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8/21) 교갱협 제23차 영성수련회 저녁집회

예레미야 18장 1~6절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에서 내 말을 네게 들려 주리라 하시기로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반갑습니다. 참 많이 고민했습니다. 여러분을 위로하고 싶고 격려하고 싶고 함께 치유받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인 가운데 천상병 시인이 있습니다. 그가 ‘귀천’이라는 놀라운 시를 남겼습니다. 돌아갈 귀, 하늘 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하는 시입니다. 그 시의 마지막이 기가 막힙니다.

“아름다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하나님께서 너의 인생이 어땠는지 물으신다면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이 시만 보면 이 시인은 세상 말로 팔자가 늘어진 사람 같습니다. 감히 누가 자기의 죽음을 앞두고 인생을 돌아보면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목회하면서 수많은 임종을 보았습니다. 79년도에 처음 전도사를 시작했는데 이렇게 아름답게 생을 끝내는 사람을 저는 못 보았습니다. 아름답답니다. 세상이, 자기 인생이 마치 소풍 끝내는 날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 어릴 적을 생각해 보면 제일 행복했던 날이 소풍가는 날과 운동회 날이었습니다. 저는 시골사람이라 그 날이 제일 기다려졌습니다. 그날은 어머니가 싸주신 김밥과 삶은 계란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소풍가는 날은 너무 너무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배낭에 과자 몇 개랑 사이다 찔러넣어 머리맡에 올려놓고 아침에 싸주시는 김밥과 삶은 계란을 기대하면서 잠을 청합니다. 잠이 올까요? 안 옵니다. 평소에는 두들겨패도 잘 안 일어나는 아이가 깨우지 않아도 발딱 일어나는 날이 소풍가는 날입니다.

천상병 시인은 자기 인생이 소풍가는 날 같았다고 합니다. 인생을 마치는 날을 소풍 끝내는 날이라고 했습니다. 천상병 시인은 서울대학교 상대를 중퇴하고 맙니다. 천상병이라는 사람이 갖고 있는 인상은 딱 하나, 가난이었습니다. 지지리도 가난했던 사람, 순수문학밖에 몰랐던 사람입니다. 동백림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6개월 동안 모진 고문을 받고 심지어 전기고문을 받고 마지막에 정신병원에 던져졌던 사람, 조금 죄송한 표현을 하자면 마치 노숙자 같아요. 단 한번도 재산을 가져본 적이 없고, 단 한 번도 명예와 권세를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 내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고 심지어 자식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누려본 적도 없는 사람, 오직 시와 문학이 좋아서 그렇게 살았던 사람.

마지막 당신의 죽음 앞에서 살아온 인생길을 돌아보며 이 인생 끝나는 날 하나님께서 네 인생이 어땠느냐고 물으신다면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여러분 이게 목회자의 삶 아닌가요? 우리 그렇게 부름 받은 거 아닌가요? 어쩌다가 은혜는 받아서 이 자리까지 오셨나요? 은혜 주실 때 피하지 그랬으면 여기 안 오시잖아요. 은혜 주신다고 넙죽 다 받아먹다가 여기까지 왔잖아요. 저도 은혜 받아서 신학교 가고 강단에서 외치면 다 될 줄 알았어요. 현실에서 보면 소풍가는 날이 아니라 매일 전쟁같은 목회를 합니다. 이해도 안되고 해석도 안되는 사건을 수도 없이 고비고비 겪으면서 왔습니다.

제가 목회할 때는 재주가 없어서 성도들이 데려온 새가족 목회를 잘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4주를 마치면 성장반 8주를 훈련시켰습니다. 그 8주를 마치면 저희 집에서 만찬을 합니다. 12주 정도를 훈련받고 나면 우리 교인이 되겠다 믿었기 때문에 저희 집에 한 달에 한 번씩 수료자를 초청합니다. 아주 더울 때 한 달과 아주 추울 때 한 달을 빼고 일 년에 10번을 매월 저희 집에서 만찬을 했습니다. 수백 명이 다녀갔습니다. 저희 집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음식을 내놓고 이분들만을 위한 음식을 만들어 놓고 2시간 만찬을 합니다. 제가 심방을 못가기 때문에 거기서 단체로 심방을 하는 겁니다.

어느 날 젊은 부부가 친정어머니와 함께 참석을 했는데 배가 남산만 해서 물어봤더니 회사에 다니는데 평신도 선교사로 떠나려고 준비 중이고, 애기를 낳고 유아세례를 받으면 인도네시아로 간다고 합니다. 모든 것 다 내려놓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기를 원합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얼마나 감동이 되는지 열심히 기도해주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많은 대화를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있다 아이가 태어났고 유아세례를 받고 인도네시아로 갔습니다. 얼마 있다가 9시 뉴스를 보는데 제 아내가 옆에 있다가 ‘헉’ 하는 것입니다. 인도네시아에서 싱가포르로 가던 비행기 안에 한국인 세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항공기가 떨어져서 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이 낯익은 이름이 사망자 명단으로 지나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 부부와 아이였습니다. 언어 연수하다가 아직 선교도 해보지 않았는데, 그 아이가 돌이 되었고 부모님과 싱가포르에서 만나 돌잔치 하기로 하고 가던 중에 사고가 난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면 그 사람들을 그렇게 데려갈까요? 저는 제가 하나님이라면 그 사람들 그렇게 안 데려갑니다. 부를 때는 언제고 그렇게 죽일 거 왜 선교현장에 부르셨나요? 한 번도 복음을 전해보지 못한 사람을 속절없이 데리고 가실 수 있을까요? 저는 목회현장에서 수없는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하나님 이게 뭔가요? 왜 부르셨습니까? 저를”

얼마나 우리는 목회를 잘 하고 싶습니까? 누구보다 기도 많이 했고, 누구보다 성경 많이 읽었고 말씀 준비했는데, 왜 우리 교회만 부흥이 안되요? 목회하다 보면 가족들 보기 부끄러울 때가 많아요. 저는 목회 안하려고 신학교를 세 번 도망간 사람입니다. 군대까지 찾아오셔서 항복 시키더라구요. 이해도 안되고 해석도 안되는 일은 감당이 안되요. 어떤 때는 본당 문 걸어 잠그고 미친 놈처럼 혼자 밤새도록 돌아다녀보기도 했고, 아무리 소리지르며 통곡해도 답을 주시지 않더라고요. 하나님,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됩니까? 내가 고생하면 자식이라도 잘 되게 해주시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것도 안 되니까 힘듭니다.

몇 주 전에 제가 사랑하는 친구를 만났는데 힘들어하더라고요. 그 친구는 정말 착한 친구입니다. 대학부 1학년 때 만나서 평생 친구로 모든 것을 다 보고 함께 목회하며 살아왔는데, 친구 세 명 중 두 명은 미국으로 가고 저 혼자 남아서 개척교회를 했습니다. 미국에서 30명 모이는 작은 이민교회가 얼마나 열악합니까? 섬겨도 그렇게 섬기는 목사는 처음 봤습니다. 정말 간 쓸개 다 내놓고 섬기더니 그 지역에서 제일 큰 교회가 되었습니다. 큰 공장을 사서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도 이제 한계가 되었고 더는 힘들다며 내년에 은퇴한다고 교회에 선포를 했습니다.

제가 그 교회 갈 때마다 집회하고 수도 없이 설교했는데 정말 교인들이 목사님 닮아서 착한 것 같아요. 그런데 사표를 딱 내고 나니까 리더 몇 사람이 찾아오더니 “목사님, 소리없이 조용히 나가주시기 바랍니다.” 하면서 등에 비수를 꼽더래요. 이 친구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믿고 제자훈련을 시켰는데 등에 비수를 꼽으니 이 친구가 감당을 못하는 겁니다. “하나님, 뭐하세요? 하나님, 우리 불렀잖아요. 은혜 주셨잖아요. 목회하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앞만 보고 달려왔잖아요.” 남은 것은 좌절과 슬픔, 고통이었습니다. 차마 내색은 못하고 속앓이만 합니다. 소풍 가는 날 같은 목회를 하고 싶은데 그렇게 잘 안 이뤄집니다. 울 수밖에 없고 고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예레미야 선지자가 바로 그런 분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눈물의 선지자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에게 망할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 예레미야는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하는 말은 “하나님, 어찌하여” “어찌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잡혀가고 그 들의 말발굽에 짓밟혀야 됩니까?” “하나님, 어떻게 하나님의 성전에 돌위에 돌이 남지 않을 만큼 모든 것이 다 무너져야 됩니까?”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간다면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었던 언약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동시대의 선지자가 하박국 선지자입니다. 하박국 1장에 반복해서 나오는 단어가 “어찌하여, 어찌하여”입니다. 예레미야 18장 1절에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가라사대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서 내 말을 네게 들리리라 하시기로” 하나님께서 울고 있는 예레미야에게 답답한 가슴이 뻥 뚫리는 메시지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누구한테도 내어놓을 수 없는 답답한 가슴을 안고 예레미야와 함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기를 원합니다.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갔는데 마치 녹로로 그릇을 만드는데 그것이 터졌다고 말합니다. 깨진 질그릇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지금 예레미야에게 실물교육을 시킵니다. 질그릇이 깨졌으니까 더 이상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상태를 말합니다. 도무지 하나님께서 쓸 수 없는 인내의 한계입니다. 바벨론의 회초리 밖에는 답이 없는 이스라엘의 상태입니다. 동시에 그런 자기의 동포를 끌어안고 울고 있는 예레미야의 가슴이 깨진 질그릇 같습니다. 누구도 회복시킬 수 없는 고통의 절정까지 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저희 교회에 서른 된 자매가 있는데 예쁘고 찬양 잘하고 믿음이 좋습니다. 싱어를 오래동안 했습니다. 어머니 권사님은 정말 착하십니다. 목소리도 제대로 못 들었어요. 그저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일하십니다. 회사에서 건강검진 받으라고 해서 받았더니 위암 말기라고 합니다. 건강했는데 6개월밖에 못산다는 소식을 어머니로부터 듣고 참 많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제 결혼도 해야되는데 저 믿음 좋은 자매를 통하여 지금까지 영광 받으셔잖아요. 고쳐주세요. 치유해주세요.” 새벽에 많이 울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속절없이 데리고 가셨습니다. “하나님, 이런 기도는 들어주셔야 되쟎아요” “세상에 백주대낮에 사기꾼, 도둑놈, 없어도 되는 인생 얼마나 많습니까? 왜 하필이면 저 자매입니까?” 장례식을 치르면서 온 교인이 울었습니다.

그리고는 6개월도 안되서 그 남편이 폐암 말기래요. 우리 집사님은 저보다 키도 더 크고 평생 감기도 앓은 적이 없데요. 얼마나 덩치가 좋고 건강한지, 담배를 피는 것도 아니고 술을 마시는 것도 아닌데 폐암 말기로 3개월 밖에 못 산데요. 그 분도 그 분이지만 작고 여린 권사님을 생각하니 기가 막히는 겁니다. 몇 달 전에 딸 가슴에 묻었고 이제 남편까지 묻고 나면 어떻게 사시겠어요. 그 때부터 저는 새벽마다 나가서 씨름했습니다. 전쟁 같은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이건 아닙니다. 우리 권사님 죽습니다. 불쌍해서 안 됩니다.” 정말 많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속절없이 데려가셨어요. 정말 목회할 맛이 안 났습니다. “이 기도도 안 들어주시면서 왜 저를 목회하게 했습니까? 그렇게 도망다니던 저를 왜 불렀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 돌아가실 때 보다 더 많이 울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이런 형편 가운데 계시는 분들 많으실 겁니다.

한번은 내 친구가 죽어서 장례식장에 갔더니 그 사모가 펑펑 울더라구요, 그 친구는 학교 때는 공부를 잘했습니다. 그보다 공부를 못한 애는 큰 교회 담임하고 자기는 공부를 잘했는데 개척교회 지하를 벗어나지 못해요. 목사 혼자 가슴앓이를 했던 가봐요. 사모가 말하기를 자기 남편 정말 착하고 성실하다고 합니다. 지하를 벗어보려고 그렇게 몸부림쳤는데 결국 하나님은 간암으로 자기 남편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소풍가는 날 같은 목회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레미야도 하나님 앞에서 이 울음을 울고 있습니다. 이해가 안되고 해석이 안됩니다.

깨진 질그릇같은 예레미야, 그런데 참 감사하게도 깨지고 터진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레미야 18장 4절에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저는 이 하나님이 너무 좋아요. 깨지고 부서지고 버림받아야 하는 인생을 하나님이 다시 쓸어 담아서 다시 반죽하시고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멋진 그릇을 만들어 쓰시더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 때문에 오늘 저와 여러분이 버티고 있는 것으로 믿습니다. 이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이 없다면 하루도 목회할 자신이 없습니다. 이천이나 여주에 가면 유명한 토기장이의 집일수록 깨진 파편이 많아요. 산처럼 쌓여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깨지고 부서진 산산조각난 토기 같은 우리도 믿음의 끈을 놓치 않으면 다시 반죽하셔서 기가막힌 그릇으로 회복시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이해도 해석도 안 되지만 70년 후에 사막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물을 흐르게 하셔서 무너진 이스라엘 성전 대신 스룹바벨의 성전을 세우시고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는 놀라운 70년 후의 계획을 갖고 계시고 이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지금 울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속에는 이스라엘의 70년 후의 모든 계획을 갖고 계신다는 사실을 암시해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두 번째 메시지가 기가 막힙니다. 예레미야 18장 5절과 6절을 보겠습니다.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여전히 우리 인생은 아무리 부서지고 깨졌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손에서 여전히 빚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은 내가 해석이 안되고 이해가 안되어도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의 계획속에서 나를 붙들고 계시고 때가 되면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그 놀라운 날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시 한 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든 그리스도인의 마지막 종착력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세요? 바로 해피엔드역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군대생활을 군기가 있는 곳에서 했습니다. 키가 커서 헌병대로 들어갔습니다. 내무반이 얼마나 군기가 센지 내무반이 따로 독립되어 있었습니다. 거기서는 무슨 짓을 해도 사령부에 전달이 안 됩니다. 배치를 받아서 들어갔더니 첫 번째 복창이 “왕고참은 하나님과 동기동창이다.” 이것을 계속 반복시킵니다. 마침내 세월이 흘러서 제가 왕고참이 되는 날이 왔습니다. 이등병이 들어왔는데 대학원 졸업하고 결혼해서 아기도 있고 공인회계사가 된 다음에 늦게 마지막까지 미루다가 들어온 사람이었습니다. 저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이등병이었습니다.

군대 가보신 분은 알지만 나이가 얼마를 먹어도 이등병은 이등병 짓을 하고, 나이가 아무리 어려도 병장은 병장 짓을 해요. 이등병을 보니까 좀 안 됐더라구요. 그 부인이 믿음이 좋은 분인데 남편이 공부밖에 모르니 군대가서 믿음생활 잘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기도를 많이 하는가 봐요. 그 이등병한테 공부 외에 뭘 잘 하는지 물어봤더니 바둑을 잘 둔다고 해요. 제가 군대에 가서 시간이 있을 때마다 취미삼아 바둑을 배웠고 그 때가 5급 올라가기 직전이었어요. 7급에서 5급 올라가기 직전은 바둑에 환장할 때입니다. 바둑이 너무 좋을 때인데 이등병은 4단이래요. 4단을 생전 처음 봤습니다.

제가 불러서 나는 너에게 성경을 가르쳐 주고 너는 나한테 바둑을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둘이 앉으면 그 어리버리한 이등병이 4단 포스가 나옵니다. 장난 아닙니다. 내 것은 엄청 많이 깔아놓고 시작하는데도 언제 죽는지 모르게 내 것은 다 죽습니다. 그렇게 다 두고나면 그 때부터 복귀를 하는데 제가 놓은 것과 자신이 놓은 것을 다 외웁니다. 복귀를 하면서 바둑을 하나씩 가르칩니다.

그런데 그 때 내게 해줬던 목회하는 내내 가슴속을 울렸던 말이 하나 있습니다. 이병장님은 눈앞에 있는 것만 먹으려고 한데요. 자기는 한 수를 놓을 때마다 전체를 개가한데요. 91수를 놓을 때 자기가 동수였고 92수부터 반집씩 자기가 이겨갔데요. 우리는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합니다. 그저 눈앞에 있는 것 때문에 울고 불며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인생 전체를 개가합니다. 내 목회 전체를 개가합니다. 아픔이 필요할 때 아픔을 주셨다가, 기쁨이 필요할 때 기쁨을 주셨다가, 아주 극한 고통이 필요할 때는 그 고통을 주세요. 그 때는 이해도 안되고 해석도 안되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지만 때가 되면 다 해석되고 이해되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끌어가십니다.

"예레미야야, 지금은 네가 할례없는 민족에게 짓밟히고 포로로 끌려가서 생고생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되지만 70년 후에 하나님이 어떻게 회복하시는지 그 때는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그렇게 바벨론이라는 무거운 채찍을 들 수밖에 없었는지 왜 그릇을 파상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때는 이해가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저는 목회를 다 끝내고 지난 5월에 원로식을 하고 3개월이 지났습니다. 이제 조금 이해도 되고 해석도 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 때 그러셨구나.” 이게 저의 고백입니다. 저는 개척교회도 해봤고 기존교회에 부임해서 후임으로 목회도 해봤습니다. 제 손으로 교회 건축을 다섯 번 해봤습니다. 참 많이 울었고 마지막 건축 때는 내놓을 헌금이 없어서 사례비 2년치를 내놓았습니다. 앞으로 받을 것을 안 받겠다고 했습니다. 내가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사례비 2년치 안받을 테니 교회 짓자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죠. 진짜 피눈물 쏟을 때도 많았지만 돌아보면 은혜였고 축복이었습니다.

제가 사례비를 안 받는 2년 동안 사례비보다 훨씬 많은 돈을 받았습니다. 저는 원래 부흥회를 안 가는데 2년 동안 어마어마하게 부르더라구요. 그 때 애들 시집 보내고 다 했습니다. 희안한 일이 벌어집니다. 사례비 2년치를 내고 제 방에 들어오니까 지금은 돌아가신 장로님 한 분이 오셨습니다. “목사님, 지금부터 드리는 말씀은 목사님과 제가 하나님 앞에서 둘 만의 비밀로 평생 유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목사님이 굶는 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2년 동안 제 월급을 나눠서 씁시다.” 하고는 2년 동안 월급을 나눠서 줍니다. 지금은 돌아가셨기에 말씀드립니다. 까마귀를 보내주시는데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보내주십니다. 어떤 때는 정말 이해가 안되요. 뒤통수도 맞아봤고, 억울한 일도 당해봤고, 말도 안되는 말도 들어봤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셔서 저를 빚고 계셨습니다.

저는 21세에 처음 예배당에 나왔습니다. 불교 믿는 가정에 태어나서 아마 제가 목사가 안 되었다면 중이 되었을 것입니다. 철저하게 불교를 신봉하는 어머님을 따라 저는 절에 깊이 빠졌습니다. 고 1때는 절에 가서 살기도 했습니다. 몸이 병들어서 고등학교를 4년 동안 다녔습니다. 위 아래로 피를 쏟고 아버지의 사업도 세 번이나 부도가 나서 집은 다 망하고 소망없이 스물 한살에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래도 공부를 해야 될 것 같은데 도저히 안되요. 고등학교는 15일 다닌 것 외에는 공부를 해본적이 없었어요. 혼자서 독학을 하는데 정말 어려웠어요. 그 때 형님 집에 얹혀 있었는데, 형수님이 저희 집안의 유일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얼마나 잘해주시는지 형님 집에 21살에 들어가서 결혼할 때까지 신세를 지고 있었는데 한번도 인상 쓴 것을 본적이 없습니다. 저한테 너무 잘해주셨습니다.

가을이 되니까 형수님이 저한테 소원이 하나 있는데 교회에 한번만 같이 가자고 해요. 지금 생각하니 총동원주일이었어요. 제가 불교신자인지 아시는데 도저히 교회에 데리고 갈 사람이 없다고 한 시간만 앉았다 오라고 해요. 그 소리 듣고 안갈 수가 없지요. 눈치 보여서 밥을 얻어먹을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한 번 가주는데 저의 조건은 10미터 앞에서 걸어갈 것, 뒤로 돌아보지 말 것, 교회에 시동생 왔다고 하지 말 것, 내 옆에 앉지 말건, 내가 알아서 한 시간 뒤에 갈테니까 앉지도 말 것, 만약 안그러면 바로 돌아온다고 했어요. 제 성질이 얼마나 불 같은지 아시거든요.

그리고는 가서 교회 맨 구석에 머리를 처박고 앉았어요. 제 머리털 나고 처음 예배당에 간 날입니다. 그날 목사라는 사람도 처음 봤습니다. 이놈의 교회를 가니까 왜 이렇게 일어났다 앉았다를 많이 하는지 너무 생경한 거예요. 사람들이 막 울다가 또 박수 치면서 난리를 치는데 제 눈에는 다 또라이들로 보였습니다. 문화충격이 어마어마했습니다. 아니 금방 울다가 갑자기 박수치면서 노래하다가... 저는 충격을 받았어요. 여기는 있을 곳이 못되고 빨리 가야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렇게 한 30분 지나니까 목사가 시커먼 가운을 입고 올라오더라구요. 목사가 올라오니 설교하고 끝나겠구나 하고 머리 처박고 있었어요. 그 설교가 예레미야 18장 1~6절이었어요. 제가 처음 들었던 설교입니다. 저희 형수님이 그 목사님한테 제 얘기를 해놓은 것 같아요. 깨진 질그릇을 이야기하는데 내 인생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어요. 저는 안 들으려고 애를 쓰는데 들리는 겁니다. 그날 코 꿰었습니다. 그리고 신학교를 갔습니다.

그 때는 박윤선 박사님이 학장님이셨는데 1학년 봄에 축제를 하는데 거룩한 전도사님들이 축구를 하다가 싸우는 것을 봤어요. 너무 시험 들어서 때려치고 나와 버렸어요. 저는 예수 믿는 사람은 천사인 줄 알았거든요. 그 놈의 축구 이기면 뭐하고 지면 어떻습니까? 싸우는 것을 보고는 이건 아니다 하고는 때려치고 나와 버렸습니다. 그렇게 나오면 몸을 치십니다. 그러면 또 들어가요.

그 때만 해도 신학생들이 구질구질하고 양복도 없어서 기숙사에 죽 걸어놓고 아무거나 맞는 것 있으면 입고 가고, 점심 먹는 사람도 거의 없는 것 같고, 서울 시내에 개척하신 목사님 중에 제대로 사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것 같아서 "하나님, 저는 못합니다. 지금까지도 가난하게 살았는데 내 새끼까지 가난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나 아니어도 목사 할 사람이 저렇게 많은데 꼭 내가 해야 됩니까?" 그 때 보니까 장로님들은 다 잘 살더라구요. "저도 장로 할께요. 돈 벌어서 가난한 신학생들 평생 도우며 살게요 내버려두세요." 그랬더니 또 때리더라구요. 결국 3학년 1학기까지 다니다가 도저희 안되겠어서 휴학계를 내고 군대로 도망갔습니다. 그랬더니 군대 내무반에 찾아와서 부르셔서 두 손, 두 발 다 들게 만드셨어요.

그렇게 했으면 은혜를 주셔야 될 거 아니예요. 기도하면 능력을 주셔야 되잖아요. 어떤 때는 병도 낫더라구요. 그런데 필요할 때는 또 안 나아요. 하나님이 나를 헷갈리게 만들어요. 근데 하나님이 답을 주셨어요. 하박국 선지자가 그럽니다. "어찌하여, 어찌하여" 거기서 끝나면 하박국은 열사는 될 수 있어요. 주의 종은 안됩니다. 그런데 하박국은 주의 종이기 때문에 성루에 올라갑니다. 성루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씨름하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요. 3장에서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여전히 창자가 떨리고 온몸이 고통스럽지만, 무화과 나무의 잎이 무성하지 않고 포도나무의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의 소출이 없어도,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송아지가 없을지라도 내가 여호와를 인하여 찬송하리라. 그것이 우리의 소풍가는 목회이고 우리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갔을 때에 너의 목회현장이 어땠냐고 물으신다면 "하나님, 나름 아름다웠습니다."라고 고백하게 하실 하나님의 은혜가 오늘도 우리 가운데 협력하여 선이 되도록 이끌어가는 줄 믿습니다. 이것이 예레미야의 고백입니다.

사모님들 많이 힘드시죠? 특별히 목사님 따님들은 하나같은 고백이 사모만 안 한다고 합니다. 목사만 아니면 된다고 하다가 사모가 됩니다. 얼마나 힘드세요. 이 눈치, 저 눈치, 지나가다 성도가 한마디 하면 가슴에 비수가 꽂혀서 밤새도록 고민하고, 목사님한테 말도 못하고 혹시 목사님이 듣고 그 성도 미워할까봐 혼자 가슴앓이하고, 그런데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다시 만들어 주십니다. 회복시켜 주십니다.

리더스다이제스트 이야기 하나 하고 마치겠습니다. 뱃속에 5개월 된 아기가 있는 신혼의 단꿈에서 아직 깨지 않은 자매가 남편 출근시키고 알래스카 공군 본부에 근무하는데, 차를 몰고 가는데 앞에서 원유를 실은 큰 탱크로리가 와서 작은 승용차를 덮쳤습니다. 마치 작은 산이 하나 넘어지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앗~ 하는 순간 아무 기억이 안 납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의식이 돌아오는데 귀에 들리는 소리가 앰블런스 소리와 사람들 소리, 그리고 “어, 시체가 움직인다” 는 말이 들렸습니다. 그 길로 공군본부 응급실로 들어갔습니다. 순간 다 일그러졌습니다. 뱃속의 아이는 죽어서 하혈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남편은 뛰어왔다가 완전히 일그러진 너무 처참한 광경 앞에 아무 소리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깨진 질그릇입니다. 남편은 아무 소리 없이 가더니 얼마 있다가 이혼했습니다. 거울을 보니까 너무 처참합니다. 자신의 얼굴을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습니다.

이 글의 제목은 “왜 하필이면 납니까?” 하나님, 왜 하필이면 납니까? 내가 언제 십일조를 하지 않았나요? 주일성수 하지 않았나요? 봉사하지 않았나요? 왜?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차라리 죽여주세요. 이 몰골로 어떻게 살아갑니까? 다 깨지고 부서졌는데... 매일 웁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군의관이 그 광경을 보고 어느 날 자매에게 이야기합니다. "지금까지 제가 살아오면서 이렇게 비참한 모습은 처음 보았습니다. 아마 자매님은 지금 지옥을 걷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와 자매님이 믿는 하나님이 지금 살아계시니까, 저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믿고 3년만 시간을 주시면 최선을 다해서 고쳐보겠습니다" 그 간청에 이 자매의 마음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치료가 시작되었는데 3년이 아니라 7년 동안 대수술만 34회, 전신을 대수술했습니다.

사람이 인생에 한번 할까 말까한 대수술을 7년 동안 34회 합니다. 마지막 수술을 마치고 회복실에 들어갑니다. 마취를 마치고 눈을 떠보니 한 남자가 내려다보면서 빙그레 웃고 있습니다. 군의관이 “자매님, 이제 다 끝났습니다. 완벽합니다. 그리고 나와 결혼해주세요.” 그 둘이 결혼을 합니다.

그 순간에는 이해가 안 됩니다. 내 자신이 왜 이런지, 내 목회가 왜 이런지, 하필이면 왜 그 병에 걸렸는지, 왜 우리 교회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야 되는지, 눈물밖에 흐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때가 되면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십니다. 지금도 답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은 지금도 저와 여러분을 만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이 되게 하는 그 날이 반드시 오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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