 말았다.

한편 1988년 이후 해외여행 자율화는 여유있는 사람들의 잦은 해외여행 증가를 불러 왔다. 통계청의 한국통계연감(1995)에 따르면 민간항공 수송인원이 국제선의 경우, 1986년에는 244만이던 것이 1990년에는 408만으로, 다시 1994년에는 606만으로 급증하였고, 국내선의 경우는 1986년 391만이던 것이 1990년에는 1,080만으로 1994년에는 1,780만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인간을 한층 바쁘게 만들었다. 분주해진 인간들은 휴식을 요구하게 되어, 종교적 수련을 쌓는 기회로 사용되어 왔던 정기 휴일은 이제는 휴식의 기회로 점차 바꿔지고 있다. 주말에 휴식이라는 명분으로 사람들을 집에 묶어두는 또 하나의 요인은 텔레비전이다. 가구당 텔레비전 보유율이 1975년의 30.2%에서 1990년의 97.2%로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텔레비전 시청율도 1977년 54.4%이던 것이 1993년에는 94.8%로 증가하였다. 1인당 평균 주당 텔레비전 시청시간도 1977년의 14.3시간에서 1993년의 17.5시간으로 늘어났다. 이처럼 여가산업의 급속한 발달은 교회참여나 헌신을 약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이유가 되어버렸다.

기성종교에 대한 대체물은 여가산업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민족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주체사상과 같은 이데올로기적 이념은 기성종교의 이념과 경쟁하거나 젊은이들에게는 그것으로 종교적 공간을 대체시키고 있으며, 정신의학과 상담기술의 발달은 커다란 정신적 치유효과를 보이면서 종교적 신유운동을 비웃고 있다. 실제로 비종교인이 종교를 믿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필요성을 못 느낀다(35.2%)”는 것이었는데(한국 갤럽조사연구소,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1990)) 그 비율은 5년 전의 12.7%보다 훨씬 높은 것이었다. 그들은 종교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을 다른 것에서 충분히 얻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③ 인구구조의 변화와 여성의 사회진출 확대: 1990년데 한국교회 성장둔화의 또 하나의 요인으로는 인구구조의 변화가 지적되고 있다.(이원규, 《한국교회의 사회학적 이해》, 성서연구사, 1992, pp. 242~243.-이원규,<한국교회의 성장과 둔화 요인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한국교회 성장 둔화 분석과 그 대책》, 제10회 숭실대 기독교문화 및 신학 세미나 자료집, 1996, p. 62)에서 재인용.)

[표5] (인구비 단위 : %)

나이 인구비(1980) 인구비(1994) 종교인구비(1994) 개신교인구비(1994)
15-19 11.3 8.8 40.8 55.4
20-29 19.0 19.4 38.7 47.7
30-39 12.6 18.5 51.8 37.9
40-49 10.5 12.1 57.5 31.8
50-59 6.5 9.1 58.5 25.2
60세 이상 6.1 9.0 57.1 24.0

(자료:한국의 사회지표, 통계청, 1995)

[표5]에서, 1980년과 1994년을 비교하면, 인구비에서 젊은 층 인구는 감소하고 장년, 노년층 인구는 늘어나고 있다. 젊은 층이 타종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고 그 대신에 장년, 노년층은 상대적으로 적은 개신교의 입장에서 보면 젊은 인구의 일반적인 감소와 장년, 노년인구의 일반적인 증가는 교회성장에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 왔다.

인구 구성의 문제와 함께 여성 취업의 확대가 종교 인구를 감소시켰다고 할 수 있다. 흔히 여성은 남성보다 더 종교적이다. 그 중요한 이유는 여성이 박탈감을 더 경험하기 때문이다.(Michael Argyle and Benjamin Beit-Hallahmi, The Social Psychology of Religion, London:Routlege and Kegan Paul, 1975, 제5장.-이원규, 위의 논문 p. 64에서 재인용.) 그래서 여성의 신도 비율은 항상 남성보다 높다. 여성에게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보상의 길이 상대적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즉 박탈에 대하여 종교적 보상 이외의 확실한 대안이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여성은 더 종교적일 수 있다. 따라서 남성과 비슷한 사회적 위치에 있는 여성의 종교성은 남성의 종교성과 비슷하게 낮아질 것이다.(Thomas Luckmann, 이원규 역, 《보이지 않는 종교》, 기독교문사, 1982, pp.36~37.- 이원규, 위의 논문 p. 64에서 재인용) 실제로 여성들이 취업하고 경력을 쌓는 일에 몰두할수록 종교에 대한 참여도는 감소한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따라서 1980년대 이후 늘어나는 여성의 취업율(1980년 522만, 1985년 583만, 1990년 738만, 1994년 800만)은 여성의 종교참여와 종교적 관심을 약화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고 이것은 교회의 성장둔화와도 깊은 관계가 있다.

 

2) 교회 내적인 요인

① ‘거품교인’의 증가에 따른 부작용: 1980년대 후반부터 일기 시작한 교회의 대형화 추세에 따라, 목회자는 물론 일반 교인들까지 양적인 증가에 치중하였다. 따라서 전도에 의한 실질적인 교인의 증가가 아닌 ‘수평이동’이나 ‘거품교인’들이 많이 늘어났다.(정훈택, “신데렐라의 유리구두-한국교회와 비교해본 교회의 본질과 성장에 관한 연구”, 제10회 숭실대 기독교문화 및 신학 세미나 자료집, 1996, pp. 99~102.) 여기서 ‘거품교인’이란 믿음이 없이도 교회에 소속된 사람들을 말한다. 또 이교회 저교회에 이중 삼중으로 통계에 잡힌 신자들의 수도 상당하여 해마다 정부에서 조사하는 개신교인의 수와 각 교단에서 정리하는 통계와는, 때로는 상당 부분 차이가 있었다. 앞의 [표4]의 통계도 조사기관의 차이에서 오는 불합리성이 있을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거품교인’의 유형도 여러 가지다. 우리 사회가 제면을 중시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할 수 없어 교회에 나가는 경우, 기복적 신앙에 의해 믿음없이 교회에 출석하는 경우, 실리추구적인 측면, 교육의 현장으로서 교회를 이용하는 경우, 친교를 위한 장으로서의 교회의 이용 등 이런 저런 목적으로 출석하는 교인의 수가 한국교회의 양적 통계에 일정부분 영햐을 미쳤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 이른바 ‘거품교인’들이 경제성장에 따른 여가문화와 다변화된 사회에 관심을 돌림으로 통계상 교인 수는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났다.

② 교회의 자기 정체성의 약화: 현대 한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이 점차 약화되고 있다. 한국 사회의 경제적인 성장은 상대적으로 교회의 부유화를 초래하였다. 거기에 따라 한국교회는 한편으로 점차 세속화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적인 한 조직으로 전락되고 있다. 교회는 구속받은 성도들이 모여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 봉사와 정의를 나누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실천하는 공동체인데 이러한 자기 정체성을 점차 상실하고 현실에 영합하여 세속적인 성취를 이룩하는 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 더구나 신자수가 천만명을 넘어섰다는 세과시(勢過示)적인 의식은 한국교회가 사회를 향하여 발언권을 강화시켜 갔고, 따라서 교회의 자기 정체성과 본래적인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신흥 ‘종교 귀족’을 탄생시키는 한편 ‘종교적 왕국’ 구축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③ 목회자의 영성 상실: 한국 교회의 목회자와 지도자들이 영적인 준비가 철저하지 못하다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목회자들은 교회의 일 때문에 혹은 세속적인 관심 때문에 매우 분주하다. 그 때문에 목회자는 기도하는 무릎을 상실하였고 성경과 신학을 심도있게 연구하기는커녕 연구할 생각조차 갖지 않아도 그 양심이 괴로움을 당하지 않게끔 되었다. 목회자 자신은 안일한 성경연구로 인해 기존에 나와 있는 성경공부책이나 외국의 베스트셀러를 번역하여 그대로 교인들에게 소개하는 대리자로 전락되고 있다. 심지어는 매주일 설교를 준비하여 공급하는 기관이 성업중이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 속에 생명의 말씀으로 육화(肉化)시키고 실천하는 구도자의 과정없이 그대로 교인들에게 설교자로 나섬으로 목회자 자신은 하나님 말씀의 대리자이기보다는 하나의 종교적 정보전달자가 되어 버린다.(이요한, “한국교회는 왜 성장둔화의 침체에 부딪혔는다”, 〈월간목회〉1992년 10월호, p. 104.)

거기에다 교회의 대형화는 목회자의 교인양육 사역에도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다. 한 목회자가 실지로 양육할 수 있는 교인의 수는 200~300명이 적당하다. 한국 교회의 대형화는 한 목회자의 감당할 수 있는 양육의 범위를 넘어섰고 목회자와 교인 사이의 인격적인 교류가 상실되면서 목회자와 교인 사이에 상당한 거리감이 형성되었다. 목회자와 교인 사이에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인격적인 신뢰관계가 형성되지 못하면 겨우 교회라는 울타리를 통해 묶여있던 신자들은 언제 그 밖으로 튀어나갈 지 모르는 불안한 조재가 되어버린다. 이것은 대형교회를 과시하는 한국교회에 성장둔화의 중요한 요인이다.

한편 한국교회에서는 무자격 교역자 양산의 문제가 없지 않다. 그 동안 무인가 신학교의 난립(조종남,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육 개선책”, 〈목회와 신학〉1991년 1월호, p.43. 이 지적에 의하면, 1991년 현재 인가받은 신학교가 50개, 무인가 신학교가 270개, 그리고 해마다 배출되는 신학생수가 6,500명인데, 그 중 학력인정 신학교의 출신은 불과 1,50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으로 인해 목회자의 자질이 함량 부족이라는 비판이 많았다. 신학 졸업자의 다량 배출은 최근 교회성장 둔화 내지 신자수의 감소 속에서도 교회수의 지속적인 증가와 연관된다. 한국교회 전체를 보면 1990년 35,869개의 교회가 1992년에는 42,589개로 7천여 교회가 증가(18.7%)(“한국교회 성장률 급감속, 개척교회 수는 증가”,〈크리스챤신문〉1996년 5월 18일 1면.)한 것처럼 되어 있는데, 이처럼 신자수의 감소 내지 성장둔화 현상에도 불구하고 교회수가 늘어났다는 것은 신학교 졸업자들에 의한 개척교회가 증가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교회의 영세화를 의미하고 자격미달의 교역자들이 개척교회를 난립하는 것과 직결되는 것이었다.(김영한, “한국교회의 성장둔화 요인에 관한 개혁신학적 연구”, 제10회 숭실대 기독교문화 및 신학 세미나 자료집, 1996, p.20.)

④ 서열화된 교회 직분구조와 리더십의 부재(전용재, “성장과 둔화의 분기점에 선 한국교회”, 〈기독교세계〉1997년 2월호 pp.12-13.): 한국 교회 리더십의 문제는 한국 교회의 자율적인 성장을 가로막고 있는 중요한 요인의 하나다. '섬김을 통해 이끈다'는 기독교 본래의 리더십이 왜곡된 데다 서열화된 직분관과 신자들의 영적인 타율성·의존성이 특히 문제가 된다고 하겠다. 모든 교인들은 교역자에게 매어 있도록 훈련받고 있으며, 영적인 문제를 자율적으로 해결한 수 있는 능력을 아예 갖지 못하도록 타율화되어 있다. 그래서 항상 젖만 먹는 어린애처럼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성숙한 교인들이 가져야 할 영적인 리더십을 갖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의 직분은 은사에 의해 부여된 기능적 성격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직분을 계층적 서열로 잘못 이해하거나 바꾸어 놓고 교회 공동체를 운영하려고 하고 있다. 그 결과 교회의 직분이 마치 세속적인 계급 모양으로 서열화되어 교회안의 민주적 공동체성은 형식에 불과하게 되었다. 한국 교회가 지도자의 직분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도 교회적 리더십을 혼돈케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는 각 개체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의 사명을 갖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각 성도는 교회의 사역자요 지도자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층화 내지는 서열화되어 있는 교회의 직분 구조에서 각 직분을 가진 성도는 그것을 사역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한 달란트 받은 자’ 모양으로 그 직분을 매몰시켜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따라서 한국 교회는 교회 성장으로 인해 각기 다른 은사를 받은 수많은 성도들이 공 동체를 이루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사들을 활용하는 데에 적지 않은 문제점을 노 출시켰다. 그런 은사의 활용은 새로운 선교의 가능성과 교회 밖에서의 기독교 공동체를 확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거의 불가능하였다. 예를 들면, 최근의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을 비롯한 기독교운동들이 교회로부터 거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백안시당하고 있는 것은 한국교회의 은사 활용과 그것을 통한 새로운 선교의 장을 여는 데에 얼마나 폐쇄적이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한국 교회에는 아직도 세속적인 리더십의 잔재가 그대로 남아있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친히 보여주신 리더십의 모형인 ‘섬김을 통한 리더십’을 교회와 사회 속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있다. 섬김을 통한 리더십의 실현은 교회는 물론이고 우리 사회의 새로운 선교의 장을 개척해 가는 데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한다.

⑤ 미래와 후세에 대한 투자가 부족한 교회: 교회의 대학부나 청년부에 대한 목회비전이 결여되어 있다. 어른중심의 교회운영으로 교육전담 목회자가 부족하다. 대부분의 교육목사는 교회행정과 교육을 함께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것은 한국 교회의 미래를 암담하게 만들고 있다. 수십년래 취해 온 그와같은 정책의 당연한 결과가 현재 맞고 있는 성장의 둔화로 이어지는 것이다. 주일학교가 이래서는 안된다고 걱정하던 것이 벌써 몇십년이 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는 미래와 후세를 위한 투자에 얼마나 열을 올렸던가. 미래를 위해 씨를 뿌리지 않았는데 그 열매가 없는 것은 당연하지 않는가. 1970-80년대에 교회가 성장했던 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해방 후와 6.25때에 한국 교회가 주일학교를 퉁해 뿌린 씨앗이 늦게나마 싹이 트고 열매를 맺었다고는 할 수 없을까.

그 동안 각 교회마다 성장중심의 목회를 강조하면서 그 성장의 목표를 헌금을 낼 수 있는 장년층에 맞추다 보니 장년 위주의 예배시간 중심으로 교회의 프로그램이 편중되었고, 후세들을 위한 주일학교 교육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하였다. 한국의 해외진출이 본격화되면서 교회는 다시 해외선교에 치중하게 되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이기 때문에 순종하기도 했지만, 개 교회가 자신을 과시하는 가장 가시적인 업적이 될 수 있었고, 목회자는 목회자대로 이 목표를 통해 교회의 응집력을 제고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되었기 때문에 해외선교에 치중했던 일면이 없지 않다고 할 것이다.

교회의 목표와 정책의 편중성은 상대적으로 주일학교 교육에 투여하는 비용이 저조하게 되었다. 투자의 부실은 과실의 빈곤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선교 초기, 한국의 일반 학교와 사회 교육이 저조하고 그 방법 또한 뒤떨어졌을 때에, 교회교욱은 이들을 선도하였고 때로는 교회교육의 방법이 사회에 전달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학교 교육과 직장 교육이 그 동안 괄목할 정도로 발달하고 선진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교육은 거의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였다. 이것은 세상이 변하는 데도 교회 교육은 거기에 신속히 대응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의 문화는 교회에 다니는 젊은이들에게도 재미를 끌고 있지만, 교회는 재미가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어 갔다. 부모의 강권 등으로 고등부까지는 억지로 교회에 다녔지만, 청년부로 올라가면서 그만두는 수가 점차 늘어나고 있는 것은 교회성장을 둔화시키는 요인일 뿐아니라 한국 교회의 미래에 대한 투자를 더욱 강화시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경고다.

⑥ 교단분열 및 개교회의 불화: 한국 교회의 분열과 불화는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던 것으로 교회의 성장을 둔화시키는 요인으로 지적할 수 있다. 한국 사회의 지방색은 일반사회의 지방색이나 파벌 의식이 조장되기 전에 시작되었다. 가령, 일제 하 서북지방과 경기 지방간의 긴장과 분열은 오래동안 계속된 것으로 이것은 일제하의 한국 교회의 일본에 대한 신사찹배투쟁의 전열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또 해방 이후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은, 그것을 아무리 미화시킨다 하더라도, 장로교회의 초기 선교지역의 분할과 관련시키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한국 사회의 지방의식이나 파벌의식이 구체화하기 전에 한국 교회에서 먼저 보였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 교회는 한국 민족 앞에 회개해야 할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다.

1994년 유선 텔레비전 방송국 허가를 당국에 촉구하는 개신교 보수교단들의 성명서가 각 일간 신문지 1면에 발표되었다. 이 때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간판을 가진 105개의 교단이 있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양식있는 신자들은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언필칭 사랑과 화평을 입버릇처럼 외우던 교회가 얼핏하면 분열하여 같은 간판을 건 105개의 장로교단이 있다는 것은 상식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1993년 기독교문사 발행의 《기독교연감》에 의하면 ‘대한예수교장로회’ 간판을 가진 교단만 58개가 등록되었는데, 실제로는 105개나 된다는 것이다.(김영한, 앞의 글, p.21) 이 가운데는 합동이 5,123교회, 통합이 5,045교회, 개혁이 1,565교회, 고신이 1,266교회, 합동정통이 1,044교회, 대신이 838교회, 합동보수가 807교회이고 그 밖의 교단은 500여 교회를 가진 교단이 1개, 400여 교회가 2개, 300여 교회가 8개, 100개 이하의 교회를 가진 교단이 16개나 된다고 한다.

이와같은 교단의 분열은 실질적으로 어떠한 교리나 신학의 차이라기보다는 교권을 장악하기 위한 분열로 보여지며 이는 비교인들에게는 물론 교인들에게도 교회에 대한 회의를 가지게 하고 종교적 안정을 구하려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실망을 주고 있다.

이와함께 이웃하고 있는 개교회끼리의 갈등과, 각교회 내의 분열·갈등도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갈등을 불러 일으키며 불신자들에게는 전도의 문을 막는 요인이 된다. 담임목사와 장로 및 교회 중직들과의 반목과 질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과 섬김을 강조하는 기독교 정신에 위배된다. 이러한 반목과 갈등을 계속하는 교회는 구성원으로 하여금이기적인 파당을 짓도록 하며, 사회적으로도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어 교회성장을 둔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⑦ 사회를 향해 섬김과 나눔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함: 양적 성장의 추세 속에서 그동안 한국 교회는 자체의 물적·인적 자원을 사회봉사나 구제에 활용하기보다는 대부분을 교회당 증축, 기도원이나 수양관 건립, 교회묘지 구입 및 교육관 건축 등 보이는 일, 대형화하는 일에만 치중했던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어떤 면에서는 그것이 한국 교회 성장을 부추기는 동인이 되기도 했고 성장의 결과로 과시하기도 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한국교회가 양적인 성장에 치중하면서 윤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한국사회의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이는 198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학생층의 기독교 선호도는 타종교에 비해 월등했으나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급격히 하락했다는 견해와 일치한다고 본다.(김영한, 앞의 글, p.25)

이와 함께 목회자 및 교인들의 윤리성 결여로 인해 사회적 신뢰가 실추되는 것도 교회성장 둔화에 큰 요인이 되고 있다. 한국갤럽이 1993년 5월에 제주도를 뺀 전국의 20세 이상 성인 남녀 1,500명을 상대로 실시한 <직업인에 대한 윤리수준 평가>에 의하면 정직성과 윤리성이 높다는 평가를 많이 받은 직업인은 천주교 신부(52.7%), 텔레비전 기자(45%), 스님(38.2%), 신문기자(37.4%), 교사(31.2%), 목사(30.9%), 교수(30.1%)의 순으로 나타났다.(“정직한 직업인 신부-아나운서-스님-기자 순”. 〈조선일보〉1993년 6월 26일 22면.) 이 점은 개신교의 위상을 하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그 반면 신부와 가톨릭의 위상을 높여 천주교회의 성장에 큰 역할을 감당했다. 목사의 정직과 윤리성이 다른 종교의 성직자보다 저조하다는 것은 다시 숙고해 보아야 할 문제임에 틀림없다.

⑧ 사이비 종파로 인한 종교에 대한 불신: 1991년의 오대양사건, 1992년의 시한부종말신앙, 1993년의 영생교주사건, 최근의 아가교사건 등 사이비 종말론이나 사이비종파의 발생은 항상 그 모체가 교회이다. 이는 한국교회가 자기 정체성을 갖지 못하고 윤리성을 회복하지 못함으로써 생기는 문제일 수 있으며, 이것이 직접적 원인이 아니더라도 교회가 말씀 중심의 기독교 본연의 모습을 간직하지 못하고 물량주의, 기복신앙, 반지성주의로 흘러가기 때문에 불건전한 사이비종파들이 그 속에서 번식했다고 생각한다.

 

4. 나가는 말 - 성장둔화의 대안과 관련된 문제(이 점에 관해서도 필자는 이미 발표한 <한국 교회의 성장과 그 요인에 관한 일 연구>(靑坡淑明史論 창간호, 1993)의 결론 부분에서 이 글에서 요약, 언급하고 있는 것과 같이 주장한 바 있으므로 참고하기 바란다.)

앞에서 언급한 성장과정과 성장둔화의 요인에 관한 문제는 그것을 뒤집어 보면 앞으로 한국교회가 취해야 할 방향이 될 것이다. 다음에 언급하는 것은, 앞에서 이미 언급한 성장둔화의 요인과 같이, 그 동안 성장에 가려진 그늘진 부분이 될 것이다. 이를 언급함으로써 현재의 성장둔화의 방향을 전회(轉回)시키려는 계기를 삼고자 하는 뜻에서다.

1) 한국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이원론적 신앙행태를 극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절박하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신앙과 생활이 분리되어 있어서 대체로 이중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즉 교회 안에서는 신자인데 교회 밖에서는 신자가 아니다. 그 이유는, 한국의 종래의 사상들이 갖고 있는 이원론적인 구조의 영향으로, 혹은 한국 교회 메시지가 이원론적인 폐단을 인식하거나 극복하는 데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영적인 생활과 세속적인 생활이 분리되고 하나님의 일과 인간의 일이 구분되며 하나님의 나라와 사람의 나라가 구분되는 상황에서는 신자들의 이 세상에서의 삶의 의미가 분명하지 않게 되고, ‘예수 천당’의 의미만 갖게 된다. 이런 신앙의 구조 속에서는 교회는 겟토화할 것이고 교회 성장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이원론의 극복문제에 대해서는 필자의 《한국 기독교와 민족의식》(지식산업사, 1991) pp.506-512 참조하라.)

2) 한국 기독교계 특히 목회자를 비롯한 지도자들의 회개운동이 선행되어야 한다. 목회성공의 척도를 수정하여 하나님 중심의 목회로 바꾸고, 지도자의 실천적인 삶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보여주어야 한다.(고전 11:1 참조) 교회의 지도자인 목회자들의 윤리성 회복이 시급하고 또한 영성을 회복하고 개발하는 것도 시급하다.

3) 연합하고 협력하는 교회(해외선교면에서도)의 상을 회복해야 한다. 조직면에서 같은 이념을 가진 교파가 하나의 교단으로 통합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사업이나 교류를 통해 화해, 연합, 일치하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또 지역 교회들이 재결합운동을 모색하고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와 가치관 선도에 연합하고 앞장 서야 한다.

4) 예루살렘형 교회(대형교회)보다는 안디옥형 교회(소형교회로서 나눠주고 선교하며 봉사하는 교회)형의 교회를 모델로 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초기 한국교회의 사회봉사 정신을 회복하여 구제사업을 위한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 (예, 소망교회-청소년 직업훈련원, 명성교회-안동에 병원 개설, 충현교회-장애인 복지시설, 광림교회-귀국한 사할린 동포들을 위한 요양원 건립, 순복음교회-불우청소년을 위한 엘림복지기관 건립) 교회 예산의 상당부분을 사회봉사와 선교프로그램을 위해 사용하는 습관을 개발, 지역교회로서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회 내에 사회선교위원회를 구성하고, 지역사회의 교회들이 연합체를 구성하며 시민단체들과 협력을 모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5) 교육하고 연구하는 교회상을 만들어야 한다. 특히 21세기를 위해서는 지금껏 등한시해온 교회 교육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하며, 다가올 사회 변화를 향한 교회의 프로그램을 선진적으로 개발해야 한다. 또 한국교회의 경험과 한국의 문화 상황을 바탕으로 한 신학의 수립과 기독교 문화의 창건을 위한 연구에 한국 교회는 과감히 투자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각종 연구소의 설립이 시급하다. 이 밖에도 ‘성장’ 구조를 ‘성숙’ 구조로 변화시키는 문제, 소그룹모임의 활성화, 목회자의 영성개발, 신자양육프로그램(제자훈련과 평신도 훈련목회), 평신도의 의식개혁(‘자기 교회’라는 의식을 ‘하나님의 교회’로 바꾸고 ‘만인제사장’ 의식을 키워주는 것 등), 젊은이들을 위한 프로그램 개발과 팀사역의 실시(“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열정으로 교회를 변화시켜라”,〈목회와신학〉1997년 1월 제리버틀러 목사와의 대담 내용.) 등을 손꼽을 수 있다.

6) 한국 교회 성장의 섭리사적 의미를 숙고하면서 민족통일과 세계선교에 대비해야 한다. 예루살렘 교회가 하루에 3천명씩 회개할 정도로 성장하고 성도의 교제와 성령운동에서 그렇게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행 1:8절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하여 흩어지거나 나누려고 하지 않았다. 그 결과 큰 환란을 당하고서야 그 말씀을 순조하게 되었다. 한국 교회도 더 이상 하나님의 매를 맞기 전에 한국 교회를 성장시킨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순종하는 것이 절대 필요하다. 민족의 화해와 나눔, 평화통일을 위해 힘쓰고 통일 후 이질화된 남북사회를 화해시키며 중재자가 되는 교회로서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기 위해 미리 준비해야 한다. 또 해외선교를 지속적으로 강조, 실천함으로써 세계를 향한 한국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되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외국인 근로자들에 대해서도 해외 선교 이상으로 물심 양면 깊은 관심과 정력을 쏟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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