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고 성취하는 길

▲ 오스 기니스 저, 홍병룡 역, IVP, 2000-09-13, 283쪽, 9800원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 세계에는 서로 대립적으로 보이는 것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면 하늘과 땅, 남자와 여자, 밤과 낮, 왼쪽과 오른쪽, 선과 악 등의 것들이다. 우리 인간의 삶에서 쉽게 접하게 되는 서로 대립되어 보이는 이러한 상반된 개념들이 세계를 지배하는 두 개의 통치 원리와 영역이 있다는 이원론을 낳게 하였다. 특별히 헬라 철학에서 이원론적 입장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래서 플라톤은 영원불멸한 영혼은 육신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다고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form)과 질료(matter)로 세계를 설명하였다. 이러한 이원론적 입장은 물질과 정신을 분리한 데카르트의 철학에서도 계속 이어져 왔으며, 데카르트 이후의 근대 철학은 이러한 철학적 이원론을 계속해서 전승하고 발전시켜온 역사였다. 그러나 이러한 철학적 이원론을 극복하려는 전위적인 노력은 쟈크 데리다의 해체철학을 통해서 성공적으로 시도되었다.

기독교의 복음이 유대의 국경을 넘어 헬라 지역으로 전파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헬라 철학의 이원론이 기독교의 옷을 입고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성경의 기본 원리는 단호히 이러한 이원론을 거부하고 있지만 기독교 진리 안에도 은혜와 율법, 믿음과 행위, 영혼과 육신,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 등의 상반되어 보이는 듯한 대립 개념들이 많아 이원론이 성경적인 것처럼 오해되고 수용되었다. 그 결과 많은 기독교 진리에 이원론적 원리들이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며, '소명'의 진리에도 세속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분리하는 이원론이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저자는 소명의 진리에 대한 이러한 이원론적 왜곡을 성경적 변론과 역사적 통찰을 통해 바르게 지적하고 극복함을 통해 소명에 대한 통합적이고 성경적인 바른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오스 기니스는 "소명에 관한 성경적 개념의 네 요소"의 분석을 통해 "일차적 소명"과 "이차적인 소명"을 구분한다. 첫째, 구약 성경에서 '소명'(부르심)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누구의 이름을 부르거나, 하나님을 부르거나, 동물을 부르는 등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이 단순한 의미와 관계 중심적인 배경이 결코 상실되어서는 안된다"(p.51)고 주장한다.

둘째, 구약 성경에서 부른다는 것은 이름을 붙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만들거나 존재하게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창1장에서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셨을(called) 때 이것은 단순히 어떤 것을 확인하기 위해 이름표를 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을 붙임을 통해 새로운 존재를 창조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택하신 백성들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붙이심을 통해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제정하시고 창조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소명이란 현재 우리의 모습 및 행위와 관련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장차 우리의 될 모습과도 관련된다."(p.51)

셋째, 신약 성경에서 소명은 구원과 거의 동의어로 쓰이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소명(부르심)은 하나님이 사람들을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되도록 그분에게로 부르신다는 의미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불러 자기 백성이 되게 한 것 같이 예수님은 12명의 사도들을 자기 제자들로 부르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부름받은 자들'의 공동체이다. 결국 구원이란 하나님의 결정적인 부르심이며, 따라서 소명이 종종 구원 자체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받은 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도를 따르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모든 사람, 모든 곳, 모든 것에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나타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사도 바울이 말했듯이,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아야"(골3;23) 한다.

소명에 관한 성경적 개념의 세 번째와 네 번째 요소는 일차적인 소명과 이차적인 소명의 중요한 기초가 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의 일차적인 소명은 그 분에 의한, 그 분을 향한, 그 분을 위한 것이다."(p.53) 그러므로 오스 기니스는 그리스도인들은 일차적으로 "누군가(하나님)에게 부름을 받은 것이지, 무엇인가(정치가나 목사 등)로나 어디엔가(도시, 빈민가, 선교지 등)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니다"(p.53)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이차적인 소명은,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주권적인 하나님을 기억하고 모든 사람이, 모든 곳에서, 모든 것에서 전적으로 그분을 위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살고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p.53) 따라서 우리가 목사나 선교사, 사업가나 정치가로 부름을 받았다고 말할 때 이것은 이차적인 의미에서의 소명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주신 여러 '소명들'(callings)이지 바로 그 '소명'(the calling)은 아닌 것이다. 이차적인 소명은 "하나님의 인도에 대한 개인적인 응답이자 하나님의 소환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다."(p.53) 그러므로 이차적인 소명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소명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일차적인 소명이 항상 이차적인 소명 앞에 오도록 분명히 해야 한다. 구원으로의 일차적인 부르심이 전제되지 않는 이차적인 소명은 개인의 야망이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소명의 진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모든 이가, 모든 곳에서, 모든 것에서' 삶 전체를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반응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p.54)라고 결론 내린다.

그러나 중세 카톨릭은 세속적인 것을 희생시킨 채 영적인 것을 격상시키는 영적인 이원론을 발전시켰다. 그래서 가이사랴 주교였던 유세비우스(Eusebius)의 <복음의 증거>(Demonstration of the Gospel)에서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완전한 삶'과 '허용된 삶'이라는 '두 가지 생활 방식'을 주셨다고 주장하였다. 완전한 삶은 묵상을 중심으로 한 영적인 삶이고 허용된 삶은 생활 중심의 세속적인 삶이다. 사제와 수도사와 수녀는 완전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고, 반면 병역, 정치, 농업, 상업 등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허용된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두 가지 삶의 구분을 통해 유세비우스는 '완전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 비해 더 비천하고 더 인간적인 '허용된 삶'을 사는 사람들은 경건의 측면에서 일종의 이류 인생들이라고 간주하였다. 저자는 소명에 관한 이 같은 이원론적 구조는 소명의 영역을 좁히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을 소명의 테두리 밖으로 밀어냄으로써 성경의 가르침을 심하게 왜곡하였으며 후대의 기독교적 사고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루터와 그 이후의 종교개혁가들은 소명의 총체적인 의미를 회복하였다. 소명에 대한 총체적인 관점의 회복은 문화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회복된 개념의 소명은 일상적인 일에 존엄성과 영적인 중요성을 부여했으며, 일의 계층 구조를 깨뜨림으로써 민주주의로 향하는 중요한 자극제 역할을 하였으며, 일, 검약, 장기 계획 등과 같은 실제적인 것들을 강조함으로써 근대 자본주의의 발흥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소명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려는 노력에 박차를 가함으로써 교회뿐 아니라 종교개혁이 일어난 국가들의 세계관과 문화를 변혁시킴으로 전통 사회가 근대 사회로 전환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아울러 우리 삶이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인정하도록 요구했다. 그래서 네델란드의 위대한 수상이었던 아브라함 카이프는 "전 피조 세계의 어느 한 영역에 대해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는 내 것이다! 이것은 나에게 속한 것이다!'라고 외치지 않으신 곳은 없다."라고 선포하였다.

그러나 개신교적 소명은 영적인 것을 희생시킨 채 세속적인 것을 격상시킴으로 세속적인 것을 영적인 것과 완전히 단절시키고, 소명이란 용어를 일을 대치하는 하나의 용어로 축소시키는 세속적 이원론이라는 왜곡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개신교적 왜곡으로 인해 청교도 시대를 거치면서 일, 거래, 고용, 직업 등과 같은 단어들이 서서히 소명('calling' 또는 'vocation')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일, 직업 등과 동일한 의미로서의 소명은 하나님의 명령보다는 사회적인 의무와 역할로 여겨지게 되었고 결국에는 믿음과 소명이 완전히 결별하기에 이르렀다. 이차적인 소명이 일차적인 소명을 삼켜 버린 것이다. 이차적인 소명이 일차적인 소명을 제압한 결과 소명은 직업이 되었고 일은 신성한 것이 되었다. 결국 소명은 세속화 되었고 이제 수입은 적지만 희생을 감수하는 일꾼, 종교인, 좀더 실제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을 고상하게 일컫는 말이 되어버렸다.

저자는 "개신교적 왜곡에서 회복되기 위해서는 먼저는 부르는 자(Caller)를 배제시킨 소명의 개념을 뒤엎고, 다음으로는 일차적 소명의 우선순위를 회복해야 한다"(p.68)고 주장한다. 우리는 일차적으로 어떤 것을 하도록 혹은 어딘가에 가도록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께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부르심에 대한 올바른 응답은 다른 어떤 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하나님께만 헌신하는 것이다."(p.70)

요약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 소명을 함께 묶어 놓음으로써 두 가지 왜곡을 피해야 한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다시 말해 "일차적인 소명을 강조함으로써 개신교적 왜곡을 극복하고 이차적인 소명을 강조함으로써 카톨릭적 왜곡을 극복해야 한다"(p.70)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다음과 같이 결론적으로 말하고 있다. "만약 신자가 하는 모든 일이 믿음에서 나오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행해진다면 모든 이원론적인 구별은 무너진다. 고차원/저차원, 성스러운/세속적인, 완전한/허용된, 관조적인/활동적인, 일등급/이등급의 구별이 더 이상 없다. 소명이란 모든 이가 모든 곳에서,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일차적인) 부르심에 대한 반응으로써 자신의(이차적인) 부르심을 성취하는 것이다."(p.57~58)

저자는 소명에 대한 성경적 개념의 바른 이해 속에서 카톨릭적 왜곡과 개신교적 왜곡을 극복한 소명의 통합적 의미를 제시함으로써 소명이란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여 모든 이가 모든 곳에서 그리고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사는 삶임을 도전하고 있다. 성경의 진리는 하나님 나라와 세상이 동등한 두 개의 원리가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또한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가 교회와 세상이라는 각기 다른 영역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우리의 소명임을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의 가장 큰 공헌과 장점은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의 올바른 이해 속에서 소명의 진정한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 박원철 목사는 고신대학교 신학과(B.A)를 졸업한 후 총신대학원에서 수학하다 캐나다 토론토로 유학가서 Tyndale Theological Seminary(M.Div)와 Institute for Christian Studies(M.Phil 기독교철학 전공)를 졸업하였습니다. 그리고 미국 Calvin Theological Seminary (Th.M Cand. 철학신학 전공)에서 수학하였습니다. 현재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가든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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