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교회와 우리교단이 앓고있는 심각한 중병 가운데 하나는 '피상증'이라는 병이다. 굳이 풀어쓰자면 '가벼움증' 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현재 안고있는 문제도 심각하거니와 더 심각한 문제는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의 심각성이다. 즉 문제의 본질은 보지 못한 채 '배아프다고 무조건 소화제 먹자'는 현상이 많은 것이다.
지나간 역사와 그 속에 존재해왔던 어느 공동체를 보던지 지상의 실존으로서 완전할 수 없었기에 문제는 늘 있어왔다. 그러나 그것을 해결하고 개선하고자 하는 접근방식과 시각에 따라서 역사의 명암이 갈리어온 것 역시 주지의 사실이다.

이제 총회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금번 본 교단의 '총회'는 교단의 미래에 중요한 분기점이 될 전망이다. 가장 큰 이슈로는 총회일꾼을 선출하는 방법에 초점이 맞추어지고있다. 우선 폐일언하고 지난해 총회가 논의하고 합의하여 도출해 낸 제비뽑기는 금번 총회에 그대로 지켜져야 한다.

이것은 진리냐 아니냐의 문제보다는 지난해 총회석상에서 합의하여 결의한 모든 총대들의 최선의 선택이다. 오죽 금권선거가 난무했으면 이 러한 골육지책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반성과 회개가 우선해야 한다. 이번 '총회'의 본질은 교단의 미래가 제비뽑기냐? 투표를 통한 선출 방식이냐? 가 핵심이 아니다. 교단의 운명이 이러한 방법의 여하에 걸려있지도 않다.

그러면 교단의 미래는 어디에 그 열쇠가 있는가? 18세기 영적 대각성운동을 이끌었던 죠나단 에드워드는 딤전1장17절의 말씀을 읽던 중 "하나님 앞에 서있다"는 임재의식을 강렬하게 체험했다. 이 체험은 죠나단 에드워드 개인에게만 머물렀던 것이 아니라 개 교회 그리고 전 사회를 진정한 부흥의 불길과 갱신으로 몰아갔으며 전 포괄적인 영역에서 사회 구석까지 이르는 각성의 불길로 번졌고, 윤리적 차원에서도 정화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결국 한 사람에게 일어난 하나님에 대한 임재의 체험은 역사를 바꾸는 불씨가 되었던 것이다.

이제 21세기에 이미 들어서 있고 교단의 발전과 개선을 위해서 여러 뜻있는 분들이 귀한 의견들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교단의 미래를 진정으로 위하는 영적인 사람들이라면 사람 만나고 회의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하나님과의 투명한 독대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서있다'는 바른 의식을 가지고 총회에 임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세례요한의 출현으로 전 이스라엘이 영적인 충격으로 요동칠 때 하나님은 궁궐에 있는 사람이나 회당안의 종교인 그리고 성소에서 하나님을 수종 들던 형식적 종교인들을 사용하지 않았다. 광야에 홀로 하나님과 독대하던 세례요한을 사용하시어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다.

우리 교단의 미래는 결코 어떤 제도개선이나 사람 바꾸고 방법을 따지는데 있지 않다고 본다. 이번 총회에 참석하는 모든 총대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하나님 앞에 서서' 그분의 임재를 골수에 사무치게 체험할 때 반드시 역사에 쓰임 받는 교단이 되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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