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100일이 지났다. 158명의 안타까운 죽음을 마주하며 교회는 무엇을 했을까? 어떤 교회는 침묵했고, 어떤 교회는 심판했고, 어떤 교회는 함께 눈물 흘리고 기도하고 위로하며 함께했다.

참사가 일어나고 다음 날, 용산구가 녹사평역 광장에 분향소를 설치했다. 한국교회봉사단에서 용산교구협의회에 분향소 옆에서 차 봉사를 함께 해줬으면 좋겠다는 도움을 요청해왔다. 모든 준비는 우리 교회의 몫이었다. 테이블을 챙기고 생강차를 끓여 전기 포트에 담고 여분의 차와 커피를 준비한 뒤 각 교회에 자원봉사자를 요청하고 조를 편성했다. 봉사 첫날 테이블을 준비하며 ‘이게 옳은가? 슬픔을 가누기도 어려운 사람들이 차를 마실 마음의 여유가 있을까?’ 내내 염려와 걱정의 마음으로 5일을 틈틈이 그곳에서 함께했다.

기우였다. 분향을 마친 사람들도,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도 그날의 차 한잔은 비통한 마음에 작지만 따뜻한 위로가 됐고, 감사의 인사도 잊지 않고 전해줬다. 통곡하며 분향을 하시던 아주머니가 차를 받으시고 가슴을 쓸어내리시던 모습, 분향하는 젋은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붉어진 눈시울을 잊을 수가 없다. 그들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마음일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는 눈물을 쏟고 누군가는 눈물을 삼키는 현장에 교회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곁에 있을 수 있음이 그저 감사했다.

체감온도 영하 20도가 넘던 날, 녹사평역 광장에 또다시 분향소가 마련됐고 고인들의 사진이 놓여졌다. 이번에는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로부터 이태원 참사 분향소에서 그리스도의 위로와 평강을 전하는 작은 성탄음악회와 예배를 드리자는 제안을 받았다. 연주를 위해 청년 다섯 명이 관악기를 준비해 왔고 연주가 시작됐으나 두 곡을 마치자 악기는 얼어서 소리가 나지 않았다. 연주는 포기해야 했고 둘러선 30여 명이 함께 나지막한 목소리로 찬송을 이어갔다. 기도와 짧은 메시지가 선포됐으며 축도로 무사히 마쳤다. 몇 미터 떨어져 보고 있을 유가족들에게 이 짧은 예배는 위로가 됐을까? 사고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이태원 상점 주인들에게 회복의 불씨가 될 수 있을까? 이번에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잘했다는 칭찬은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으나 들려오는 말들은 생각보다 험악했다. 어느 목사는 “이태원 참사를 위해 예배를 드리거나 집회에 참석하는 등 유족과 관련된 어떤 행동도 해서는 절대 안 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유는 정치적으로 이용을 당한다는 것이다. 한순간에 정치적으로 이용 당한 목사가 돼버렸지만, 스스로 떳떳했기에 그들의 판단은 중요하지 않았다.

과연 이태원 참사는 하나님의 심판일까? 핼러윈 귀신 축제에 하나님께서 형벌을 내리셔서 그렇게 많은 젊은이들을 죽게 하신 것일까? 돌아올 사회적 비난이 적지 않음을 알기에 누구도 대놓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드러내고 싶은 교회들과 지도자들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7)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다. 예수를 보내어 구원하신 하나님이 다른 한편으로는 심판하시며 죽이시는가?

이태원 참사는 무능한 책임자들 때문에 일어난 후진국형 사고다. 그리고 그들을 지키고 사랑하고 구원해야 하는 기회를 잃어버린 교회들의 아픔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 아니 세상은 교회가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할까? 교회는 제발 입을 닫고 조용히 사라지라고 말하지 않을까 두렵다. 정치 논리에 매몰된 한국교회가 아픔을 당한 이웃들을 외면한다면 언젠가는 듣게 될 말이다. 가짜뉴스와 정치 논리로 함께 돌을 던지지 말고,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말없이 눈물을 흘리시던 주님처럼 아픔을 당한 유가족들과 슬픔에 빠진 이웃들 곁에서 함께 아파하고 눈물 흘려줄 수 있는 교회로 다시 설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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