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 밥맛이 없어요. 무엇을 먹고 싶지도 않아서 묵는 둥 마는 둥 해요. ”
코로나19 난리 통에, 작년에 만나고 지금껏 뵙지 못한 장인심 권사님(신성교회)의 힘없는 목소리가 전화통으로 들려온다.

성탄절에 떡을 가지고 소록도까지 갔을 때, 손잡고 하고 싶었던 말 “따뜻할 때 잡수셔요” 하는 인사를 못한 것이 큰 아쉬움이었다. 외부인은 동리에 들어갈 수 없어서.
금년에 팔순을 넘긴 나이에 기력이 쇠하였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어쩐지 짠한 생각이 든다.

노인 교인들과 모여서 기도하고 찬송하는 일에 주일이 따로 없는 분들 아니던가. 정오기도를 모이고, 입원한 이웃들을 찾아보고, 방문객들을 맞아서 소록도 사람들 생활을 소개하는 일에 앞장서는 할머니셨는데, 기력이 많이 떨어졌다 싶다
소록도 믿음의 가족들 가운데도 장 권사님과는 친근하게 지내는 사이다.

내가 우체국에서 공무원 생활을 했던 녹동(고흥군 도양읍)이 장 권사님 고향이다. 바다 건너 육지, 도덕면 가야리 가상부락이다. 주로 농업으로 사는 인심 좋은 농촌이다. 부친은 마을 유지로 살았고, 6남매(1남 5녀) 가운데 귀염 받았던 막내딸이 인심이었다.

11세 때 한센병 나타났다. 초등학교도 못 들어갔다. 언니들이 다니는 초등학교가 십 리 길이 어서, 가까운 마을에 초등학교가 들어서면 입학할 것이라 했다. 그러나 병을 얻으면서부터는 출입도 못하고,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여 골방 생활을 했다.

철없어 보이는 어린 것의 눈에 보이는 부모님과 오빠 언니들의 행동이 예사롭지 않았다. 부친은 가문의 수치라며 주민들 앞에 막내딸을 보이지 않으려 했다.

어린 인심이는 그런 일로 슬퍼하며 마음에 모진 생각을 품었다. 자신이 죽어 가문에 수치와 저주를 끊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어느 날, 집에 있는 극약(쥐 잡으러 사놓은 것)을 입에 털어 넣었다. 잠시 후에, 하늘이 노랗게, 하얗게 소용돌이를 일었다. 끔찍한 고통이 태풍처럼 몰려왔다. 불같이 타오르는 통증을 견딜 수 없어 집안을 여기 저리 내닫고, 바닥을 기며 몸부림쳤다. 할머니가 서둘러 들려주는 물을 마시고는 속에 것을 다 토해냈다. 그리고 잠시 후 정신을 다잡고 부르짖었다. “할머니! 나, 양잿물 주세요… 왜 나는 죽지도 못해요…”울부짖으며 목 놓아 울었다.

오빠가 동생의 이런 모습을 보고 달래며 “절대로 죽으면 안 된다. 어떻게든 살아야 해. 장차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 것이다.”하며, 소록도에 가겠다면 소원대로 해주겠다고 달래었다. 인심이는 소록도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마음속으로 그 섬에 발이 닿기도 전에 바다에 뛰어들어 세상을 작별하리라 독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헛된 망상이었다.

그때의 아픔, 칼로 속을 긁어서 소금을 뿌린 것‘ 같았단다. 그 후유증 남아서 지금도 커피를 못 마신다고 한다.

1952년 8월 3일. 열여섯 살, 세상이 꽃같이 고은 나이라고 하는 때, 소록도에 들어오던 날은 무더운 여름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집을 나서는 길에 오빠와 형부가 동행했다. 남들 눈을 피해, 골목으로, 산길로, 들길로 녹동까지 내려와, 바닷가 소록도 뱃머리에 닿았다. 살아서는 나오지 못한다는 섬, 천형의 섬 소록도로 딸을 보내는 어머니는 땅을 치고 가슴을 쥐어뜯고 슬피 울었다. 

소록도 생활,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이 없고, 바라보며 수군대는 이들도 없었다. 처음 나간 교회가 더욱 그랬다. 그냥 언니고 오빠이고 어머니이고 아버지였다. 삼촌이고 이모였다.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절망과 고통 중에 서로를 격려하고 용기를 주는 사랑이 흐르고 있었다. 예수 사랑이 강물처럼, 샘물처럼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비천한 사람들이 모인 섬마을에서 그녀의 영혼을 찾아오신 하나님의 음성이었고, 사랑의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예수 십자가 구원의 복음, 값없이 받는 은혜가 임했던 것이다. 전통적 유교 집안에서 자란 장인심이 버림받듯 홀로되어 “하나님의 나라, 예수의 피로 씻어 죄 속함 받은 신자, 성도의 교제가 있는 교인이 된 것이다.

교회에 나가면서 학교에도 나갔다. 찬양대 활동도 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같은 형편의 신랑을 만나 결혼했다. 자식은 없었으나 부부가 서로 사랑하며 믿음 안에서 평생을 행복하게 살았다.

믿음의 선진들의 신앙생활을 열심을 본받아서 여러해 여전도회장을 지내고, 한낮이면 예배당에 모여 기도하는 ’정오 기도팀‘도 인도하여 지금껏 이어오고 있다. 한 사람씩 세상을 떠난 것이 이제는 열도 못 모이게 인원이 줄었다. 한국 교회가 평양대부흥 운동 때부터 시작했던 정오 기도를 중단하지 말고, 둘이 남을 때까지 이어가자고 약속했다.

먼저 간 남편 만날 날을 꿈꾸며 황혼처럼 기울어버린 남은 인생을 천국 소망 중에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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