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8/24) 교갱협 제9차 영성수련회 주제특강

거창한 제목을 붙여 놓았습니다만, 여러분 들으면서 보시면 다 아는 이야기이고, 어떤 면에서는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반추하면서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 우리 앞에 다가오는 목회 세대를 어떤 눈으로 보면서 분석하고 통합할 것인가 하는 점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한국교회 역사를 돌아보면 120년 정도 되는데요. 여러 과정을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1884년 알렌 선교사가 한국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부터 시작해서 46년 동안은 기독교가 뿌리를 내리는 기간이었고, 1차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부흥을 하던 시기였습니다. 그 당시의 교세를 보면 가장 막강한 부흥을 했던 북장로교회 교세가 36만 명이었습니다. 1900년대 초중반입니다. 다른 교파들과 합하면 50만 명 정도의 성도들이 한반도에 있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 후 1930년도부터 시작해서 해방되던 45년 동안은 한국교회가 혹독한 시련을 겪은 것을 우리 모두 잘 압니다. 일제의 핍박으로 성도수는 급감하고 지하교회를 통해서 명맥을 유지하든지, 일본정권과 야합하면서 교회를 운영하든지, 어떤 형태로든지 교회 명맥을 유지하는 심각한 위기를 만났습니다.

이후 해방이 되어 다시 하나님이 부흥의 불길을 지펴 주셨습니다. 해방되던 1945년부터 1985년까지 40년 동안은 정말로 놀라운 부흥의 시기를 한국교회가 맞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6.25와 같은 혹독한 풀무불의 연단도 있었지만, 그런 연단이 오히려 한국교회 부흥에 기름을 끼얹는 것과 같은 역할을 했다는 것을 지나고 나서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남한 교회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1945년부터 1985년에 이르는 40여 년 동안의 부흥은 엄청난 폭발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세계 교회가 주목하고 경탄하고 부러워하는 부흥을 맛보았습니다. 특별히 근대화 작업이 성공하면서 교회는 폭발적인 성장을 시작했습니다. 어떤 선교학자의 표현대로 당시 한국교회의 부흥을 일컬어서 "현대 선교사상 위대한 한편의 드라마다."라고 했습니다. 현대 선교사상 위대한 한편의 드라마를 세계가 보고 있었습니다.

그때의 부흥이 어느 정도로 대단했는가 하면, 70년대에는 나라가 유신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어려웠지만 교회는 계속 부흥했는데, 통계상 1년에 개척 교회가 4천 개 이상이었습니다. 엄청난 거죠. 70년대 후반 80년대 초반에 들어서는 1년에 교회 성장이 60만 명이라는 통계 수치가 나왔습니다. 한 해동안 60만 명의 교인이 늘어난 거예요. 1년에 15%의 교회성장률인데 이것은 인구 증가율 2%에 비교하면 약 700%의 성장률입니다. 엄청난 성장을 했고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대부분의 30, 40대 초반의 부교역자들, 담임목사님들은 아마 그 시기에 그 흥분과 감동, 열기를 잘 느끼지 못하셨을 거예요. 그러나 저와 같은 경우는 70, 80년대 부흥기를 몸소 체험하면서 목회했기 때문에 어떠했는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부흥이 지속되면서 한국에 개신교가 들어온 100주년을 기념해 1984년 전 인구의 4분의1, 약 1,200만 명이 개신교를 믿고 있다는 것을 대내외적으로 공식화시킬 정도였습니다. 전 세계가 깜짝 놀랄만한 정도의 부흥을 1세기도 거치기 전에 경험했고, 지금까지 그 부흥의 열기 속에서 목회를 해왔습니다.

그러나 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이상기류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개척이 어렵다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왔고, 각 교단의 통개 수치를 보면 불과 0.5%의 성장률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여러 학문적인 평가나 사회적인 평가가 있습니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침체기에 접어들었다는 것입니다. 80년대 중반이 지나면서 교회가 성장이 안 된다는 소리를 듣기 시작했는데, 벌써 20년의 세월이 흘렀어요. 그런데 이 20년 동안 그 분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제 자신이 느끼기에는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침체라는 말 속에는 단순히 통계 수치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폭발적인 성장이 가져다준 후유증으로 인해 생긴 심각한 질병이 교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감소함과 동시에 금방 치유하기 어려운 병을 앓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들을 묶어서 침체라는 단어로 표현을 하는 것 같아요.

교회가 근 반세기 동안 부흥하는 경험을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신학교도 많아지고, 신학교를 지원하는 사람들도 늘어나서 목사를 엄청나게 양산했지만, 교회가 침체되면서 목사는 많은데 교회일은 잘 안되는, 신학교 지원자가 점점 줄어드는 어려운 상황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실제로 신학교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니까 지원자 수가 감소추세에 있다고 합니다.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시장원리에 의해 문을 닫는 신학교도 생길 것이고 나중에는 여러 면에서 부작용들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악화된 이러한 상황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좀 더 겸손하고 회개하는 심정으로 현실을 바로 분석하고, 진단하고, 또 한 번의 새로운 부흥과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자신이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목사라고 보지 마세요. 저는 78년도에 교회 개척을 시작했고, 70년대 초반부터는 젊은이 사역을 하였습니다. 저는 침체를 모르고 지금까지 살았어요. 사랑의교회는 80년대 중반, 90년대 한국교회 전반에 침체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때 더 폭발적으로 역사했어요. 침체인지 전혀 못 느끼고 살았습니다만, 개교회를 보면 그런 교회들이 있죠. 침체에 대해 이야기한 이후로부터 20년이 가까워 지는데도 상황은 좋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한국교회 침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걸어온 긴 역사를 돌이켜 보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은혜의 시대가 지나가면 반동의 시대가 따라옵니다. 부흥의 시대가 지나가면 쇠퇴의 시대가 뒤를 이어옵니다. 기독교 역사가 보여주는 엄연한 현실적인 진리입니다. 이런 리듬을 타는 과정을 우리가 역사를 통해 읽게 되는데, 이는 놀랍게도 한 가정의 신앙 역사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며, 지역교회 역사에서도 나타나며, 한 국가의 교회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영국교회의 예를 들면 18세기, 19세기 영국의 교회는 황금시대였습니다. 조지 휫필드를 위시해서 국회의원으로서 국회의원 3분의 1을 전도해서 개종시키고, 나중에는 노예제도를 폐지시키는데 공헌했던 윌리엄 윌버포스 의원, 또 논문 몇 편을 가지고 1,200만 부나 되는 논문 출판 부수를 자랑하는 위대한 신학자 존 라일, 3,500편 이상의 설교를 통해서 영국교회 목회의 새로운 기원을 가져다준 찰스 스펄전, 근대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캐리, 중국선교의 대부 허드슨 테일러, 한국 최초의 선교사 순교자 토마스, 한글성경 번역으로 지대한 공헌을 한 로스 선교사, 이런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나는 쟁쟁한 인물을 말하려면 끝도 없죠. 전부 영국교회 출신들이에요. 우리가 상상을 못 할 정도로 신앙적인 황금시대 전성기를 영국교회가 18, 19세기를 구가하면서 내려왔으나, 20세기 들어와서 몰락의 길을 급하게 걷기 시작했습니다.

20세기 들어와 영국교회에 나타난 초기 증세는 노령화 현상이었습니다. 젊은이들이 빠져 나가고 점점 교회가 노령화되었어요. 이제 한 세기가 지나갑니다만, 영국교회는 6000만 명 전체인구 중에서 주일 교회에 출석하는 숫자는 120만 명밖에 안돼요. 스프링보드 설문조사 기관의 분석에 의하면 앞으로 2~30년 안에 주일예배에 출석하는 숫자는 전인구에서 50만 명도 안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영국교회는 텅텅 빈 상태입니다. 한 때 화려한 부흥을 겪은 교회가 쇠퇴의 길을 걷는 것은 어떤 면에서 숙명적인 피할 수 없는 현상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현상이 지금 우리나라에 찾아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편으로 하는 겁니다. 가정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가정의 신앙 계보를 보면 한때 남다른 믿음을 가지고 헌신했던 집안의 자녀들도 신앙적으로 굉장히 어렵다는 것을 봅니다. 헌신된 선조들을 가진 집안들이 오히려 영적으로 퇴보하고 신앙을 떠나는 일들을 자주 봅니다.

우리 교회에 최 모 권사 가정이 있는데 그 가정의 부모님은 황해도에서 첫 믿음, 첫 사랑을 가지고 열렬하게 주님을 섬기던 집안입니다. 얼마나 뜨겁게 주님을 섬겼는지 집안사람들은 끼니를 제대로 못 먹을지언정 헌금으로 모든 것을 다 받치는 정도였습니다. 나중에는 얼마 남지 않은 농토까지 교회를 짓는데 몽땅 바치고 집안 식구들을 위해서는 생활대책을 전혀 세워놓지 않는 정도의 헌신을 한 집안입니다. 그러자 자녀들이 반감을 갖고 전부 교회를 떠나버렸습니다. 우리 교회 최 권사님은 수십 년 교회를 떠나서 제멋대로 살다가 나중에 다시 회개하고 돌아온 케이스입니다. 이런 집안에서도 한 세대가 은혜의 시대를 구가했다면, 다음 세대는 은혜로부터 탈락하고 병들어버리는 사태를 많이 봅니다.

주일학교에서 제일 골치 아픈 애들이 누구인지 보세요 믿음이 좋은 부모를 가진 집안의 애들이 골칫덩어리라는 거예요. 전통이 있는 교회를 가보세요. 그 교회를 생명이 떠난 시체처럼 만들어놓은 당사자가 누구인지 한번 보세요. 다 자기 부모가 이 교회 장로였다는 자랑하는 사람들 집 자녀들이 그 교회를 그렇게 영적으로 시체처럼 만들었어요. 교회를 병들게 하고, 쓴뿌리 역할을 하고, 교회로 하여금 고통을 겪도록 하는데 주동적인 사람들을 보세요. 다 부모님 때에 그 교회를 위해 헌신한 집안의 자녀들이에요. 심각한 일입니다. 그 부모의 믿음을 그대로 잇는 가정은 숫자적으로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우리 교회 부목사 하나가 있었는데 7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모 교회의 담임목사로 들어갔어요. 사이즈는 불과 이삼백 명 미만의 교회지만 서울에 있는 그 교회 장로들이 저를 찾아와서 좋은 목사님을 모시게 되어서 기쁘다고 두 명의 장로가 모시고 가는 부목사를 칭찬하더라고요. 그래서 새로 부임해서 가면 목회 재미있게 하겠구나 하고 잔뜩 기대했는데, 간 지 11개월 만에 쫓겨났습니다.

집회를 통해서 생전 안해 본 전도를 하고, 교인들이 백 명이 넘는 태신자들을 데려와 복음을 듣고 46명이 그 자리에서 결신하고, 교회가 완전히 분위기가 달라지는 이런 풍토였는데, 왜 이런 사건이 벌어졌느냐? 장로 두 사람이 목사와 힘겨루기를 한 거예요. 지금까지는 모든 교인들이 장로들을 쳐다보고 매달리고 살았는데, 목사가 와서 너무 튀니까 가만히 둘 수가 없는 거에요. 그래서 죄목을 만들어서 노회에 고소를 했어요. 죄목은 목사가 어느 금요일 철야기도회 때 자기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장로들과 안수집사들도 불러올려서 목사가 무릎을 꿇고 자기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게 했다고, 어떻게 목사가 장로, 집사를 불러서 안수기도를 받느냐 이게 죄목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교회가 빚이 1억인가 있는데 부교역자가 없어요. 얼마나 힘들겠어요. 사모가 신학대학을 나온 사람이라 유아세례 받는 과정을 하도록 했더니, 어떻게 사모가 유아세례 문답을 하느냐고 노회에 올렸는데, 그러면 정말 바로된 교회라면 장로들이 잘못하더라도 노회가 바로잡아줘야 하잖아요. 장로들이 노회원들을 삶았는지 노회 지도자 목사라는 사람들이 전권위원을 만들어 담임목사를 불러서 나가라 네가 잘못했다 이런 식이에요. 그리고 "자네는 사랑의교회에서 배운대로 목회한다고 하지만, 사랑의교회가 좋은 교회가 아니다. 사랑의교회는 전국적으로 남의 교인들을 훔쳐서 부흥한 교회이기에 좋은 교회가 아니다. 그런 식으로 목회하면 안된다."라고 했답니다.

세상에 이렇게 비신사적이고 상식이하인 곳이 없어요. 한국교회, 이런 비슷한 병을 앓고 있는 교회가 80%는 된다고 봐요. 얼마나 심각한 지 아십니까. 교회의 무서운 영적 침체, 영적 암흑기 시험에 빠지도록 하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다 선조 때 신앙생활 잘하고 교회에서 인정받아 자식들이 장로 되고 권사 된 사람들이에요.

여호수아 시대의 순종의 세대가 지나가니까 사사기 시대에 불순종의 세대가 따라오고, 사무엘 슬하의 타락한 아들들이 등장하고, 성군 히스기야 밑에서 유대 나라를 돌이킬 수 없도록 말아먹은 최악의 폭군 므낫세가 태어나는 것과 같은 이런 기막힌 일들이 신앙세계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볼 때 한국교회 침체는 포스트 부흥기에 우리가 피할 수 없이 겪어야 하는 하나의 과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무리 이것을 막으려고 해도 막을 수 없고,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니냐, 한때 성장했고 부흥했으니 그 다음에는 쇠퇴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어떤 때는 하게 됩니다.

그러나 저는 모든 것을 쉽게 받아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목회자의 입장에서 또 우리교회가 걸어온 과정을 돌이켜 보면서, 아무리 40년 동안 폭발적인 부흥기를 경험했다 하더라도 그 부흥기에 제대로만 했다면, 그다음 자연스럽게 따라온다고 생각하는 침체기를 건너뛸 수가 있었을 것으로 분명히 확신합니다. 그런데 몇 가지 면에서 실패했기 때문에 결국 이와 같은 암초에 걸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따라서 비록 시간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그동안 교회 부흥기를 거치며 등한시했던 부분들을 엄밀하고 냉정하게 검토해서 지금이라도 바로 잡으면 이 침체기를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저는 확신합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몇 가지를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부흥 다음에는 침체기가 오기 마련이라는 이론을 받아들기보다는 조금 더 잘했더라면 부흥기를 이어나갈 수 있었을 것이고, 또 침체기가 왔다 하더라도 금방 건너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어려운 상황을 목전에 두고 겸손한 반성과 회개만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목회자들이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는 일반론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 한국교회가 이렇게 쇠퇴하고 있느냐, 침체하고 있느냐에 대해 일반적으로 하는 소리들, 즉 기도의 열기가 식었기 때문이다, 전도를 게을리했기 때문이다, 죄를 회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는 소리들... 성령의 능력이 약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 전도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러나 저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침체기에 접어들었다는 빨간불이 들어오고 나서도 한국교회가 여전히 열심을 다하는 것은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만큼 기도 열심히 하는 교회가 없어요. 그래도 열심히 전도하려고 애를 씁니다. 날마다 성령의 은혜를 얼마나 사모하고 하나님을 부르짖습니까? 다 한단 말이에요. 하는데도 불구하고 20년이 지나는 지금까지 침체기를 못 벗어나는 이유가 뭐냐? 일반론 가지고는 안되는 거예요. 우리는 좀 더 목회자의 입장에서 엄밀하게 분석하고 자신을 냉정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저는 한국교회가 근대화 작업과 함께 부흥을 경험하면서 본의 아니게 떠안게 된 후유증이 있다고 봅니다. 이 부흥의 후유증은 두 가지의 목회 편중 현상으로 드러났다고 보고 있습니다. 편중이라는 것은 균형을 잃었다는 말입니다. 똑같이 강조하고, 똑같이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것을 하나는 강조하고, 하나는 등한시했습니다. 부흥의 열기 속에 정신없이 달려오면서 그만 목회가 한쪽으로 치우쳐져 버렸어요. 그중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때문에 한국교회가 침체를 겪게 되었다고 보고 있고, 이 두 가지가 아직도 시정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 침체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설교와 훈련 중에서 우리는 설교 쪽으로 편중되어 버렸습니다. 또 한 가지 약속과 명령 중에서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약속에만 편중되었습니다. 그래서 약속을 얻어내기 위한 믿음은 많이 강조하였지만 명령에 순종하는 삶은 강조하지 못했어요. 목회가 한쪽으로 치우쳐 버렸어요.

설교와 훈련 중에 설교에 편중됨으로써 목회가 본질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약속과 명령가 운데서 약속에만 매달리는 목회를 하다보니 교회가 도덕적인 권위를 잃어버렸어요. 이런 현상이 노골화됨으로써 한국교회는 가만히 앉아있어도 결국은 밀물의 시대가 지나가고 썰물의 시대가 다가올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있었다고 봅니다.

우선 설교와 훈련을 놓고 왜 제가 편중이라는 말을 쓰는지 생각해 봅시다. 한참 교회가 부흥할 때 지역마다 개척교회가 우후죽순 생겨났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사역에 성공해서 그 지역사회를 복음화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대형교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사회가 잘 살아보세 라는 구호를 가지고 많이 벌고 즐기고 하는 쪽으로 점점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 기울어지는 분위기 속에서 교회가 부흥하다 보니, 자연히 교회 목회도 물량주의의 제물이 되기 시작했죠.

목사들은 무조건 사람을 많이 모아야 하고 크게 지어야 하는 거예요. 그리고 많은 헌금을 쓸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하는 거예요. 그것이 목회의 성공이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언제 저렇게 되나 하는 강박감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인간이니까 피할 수가 없어요. 50미터도 안되는 거리에 교회가 있잖아요. 아파트 주변을 보면 거리거리에 종탑들이 서 있잖아요. 주일이 되면 어떤 교회는 교인들이 막 몰려들어야 하는데 안 몰리니 집사들이 서서 한참을 기다려야 한명 들어올까 말까, 피를 말리는 경쟁이죠. 아무리 성령 충만한 거룩한 사람이라도 그런 상황에서는 힘듭니다.

그러니까 목사들이 강박증에 걸리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많이 모아서 크게 짓자 그것이 성공이다. 그래서 목사의 능력은 교회 사이즈로 평가되고, 교회 사이즈는 그 목사의 성공을 보증하는 교회 문화가 형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작은 교회 목사는 그 인격 자체만으로도 작은 사람으로 평가받는 병든 교회문화가 자리를 잡은 것이 지난 수십 년 동안의 한국교회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목사에게 있어 주일날 몇 명 모이느냐가 초미의 관심사예요.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 통계는 제일 믿을 수 없는 통계로 전락했죠. 왜 목사들이 그렇게 되었을까요. 세지를 않아요. 백 명이 모이는지 이백 명이 모이는지 알 수가 없어요. 대부분이 그래요. 유명한 말이 있죠, 교회 성장을 연구하는 기관에서는 교회 통계를 알아보는 방법은 각 교회마다 간첩을 하나씩 넣어서 뒤에서 실제적으로 세도록 만드는 거예요.

부목사들이 주는 소스를 종합해서 이야기하는 거죠. 물어보니 그러더라고요. 기가막힌 이야기예요. 이건 뭘 의미하느냐?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물량주의에 빠져서 어떻게 하든지 많이 모으는 것이 초미의 관심사가 되다 보니 목회가, 주일예배가 제일 중요한 사역이 되어버린 거예요. 다른 것은 다 안 되더라도 주일 예배만 많이 모였다 하면 그것으로 그 목회를 평가할 수 있는 절대 기준으로 인정을 해버리는 겁니다. 이게 오늘날 한국교회의 목회 문화입니다. 그러다 보니 청중 동원에 효과가 있다고 하는 방법이면,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별로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는 상황이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되니 몇 가지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목회 자체가 예배 일변도의 목회로 굳어지기 시작한 것, 목회자가 일주일 내내 하는 것이 예배 준비, 예배를 몇 개 드리는 것을 위해 목회자가 뛰는 것, 이것이 목회 전부로 착각할 정도로 목회 일변도의 상황이 나타났습니다. 목회 일변도로 빠지니까 설교 만능주의가 등장합니다. 설교 한 두 편 가지고 그 성도들의 영적인 요구를 다 채워준다고 착각하는 거예요. 설교를 잘하는 목사일수록 이런 착가에 빠져있어요. 내 설교 하나만으로도 교인들은 충분히 자양분을 공급받고 신앙생활 제대로 할 수 있다고 하는 나름대로의 착각에 빠졌어요. 설교 만능주의에 빠졌어요. 작은 모임이든 큰 모임이든 앉기만 하면 설교를 해야하는 거예요.

교회 리더십이 열린 리더십이 아닌 닫힌 리더십이 되어버렸습니다. 닫힌 리더십이 뭡니까? 자기 혼자 일한다고 생각하는 리더십입니다. 내가 교인을 위해 무엇을 할까 고민하는 리더십이 닫힌 리더십입니다. 열린 리더십은 나는 교인들과 함께 무엇을 할 것인가, 이 '함께'를 생각하는 것이 열린 리더십인데 설교 만능주의에 빠지고, 예배가 목회라고 생각하는 목회자는 전부 자기 혼자 주도하니까, 내가 교인을 위해서 어떻게 목회해야 될 것이냐, 교인을 위해서 일하는 것처럼 착각하는 리더십에 빠져있습니다. 이게 닫힌 리더십입니다.

이런 닫힌 리더십에 익숙해지다 보니 건강하지 못한 권위주의가 사람을 못 쓰게 만듭니다. 평신도들을 자신을 위해서 시종 드는 하녀처럼 생각하고, 영적 권위주의로 교인들을 압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국교회 대부분의 현실입니다. 이런 교회 풍토에서는 평신도를 평가하는 기준이 예배가 됩니다. '저 교인 참 좋다. 앞으로 주목해야 되겠구나.' 예배 출석으로 점수를 매깁니다. 그게 평가 기준이에요. 그리고 이 사람이 점점 예배시간에 앞자리로 다가올수록 점수가 높아집니다. 일 년, 이 년, 삼 년 지나고 하면 항상 예배 전에 와서 앞자리에서 경건하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목사는 이런 사람한테 반합니다. 거기에 점수를 더 따려면 설교 들으면서 고개를 몇 번 끄덕이고, 손수건 한번 끄집어내서 눈물 닦고 이러면 목사는 갑니다. 확 가요. 이게 평신도의 영적 성숙도를 평가하는 유일한 기준이에요.

예배 일변도에 빠지고, 설교만능주의에 젖어서 설교 한 편 가지고 모든 성도들을 영적으로 인도한다고 생각하는 목사, 그 교회에서 사역하는 권위는 자기 혼자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목사, 그런 목사가 목회하는 교회 성도들의 영적 수준은 예배 출석도를 가지고 교인을 평가해 버립니다. 그 정도로 끝나면 괜찮지만 나중에 그 사람을 장로, 권사, 안수집사로 세울 때 그 다음 따라오는 사태들은 여러분들이 잘 아실 것입니다. 장로되기 전에 앞자리에 앉아서 눈물 닦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장로된 후 2년만 지나면 금방 압니다. 그것은 하나의 쇼였다는 것도 드러납니다.

교회가 이런 문화로 변질된다면 성장이나 부흥이 계속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 다음에는 침체 아니면 영적인 질병을 앓게 되는 혹독한 과정이 따라오는 것은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전부 그렇게 되어버렸어요. 설교에 편중되어 버렸어요. 예배만 강조하다 보니 설교 하나만으로 모든 영적인 요구를 다 채워준다고 생각하잖아요. 결국 이게 편중된 목회인거죠.

제가 설교를 등한시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설교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설교하라고 하지 않았어요. 제자를 만들라고 하셨어요. 제자를 만드는 방법은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지킬 때까지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훈련하라는 거예요. 말씀이 인격과 삶을 변화시키는 데까지 가라 그 말입니다. 주님의 명령이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목회할 때 어떻게 했습니까? 각 사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교훈하면서 각 사람 하나하나를 예수님 닮은 온전한 자로 만드는 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고 골로세서 1장에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게 목회입니다. 그러므로 목회는 설교와 훈련의 균형을 잡아줘야 합니다.

하나님께 경건한 예배를 드리는 것과 교인 한명 한명을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 이 두 가지가 병행할 수 있도록 균형을 잡아 목회를 해야 합니다. 교인들이 영적으로 훈련을 받아서 변화가 일어나고, 성장하고, 나중에는 주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작은 예수로 계속 변화되면, 그 사람을 통해서 예배가 살아나고, 설교가 더 설교다운 하나님의 말씀이 되고, 교회가 건강해지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많이 모으기 위한 예배에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설교에만 매달리고 교인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훈련시키는 것을 옆으로 밀쳐놔 버렸습니다. 편중된 목회 아닙니까? 균형을 잃어버린 목회 아닙니까? 이런 목회는 반듯이 문제를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를 중요하게 여기고, 설교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성도들을 앉혀놓고 항상 설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소명감을 갖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만 매달리는 것은 잘못됐다는 것입니다. 냉정하게 생각하세요. 존 맥스웰이 이야기한 20, 80의 원리라는 것은 목회에 있어서도 목회 원리를 유지하기 위해 굉장히 중요한 점입니다. "목회자 에너지의 80%, 즉 교회의 재정적인 능력 80%를 그 교회 안에 있는 20%의 사람들을 훈련하는데 투자하라. 그래서 그 20%가 나중에 나머지 80%의 사람들의 영적 성공을 책임지게 하라" 이게 20, 80원리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제자훈련의 원리와 일치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키우고 사람을 만드는데 투자하는 목회, 이것이 시대를 뛰어넘어 교회를 건강하게 만들 수 있고, 침체를 벗어나거나 혹은 최소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주님이 말씀을 통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람을 만드는데 투자하지 아니하면, 아무리 화려한 예배로 그 목회가 장식이 되어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나중에 결국 영적인 생명을 잃어버린다는 겁니다. 이것이 주님이 말씀하신 목회의 본질입니다.

한국교회 대부분 목회자들이 자신의 에너지 80%를 소수의 사람들을 훈련하고, 만들어 세워서 함께 동역하기 위해서 씨름하는 데에 투자합니까? 이 가운데 앉아있는 목회자들도 스스로를 판단해 보십시오. 지금은 하자가 없고 잘 되는 것 같죠? 그러나 다음 세대를 생각하세요. 설교와 훈련이 균형을 잡아서 은혜 충만한 예배도 드리고, 주님을 따라가고자 하는 열정적인 일꾼들도 계속 만들어지는 목회여야 시간이 흘러도 그 목회가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목회자들을 보면 어림도 없는 이야기예요. 한 40%라도 투자하나요? 날마다 심방이나 가서 대접받을 생각하고, 나올 때 봉투 하나 주면 신나서 콧노래를 부르고, 이런 썩어빠진 목회자의 양심을 가지고 목회하는데 교회가 얼마나 지탱할 것 같습니까? 날마다 “목사님, 설교에 은혜 받았습니다.” 하는 소리에만 귀가 익어서 진짜 자신이 설교를 잘하는 줄 착각하고 있는데 그 “은혜 받았습니다.” 하는 사람들이 상습범인 줄 모르는 거죠. 진짜 은혜 받았으면 그 사람의 삶에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가르쳐 지키게 하라. 진짜 은혜를 받았다면, 그 사람의 인격과 삶이 달라지는 것이 보여야 하고, 모든 면에서 교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런 증거는 보이지 않는데 입으로만 은혜 받았다고 해서, 마치 내가 설교를 잘하는 것으로 착각하지 마세요.

재미있는 이야기 한 두 가지로 온 교회가 웃고 밝아졌다고 해서 은혜 받은 줄로 착각하는 멍청이 같은 인간들, 이 가운데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 없으니 말이 심해도 이해해 주세요. 순진해도 한참 순진해요. 물론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가르치죠, 가르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한국교회만큼 많이 가르치는 교회도 없어요. 설교 외에도 가르친다고 프로그램이 얼마나 많아요. 그러나 설교 만능주의에 빠져버린 목사, 예배가 가장 중요한 사역이 되어버린 목회에서는 가르치는 것은 전부 피상적인 것이 되어버립니다.

다른 교회에서 하니까 나도 해보는 거예요. 그러면 그 가르침은 자연히 변질될 수밖에 없어요. 대부분의 가르침이 얼마나 알게 하느냐는 지식에 목적을 두고 있어요. 성경을 얼마만큼 알게 하느냐, 지식에 포커스를 맞추고 가르치기 때문에 가르침으로 인해 오히려 긍정적 요소보다 부정적 요소가 더 드러나고 있어요. 한국교회는 많이 가르쳐놓고 손해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의 초대교회는 사랑방에 둘러앉아 선교사나 지도자가 없이 자기들끼리 둘러앉아 말씀을 공부하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는데, 거기에 성경적인 체계나 신학적인 깊이 있는 가르침은 없었어요. 서로 은혜받은 것을 나누었습니다. 이게 초대교회의 모습이었어요. 얼마나 폭발적인 능력이 일어났습니까? 가르침의 목적이 변화였기 때문입니다. 배우면 배우는 것만큼 사람이 변했어요, 삶이 달라졌어요. 예수님을 알면 아는 것만큼 그 사람의 인격에 놀라운 능력이 나타났어요. 그럼으로 불교와 유교에 찌든 가정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역사들이 연일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가 지나고 나서 한국교회가 폭발적인 성장을 경험하며 큰 교회를 만들자는 야심 때문에 열심히 가르치는 프로그램들은 많이 만들었지만, 모두가 다 그저 얼마나 많이 아느냐를 테스트하는 것을 목적에 둔 머리를 향해 방망이질을 하는 교육에 치중되어 버렸어요. 그리고 그 사람들이 배운 말씀대로 어떻게 사는지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 이렇게 가르침이 인격과 삶에 깊은 영향을 주지 못했고, 또 그 변화를 통해서 생활 전반에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가르쳐 놓고 손해를 보는 한국교회가 되어버렸습니다.

흔히 말하기를 평신도는 많이 가르칠수록 안 좋다고 합니다. 머리에 뿔이 난다고 합니다. 가까이 지내는 대형교회 목사가 항상 그런 이야기를 하며 돌아다닙니다. 그래서 그 교회는 공식적으로 성도들끼리 모여서 성경공부를 못해요. 그 목사의 말은 일리가 있어요, 가르쳐 놓으면 항상 뿔이 나서 목사부터 들이받거든요. 성경이 이야기하는 가르침은 머리에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가르침은 예수님을 닮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작은 예수가 되도록 하는 데에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가르침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예배 중심의 목회를 하면서 설교 만능주의에 빠진 이들은 본질에서 벗어나 버렸습니다. 그래서 형식적으로 가르쳤고, 주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열매들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결국 평신도들은 무력한 예배 군중으로 전락하게 되었고, 사회에 나아가서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사이의 큰 차이점을 보이지 못하는 동화된, 세습화된 평신도를 교회가 양산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한국교회 침체를 앞당기게 된 원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서는 훈련을 강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목회를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저의 이야기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이것은 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는 어제 저녁에 설교한 권성수 목사님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있어요. 유명한 신학학자이 실력으로 따지면 제가 옆에 설 수도 없죠. 그 유명한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Ph.D를 받은 사람입니다. 대구에 목회하러 내려갈 때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 목사님은 설교에 탁월한 은사를 가진 사람입니다. 90년도에 제가 일 년동안 병으로 고생할 때 반년 동안 사랑의교회 주일 설교를 그 목사님에게 맡겼죠. 탁월한 설교자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설교를 믿을 수밖에 없죠. 그래서 처음 내려갈 때 나는 설교 중심의 목회를 해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마디 했어요. "그것만으론 안될 걸? 목회는 내가 선배니 내 말 좀 들어라." 그랬습니다. 가서 2, 3년 씨름했어요. 결국은 돌아오더라고요. 그래서 몇 달 전에 칼세미나 할 때 그 목사님이 정식으로 등록하고 참석했어요.

목회는 설교 한 편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만 드리고 흩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예배 군중 만드는 것이 목회가 아니에요. 성경 보세요. 주님이 명령하는 목회는 그런 목회가 아니고, 바울이 오늘 우리에게 보여준 목회 모델이 그런 목회가 아니에요. 오늘 우리 한국교회 목회는 너무나 변질되어 버렸어요. 본질에서 이탈했어요. 그러니까 그 영광스러운 부흥기를 살리지 못하고 침체기에 빠져, 온 교회가 썩는 냄새가 날 정도로 교단을 가도 그렇고, 신학교를 가도 그렇고, 왜 이렇게 되느냐 이걸 놓고 우리가 성경 말씀을 통해 진단받아서 회개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한다면 이것은 양심 없는 목회자인 거죠.

90년대 한국에 와서 강해설교 시리즈 세미나를 자주해준 영국 선교사 데니스 레인이 와서 한 말이 있습니다. 한국교회에 와보니 100년 전의 영국교회를 보는 것 같습니다. 그 말에는 긍정적인 의미도 들어있고 부정적인 의미도 들어있습니다. 긍정적인 의미는 100년전 영국 교회가 한참 부흥할 때의 그 열기를 한국교회에서 느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영국교회가 한참 부흥하다가 몰락한 것처럼 한국교회도 그런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경고도 들어있는 것입니다.

한때 놀라운 부흥을 경험한 영국교회가 자기만족과 도취에 빠져있다가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에 떨어진 것을 우리는 봅니다. '평신도를 깨운다' 책에도 인용했습니다만, 크리스채너티투데이 월간지에 영국 목사 그린이라는 사람이 미국교회 목회자들을 보고 경고한 이야기가 한마디 있습니다. "영국교회는 텅텅 비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여러분들이 만족하고 안주하면 여러분들도 영국교회처럼 텅텅 비는 날이 올 것이다."라고 경고했어요. 왜냐하면 "미국교회에서 예배가 주일행사 정도 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때 내가 만약 미국교회 목사라면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전도 열심히 하는 것보다 먼저, 교회 안의 평신도부터 중생시키고, 영적으로 기반이 약한 자는 기반을 닦아주고, 훈련이 안된 자는 훈련을 시키는데 나는 더 시간을 투자하겠다. 내가 미국 목사라면 지금부터 그 일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들어야 할 중요한 충고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설교와 훈련, 두 가지 중요한 축을 놓고 목회자로서 균형을 잃어버렸는지 이것이 자각이 되면 빨리 돌아서세요. 훈련에 비중을 두세요. 사람을 만드세요. 예수의 제자를 만드세요. 그 일을 위해 여러분의 에너지 80%를 투자해 보세요. 그러면 목회 균형이 잡힙니다. 그에 따라 교회의 건강은 금방 회복됩니다. 여러분, 교회의 건강이 회복되면 한국교회가 침체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기도 많이 해라." 이런 소리 계속 하지 마시고, 한국 교인들만큼 불쌍한 사람들이 없어요. 밑도 끝도 없이 기도 많이 하라고 하니까 열심히 하잖아요. 안 나오는 소리로도 떠들잖아요, 너무 몰아붙이지 말아요. 더 중요한 문제를 지적하고 시정해줘야 돼요.

헨리 나우엔의 말을 인용합니다. "우리들의 영적 생활에 있어서 커다란 도전이 하나 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예수님과 같다고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우리는 오늘을 살고 있는 살아있는 예수라고 사람들 앞에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진정한 구원은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구원이 뭐냐? 우리 모두가 예수가 되는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사람 앞에서 예수를 알고 싶으면 나를 보라고 할 만큼 말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돼야 한다는 겁니다. 이게 기독교입니다.

제자훈련을 하며 내가 겪은 이야기를 다 하려면 끝이 없어요. 한마디만 하면 제일 골치 아픈 사람이 장로 아들, 목사 아들이예요. 기본이 안되어 있어요. 이런 사람들을 데리고 일평생 교회에서 일을 하려고 생각합니까? 차라리 구멍가게를 하세요. C.S.루이스의 말을 인용합니다. “교회는 오직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이끌어서 작은 그리스도를 만들기 위해서 존재한다. 작은 그리스도를 만드는 이 일을 교회가 하지 않는다면 교회 건물도, 성직자도, 설교도, 성도도 심지어 성경까지도 다 시간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이게 성경의 진리입니다. 우리가 신학교 때 잘못 배웠습니다. 엉뚱한 것을 배우고 목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다시 봐야 합니다.

간단하게 정리합시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어요. 동시에 명령이 있어요. 그러나 한국교회는 놀라운 성장기를 거치면서 추가 한쪽으로 기울어졌어요. 하나님의 좋은 약속만 사람들이 바라보도록 만들어놨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믿고 열심히 구하면 그 약속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말씀으로 모든 성도들의 가슴에 바람을 넣어놨어요.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받아내고, 그 약속의 은혜 안에서 함께 춤추고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얻어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약속이 있는 반면에 명령이 있는데, 하나님의 명령을 가르치지 않아요.

그러다 보니 명령에 순종하지 않아도 입으로 회개 몇 마디만 하면 그 모든 죄가 용서받는다고 하는 이상한 풍토에 교인들이 젖어있어요. 이걸 우리가 값싼 복음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고약한 죄를 범해도 회개만 하면 용서받게 되어 있다고 하는 값싼 복음이 그들의 마음속에 꽉 잡혀 있어서, 순종하지 않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별로 없어요. 그리고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것에 대한 의무감이 별로 없어요. 이것이 한국교회의 현주소입니다. 성도들이 세상에 나가 사는 삶이 불신자들과 차이가 별로 없어요. 똑같이 속여서 팔고, 똑같이 거짓말하고, 투기하고, 사치하고 다하잖아요. 똑같이 이혼하고, 포르노에 빠집니다. 눈 하나 깜짝 안하고 회개했으니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명령하신 명령을 순종해야 할 책임이 은혜 받은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어요. 그리고 그와 같은 현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아무리 죄를 범해도 내가 예수를 믿는 이상은 구원에 지장받지 않는다고 하는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을 갖고 있어요. 누가 교인들을 이렇게 만들어 놨습니까? 여러분, 돌아가서 설교들을 들어보세요. 죄를 책망하는 설교가 있습니까? 교회 안에 모인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면서 정말 회개하는 눈물의 역사가 있습니까? 기독교의 본래 모습은 세상의 악에 대해서 확실한 견제력을 갖는 것이고, 강력한 치유력을 가진 공동체에 있습니다.

로마제국에서 기독교가 처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혹독한 300년의 핍박 길을 거치면서 로마제국에 놀랍도록 퍼지게 된 원인 중에 하나는 도덕성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진리의 계시이며 동시에 성결의 샘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신적 종교라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하느냐, 도덕적 행위로써 입증하게 되어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로마시대 초대교회는 온갖 장애를 무릅쓰고 도덕적 개혁을 이루어갔고, 사회 개혁을 이루어서 역사를 바꾸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네르바 황제로부터 아우렐리우스까지 84년간은 세계 역사상 가장 행복하고 번성했던 시기라고 흔히 말하는데, 그 기간 동안 카이사르의 궁전, 하드리아누스의 대형묘, 카라칼라스의 목욕탕, 수로들, 아치들, 기둥들 베스파니아누스가 건축한 높이 45미터에 8만 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콜로세움 등이 화려하게 등장한 시대 아닙니까? 하지만 그런 겉모양과는 달리 내적으로는 엄청난 도덕적 부패가 그 사회를 좀먹고 있었어요. 극도의 사치 이성간의, 동성간의 성적 문란, 막대한 부, 그것에 대비되는 극심한 빈곤, 그래서 사회 구석구석마다 상류층에서 하층민에 이르기까지 도덕적인 부패가 판을 치던 시대였습니다.

이때 기독교가 무엇을 했습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들고 나오는 소수의 박해받는 무리들, 이들은 사회적으로 사람 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도 정절을 근본적인 덕으로 선언하고, 여성의 지휘를 향상시키고, 결혼의 신성성을 주장하고, 여러가지 악들을 완화시키고, 노예제도의 기반을 허물어뜨리고, 일부다처제에 반대하고, 어린이들을 함부로 내버리는 유기 습관에 저항하고, 피를 흘리는 검투와 서커스를 대적하고, 폭력과 억압과 부도덕으로 얼룩진 왕국을 대항하면서 싸웠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기독교는 사회를 밑바닥에서부터 개혁하기 시작해서 중간계층과 상류계층에까지 영향을 미치다가, 마침내 콘스탄티누스가 황제가 되고 나서부터 법률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여 잔인한 제도들을 하나하나 폐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정의와 인간애가 살아 넘치는 법률들이 재정되도록 하는 일에 기독교가 기여했습니다. 이게 초대 교회의 모습입니다. 로마를 정복한 기독교 원래의 모습이에요.

오늘 한국교회는 이런 도덕적인 권위를 잃어버렸잖아요.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듣기 좋은 약속의 말씀만 성도들로 하여금 주목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구원에 은혜를 받은 성도들이 순종해야 될 부분에 대해서는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서 회개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상한 교회로 변질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한국교회에 절실한 것은 부흥이 아닙니다, 교회 갱신이요, 회개요 이것이 선행되지 않고는 부흥할수록 교회는 약화되고 병들어버립니다. 따라서 목회 균형을 잡아야합니다.

약속의 말씀을 가지고 성도들로 하여금 은혜를 사모하게 하고, 복을 받기를 사모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과 똑같이 은혜 받은 우리, 구원받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성취해야 합니다. 특별히 택함 받은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어떻게 순종해야 되는가를 가르쳐야 합니다. 교회의 도덕적 권위를 다시 회복시키자 그 말이에요. 목사부터 균형을 맞추어야 해요. 신앙양심상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목사부터 회개하고 바로서서 순종하자 그 말입니다. 교인수가 좀 떨어져나가고, 교회가 수적으로 줄어도 교회의 거룩을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가 몸부림치자는 것입니다.

냄새 나고 썩어서 균이 득실거리는데에다 자꾸 물을 붓는 것보다도, 깨끗하게 청소한 다음 새 물을 붓는 것이 낫잖아요. 교회의 폭발적인 성장 후유증으로 목회의 편중 현상이 일어났는데, 설교와 훈련을 놓고 볼 때 우리는 설교쪽에 너무 편중되고, 훈련을 등한시해서 교회가 오늘날 이렇게 무력한 군중이 되었다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또 하나, 말씀의 약속만 높이 받들고 명령을 등한시해서, 오늘날 교회가 도덕성을 잃어버렸다는 이것들이 한국교회가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는 원인이라고 제가 지적했습니다. 이걸 알면 이제부터라도 우리 모두가 힘을 모아서 다시 출발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요, 이 놀라운 사역이 바로 여러분의 어깨에 있다는 것을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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