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04/28) 장로교정치제도 심포지움장로교정치제도 심포지움

I. 서론

대부분의 칼빈주의 개혁파교회는 칼빈(John Calvin)을 장로교 정치제도의 원조로 인식하고 있다. 개혁파 신학자들도 이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이다. 이들이 전통적으로 이러한 견해를 갖게 된 이유는 개혁파교회의 산실인 제네바(Geneva)에서 칼빈이 장로정치제도를 실시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빈이 장로정치제도를 독창적으로 창안했거나 발견한 것은 아니었다. 칼빈 이전에 혹은 동시대에 이미 장로정치에 대한 시행이 다른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시행되었다. 칼빈은 제네바 종교개혁 때 이들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장로정치제도를 제네바교회에 적용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칼빈은 장로정치제도의 성경적 이론적 근거를 위해 성경과 초대교회의 자료를 인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장로교 정치제도의 기원을 밝히기 위해 칼빈에게 있었던 두 가지 정황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즉 역사적 정황(Historical Context)과 성경적 정황(Biblical Context)이다. 본 논문은 이와같이 두 가지 정황을 먼저 논한 후에 논자의 결론을 통해 장로교정치제도와 그것의 기원에 대한 재조명(reappraisal)을 평할 것이다.

 

II. 본론

1. 역사적 정황(Historical context)

칼빈이 장로 정치제도에 있어서 스트라스부르그(Strassburg)의 종교개혁자들, 특히 마틴 부쳐(Martin Bucer)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단순한 추론이 아니라 역사적인 정황에서 볼 때 확실한 것 같다. 16세기 개혁파교회의 장로정치제도를 처음으로 도입한 교회는 보헤미안-모라비안(Bohemian-Moravian)형제단들의 교회에서부터였다. 이들은 1467년에 장로들을 가톨릭의 교황감독제 대신 채택했으며 목사들을 장로들이 감독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 공동체에 장로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1877년 세계개혁파교회연맹(World Alliance of Reformed Church)의 에딘버러(Edinburgh)에 파송되었던 그들의 대표가 재확인 해주었다.

"나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장로교회인 형제단교회를 대표한다고 믿는다. 요한 칼빈이 태어났을 때 형제교단은 이미 장로들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 심한 것은 여자장로들도 있었다. 성실하고 경건한 장로들이 당시 장로교회의 중심 역할을 했다. 우리들의 교회가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증인이다. 교회가 존재했었고 존재해 왔고 지금도 존재하는 것은 장로라는 수단을 통해서였다."

새롭고 확고한 개혁교회의 장로제도의 구조를 가지고 있던 형제단 멤버들은 다른 종교개혁자들과 접촉을 가졌으며 일찍이 루터를 만났고, 1540년에는 스트라스부르그를 방문하여 부쳐와 칼빈도 만나 토론을 하였다. 토론 후에도 그들은 서로 서신을 주고 받을 정도로 관계가 발전하였다. 이와 같은 접촉은 스트라스부르그의 종교개혁에 있어서 교회의 정치제도에 아무 영향을 주지않고 지나가지는 않았다.

형제단과 더불어 이곳의 개혁교회 정치제도에 영향을 주었던 자는 바질(Basil)의 종교개혁자 오코람파디우스(Oecolampadius)였다. 그는 1530년경 바질에 새로운 교회조직을 만들기 위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마태복음 18:15~18절을 자신의 시대에 교회를 위해 필요한 성경적인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사도들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어떤 장로들"이 교회의 치리(discipline)를 조종하기 위해 임명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러한 조직의 의도는 개혁교회의 독립적인 치리조직을 위해 세속의 간섭을 배제하려는 것이었다. 이때 견책자(censors)들을 성경의 장로들과 동일시하였다. 시당국으로부터 교회의 독립적인 치리를 구성하기 위해 이미 서신을 통해 그는 제네바에 있는 쯔윙글리에게도 독립을 강력하게 강조하였다.

"교회의 권위를 가져가는 이러한 당국들은 적그리스도 보다도 참기 힘들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형제가 죄를 범하면 당국에 가라고 하지 아니하고 교회에 가라고 하였다."

그의 개혁은 그의 사후에 시 당국에 의해 폐지되었지만 그러나 후에 스트라스부르그와 제네바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부쳐에게 영향을 미쳤다.  부쳐는 1530년에 오코람파디우스를 만났으며 그는 오코람파디우스의 주장은 바람직하며 치리(discipline)는 교회를 위해서 필요함을 주장하였다. 부쳐는 오코람파디우스가 만들었던 위원회중심과 유사한 성격의 교회관리단(a board of Kirchenpfleger)을 1532년에 세웠다. 이 구성회는 목사들의 설교를 간섭하였고 신도들의 신앙훈련을 책임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1533년 열렸던 스트라스부르그 총회에서는 부쳐의 영향을 받아 스트라스부르그 교회규정(Ordinances)을 제정하였다.

1536년 부쳐는 "복음서의 주석"(Commentary on the Gospels)에서 일반적으로 치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확대시켰다. 그는 여기서 장로들을 특별히 치리를 위해 책임을 진 자들로 규정하였다. 참회(Cofession)까지도 장로들 앞에서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그러나 제3판을 내면서 성도들의 치리에 대한 수정을 가했고, 주로 목사들에게 이임되도록 규정하였다. 2년 뒤에 사목(pastoral care)에 관한 논문(De Vera Animarum Cura)에서 사목의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일임을 주장하였으며, 동시에 죄인들을 치유하고 영혼을 돌보기 위해 특별히 임명된 자들이 필요함을 또한 강조하였다. 여기서 그는 다시 지금까지 언급한 고린도전서와 디모데전서의 장로들의 경우를 교회의 치리의 중요한 기능그룹으로 주목하였다. 신약의 이러한 장로들의 그룹을 부쳐는 개혁교회의 치리를 위한 특정한 그룹의 교회지도자들과 일치시키므로 개혁교회의 장로단의 존재형성에 신기원을 마련하였다고 볼 수 있다.

칼빈이 스트라스부르그에 왔던 때는 1538년이었으며 이때는 이미 부쳐를 중심으로 개혁교회에 장로정치제도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던 상태였다. 칼빈은 3년간 이곳에서 프랑스 피난민교회에 사역하였고 스트라스부르그의 장로제도를 도입하게 되었다. 칼빈은 1541년 제네바에 다시 돌아와서 본격적인 교회개혁을 주도할 때 바로 이 장로제도를 시행하려고 시도함을 볼 수 있다.

역사적인 정황에서 볼 때 분명히 개혁교회의 장로제도는 칼빈에게서부터 처음으로 시작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칼빈 이전에 부쳐가 있었고, 부쳐 이전에 오코람파디우스가 있었고, 오코람파디우스 이전에 형제들의 개혁교회가 있었다.

그러면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이처럼 장로제도를 주장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공통적으로 치리(discipline)문제였다. 당시 교회국가(church state)의 정황에서는 교회의 치리를 시당국이 담당하고 있었다. 교회국가는 로마가톨릭과 결탁되어 있었고 개혁교회가 이러한 구조 가운데서는 제대로 교회개혁을 성취할 수 없었다고 보았다.  개혁자들은 교회를 제대로 치리하며 개혁하기 위하여 이러한 시당국의 간섭을 배제하고 감독을 도와 일할 수 있는 제 3의 제도적인 장치가 필요함을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 점이 개혁자들과 칼빈이 장로정치제도를 도입한 시대적, 역사적 정황이었다.

 

2. 성경적 정황(Biblical context)

칼빈은 1541년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제네바로 돌아와서 종교개혁의 박차를 가할 때 제네바  교회규정(Geneva Ordinances ; Draft Ecclesiastical Ordinances)을 제정하였다.  그는 여기서 오늘날의 장로교의 정치제도인 4가지의 체제(목사, 교사, 장로, 집사)를 제네바교회의 직제로 삼았다. 칼빈은 이러한 개혁교회의 직제를 창안(invention)한 것이 아니라 성경의 제도를 재발견(rediscovery)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칼빈이 교회의 장로직제의 성경적인 근거로 인용한 대표적인 성경구절은 롬 12:8("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하므로"), 고전12: 28("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웠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하는 것이다."), 그리고 딤전 5:17("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절이다.

롬 12:8절의 초기주해(1536)를 통해 칼빈은 다스린다는 직분을 신적 기원에 두며 동시에 정치, 사회적인 함의로 이해하면서 교회를 들어 세우기 위한 직책으로 이해하고 있다.

"주님은 일반통치자들의 직분을 그가 승인하고 또한 수용될 수 있는 것으로 증언하였을 뿐 아니라 가장 영광스로운 칭호들을 가지고 권위들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놀라웁게도 우리에게 그것을 맡겼다..... 하나님이 그들의 직책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사역을 맡겼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이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마치 모세와 여호수아가 사사들을 유다의 여러 도시에 임명했을 때 말한 것처럼)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재판 권한을 위임했다는 것 외에 무엇이 있을 수 있는가? (신.1:16~17; 역하.19:1).... 지상에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권위가 왕들이나 다른 통치자들 손에 있다는 인간적인 왜곡된 사고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이며 거룩한 제정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사람들의 일들을 다스리시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바울도 하나님이 주신 은사들 가운데 '다스림'(ruling)이라는 은사를 기입할 때 이 점을 분명히 가르쳤다.(롬.12:8) 그런데 이러한 은사들은 '교회를 들어 세우기'(upholding of church)위해 그리스도의 종들에 의해 사용되어져야 함을 가르쳤다."

그러나 1543년 이 구절을 확대 해석하면서 칼빈은 새로운 직분론을 이야기한다. 그는 목사 외에 교회의 영원한 직분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감독들과 더불어 도덕의 견책과 권징의 행사의 임무를 띠고 있는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있어야 함을 논한다. 그리고 그는 이들을 고전 12:28절에 나오는 통치자들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그 직무는 영속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고전 12장 28절에는 다스리는 자들은 내가 믿기로는 감독들과 더불어 도덕의 견책과 치리의 업무를 맡은, 사람들로부터 뽑힌 장로들이다. 로마서 12장에서 부지런하므로 다스리게 하라는 바울의 말을 아무도 다르게 해석할 수 없다. 초대교회는 그러므로 처음부터 잘못을 교정하는 재판권을 가진 거룩하고 엄정하고 경건한 사람들 가운데서 뽑은 원로회(senate)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들의 경험자체가 이러한 종류의 체제(order)는 한 시대에 국한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통치관리의 직분(office of government)은 모든 시대에 필요한 것이다."

칼빈은 여기서 특히 신약의 직분들에 대한 리스트를 언급하면서 다스리는 자들은 신자들 사이에 선택된 장로들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칼빈이 두 종류의 장로를 언급한 곳은 딤전 5:17절 주해에서였다.

"나는 통치(governments)라는 것을 치리를 위해 책임을 지고 있는 장로들(elders,seniors)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초대교회에서 사람들의 바로 세움에 있어서 장로들의 회(councils of elders), 즉 원로회(Senatus)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딤전 5:17절에서 장로들의 이중직제(duplicem ordinem)에 관해 언급할 때 이 점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통치는 인격의 무게와 경험 그리고 권위가 다른 사람들을 능가하는 장로들에 의해서 이행되어져야 한다."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은 또한 두 종류의 장로들을 구분한다. 즉 말씀에 사역하는 자들과 말씀 사역에는 종사하지 않지만 잘 다스리는 자들이다.(딤전 5:17) 의심할 여지없이 후자는 도덕적인 문제들을 감독하기 위하여 임명된 자들이며 그리고 교회의 열쇠의 권한을( power of the keys)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지금까지 다룬 칼빈의 장로정치제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다.

1. 칼빈의 장로정치제도는 부쳐를 중심한 스트라스부르그의 개혁자들의 영향 속에서 발달되었다.
2. 칼빈은 장로정치제도의 타당성을 일반 사회나 초대교회의 일반통치원리의 경험론 위에서 조명하였다.
3. 칼빈의 장로정치제도는 세속정치의 교회간섭에서 벗어나려는 의도에서 시작되었다.
4. 칼빈은 필요에 의해 장로정치제도의 성경적인 근거를 찾아갔다.
5. 초기에 태도의 교정(Correction of manners)을 위해 있었던 연장자들(Seniors)의 개념이 후에 목사를 도와 교회의 관찰(oversight)역할을 하는 장로의 개념으로 분명해져 갔다.
6. 초기 직분의 이러한 의무들은 점점 교회의 행정(government of church)의 정황에서 이해되어지므로 일반 원로회(Senate)의 개념들이 교회의 장로직의 것으로 전환되었다.
7. 교회정치제도는 성경과 연결하여 이해하고 권위를 갖게 됨으로 성경적인 규범들(norms)을 추적하게 되었다.
8. 칼빈의 교회직분의 개념은 사상의 발전(progression)으로 성숙해졌다. 그리고 이러한 진보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고 의식적인 고려의 결과였다.
9. 칼빈의 장로제도는 발명된 산물들(inventions)이 아니고, 재발견의 산물(re-discovery)이다.
10. 칼빈은 두 종류의 장로직분(장로목사와 치리장로)을 분명히 구분한다.
11. 칼빈은 장로직분은 감독과 함께 감독을 도우는 사역으로 인식한다.
12. 칼빈이 말하는 장로직분은 시당국의 간섭을 배제한다는 차원에서는 교회의 전권(the whole power of the keys)이 주어지지만 주로 교회내의 도덕적인 문제의 치리사역이다.
13. 칼빈은 말씀과 성례직분은 감독/장로들에게 국한시킨다.
14. 칼빈은 감독중심의 교회행정과 치리를 선호한다.
15. 칼빈은 교회직분의 이러한 제도는 영원히 필요한 직제로 보고 있다.

 

III. 결론: 장로정치제도의 기원에 대한 재조명(Reappraisal)

1) 성경적 조명

신약교회의 장로제도는 헬라문화 환경 속에 있었던 장로제도, 고대 근동지역의 장로제도, 그리고 구약의 전통을 계승한 회당(synagogue)이나 산헤드린(sanhedrin)의 장로제도 중에서 유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셋 중에서 신약교회에서 모방한 제도는 회당과 산헤드린의 장로제도였다. 그리고 둘 중에서도 회당의 영향이 더 컸던 것으로 나타난다.

"교회의 팽창으로 즉각적인 어떤 조직의 필요성이 있자마자 교회는 자신의 회당을 형성하였다. 에클레시아라는 용어는 처음부터 이방 지역으로부터 유래되었지만, 팔레스틴에 있는 크리스챤 공동체는 오랫동안 회당이라는 이름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호칭되었다. 이에 회당이라는 이름 자체를 가진 그들은 자연적으로, 필연적인것은 아니지만, 회당의 정상적인 행정제도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장로들의 체제(body of elders or presbyters)가 종교적인 예배와 부분적으로는 당시 사회의 번영을 위해 돌보도록 출범되었다."

신약교회에 나타난 장로제도의 적용에 있어서 오늘 장로교회의 문제가 되는 것은 감독(목사)와 장로와의 관계이다. 감독/목사와 장로와의 관계는 교회직분을 이직분론으로 보느냐 삼직분론으로 보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다. 그러나 두 경우 다 감독/장로와 장로의 관계는 직분상(office)의 구분이 아니라 기능상(function)의 구별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더 분명한 것은 신약교회의 직분론이 오늘날 각 교파들이 자신들의 교회직제가 더 성경적인 규범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확정된 상태는 아니었다. 감독/목사와 장로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관계를 신약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이해하려면 미완성된 일치와 조화의 관계로 보아야 할 것이다.

 

2) 재조명(Reappraisal)

칼빈이 장로정치제도를 시도한 정치사회적인 배경은 3 가지로 분석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로마가톨릭의 교황제의 독선을 방지하고, 둘째로는 급진종교개혁자들의 무정부주의(anarchism)적인 교회의 반제도화를 반대하면서, 셋째로는 교회의 치리와 행정관리를 제네바 시민정부의 간섭으로부터 독립시키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면 칼빈의 장로정치사상은 자신이 밝힌대로 영원히 고수해야 할 교회의 유일한 성경적인 제도인가? 여기에 칼빈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칼빈은 교회제도 문제에 대해 사실은 자유함의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칼빈은 고전 14: 34~37절을 주해하면서 교회의 외적인 통치나 관리조직(externa politia)은 정황이 바뀌었을 때 가변성이 있다고 하였다. 특히 칼빈은 도덕적으로 중성인(indifferent) 교회의 행정관리, 정책 등은 영원히 우리의 양심을 묶어둘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칼빈은 당시 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개혁교회의 성경다운 교회직제를 위해 신약과 초대교회의 장로정치제도를 도입하였지만 칼빈의 전체적인 교회직제관의 관점에서 조명해 볼 때 교회의 직제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 칼빈의 장로정치제도 사상을 더 잘 이해한 경우가 될 것이다.

장로정치제도의 성경적인 기원을 검토해 본다면 사도들은 분명히 장로정치제도를 초대교회의 모델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도나 초대교회의 장로정치사상은 역시 발명품은 아니고 헬라문화나 근동지역의 이방세계에 편재해 있던 장로정치제도를 모방했던지 아니면 회당이나 산헤드린의 장로제도를 수용한 것은 확실한 것 같다. 헬라문화와 근동지역의 관습에서 나왔을 가능성은 희박하며 쿰란공동체나 회당에 있었던 장로제도의 관습을 받아들였다는 주장이 더 타당한 것 같다.

사도들의 시대나 초대교회에서 목사와 장로와의 관계는 기능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분리나 구분이 가능하겠지만 직분에 있어서는 공유개념이 있음을 볼 수 있다. 김의환 박사의 주장처럼 분명히 사도시대에 장로제도가 있었지만 손병호 박사의 주장처럼 사도시대의 교회에서 분명하게 거론된 공식적인 행정적 직제는 장로직이 결여된, 주로 사도, 선지자, 교사요(고전 12:28), 그리고 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 혹은 목사와 교사(엡 4:11)였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 교사, 선지사, 전도사, 목사 등은 신약교회에 새로 생긴 직분들이기 때문에 동시에 그리고 자주 언급되었지만 장로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명할 필요가 없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리고 목사라는 개념 속에는 본 논문에서 지적했듯이 장로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생략했을 수도 있다.

장로의 직분이 다른 직분들과 불가분의 관계로 초대교회에 있었으며 또한 교회의 행정과 치리에 있어서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했지만 여전히 감독/목사를 보필하는 고문이요 원로격이였던 것만은 틀림없다. 이 점에 있어서는 칼빈도 마찬가지였다. 칼빈이 목사와 장로직제를 연계해서 설명할 때는 언제든지 장로는 "목사와 함께" 사역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칼빈은 로마가톨릭의 교황감독의 독재를 극복하기 위해 장로를 세우지만 여전히 장로와 함께 감독/목사 중심의 교회정치제도를 구상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감독 없이 교회가 없다"(no bishop no church)는 초대교부들의 교회론에 충실하였다.

칼빈은 감독/목사 중심의 교회체제(order)를 선호하지만 동시에 교회정치에 평신도 장로의 참여의 문을 열었다. 1400년간 성직자들에 의해 다스려왔던 교회가 평신도의 참여로 적극적인 전환을 한 것이 바로 장로제도의 기원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평신도장로들의 교회사역 참여는 바로 시정부의 간섭과 국가권력의 독주를 견제하면서 교권을 회복하려는 민주적인 제도였다. 칼빈은 장로회를 통해 시정부와 조화를 이루면서 교회개혁의 민주적인 방법론을 채택한 것이다.

그러나 장로정치제도의 역사적, 성경적인 기원의 이러한 고찰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말씀중심의 교회개혁과 복음전파를 위해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복음의 그릇을 창출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칼빈에게서 발견하게 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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