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직후 갈 곳 없는 전쟁고아들은 무작정 기차를 탔다가 종착역인 목포에 내렸습니다. 그래서 목포에는 고아원이 많습니다. 유학생들이 가장 많은 곳도 목포입니다. 험악한 파도와 싸우며 내 자식만큼은 잘살게 해야겠다는 일념으로 부모들은 모질게 돈을 모아 육지인 목포에 집을 사고, 거기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특히 항구에는 결손가정이 많았습니다. 가난 속에 홀로 자식들 먹여 살리려는 아낙네들의 억척스러운 삶이 그 항구에 있었습니다. 갈 곳이 없어서 시청이나 항만청 소유지에 몰래 밤에 들어가서, 겨우 비만 피할 수 있는 집을 짓고 사는 일들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다음날에는 어김없이 시청의 망치부대가 와서 다 부수고 갔습니다. 그러나 어떻게든 자식들을 키우고 살아야 했기에 어머니들은 다시 집을 짓고 또 지었습니다. 가난한 어머니들의 그 억척스러움을 아무도 이길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저를 세우셨습니다. 이것저것 생각해볼 겨를도 없었습니다. 앞에 살던 주인 셋이 모두 죽어나가 흉가로 불리던 100평 가옥에 네 번째 주인으로 들어갔습니다. 유리창은 깨져있고, 아랫층에는 물이 새어 들어와 고인 채였습니다. 노숙자들까지 자주 드나드는 그곳에 불을 켜 교회를 개척했고, 아이들과 정착해 버티는 생활이 시작됐습니다.

배고픈 아이들이 몰려다니다 보면 남의 물건에 손을 대다가 붙잡혀서 파출소에 끌려가기 일쑤였습니다. 갑자기 경찰로부터 호출이 오면 찾아가 사정하고 아이들을 데려와야 했습니다. 고심 끝에 방법을 찾았습니다.

예배당 한쪽에는 두 평 남짓한 작은 주방이 있었습니다. 그곳에다 아이들이 언제나 자유롭게 먹을 수 있도록 밥과 김치를 마련해두었습니다. 원칙 둘을 세웠습니다. 먹었으면 설거지할 것, 밥이 없으면 밥을 지어놓을 것.

훗날 그 아이들이 성장한 후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동안 함께 살면서 어떤 게 가장 기억에 남니?” 그러면 배고픈 시절에 눈치 보지 않고 맘껏 먹을 수 있었던 그 주방이 제일 많이 생각난다고 말합니다. 그들에게 주방이 가장 따뜻한 피난처였습니다.

아이들에게는 회복과 치유가 일어났고. 그들 중에서 약 35명의 목회자가 배출되었습니다. 저는 그저 까마귀가 물어다 준 쌀자루를 들여놓고, 김치를 얻어다 놓았을 뿐입니다. 그 낮은 곳에 저를 서게 하시고 그들과 어우러지게 하신 분은 주님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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