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06) 교갱협 임원수련회 특별강의

 

Ⅰ. 서론

1996년 교회갱신협의회(이하 교갱협)는 고 옥한흠 목사의 지도하에 한국교회의 주목을 받으며 출발하였다. 1980년 중반부터 급속도로 성장해온 한국교회의 부흥과 더불어 발생한 교회와 교단의 부패를 방지하고 교회를 새롭게 갱신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초기에는 합동 측 교단과 교회의 갱신을 위한 모임이었으나 곧 한국교회의 갱신을 위한 운동으로 확장되었다. 많은 젊은 목회자들과 신학생들의 기대와 호응이 있었다.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여 교갱협은 지난 27년간 한국교회의 갱신을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다. 교갱협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매년 교갱협 수련회를 개최하여 갱신 의지를 다짐했고 세미나 등을 통해 교갱협의 방향을 위한 이론을 개발하였다. 그리고 수련회를 통해 후배 양성을 도모하였다. 교갱협의 역사를 지속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교갱협의 움직임을 정치적으로 보는 견해도 적지 아니했다. 당장 교갱협에 맞선 단체들이 결성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단체가 영성목회연구회이다. 시간이 갈수록 교갱협의 원래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정치적인 견제와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2010년 옥한흠 목사의 소천이후에도 교갱협은 중단하지 않고 나름대로 소명을 갖고 갱신운동을 지속해 오고 있다. 본고를 통해 교갱협의 지난 사역들을 돌아보고 교갱협의 발전을 위한 미래 지향적인 논자의 소견을 피력하려 한다.

 

II. 본론

1. 교갱협의 어제

교갱협은 아래와 같은 설립 목적을 가지고 출범하였다. 교갱협의 홈페이지에서 밝혀진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96년 3월 7일 창립한 교회갱신협의회는, 주님의 피로 세워진 교회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의지하여 목회자의 의식 개혁과 교회의 갱신, 기독교 공동체의 역량을 강화시켜 목회자의 영성을 계발하고, 현실적인 대안을 수립, 실천할 수 있는 목회자의 리더십을 훈련시켜 교회와 기독교 공동체의 환경변화에 대응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목회자들의 협의체입니다. 사역방향어려움을 당한 형제교회에 대한 실질적인 지원 및 미래자립교회 섬김사역 확대, 교회의 대 사회적 디아코니아 사역에 대한 연구 및 대안 제시 등을 추진한다. 사회봉사를 위한 사업법인이사회 및 실행위원회 논의구조 강화, 지역모임 지원, 한목협과의 연대, 각 기독교기관 및 시민단체들과 연대협력 강화, 젊은 목회자 모임  활성화(차세대 리더 중장기적 지원) 등을 추진한다. 교회의 화합과 일치를 위한 사업목회자의식 개혁을 위한 갱신과제 연구 및 커리큘럼 구축, 목회 멘토링 사역 및 목회 자료 구축, 기도회 및 주요 이슈에 대한 성명서 발표 등을 통해 갱신 운동의 저변 확대와 역량 강화를 도모한다...”

이러한 설립 목적에 부응하여 교갱협은 특히 다음세대의 한국교회를 위한 젊은 목회자들과 지도자 양성을 위한 노력을 경주 하였다. 교갱협은 또한 전략적인 전도와 선교사역 등 현장의 문제와 현실적인 과제에 총체적으로 접근하고 체계적인 대안을 제시한다고 선언하였다. 이는 섬김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교갱협은 교갱협의 취지와 활동을 교계와 대사회적으로 홍보하여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게 하고 교계 언론의 건강한 발전을 위한 협력과 역할도 감당할 것이라고 하였다. 교갱협은 건전한 영성, 탁월한 도덕성, 깊이 있는 지성과 실제적인 적용성을 갖춘 건강한 목회 프로그램 개발과 적시적인 신학적 연구와 토론의 장을 마련할 것을 언급하였다. 교갱협의 대사회적인 관심도 표명되어 있다.

“...본 위원회는 우리 사회의 소외되고 힘든 과정을 겪는 이들에게 지속적이고 효율적인 지원을 통해 한국 교회와 사회에 관심과 책임의식을 환기시키고 교회의 올바른 사회 참여를 수행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또한, 국내는 물론 지구촌 각 영역에서 일어나는 재난과 기아에 대하여 도움의 손길을 제공하며 장학사업을 통해서 교회가 이땅의 소망의 그루터기임을 밝히는 일에 앞장서고자 합니다. 한국교회의 발전에 있어서 여성들의 기여도와 섬김의 내용을 발굴하고 교회와 일반사회에서 여성들이 앞장서 섬겨야 할 역할을 모색하며 교회갱신을 주축을 감당할 여성지도자들의 협력과 소통을 위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또한 교회와 사회 속에서 여성들이 섬겨야 할 역할의 증진과 성경적인 여성 지도력의 대안을 제시하는 역할을 감당할 것입니다.”

교갱협은 전술한 바와 같은 설립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지난 27년 동안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면서 한국교회의 갱신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목회자로서 자신들의 교회사역에 매진하는 것도 힘겨운데 한국교회를 염려하면서 갱신을 위해 매진해 온 모습들은 아름다웠다. 특히 교갱협은 목회자갱신(새로움), 차세대(키움), 교회현장(세움), 선교(섬김), 사회(나눔), 언론(알림), 그리고 여성(돌봄) 등 7개 분야로 나누어 사업(work)을 추진하고 있다. 그리고 전국단위의 9개 조직을 형성하여 탄탄한 기반을 조직하고 세미나, 연합집회 그리고 다양한 프로그램 등을 실시하여 소기의 목적 달성을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몇 가지 사례를 검토해 보자. 

a. 교갱협 자료에 의하면 2009년과 2010년 두 차례에 걸쳐 젊은 목회자를 위한 포럼을 가졌다. 특히 2010년 4월 26-5월 17일에는 서대문교회에서 제 2기 젊은 목회자 포럼을 가졌다. 이른 교갱협의 설립정신인 차세대 교회지도자 양성을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교갱협은 특별히 젊은 목회자들이 교갱협의 정신을 계승하여 한국교회의 갱신에 헌신하도록 노력하였다. 목회자들의 사역에 도움이 되는 구체적인 구제들을 다루어 진행했다. 강의 주제로 영성훈련, 예배, 목양과 행정, 교육목회, 사회봉사, 설교, 개척과 전도, 소그룹목회 등 목회현장에서 실질적인 경험을 축적한 강사들을 초빙하여 4주간 진행하였다. 

b. 2011년 10월에는 “목회자의 자기갱신과 설교”라는 주제로 서대문교회에서 열렸다. “교회갱신을 위한 목회원리”와 “설교에 관한 실제적 연구” 그리고 “귀납적 성경연구”에 대한 강의가 있었다. “설교에 관한 실제적 연구”와 “귀납적 성경연구” 발표에서는 주제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었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교회 갱신을 위한 목회원리”라는 주제에 관심이 있었지만 강의 내용을 볼 수 없어서 아쉬웠다. 

c. 2014년에는 “성공적인 노년목회와 사별목회, 어떻게 할 것인가?”란 주제로 발표회가 있었다. 고령화 시대를 맞이하여 적절한 주제를 다루었고 사례연구 발표 등을 통해 실질적인 현장의 목소리도 듣게 되었다. 목회자들이 고령화 사회 속에서 노년세대를 어떻게 품고 위로할 수 있는가를 다른 적절한 주제였다. 

d. 2016년에는 “목회자의 성격장애와 목회 윤리” 주제를 다루었다. 상담학자 이관직 교수의 성격장애자 치유를 위한 심리학적 접근에 대한 전반적인 서술은 현장목회자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내용이었다. 이 상원 윤리학자의 “교회 정치에 임하는 목회자들의 윤리적 자세”란 강의는 교단정치에 대한 진단과 목회자들이 교단정치에 어떻게 임할 것인가를 다루어 주목을 받았다.

e. 2018년(12,10-12,11)에는 “목회현장을 위한 목회준비와 실제”라는 주제를 다루었다. 목회사역 현장을 위한 실제적인 주제들을 다루었다. “성경적 설교”, “팀 사역”, “목양: 심방과 성도와의 관계”, “전체집담회와 기도회”, “목회자의 자기관리”, “장년 및 다음세대 교육” 등 상당히 실제적인 목회현장의 주제들을 다루어 목회자들에게 큰 도움을 준 것을 보인다.  

f. 2019년에는 교갱협의 여성위원회 주도로 “이사야서의 정의와 거룩”이란 주제로 김순영 박사의 강의가 있었다. 교갱협의 여성 돌봄에 대한 상당한 배려와 사례로 보인다.

g. 2022년에는 주제의 방향이 청년목회로 전환한다. 시대의 요청에 부응한 주제를 다룬 것으로 보인다. “전환기 청년목회 현주소와 그 대안”이란 주제는 비교적 젊은 세대의 강사들이 흥미로운 주제로 발표회를 가졌다. 예를 들면 “청년 사역-라떼 이야기”와 “나는 이렇게 사역하고 있다.” 등이다. 교갱협 지도자들의 차세대의 목회를 준비하기 위한 기대와 배려 속에서 개최된 것으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종합하면 교갱협은 그동안 다양한 주제로 한국교회의 갱신을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교갱협은 특별히 미래세대의 지도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중점으로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여성들의 참여는 교단의 여성사역 갱신을 위한 관심과 배려로 보였다. 고 옥한흠 목사의 소천으로 인해 있었던 우려와 염려에도 불구하고 교갱협은 훌륭한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한국교회의 갱신을 위한 지속적인 프로그램 개발을 멈추지 않았다. 교갱협은 이제 1세대 중심의 운영체제에서 제 2세대 혹은 청년세대로 중심축이 이동하는 시점에 서 있다. 지난 26년간의 역사를 성찰해 보고 내일을 위한 교갱협의 시대적 소명을 검토해 보려 한다. 

 

2. 교갱협의 성찰

교회갱신을 위한 목회자협의회는 철저한 자기반성을 통한 교회의 새로움과 성숙을 위한 목적으로 창립되었다. 아래 도표에는 교갱협의 분명한 3가지 출범목표가 있었다. 첫째는 교회의 일치(Unity) 둘째는 교단의 갱신(Renewal), 그리고 셋째는 사회를 위한 섬김(Diakonia)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도표의 중심에 “자기 갱신”이 자리 잡고 있다. 출범목표 서두에도 “자기 반성을 통한”이란 문구가 나온다. 이는 교갱협의 운동은 목회자들의 철저한 자기갱신을 바탕으로 진행되어야 함을 전제하고 있다. 

교갱협은 본 협의회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갱신’이란 공통용어를 사용하였다. “자기 갱신”, “교회 갱신”, “교단 갱신” “사회 갱신” 등이다. ‘갱신’이란 용어의 의미가 다양하지만 교갱협이 사용한 ‘갱신’의 의미는 “다시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교회와 교단을 다시 새롭게 하기 위한 중심에 자신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자기 갱신”이 중심에 서 있다. 이러한 자기 갱신이란 힘든 과제를 안고 교갱협은 지금까지 지속되어 온 것이다.

교갱협은 교회의 일치라는 목표에 부응하여 합동과 개혁측 교단의 연합을 이루는데 공헌하였다. 그리고 교단의 정치적인 갱신을 위해 총회장 선거제를 제비뽑기제도로 변경하였다. 또한 전국교회가 연합하는 과정의 일환으로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를 창립하였다. 지금까지 다양한 포럼과 세미나를 통해 한국교회의 갱신을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하지만 교갱협의 사역을 보면 그 동안 목회자 훈련 프로그램에 치중하였고 한국교회와 사회에 대한 활동은 미약한 것으로 나타난다.

교갱협의 미래지향적인 의미로 아래와 같은 미래 지향적인 질문을 던져본다. 그동안 교갱협의 활동으로 인해 목회자들과 한국교회와 사회의 실질적인 변화가 일어났는가? 교갱협이 앉았다가 일어선 자리의 전후는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아무른 변화가 없다면 왜 교갱협인가? 교갱협은 한국교회가 공감할 수 있는 대안과 실질적인 운동을 전개했는가? 

 

3. 교갱협의 내일

a. 교갱협과 칼빈의 정신

교갱협은 교회(교단)의 갱신, 교회의 사회적인 기여, 그리고 한국교회의 일치를 외쳤다. 교갱협의 이러한 외침은 미래 한국교회를 위해 지속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과제들이다. 논자는 감히 교갱협의 갱신운동을 16세기 칼빈의 종교개혁 운동에 비교해 본다. 예를 들면 교갱협의 갱신정신은 칼빈의 개혁운동의 기본정신이었다.

- 칼빈은 교회개혁의 일환으로 로마카톨릭교회의 비 성경적 교회와 전통에 맞서 성경적인 교회관의 회복을 외쳤다. 교갱협은 목회자들의 성경적인 바른 목회를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훈련시켜 교회가 말씀중심으로 새롭게 되기를 소원하였다.

- 칼빈은 또한 교회의 갱신과 사회적 정의 실현의 기여를 위해 제네바 치리회를 구성하였고 실제로 결혼법제정, 노동자를 위한 노사임금협정에 간여하였다. 교갱협은 교회개혁뿐만 아니라 대 사회적인 교회의 역할과 사명에 대해 천명하였다.

- 칼빈은 다른 개혁자들보다 월등하게 교회의 일치를 위한 에큐메니칼 운동에 진력을 다했다. 교갱협은 한국교회의 일치와 교제를 위해 한목회협의와의 유대를 공고하고 연합운동에 앞장섰다.

- 칼빈은 구빈원을 육성하고 제네바 대학을 세워 교육을 통한 통전적인 하나님의 나라 실현에 앞장섰다. 교갱협은 교갱협의 취지와 활동을 교계와 대사회적으로 홍보하여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게 하고 빛과 소금을 다하는 교회 구현” 그리고 “민족과 세계 앞에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것”이라고 천명하였다.

이러한 교갱협의 갱신정신은 칼빈의 개혁정신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칼빈이 종교개혁을 하면서 우리에게 남겨준 간과해서는 안될 중요한 모습이 있다. 그것은 칼빈은 개혁을 위해 뼈를 깎는 자기갱신을 했다는 것이다. 칼빈은 조용히 자신의 목회성공에만 만족하는 온정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모든 것을 쏟아서 개혁을 위한 노력에 평생을 헌신하였다. 그것은 칼빈의 자기비움(kenosis)이었다. 논자는 이러한 칼빈의 자기 다스림의 아픔이 없었다면 종교개혁을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칼빈의 자기비움의 정신은 곧 교갱협의 중심에 있는 ‘자기갱신’과 맥을 같이 한다. 칼빈의 캐노시스 정신의 검토를 통해 교갱의 미래를 위한 교훈을 얻고자 한다. 

b. 칼빈의 캐노시스 

칼빈은 1533년 젊은 시절 카토릭교회의 부패에 맞선 파리대학 니콜라스 콥 총장의 개혁적인 연설문에 관여함으로 고난의 행군을 시작한다. 니콜라스 총장은 만성절(All Saints’ Day)날 기념 강연에서 복음과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에 대해 말하면서 로마교회에서 성경으로 돌아간 자들의 박해를 반대하는 강연을 하였다. 이 연설 초안은 젊은 학자 도움과 충고로  작성된 것으로 알려졌고 그 중심에 칼빈이 있었다. 이때 젊은 칼빈은 기득권을 포기하고 의를 위한 결단을 한다. 그는 콥 총장의 개혁을 위한 의지에 공감하고 카토릭교회에 저항하였던 것이다. 자기의 출세의 영달에만 눈먼 젊은 학도는 아니었다. 캐노시스 정신이 없으면 불가능했던 것이다. 

칼빈은 앙골렘(Angouleme)에 갔다. 그의 친구이자 급우인 뒤 티예(Louis du Tillet)의 집에 머물렀다. 그의 집은 3-4천권의 책을 소유한 큰 집을 갖고 있었다. 칼빈은 가명으로 지냈으며 이때부터 아마도 9개의 가명으로 생활했다. 그러나 칼빈의 명성으로 인해 티예 집에 칼빈을 만나기 위해 젊은 학도들이 몰려왔고 이는 칼빈을 더 깊숙한 시골로 방황하게 만들었다.

그 뒤로 칼빈은 여러 곳을 전전 긍긍하다 연구와 저서를 위한 평화를 희구하면서 라인 강과 독일 국경을 향해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칼빈과 친구들은 파리로부터 200마일 떨어진 메츠(Metz)를 향해 갔고 그들은 모든 여인숙에서도 경찰의 추적 위협에 떨었다. 겨울의 칼바람과 함께 칼빈은 평소에 앓았던 복통과 두통을 이겨내야 했다. 어느 날 아침 자고 일어난 칼빈은 하인 중의 한명이 일행의 돈 주머니를 몽땅 가지고 도망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한 푼의 페니도 없었고 그들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서는 돈을 구할 길이 없었다. 다행히도 다른 하인이 돈을 빌려줘서 스트라스부르그 국경을 건널 수 있도록 하였다. 칼빈은 이곳에 절 친인 마틴 부쳐가 있는 줄 알고 있었고 또 이전에 편지를 통 해 프랑스 피난민을 도와주도록 협력을 구한 적이 있지만 이곳도 안전하지 못하여 남쪽으로 향했다.

1535년 칼빈은 친구들과 함께 바젤에 도착하였다. 그는 Madame Catherine Klein에게서 방을 전세 내어 연구에 몰두하였다. 칼빈은 마르티누스 루시아누스(Martinus Lucianus)라는 가명으로 지냈다. 여기서 칼빈은 운명을 같이 했던 니콜라스 콥 총장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파리에서 있었던 당황스럽고 가슴 아픈 박해 소문을 상세하게 듣게 되었다. 예를 들면 화형을 면하려는 한 개신교 수감 인이 개신교 동료들의 비밀집회소를 폭로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개신교도들이 발각되어 비참한 박해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바젤에서 칼빈은 이 소식을 접하고 그의 절친들이 파리에서 얼마나 잔혹한 박해를 받았음을 알게 된 것이다. 칼빈이 잠시 머물었던 에티엔 드 날 포르지(Etienne de la Forge)는 산채로 화형을 당했다는 것이다. 반신불수이므로 포스터를 붙이지 못했던 구두장이 바르테레미 미론(Burthelemy Milon)도 그레베 광장에서 화형 당했다는 것이다. 미장이 헨리 포이는 화형 장에서도 그의 신앙을 고백하지 못하도록 그의 혀를 쇠꼬챙이로 볼에 꽤 메었다는 것이다. 파리의 목사 중의 한명인 Corault이 바젤로 도망 와서 파리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고 했던 것이다. 칼빈은 이러한 순교자들을 대변해서 안타깝고 분노하면서 그들의 신앙을 대변하기 위해 [기독교 강요]를 출판한다고 했다. 그는 시편주석 서문에 이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것이 내가 기독교 강요를 출판해야 했던 이유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내 형제들이 감수해야 했던 불의하고 못된 비난들에 응수함으로써 그들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했다. 그들의 죽음은 주님 앞에서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위협과 탄압 받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연민을 갖고 있으며, 외국에서 할 수 있는 한 이들을 돕도록 애썼다.”(CR 59, 23 정미현, 장로교의 뿌리 칼빈, p. 41)

기독교 강요는 단순히 개혁신학의 정론을 정리하기 위한 이유에서만은 아니었다. 종교적인 탄압에 저항하고 핍박받는 받는 동료들의 신앙을 변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후 칼빈은 스트라스부르로 가려고 했으나 북동부 지역의 통로가 전쟁으로 말미암아 길이 막혔기 때문에 제네바로 우회하여 가려고 하였다. 단 하룻밤만 제네바에 묵을 것을 결심하였다. 1536년 7월 저녁 어느 날 그는 제네바의 어느 여관에 짐을 풀었다. 다시 교황주의자로 전락한 뒤 티예(de Tillet)가 칼빈을 찾아내고 파렐(Guillaume Farel)에게 전달한다. 이 사실을 전달 받은 파렐은 여관에 머물고 있는 칼빈을 찾았다. 칼빈의 운명을 달리한 밤이었다. 그 날 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칼빈은 스스로 말하고 있다.

파렐이 칼빈에게 한 말이다.

“Oh no, sitting in a cosy study, far removed from the heart of the battle, is no way to serve God’s cause. God needs soldiers who are prepared to march to war, prepared to climb onto the stake if need be”... “So you  are seeking a quiet corner to pursue your studied?... And you think that you will serve God better that way? But let me tell you, you are not seeking the glory of God, You are seeking yourself, by pursuing your own interests. And God will curse your selfishness and your studies!”(Jansie van der Walt, Calvin and His times, 1985, p. 38)

그래서 칼빈은 원치 않는 길을 가게 된다. 그는 바젤에 가서 자신의 짐을 꾸려 다시 돌아왔다. 칼빈은 이때 제네바에서 인정받은 인물이었나? 칼빈은 초기 사역에서 제네바에서 별 볼일 없는 존재였다. 시 의회는 그를 성 베드로 성당에서 로마서를 매일 오후 강론하도록 허락할 뿐이었다. 기록에 보면 단순히 어떤 프랑스 인(Frenchman)이 강사로 임명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파렐의 요청에 의해 적은 봉급을 받고 생활을 하였다. 재정적으로 상황속에서도 칼빈은 개혁의 길을 추진한다.

칼빈은 개혁신앙의 정신으로 훈육하고 지도하려고 하였다. 특히 성만찬에서 개신교신앙을 고백하는 자 만이 개신교 성찬에 참여하도록 할 계획이었다. 모든 삶의 영역에서 경건의 삶을 실천하려던 칼빈은 시의회원과 시민들의 반대를 받게 되었다. 거의 매일 칼빈과 동료들에게 시련과 환란이 닥쳤다. 사람들은 그에게 돌을 던졌다. 그리고 개들을 부추겨 달려들게 했다. 때로는 사람들이 개혁자들에게 독약을 먹이곤 하였다.

Pierre Viret는 거의 치명적인 독약으로 인해 일생동안 고통을 당하며 살기도 하였다. 폭도와 모욕적인 노래 그리고 그들을 저주하는 일들이 면전에서 일어났다. 칼빈이 설교하는 동안 어떤 회중은 일부로 감기에 든 것처럼 기침을 하고 발바닥을 끌며 방해하였다.

칼빈은 자신의 저축이 바닥났을 때 물질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시에서 급료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파렐은 시에 요청해서 5개월 동안 지급하지 않은 보수를 받도록 하였다. 이러한 적대적인 환경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자신의 일을 하는 데 게을리하지 아니했다. 강의하고 가난한 와 병자 그리고 감옥에 갇힌 자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외에 결혼주례와 세례식 그리고 저작활동을 하였다.

1538년 3월 11일 대 의회는 칼빈의 의도와는 반대되는 베른의 유형에 따라 교회를 운영 특히 성만찬을 시행 할 것을 결의하였다. 칼빈에게 수용하기 힘든 결정이었다. 시의회는 모든 설교자들이 무조건적으로 수용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반대했던 맹인 목사인 코로(Coraud)를 투옥시켰다. 칼빈과 파렐은 이에 저항하였고 칼빈은 코로의 수감에 대해 용감하게 비판하였다. 이에 시의회에서는 칼빈에게 설교 금지령을 내렸고 칼빈은 저항의 의무를 주장하였다.

부활절에 칼빈은 성 베드로 성당에서 국가적인 금지령에도 불복하고 설교하면서 성찬예식을 거부하였다. 개신교 설교자와 시의회의 갈등은 지속되었고 소요가 동반되었으며 총성이 오가기도 하였다. 부활절 후 화요일에 시의회가 소집되어 소요 자들에 대한 구금 형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설교 금지령을 어긴 목사들에 대해서는 72시간 내에 제네바를 떠나도록 결정하였다. 1538년 4월 25일 칼빈은 망명자 신세로 22개월 간의 생활을 청산하고 제네바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칼빈의 추방은 개혁을 위한 저항 때문이었다. 제네바에서 쫓겨난 칼빈은 바젤에 머물었고 5개월 후 스트라스부르그의 마틴 부처로부터 긴박한 청빙의 초청을 받아 바질을 떠나게 된다. 

칼빈은 부처의 권고에 따라 1538년 9월 8일 성 니콜라스 교회에서 프랑스 이민교회를 담당하게 된다. 개신교 신앙을 위해 피난 온 프랑스 인들의 이민교회는 진리에 대한 갈증과 열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칼빈의 경제적인 삶은 여전히 절망적이었다. 스트라스부르그의 시당국도 제네바처럼 칼빈에게 줄 급료를 제대로 지급하지 아니하였다. 6개월이 지나서야 지불을 받게 되었다. 주 급료는 칼빈이 살아가기에 충분치가 않았다. 그는 파렐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우리가 바질에서 머물던 집 주인이 청구서를 보내왔다. 거기에는 임대료와 더불어 술값도 포함되어 있었다. 칼빈은 혼자서 그것을 지불할 능력이 없어서 자신이 2개월 분을 내고 파렐은 7주와 2일을 머물렀으니 그에 해당하는 돈을 지불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칼빈은 파렐에게 아직도 그에게 한 크라운 반을 빚지고 있는데 그것은 가능한 빨리 갚겠다고 하였다. 

이 사정을 알게 된 칼빈의 지인이 프랑스로 오면 자신이 칼빈의 경제적인 것을 해결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칼빈은 거절하였다. 

1540년 10월 20일 제네바의 사신들이 칼빈을 청빙하기 위해 스트라우스부르그로 보내졌다. 그 동안 제네바는 로마 가톨릭주의자들의 가톨릭 화 작업이 진행되었고 그 중심에 야콥 사돌레토가 있었다. 사돌레토는 제네바 시민들에게 구교회로 돌아올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으며 그 내용에는 파렐과 칼빈은 가난한 제네바 시민들을 호도한 인물이라는 날카로운 비판이 있었다. 이 편지는 베른에 전달되었고 베른은 칼빈으로 하여금 답변을 하도록 요구하였다. 칼빈은 추기경 사돌레토의 주장을 차근차근 반박하며 종교개혁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이 편지는 제네바에 알려져 종교개혁을 반대하던 자들의 입을 다물게 하였다. 그리고 칼빈이 제네바에 다시 와야 한다는 강한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칼빈은 제네바의 복귀가 마음에 들지 아니했으나 파렐의 강력한 요구로 또 한 번 제네바로 향하였다.(1541. 9. 13) 제네바 시장의 공문을 받은 칼빈은 다음과 같은 답변을 보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저를 여러분들의 목사로 원하신다면 여러분들의 생활의 무질서를 고치십시오. 만약 여러분들이 신실한 마음으로 저를 망명생활에서 다시 부르신 것이라면, 여러분 가운데 만연하고 있는 범죄와 방탕함을 제거하십시오. 제 생각에 복음의 제일 큰 적은 로마의 교황이나 이단이나, 미혹케 하는 자들이나 독재자가 아니고 나쁜 기독교인들입니다 … 선행을 겸비하지 않은 죽은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악한 생활이 진리를 가장하고 행동이 말을 부끄럽게 한다면 진리 자체는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제 저로 하여금 두 번째로 여러분들의 고장을 버리고 떠나 새로운 망명지에서 제 고통의 쓰라림을 삭히게 하시든가 그렇지 아니하면 교회 안에 법이 엄격하게 지켜지도록 해 주십시오. 순수한 훈련(disciplina)이 재건되게 하소서.”

제네바에 돌아온 칼빈은 개혁교회의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는 시 의회의 잘못된 결정에 대해서는 언제나 맞서 싸웠다. 칼빈은 어느날 오후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제가 행하는 설교가 제네바에선 마지막 설교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제 의사에 따라 이곳을 떠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들을 제게 강요한다면 저는 결코 그 일에 경솔히 대처하지 않을 것입니다.”(정미현, p. 78) 

1538년 깨끗이 제네바를 떠났을 때와는 달리 칼빈은 국가의 강압적인 태도가운데서도 교회의 독립과 신앙의 자유를 위한 단호한 결심을 보였다. 칼빈의 개혁은 페랑을 중심한 제네바의 전통적인 귀족가문들과 충돌로 이어졌다. 칼빈이 내세운 권징 혹은 훈육(displina)의 공평한 적용이 기득권층에게 수용되지 아니했던 것이다. 제네바 시민의 자격도 없는 피난민으로서의 칼빈의 신분이 또한 배타성에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종교개혁을 위해서는 타협을 모르는 칼빈은 해가 갈수록 어려움에 부딪쳤다. 

칼빈과 반대파들과의 갈등은 칼빈의 개혁과 삶을 힘들게 만들었다. 반대자들은 칼빈의 서적 출판을 위한 복잡한 절차를 요구하여 무산시키거나 지체하게 만들었다. 길에서 칼빈에게 야유가 쏟아졌고 조롱의 휘파람과 “가인, 가인!”이라는 별명을 부르기도 하였다. 칼빈의 집 앞에서 시편 찬송가의 곡에 맞추어 음란한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1547년 칼빈은 비레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못된 일들이 너무 많이 생겨서 교회의 정돈된 상태가 어느 정도 지속력 있게 유지된다는 것을 더 이상 희망할 수 없다네, 특히 내가 하는 일들을 통해서 말일세.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나는 정말이지 아주 부서지고 망가진 한 남자일 뿐 일세”(정미현, p. 91)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교회의 건설을 위해 칼빈은 강인하고 결단력 있게 그들의 악습과 패륜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맞섰던 것이다. 칼빈이 제네바로 다시 온다는 의미는 투쟁을 의미한 것이었다. 1541-1555까지 칼빈은 투쟁의 삶의 연속이었다. 1545년부터는 이단을 대항한 저서를 통한 투쟁도 감당해야 했다. 한때 칼빈의 사망에 대한 소문을 들은 칼빈의 고향 노용의 성당참사들은 그의 죽음을 축하하는 거리행렬을 행사하였다. 1552년에는 곡물시장 광장에 위치한 칼빈의 집이 분노에 찬 이들에 의해 방화가 시도되었으나 다행히도 화마는 피했다. 칼빈이 사망했다는 소문이 무려 10번 정도 보고될 정도로 그는 로마교회의 대적이었다. 그러나 칼빈은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건 수많은 개신교도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친구가 되었다. 그들은 그가 얼마나 자신을 비우며 가난한 삶을 선택했는지를 보았던 것이다.(Halsema, p. 157)

매년 수 천 명의 개신교 난민들이 제네바로 이주해 왔으며 칼빈은 그들의 최상의 친구역할을 하였고 이들로 인해 칼빈의 집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의 아내 드 뷰레는 손님 대접에 여념이 없었다. 칼빈은 피난민들을 위해 시당국에 봉제업을 육성할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는 여러 지역에서 온 이들을 위해 다문화 예배순서를 만들기도 하였다.-영어, 이태리, 스페인, 플래미쉬 등. 칼빈은 너무 바빠서 아플 시간도 없었다.

칼빈의 대적들은 칼빈이 부동산을 구매하기 위해 수천 달러를 투자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때 칼빈은 이렇게 답했다.

“우리가 앉아 먹는 식탁도 우리가 잠자는 침대도 우리 자신의 것은 하나도 없는데...어디에서 이런 소문이 났을까? 나의 절친들은 내가 1피트의 땅도 소유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나는 1에이커를 구입할만한 정도의 돈을 한 번도 가져 본적이 없었다.”(Halsema, p. 164)

어느 날 추기경 사돌레토는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incognito) 제네바에 나타났다. 그는 제네바를 다시 로마교회로 돌려놓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추기경이었다. 그는 캐논 거리에 위치한 소박한 칼빈의 집에 도착하였다. 추기경은 초라한 칼빈의 집을 보면서 개신교의 대표주자로 유명한 칼빈이 이런 초라한 집에 살고 있는데 대해 경아해 했다. 말문이 막힐 정도로 어리둥절하였다. 로마에 있는 감독들도 부와 하인들을 거느리며 대저택에서 살고 있는데 그리고 총감독이나 추기경들은 왕들처럼 궁전에서 살고 있는데 전 개신교회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이런 집에 살다니. 그리고 사돌레토는 초라한 검은 망토를 걸치고 문을 열어주는 칼빈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톨레도가 당시 교황인 파이어스 4세(Pius IV)에게 어떻게 보고했는지는 몰라도 교황은 칼빈이 죽었을 때 이런 말을 남겼다. “이 이단의 가장 큰 힘은 돈이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에서 나왔다.”(Halsema, p. 164) 교황은 로마교회의 성직자들에게서 그런 모습은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칼빈은 얼마 안 되는 돈에도 불구하고 늘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얼마 안 되는 수입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기 때문에 진정한 부자이다.“(Halsema, p. 165) 이 얼마 안 되는 돈은 칼빈에게 손님을 대접하고 약값을 지불하고 문전에 찾아온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기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항상 빌린 돈을 지불하지 않고는 시의회의 도움을 받지 아니했다. 칼빈의 병든 기록을 남김 시 의회 서기록에는 ”who has no resourses“라고 기록되어 있다.

어느 날 시 의회는 딱한 사정에 처한 칼빈에게 10 crowns를 보냈다. 그러나 칼빈이 회복되었을 때 칼빈은 그 돈을 다시 돌려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 돈으로 자신을 위해 와인 한통을 사는 비용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 돈을 받아드릴 수 없었다는 기록이다. 그리고 칼빈은 도리어 자신의 봉급에서 10 crowns를 가장 가난한 목회자들을 위해 나누어 주었다고 하였다.

칼빈은 그의 두 번째 아이의 병으로 인해 또한 빚을 지고 있었다. 시 의회는 한참 후에야 칼빈 집에 있는 모든 가구를 그에게 선물하도록 동의하였다. 칼빈은 이제야 자신의 식탁과 침대에서 잠을 잘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1548년이었다. 어떤 때는 치솟는 자신의 치료비를 감당하기 위해 25달러를 차용해 주도록 시 당국에 간청하였다. 칼빈은 빌린 돈이 준비되었을 때 시 의회에 갚으려고 했고 그때 시 의회는 이를 거부하였다. 그는 시 의회에 답변을 보냈다. ”만약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시는 강단에 서지 않겠다고“ 그리고 그는 그가 받을 당연한 봉급의 일부도 거부했다. 어느 날 목사들이 칼빈에게 그들의 봉급을 시 의회에서 올려 주도록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때 칼빈은 시 의회에 자신의 봉급을 평준화해서 다른 목사들에게 나누도록 제안했다.(Halsema, p.165-166)

칼빈은 시편주석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나의 일생동안 내가 부유하지 않았고 돈이 없었다는 것을 설득 시킬 수 없는 어떤 사람이 있다면 나의 죽음이 최후로 그것을 보여줄 것이다.”(Halsema, p. 166)

칼빈이 죽었을 때 그의 재산을 2500달러였다. 그가 조금 더 살았다면 그것보다 작은 액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마지막 4개월의 봉급은 거절했기 때문이다. 칼빈은 내가 벌지 않았는데 내가 어떻게 받을 수 있느냐?고 하였다. 아마 그는 마지막 4개월간 병으로 인해 자신의 목회사역을 감당하지 못했던 것으로 본 것 같다. 칼빈은 자신의 가난에 대해 이와 같이 말했다. “Satisfied with my humble condition, I have ever delighted in a life of poverty”(Halsema, p. 166) 칼빈은 실로 그의 주인(Master)의 본을 따라 일생을 살았던 것이다.

1564년 5월 27일 칼빈이 사망했을 때 자신의 장례에 대해 친구들에게 부탁했다.

“나의 몸은 축복된 부활의 날을 기다리기 위해 일상적인 형식으로 매장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의 무덤에는 어떤 말도 기록된 것이 없고 무덤을 표시하는 비석도 없이 장례되었다. 

 

칼빈의 일생을 통해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칼빈은 불의한 일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분노는 감성적인 분노가 아니라 불의를 묵과하지 않는 의지적인 분노였다. 그는 자신과 함께 개혁에 동참한 자들을 향한 핍박과 그들의 고난과 순교를 지켜보면서 조용히 기도로 하나님께 호소하는 수도원적인 경건한 신앙은 아니었다. 그는 개신교도들을 핍박한 프랑스 왕 프란시스 1세에게 핍박을 중단 할 것을 소원하면서 개혁자들의 신앙이 정당함을 밝히려는 강력한 서한을 보냈다. 그것이 기독교 강요이다. 그는 시편서문에서 강요를 기록한 이유가 바로 형제들이 당하는 불의한 핍박을 간과할 수 없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는 그들을 연민하였으며 안타까움에 가득 차 있었다. 그의 연민과 안타까움의 밑자리에는 불의에 대한 분노와 몸부림이 있었던 것이다. 그 분노는 제네바의 종교개혁 때 실상으로 나타남을 볼 수 있다. 칼빈은 또한 이단들에 대해 1545년 발표한 논문에서 심한 말로 그들의 잘못을 질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칼빈의 성격은 잠잠하지만 불의한 일에 대해 무감각한 보신주의가 아니었다.

둘째, 칼빈은 저항하는 믿음을 가진 개혁자였다. 그는 신앙 양심의 자유를 주창한 16세기의 자유사상가로 행동하였다. 그는 자신에게 닥치는 모든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었다. 칼빈은 제네바 시의회의 결정이 교회의 성결 원칙에 위배된다면 단호하게 저항하였다. 칼빈은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단호한 투쟁의식을 가진 개혁자였다. 그는 자신의 직책을 잃을 각오로 진리 편에 서 있는 개혁자였다.

셋째, 칼빈은 예언자로서의 개혁자였다. 칼빈은 종교 개혁자에 앞서 예언자였다. 중세기는 예언자가 없었고 오직 배부른 사제의 역할을 하는 성직자들만이 있었다. 구약의 선지자가 종결되고 중간시대에 예언자가 없었고 살진 제사장들만 있었던 것처럼 중세교회는 사제들만 있었다. 그래서 예수 당시 사제처럼 중세의 성직자들은 제사에 종사하는 특권을 누리면서 치부하며 부패한 삶을 살았다. 이들에게 잘못을 지적할 예언자들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암흑기에 칼빈은 진리를 밝히고 말하는 예언자로 등장한 것이다.

넷째, 칼빈은 그리스도의 캐노시스의 삶의 철학을 철저하게 실천한 개혁자였다. 그는 명예와 권력 그리고 물질에서부터 해방된 비움의 개혁자였다. 그의 비움은 헬라의 정숙주의적인 비움이나 수도원적인 자기 비하의 비움이 아니라 개혁자로서 성경적인 삶의 모범을 위한 비움이었다. 

칼빈의 제네바의 종교개혁을 통해 오늘날 개혁교회가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이와 같이 칼빈의 개혁정신과 삶이 동반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16세기 제네바를 방문한 수많은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칼빈의 모습을 경험하고 자신들의 나라에 개혁교회 신앙을 전승하기 위해 투쟁하였던 것이다. 

칼빈은 실제로 자신이 주장한 진리대로 삶을 살려고 노력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먼지처럼 소멸되어 버리기를 원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마지막 순간 자신의 모든 잘못에 대해 용서를 빌며 생을 마감할 정도로 소박하고 정직한 남자였다. 그는 성직자이기 전에, 위대한 신학이기 전에, 그리고 1만 명이 넘는 대형교회의 담임목사이기 전에 그의 왕 예수그리스도에게 절대복종하는 겸허한 전도자였다. 칼빈은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내세우지 않고 한 알의 밀알로 살아진 것이다. 칼빈은 1만 2천명이 넘는 대형교회의 담임목사이기 전에 그의 왕 예수그리스도에게 절대복종하는 겸허한 전도자였다. 그는 1564년 4월 28일 제네바의 동료 목사들에게 마지막을 말을 남기고 별세로 갔다. 

“여러분은 제가 저지른 많은 실수를 참아내야만 했습니다. 제가 이루어낸 것이란 정말 보잘 것 없습니다. 마귀들은 이 말을 이용하려 들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다시 한 번 말하겠습니다. 제가 이룬 모든 일은 가치 없는 것이었고, 저는 정말 가련한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저는 시종 좋은 의도로만 일해 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의 부덕을 떨쳐내고, 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슴에 담아두고 일해 왔습니다. 여러분도 제 의도가 좋은 것이었다고 추억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제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 용서해 주실 것을 간청합니다.”

그래서 개혁이 가능했다. 칼빈이 죽은 제네바 목회자들은 서로 갈등하고 화합하지 못하면서 칼빈의 정신을 계승하지 못했다. 도리어 제네바에 유학 왔던 유럽의 여러 나라의 학생들이 칼빈의 정신을 이어 받아 개혁신앙을 전수했다.

 

III. 결론

오늘날 교갱협은 칼빈의 삶의 개혁정신으로 한국교회를 살릴 수 있을 것인가? 질문으로 결론을 갈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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