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스토예프스키 저, 김연경 역, 민음사, 2007-09-20, 593쪽, 각 9500원
나의 일생에 가장 감명 깊은 책을 꼽으라면 뭘 들 수 있을까? 교과서적인 대답은 성경이다. 성경은 나의 삶에 감명을 끼친 책이지만 여전히 나의 씨름의 대상이다. 신자로서 성경은 생명의 원천이다. 목회자로서 성경은 사역의 근원이다. 신약학자로서 성경은 탐구의 대상이다. 하지만 성경의 사상이 현실의 삶 속에 녹아들면서,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각각 성경의 가치관에 반응하며 살고 있다. 그 삶의 치열한 현장을 그리면서 여전히 성경이 말하는 세계관은 우리에게 유효한가의 질문을 던지는 책은 없을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러시아의 작가 표도르 마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의 마지막 장편 소설 "카라마조프 가(家)의 형제들"을 택하고 싶다.

이 책의 이야기 흐름은 단순하다. 무대는 1860년대 제정 러시아이다. 벼락부자 카라마조프 가문에 가족 간의 갈등으로 인한 부친살해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아버지 표도르는 물욕과 음욕(淫慾)의 상징으로 2번 결혼했다. 첫째 여자가 도망가자 온순한 고아와 다시 결혼했다. 맨 손으로 술집과 고리대금업으로 악착같이 돈을 벌여들인 지주귀족으로, 자신도 타락하고 주변사람도 타락시키는 냉소적인 인물로 '러시아는 돼지우리다'는 말을 스스로 서슴치 않는다.

맏아들 드미트리는 무절제와 호색으로 자신의 삶을 탕진한다. 작가에게 드미트리는 정형적인 악과 선의 혼합이다. 때로는 숭고한 종교성으로, 때로는 타락한 인간에 대한 연민을 나타낸다. 아버지에게 육체적 욕망의 포로가 된 그루센카를 사랑하여 자신의 약혼녀를 버리고 또 아버지와 갈등을 빚는 주색에 허우적거리는 러시아적 성격의 대변자이다.

둘째 이반은 대학을 졸업한 총명한 아들로서 이지적이며 비판적이다. 아버지와 형의 정욕에 얽매인 삶에 염증을 내지만 사실은 뒤틀린 세계관에 갇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전형적인 무신론적 지식인으로서, '신을 인정하지 않는 한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말로 그의 사상을 대변하는 허무주의자이다.

셋째 알료사는 집을 떠나 수도원에 살면서 세상의 구원을 위한 사제의 길을 걷고자 하지만, 자신이 신봉하던 스승 조시마 장로의 죽음으로 인해 수도원을 떠나는 순진무구한 영혼의 소유자로서 아버지에게 천사라고 불리우며 귀여움을 독차지 하지만, 알료사의 혈관에도 카라마조프가의 세속적인 피가 흐르고 있다.

마지막으로 스메르자코프이다. 그는 백치 여인에게서 난 사생아로 간질병을 앓고 있다. 머슴 생활을 하며 우직하게 일을 하지만 계산에 밝고 야수적이다. 아버지를 증오하는 마음이 누구보다도 강한데다 덧붙여서, 이반의 치열한 논리에 설복되어 아버지를 살해한다.

스메르자코프가 아버지를 살해하지만, 살인혐의는 아버지와 그루센카를 두고 다투었던 드미트리에게 돌아간다. 재판에 앞서 스메르자코프는 이반에게 당신의 사상에 사주를 받아서 아버지를 죽였다고 자백하고 자살한다. 이반은 재판정에서 자신의 사주로 인하여 아버지를 종이 죽였다고 광적인 항변을 하지만, 또 다른 연인 - 드미트리와 이반 사이에 연인 - 카테리나가 드미트리의 결정적인 살인혐의를 입증하는 편지를 재판장에게 제출하여 드미트리는 20년을 선고받는다.

각기 독특한 개성을 지난 작품인물들을 당시 러시아 사회를 대변하고 있다. 붓을 든 영혼의 설교자라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이 작품을 통해 말하려고 했던 메시지는 무엇인가? 아버지 표드로와 드미트리는 러시아 즉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대지(大地)를 상징한다. 물질과 정욕이란 탐욕에 사로잡힌 이 대지를 살릴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 그 사이에 이반으로 대변되는 무신론적 허무주의와 알료사로 대변되는 숭고한 신앙적 영혼이 갈등과 이해와 대화를 하고 있다. 그 사이에 이반의 사주를 받은 백치형 인간이 결국은 일을 저지르고야 만다.

나는 알료사와 이반이 한 광장의 카페에서 마주앉아 대화하는 장면에 주목한다. 이반은 자신의 사상을 '대심문관의 전설'로서 얄로샤의 신앙적 구원관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를 역설한다. 중세시대 때에 대심문관들은 마녀사냥과 억압으로 백성들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 때에 예수님은 다시 백성이 살고 있는 땅에 오셔서 그들의 삶을 만지고 위로하며 격려한다. 대심문관은 예수를 사로잡기를 명하고 "당신은 오실 필요가 없는데 왜 오셨소? 우리는 당신이 이루지 못한 떡과 권세와 평화를 주고 있는데..." 하면서 예수를 화형에 처할 것을 명한다. 이는 도스토예프스키가 러시아가 볼세비키 혁명을 맞이하게 될 운명을 예고한 대예언시이다.

위대한 고전의 힘은 시대와 상황을 초월한 영감과 교훈에 있다. 나는 이 책을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 가운데 놓고 싶다. 드미트리로 대변되는 정념의 사회, 목적과 수단을 가리지 않고 성공하고 멋있게 살아보려고 하는 이 세상에 진정한 대안은 무엇인가? 이반은 '대심문과의 전설'을 통해 니이체의 초인사상과 같이 강대한 권력의 통제를 주창한다. 이 길만이 진정한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본다. 예수는 인간을 영원히 사로잡을 수 있는 기적과 신비와 권위를 거부하였기에 실패하였다.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와 영혼의 자유의 길을 열어놓았기에 도리어 불행하게 만들었다. 인간은 오직 권력과 통제를 통해 인간적인 욕구를 채워줄 때만이 행복하다고 본다.

이에 비해 알료사는 영혼의 고결함을 추구한다. 사랑의 역설을 통해, 인간은 불합리하고 번덕스럽고 한없이 무능한 인간이 자유로운 선택과 고통, 그리고 수난을 통해 인간의 진정한 부활을 꿈꾼다. 과연 알료사가 우리 현실의 대안일까?

여기에 오늘날 교회의 선택이 있을 것이다. 우리의 현실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살고 있던 당시와 다를 바 없다. 교회는 이반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 알료사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 오늘날 한국교회는 힘이 있는 기독교를 추구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정부와 사회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줄 수 있는 권력집단으로서의 교회! 대형집회를 추구하는 그 밑바탕에는 우리는 이러한 힘이 있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욕구가 깔려있다. 그 때에 교회는 무언가 대안을 제시하고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고 본다. 교회는 권력과 통제를 통해 인간 영혼의 자유를 담보물로 잡고 성장을 향해 나아가기를 원하고 있다.

반면에 사랑과 자유를 위한 진정한 외침들은 어디에 있는가? 미국식 복음주의의 배후에 갈려있는 상업주의와 실용주의 노선에 진정한 신앙의 길을 부르짖는 소리들은 침묵하고 신음한다. 고난과 섬김을 통해 이 땅을 치유하며 회복하는 길을 열어놓았던 십자가의 예수는 다시 상업주의적인 대형화된 캠페인에 화형을 당하고 있는 한국교회가 아닌지!

다시 한 번 더 숭고한 이념에 어리석을 정도로, 바보 천치라는 소릴 들으면서도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낮아지고 비워주고 권리를 포기하며 성육신하여, 이 땅의 거민들을 섬길 때에, 기독교는 진정으로 부활의 영성을 회복하지 않겠는가? 십자가의 영성이 전제되지 않는 부활의 영성은 권력이다. 반면 부활의 영성이 전제되지 않은 십자가의 형성은 허무하다. 교회는 선택을 해야 한다. 19세기말 피폐해져가는 제정 러시아를 향해 외쳤던 한 예언자의 외침은 21세기 생존이냐 부흥이냐의 갈림길에 놓인 기독교를 향해서도 여전히 선택할 것을 요구한다. 진정으로 이 땅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뜻과 통치가 이뤄지기를 위해 우리는 어떤 길로 선택하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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