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그 때, 박요한 목사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박요한 목사님도 이러한 사명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일제시대와 6ㆍ25를 겪으면서 교회가 당했던 시대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지(死地)에서 살려두신 것은 그에게 시대의 십자가를 지우고 역사의 증인으로 세우려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당했던 6ㆍ25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함평까지 밀고 내려온 인민군에 끌려가 함평내무서 유치장에 갇혔다가 한 달 만에 풀려났습니다. 그 때 밤마다 불려나간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총살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남아 있다 풀려난 것입니다. 공산군이 후퇴하면서 풀어주었는데, 내무서를 나설 때 누군가가 그와 김장로님의 등에 대고 "당신들, 하나님이 살려준 줄 알아..." 말한 대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궁산교회로 돌아와 가족과 교인들을 만났지만 그 기쁨도 잠깐이었습니다.

▲ 서남해 섬지방에 전도했던 박도삼 장로 선교기념비, 도초중앙교회. ⓒ 황영준 목사
국군 상륙이 소문보다 늦어진다는 정보를 받은 내무서에서 다시 박목사를 찾는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집에서 급히 나와 벼가 노랗게 익어가는 논에 숨었다가 밤이 깊어지자 돌머리에 있는 교인 집으로 피신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남편과 부인 집사님이 나무를 쌓아둔 헛간 건초더미 속에 은신할 자리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건초를 뒤집어쓰고는 구멍으로 밖을 살필 수 있었습니다. 밤늦은 시간에 딸을 문밖에 세워 주위를 살피게 하고 식사를 넣어 주었습니다. 이웃 간에도 누가 좌익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이웃도 조심해야 했습니다. 공산군이 물러가기를 바라면서 2주간을 긴장과 불안 가운데 지냈습니다. 총칼을 든 자들이 금방이라도 나타나서 방아쇠를 당기고 창으로 찌를 것 같았습니다. 그 날 하루하루는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는 기도 기간이었습니다.

최 장로님이 찾아왔습니다. 국군이 광주에 들어왔으니 함평도 곧 회복될 것이라며 자기 집으로 옮기자고 했습니다. 장로님 댁 작은방 다락에 자리를 잡았지만 낮에는 숨도 죽이고 있어야 했습니다. 다음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 때 장소를 옮기지 않았더라면 죽을 뻔 했습니다. 집사님 댁을 나오고 반시간쯤 지나서 폭도들이 들이닥쳐서 건초더미를 총검으로 사정없이 찌르고 집을 발칵 뒤집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밀고로 기습을 당했지만 하나님께서 그 때도 그의 손목을 잡아 인도하신 것입니다.

학수고대하던 국군과 경찰이 들어와서야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지방 폭도들도 불갑산이나 지리산 등지로 은신했지만 그들이 휩쓸고 간 만행은 엄청났습니다. 무고한 사람들이 학살되고, 예배당도 여러 곳이 태워졌습니다. 그렇게 피해가 컸던 것은 1948년에 발생했던 여순반란 사건 여파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 좌우익 간 충돌로 인명피해가 컸습니다. 정부가 사태를 진압해서 반란이 잠잠해졌지만 가만히 잠복했던 좌익세력이 6·25가 터지면서 곳곳에서 일어나 인민군과 합세했고, 보복과 살육을 자행했던 것입니다. 무법천지였고 지옥이었습니다. 가까운 영광군을 비롯하여 영암 함평 장성 무안군 등 여러 지역에서 교회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목회자만 아니라 교인들도 많이 순교했습니다.

영광읍교회는 탄식과 눈물 가운데 박 목사님을 모시고 부흥회를 열었습니다. 예배당은 불타버리고 교인 23명이 죽었습니다. 기독교인이었던 경찰서장은 자수한 좌익들을 부흥회에 참석시켰습니다. 그 가운데 여러 사람이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부흥회를 통해 위로를 받고 소망을 붙들었던 교인들은 박목사님을 영광읍교회 담임목사로 모셨습니다. 박 목사님은 불같은 시련 가운데 있는 어려운 교회를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는 결단으로 그곳에 부임했고, 교인들의 힘을 모아 예배당을 복구했습니다.

장로회신학교 동기인 김준곤 목사님이(전 C.C.C 총재) 그 때 그의 고향 지도로 피난을 와 있었지만 통신이 끊겨 안부를 알 수 없었습니다. 뒤늦게야 알았지만, 김 목사님도 가족이 폭도들에게 끌려갔는데 김 목사님만 살아나고 부친과 아내는 순교 당했습니다. 장례식에 참석해서 엄두섭 목사님이 지은 애도시에 박목사님이 '울 밑에서 선 봉선화야' 곡으로 조가를 불렀습니다. 살아서 만난 동기들은 서로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어려운 십자가를 함께 지고 나갔습니다. 김준곤 목사님은 그 때 24명이 순교한 법성포교회에 부임하여 전라도에 주저앉았습니다.

박 목사님은 이리중앙, 대전남부교회 등을 시무하다가 은퇴했습니다. 지금은 선친 박도삼 장로님이 전도해서 교회를 설립한 흑산도예리, 도초중앙, 소흑산도 황해교회 그리고 서남해안의 섬 교회를 순회하며 선교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광주역에서 상경하는 박목사님께 허리 굽혀 인사드립니다. 은퇴하시고 20여 년, 고령 89세가 되기까지 여전히 예수 복음을 전하시는 모습이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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