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론에 볼모로 잡혀온 다니엘은 자존심이 상했다. 도대체 어른들이 어떻게 살았 길래 우리 민족이 이렇게 무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는가, 무엇보다 땅에 떨어진 하나님의 이름을 어떻게 다시 회복할 수 있겠는가. 나의 생존에만 급급한 사람은 민족적 신앙적 자존심을 들먹일 여유가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생존보다 생존의 목적인 하나님의 뜻에 더 자존심을 거는 법이다.

그래서 다니엘은 왕궁의 음식을 먹는 문제로 생존의 위협을 느꼈지만 뜻을 정하고 행동하기 시작한다. “왕의 진미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 개인적 성결에만 머무르는 결단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 결단의 민족적 의미는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다시는 조국의 비극을 되풀이 해서는 안된다는 역사인식이 깔려있었다.

‘나라'가 못하면 '나'라도 한다. 우리 조국교회와 민족의 장래가 ‘청년들’에게 달려있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차세대가 철저히 준비되어야 한다는 요구 섞인 표현이다. 그러나 그 ‘청년들’이란 연령보다는 의식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즉 우리 조국교회와 민족의 장래가 ‘청년성’에 달려있다는 말이다. 청년성은 순수성, 모험성, 개혁성의 이미지를 동반한다. 그러나 나이 젊은 청년들, 무엇보다 나이 젊은 목회자들이라고 다 청년성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오랜 삶의 여정에서 부끄럽게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요소들을 미리 앞당겨 적극적으로 자신의 생존 수단으로 무기처럼 가지고 있는 젊은이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이 많으면 20년후는 가보지 않아도 뻔하다. 이들의 목표는 ‘목회영웅’이고, 이들의 이데올로기는 ‘성장주의’다. 그래서 결국 이들의 신은 ‘자신’이 되어버린다. 이 땅에는 모험과 착취 그리고 혈투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조국교회와 민족을 사랑하는 진정한 청년은 외롭다. 그러면서 되뇌인다. ‘나라'가 못하면 '나'라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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