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 밥맛이 없어서 오늘은 아무것도 안 먹었어요. 북한 열리면 평양 가야 하는데 이러다가 통일도 못 볼가 싶어 걱정입니다.”

소록도 장은심(가명) 할머니의 인사이다. 코로나19로 겪는 격리 생활에 지친 기색이다. 함께 생활하던 몇 분이 요양 병동에 입원해서 날마다 문병을 했었는데 그 일도 못한단다. 그렇지만 매일 정오면 신성교회 예배당에 네댓 명이 모이는 기도반은 계속하고 있단다.

내가 소록도에 드나들면서 한국 교회의 아름다운 기도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이 기도반을 만났었다. 격려하면서 두세 사람만 남을 때까지도 이 모임을 끊지 말자고 약속했다. 그때부터 종종 장 권사님 집에서 도시락을 펴놓고 점심을 먹었고,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자원봉사 활동을 오는 분들도 장 할머니 집에 와서 소록도 사람들 이야기를 듣는다.

기도반의 기도 내용은 소록도 교회와 한국 교회만 아니라 자신들의 삶을 책임져주는 나라와 고마운 국민에게 복을 주시라는 간구이다. 해외 선교사들과 협력하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장 권사님이 말레이시아, 필리핀, 일본 교회를 방문하기도 했다.

남북이 통일되면 북한 교회를 위해 2009년부터는 우체국에 ‘통일 통장’을 만들었고, 지금까지 14년을 이어왔다. 내가 통일을 못 보더라도 ‘성경 책 구입비, 구제와 선물비’로 써주라는 말을 유언처럼 통장에 써놓았다. 소록도 할머니의 특별한 사랑이다.

꿈꾸는 소녀의 꽃 같은 나이라는 16세에(1952년) 소록도에 들어왔다.

6남매 중 막내딸이던 그녀 고향은 가까운 고흥군 도양면이다. 한센병인지 아닌지 앓았던 수년을 집에서 지냈지만 증상이 나타나면서 입원을 결심했다.

어머니와 함께 소록도 배가 닿은 녹동까지 걸어왔다. 동네 사람들 눈을 피해 들로 산으로 이십 리를 걸었다.

배는 노 젓는 작은 목선이었다. 어머니는 자신의 생명 같은 막내딸을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내야 했다. 딸은 어머니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속으로 삼켰다. 안내 나온 주임에게 맡겨진 딸이 멀어지자 어머니는 바닷가에서 통곡했다. 그때는 살아서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이별로 알았다.

은심 양은 바다에 빠져 죽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배에 함께 탄 사람들이 쉽게 건져낼 것 같았고, 바다도 잠잠해서 그날은 포기했다. 경치 좋다는 소록도 구경이나 며칠 하고 죽어야지 하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처음 들어간 곳이 신생리였다. 한 방에 8명씩 두 방을 합쳐 16명이 함께 살았다. 할머니와 어머니같이 다정한 분도 계셨다. 그분들은 세상일에 철이 덜 들고, 공동생활에 생소한 10대 소녀 은심 양을 애틋이 생각해 사랑으로 품어주었다. 학교 다니는 또래도 있었다. 같은 환자 형편이라서 서로 낯을 가리지 않으니 마음이 편했다. 서로 불쌍히 여겨 돌봐주며, 정이 들면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이나 딸, 삼촌이나 이모라 부르며 서로 의지했다.

장은심, 하나님의 딸로 거듭난 거룩한 만남의 시간이 있었다.

할머니 한 분이 “가자, 교회에 너 같은 처자가 많아” 하며 은심이를 챙겼다. 난생처음 찾아간 교회는 별천지였다. 몸이 불편한 교인들이 예배당에 가득 모여 온몸으로 열심히 찬송가를 부르고, 소리 높여 기도하는 모습은 이 세상이 아니었다. 놀랍고 신비했다. 어둡고 답답하던 마음에 한 줄기 밝은 빛이 비치듯 마음이 평안해졌다. 신비로운 천국이었다.

목사님께서는 그녀의 마음을 들여다보듯 말씀하셨다. “자살(自殺)은 살인입니다. 지옥에 떨어질 죄악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 한 마디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바다에 빠져 목숨을 끊으려던 생각을 버렸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믿으면 영생(永生)을 얻습니다.” 그 말씀에 붙잡혔다. 훗날에 깨달았지만 하나님이 목사님을 통해 구원을 베푸신 것이었다. 비록 몸은 병들었지만 하나님의 나라 새로운 피조물(被造物)이 되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학교에 갔다. 고향에서 이루지 못한 꿈이 소록도에서 열렸다. 나이가 많아도 병사(病舍) 지역에 있는 녹산초등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3백여 명 학생이지만 입원하는 부모 따라온 건강한 아이들이 많았다. 그들과 친구로 어울려 열심히 공부했다.

교회 찬양대에 들어가면서 어른 교인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그때부터 “나 위하여 십자가에 중한 고통 받으사 대신 죽은 주 예수의 사랑하신 은혜여… ” 늘 찬송하며 살았다.

소록도 섬 생활 70년. 한때 6천 명 넘던 환자들이었는데, 병을 낫고 자립하며 살기 위해 전국 각지로 ‘자립 정착촌’을 개척해 나갔다. 인구는 감소하고, 교회도 세 군데나 문을 닫았다. 10대에 만나서 지금껏 함께 살아온 분들이 여럿이다. 대부분 나이 80을 넘겼다.

주거시설이 불편하고, 식량이 부족해서 고생했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집을 잘 갖추고, 생필품도 부족하지 않게 보급된다. 모든 것이 앞서간 교인들의 눈물기도의 열매이고 하나님의 은혜라며 감사하고 산다.

장은심 권사도 결혼했지만 남편이 먼저 하늘나라로 떠났다. 부모도 세상을 떠났지만 언니 하나가 찾아다니며 교회에 나간다.

‘이젠 내 차례겠지’ 생각하며 하나님의 부름을 기다린다.

코로나가 풀리면 맛있는 김치랑 모싯잎송편이랑 들고 달려가야겠다.

기도반을 만나 코로나에 지치고 외롭던 얼굴들 보며 굽은 손 붙잡고 위로하고 합심하여 기도하련다. 그리고 우리들의 소망을 찬송하리라. ‘날이 저물어 오라 하시면 영광 중에 나아가리 빛난 면류관 받아쓰고서 주와 함께 다스리리’ 심령으로 찬송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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