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민 저, 김영사, 2006-11-25, 612쪽, 25000원
취재를 하다 보면 가끔 목회자의 서재를 방문하게 된다.

목회자의 서재는 보통 사람보다 훨씬 많은 책들이 꽂혀있다. 대부분 수천 권의 책들이 가득 꽂혀있고, 사방의 책장이 모자라 일부는 상자 속에 있는 경우도 있다.

국내외의 주석서와 각종 사전류, 신학생 시절 읽었을 신학개론서와 히브리어 헬라어 책, 유명 목회자의 설교집과 예화집, 각종 잡지와 세미나 자료에 해외의 최신 서적까지 책 이름만 쭈욱 훑어도 공부가 되는 느낌을 받는다. 감탄스럽고 존경스럽다.

당회가 갖춰진 교회의 경우에는 목회자들에게 도서구입비를 지급하는 경우도 많다. 내가 만난 목회자들은 대부분 교회에서 받는 도서구입비보다 더 많은 돈을 들여 책을 사셨다. 목회자들은 실제로 책을 열심히 읽으시고, 책에서 얻은 지혜와 지식으로 목회 수준을 높이고 성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 밤낮으로 애를 쓰신다.

그런데 독서엔 약간의 함정이 있다. 책을 읽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체득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특히 읽는 책이 다양하고 많을 경우 그렇다. 유명한 베스트셀러라도 읽고 난 뒤 "내가 여기서 뭘 얻었지?" 하면서 공허감을 느끼는 경우가 꽤 된다. 이럴 땐 대부분 "그래도 많이 읽어놓으면 그게 내 안에 쌓여서 언젠가 밖으로 드러나겠지." 라며 스스로 만족하고 넘어간다. 무지의 바다를 책으로 열심히 메우다보면, 언제가 그것이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겠냐는 것이다.

일리가 없지는 않지만 비효율적이다.

다산, 조선의 멀티 플레이어

여기 20년 동안 500권의 책을 쓴 사람이 있다. 한 달에 2권씩 책을 쓴 셈이다. 대충 휘갈겨 쓴 것도 아니다. 임금님의 지시를 받아 써 올린 책이 부지기수다. 200년의 세월을 넘어 지금까지 널리 읽히는 책도 있다. 그는 다산 정약용이다.

그가 쓴 책은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다. 유학자로서 옛 경전의 뜻을 풀어 쓴 책부터 행정관리로서 국가의 경영과 행정, 관리의 몸가짐을 밝힌 책, 법체계와 적용을 검토한 법학 서적,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대동수경(大東水經)' 같은 지리학 서적, 수원 화성으로 유명한 건축학과 토목공학 기계공학 분야의 책, '마과회통(麻科會通)'과 같은 의학 서적, 시와 문장을 논한 문학 분야, 무기와 무예 분야까지 실로 상상을 뛰어넘는다.

다산이 어떻게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이렇게 많은 책을 쓸 수 있었을까. 그 비결을 밝힌 책이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이다. 책 제목은 '지식경영법'이지만, 학자나 경영인뿐만 아니라 지식의 우물에서 지혜를 걷어 올리기 원하는 목회자들에게도 꽤 유용한 내용을 담고 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지식에는 몇 가지 단계가 있다. 첫 번째가 사실이다. 단순한 사실, 단편적인 사실이다. 사실 확인이 되지 않은 소문은 아예 정보의 대상이 아니다. 두 번째가 정보다. 사실 중에서 알아놓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가공해 정리한 것이다. 세 번째는 지식이다. 지식은 정보가 모여 체계적으로 쌓아올려진 것이다.

이런 구분이 의미하는 것은 간단하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거다. 정보화 사회에서는 가공하고 정리되지 않은 것은 정보로서 가치가 없다. 무조건 책을 읽기만 해선 아무 소용이 없다는 의미다. 단순한 정보 중 꼭 필요한 뉴스만을 골라 자신만의 기준으로 분류하고, 체계적으로 모아 서로의 관계를 밝혀 정리해야만 비로소 지식으로서 부가가치를 생산한다.

다산이 다양한 분야의 책을 저술할 수 있었던 비결도 여기에 있다. 다산은 자신이 접한 정보나 체험한 내용을 일일이 주제별로 따로 옮겨 적어놓고 분야별로 모았다. 그렇게 옮겨 적은 내용이 한권의 책 분량이 되면 이를 체계적으로 다시 정리하고 앞뒤를 밝혔다. 사실을 정보로, 정보를 지식으로 꿰어가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다산의 책 중 가장 유명한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예로 들어보자.

그는 학자로서 역사책을 읽고 행정관리로서 현장의 행정 기록을 접하면서 유용한 사례가 있을 때마다 이를 적어 놓았다. 이렇게 정리한 내용이 수만 건이 되자 이를 12가지 주제로 다시 분류했다. 12가지 주제는 다시 6가지 세부 항목으로 분류했고, 각 항목마다 이에 맞는 사례를 덧붙였다. 목민심서의 72가지 항목이 이렇게 탄생했다.

목민심서를 쓰다 보니 특히 형법이 중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래서 이 부분만 따로 내용을 더해 새로운 책을 썼다. 이것이 '흠흠신서(欽欽新書)'다.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던 다산은 귀양지에서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는 훈장 노릇을 했다. 중국의 천자문을 가져다 가르치다 보니, 우리 아이들에게 맞지 않는다고 느꼈다. 기초 한자를 다시 분류해 명사 동사 형용사로 갈래를 나누고 비슷한 글자와 대조되는 글자를 짝지어 쓴 책이 '이천자문(二千字文)'이다. 또 옛 경전 중 어린이들의 공부에 보탬이 될 만한 내용만 추려서 '소학주천(小學珠串)'을 썼다. 주천(珠串)이라는 말이 바로 구슬을 꿴다는 표현이다.

이 책을 쓴 정민 교수는 책을 쓰는 과정에 다산의 방법을 적용했다. 책의 주제를 잡은 뒤 10가지 주제를 정하고, 각 주제마다 5가지 세부항목을 넣었다. 각 항목마다 다산의 글에서 해당되는 사례를 뽑아 제시했다. 50가지 항목은 어떻게 정보를 지식으로 꿰어낼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벌써 이 책의 50가지 항목을 누군가 요약해 놓았다. 우리가 다산과 비교해 얼마나 좋은 환경에 있는지 실감이 난다. 다산은 어렵게 책을 구해 일일이 손으로 메모를 해야 했지만, 우리는 책이든 정보든 너무나 쉽게 접할 수 있고 또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 편리하게 분류하고 재정리할 수 있다.

다산의 방법을 컴퓨터와 인터넷 시대에 맞게 적용하되, 이 책을 요약본만 찾아 읽는 우를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군가 요약해 놓은 것만 보고 이 책의 정수를 습득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반쪽짜리 설교 요약문만 읽고 설교를 다 소화했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산의 방법을 목회에 적용하면

이 책에는 다산이 어떻게 지식을 관리하고 축적했는가 하는 방법론보다 더 값진 것이 있다. 바로 다산의 문장이다. 정민 교수는 한문으로 씌여진 다산의 글을 우리말로 번역해 읽어준다. 글이 정갈하고 힘이 있다. 옛글의 향기가 살아있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이다.

"항상 안개와 노을, 강물과 바위, 그리고 지출(芝朮)을 향한 마음을 폐부에 젖어들게 하고 골수에 새기십시오. 또한 마음이 맑아지고 눈이 밝아져서 이치를 보는 것이 정밀하고 투철해져서, 자벌레가 푸른 것을 먹으면 몸이 푸르게 되고 누런 것을 먹으면 몸도 누레지는 것과는 같지 않게 될 것입니다." (책 521페이지)

우리가 설교를 들으면 설교의 내용 그 자체보다 거기서 풍겨 나오는 신앙의 향기에 더 취하듯, 다산의 글을 따라 읽다 보면 그의 지식보다 인간됨과 정신세계에 더 큰 매력을 느끼게 된다. 그의 인격에서 지식을 넘어 지혜를 배우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세상의 학문을 위해서 그토록 정진하는 다산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를 전하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노력했는지 돌아보게 된다. 실용적인 정보 활용법이나 진리를 추구하는 삶의 태도에서나, 교갱협 회원들의 목회와 설교에 신선한 도전이 될 만한 내용이 이 책 한 권에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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