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8/20) 교갱협 제23차 영성수련회 개회예배

디모데전서 3장 15절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 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곳에 우연히 온 것도 아니고 끌려온 것도 아닙니다. 세미한 주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가끔 대체불가라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을 뜻합니다. 이 세상에서 대체불가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저는 어머니라고 생각합니다. 자녀를 향한 뜨거운 사랑, 어머니는 대체불가입니다.

저의 어머니는 이북 분이셨습니다. 6.25 동란 피난 중에 애기가 먹을 모유가 없어서 까무러치게 울 때 어머니가 자신의 손을 깨물어서 흘러내리는 피를 먹이면서 피난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어머니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사역하고 있습니다. 요한 칼빈은 그의 교회론 마지막 부분에서 교회는 마치 어머니 같다고 했습니다. 성숙한 교회관을 갖고 있는 지도자는 누구일까요? 기독교 2000년 역사에서 무형교회만을 강조했던 자들은 이단사이비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무형교회가 중요하지만 우리들이 섬기고 있는 이 교회는 대한민국과 부패해지는 사회와 썩어져가는 총회에 대체불가한 귀한 단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성숙한 교회관이라고 생각합니다.

똑똑한 분들은 예배와 설교는 TV와 라디오의 수많은 귀한 목사님들의 설교로 대체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서 하는 모든 사회 기능도 국가가 더 잘한다고 이야기하면서 대체불가가 아니라고 항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서 하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도 구청이나 시청에서 하면 더 크고 확실하고, 또 많은 예산으로 큰 열매를 맺을 수 있어서 교회에서 하는 것은 그저 틈새공략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로 봤을 때 교회도 대체불가는 아닌 것 같습니다. 마치 어머니의 기능도 대체할 수 있듯이 엄마가 안계시면 할머니가 길러주면 됩니다. 엄마가 놀아줄 수 없으면 삼촌이나 이모가 놀아주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교회의 기능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입니다.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고 구원받은 영혼이 세례받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고 그들이 많은 사람들을 영적으로 재생산하며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본질은 그 무엇과도 대체불가합니다. 교회를 나의 어머니처럼 소중하게 여기며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하고 있는 많은 유무형의 세력속에서 방어하겠다고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썩어지는 작은 밀알로 사용되어지는 비결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지난주에 꽤 고위층의 분과 식사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라가 어떻게 될까요? 저도 시민의 한 사람으로 꽤 불안한 마음으로 미래를 봅니다.” 했더니 장로님이신 그 분이 저한테 훈수를 한마디 제대로 주셨습니다. “목사님, 염려하지 마세요. 제가 섬기고 있는 이 분야에도 그러한 분들이 많이 있지만 예수님의 이름과 복음으로 무장된 보이지 않는 십자가의 정병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 분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제가 기쁘면서도 매우 매우 부끄러웠습니다. 저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이 세상의 유무형의 모든 단체 속에서 하나님이 제일 사랑하시는 우리 교회,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요, 예수그리스도가 주인이신 교회, 물론 성령님은 어느 곳에서나 바람과 공기처럼 다 역사하고 있지만 교회에 모여서 예배드릴 때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이 교회가 교갱협의 임역원들을 통해서 점점 성숙하게 되며 여기 모인 여러분은 마음의 문을 열고 은혜를 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면 어떤 모습이 성숙된 모습입니까? 사도바울은 자신의 서신서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있지만 공통적인 것은 겸손과 온유와 오래참음이 없으면 너희들이 아무리 목회를 해도 성숙한 교인과 교회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짧은 시간이지만 계속해서 되새김질해야 하는 것은 나는 과연 목회하면서 하나님께 겸손한 사람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저는 52년생입니다. 여러분보다 목회를 조금 오래했습니다. 실수도 많이 하고 좌절도 많이 했는데 그분의 은혜로 인천의 한 교회에서 근근이 목회하지만 그것도 나이가 들면서 쉽지가 않습니다.

지난 날 목회 여정을 돌이켜보니까 정확한 한 가지 흐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이 앞서가시면서 다 하셨습니다. 저는 뒷북만 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한 것처럼 자랑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얼마나 가소롭게 보셨을까? ‘저 녀석을 한번 치고 싶은데 섬기는 교회와 교인들 때문에 내가 덮는다.’ ‘섬기는 교회의 교인들이 불쌍해서 본 것도 못 본척 한다. 들은 것도 못들은 척 한다.’ 돌이켜보면 수십 년 지난날 모든 것은 아버지 하나님이 다 앞서가시며 하셨습니다. 제가 한 것 같은데 저는 뒷북만 쳤습니다. 근데 내가 한 것처럼 자랑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아버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겸손의 무릎을 꿇고 싶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무슨 일을 하시든지 다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시켜서 했다고 했습니다. 사도바울 자신도 만삭되어 나지 못한 형편없는 자이며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교인보다 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교인보다 더 찬송을 크게 안 부릅니다. 교인보다 더 아멘도 안합니다. 교인보다 목사님, 전도사님의 설교에 은혜를 못받습니다. 나는 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를 나의 밖에서 한 번 보십시오. 어쩌면 우리는 목회의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내 이름을 나타내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보고 비웃으시면서 한순간에 바벨탑을 무너뜨리고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저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목회자입니까? 어떻게 교회와 교인을 성숙시키겠다고 아직도 이 짓을 하고 있습니까? 아버지 하나님, 용서하여 주시옵시고,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전할 수 있는 제가 되면 우리 교인과 교회도 변하고 성숙하지 않을까요? 저를 새롭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도바울이 반복적으로 교회에 관해 이야기할 때에 교회 지도자들에게 겸손과 온유와 오래참음이 있어야 함을 말했습니다. 디모데도 목회의 겸손을 사도바울을 보며 배우려고 하였습니다. 디모데가 디모데 될 수 있었던 것은 사도바울의 모든 영성과 삶과 언행과 능력을 유심히 보면서 하는 척이라도 할 때였습니다.

작은 교회든, 중형교회든, 대형교회든 최소한 다섯 세대가 공존하며 목회하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도 큰 차이는 없습니다. 그 가운데서 세대 공감을 하는 것이 허공을 치는 것 같고 서너 세대가 넘어간 담임목사님을 보면서 무엇을 배우는 것이 말이 안된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기억하십시오.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배우기 싫으면 가르치지 말아야 됩니다. 목회하지 말아야 됩니다.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까?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면 그 분은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으시면서 우리를 목회자로 만들기 위해서 진력하시는 분이라면 내가 지금 소속된 교회의 담임목사님을 통하여 배울 것이 무엇인가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은 목회의 중요한 흐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용서하고 들어주십시오. 저의 경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부교역자 생활을 정확히 했습니다. 교육전도사, 전도사, 강도사, 부목사, 그 다음에 인천제2교회에서 담임목사가 되었습니다. 담임목사가 되고 나서 놀라운 것은 부목사, 부교역자로 있을 때와 달라도 너무 다른 것이었습니다. 어떤 때는 미치도록 힘들었습니다. 최종 책임자가 되는 것은 미치도록 힘들었습니다.

우리 아들도, 사위도 목사입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도 수군거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들이나 사위 둘 중 한 사람이 이 교회에 올 것 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몇 번에 걸쳐서 아니라고 했는데 믿지 않았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목회했기 때문에 눈빛만 봐도 압니다. 연세드신 분들은 믿는데 젊은 분들은 몇 번을 말해도 안 믿었습니다. 제가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얼마 후에 제 사위가 부교역자 생활을 마치고 담임목사가 되었습니다. 담임목사가 얼마나 힘든지 “아버님, 담임목사가 이런 것인지 몰랐습니다. 미치도록 힘이 듭니다.” 유무형의 적도 있고, 사단마귀의 적도 있고, 자신의 장로, 권사, 집사의 경력을 진로로 여기는 분들도 많이 있어서 타협이 되지 않는 분들 속에서 힘들어합니다. 할 수 있는 것이 기도밖에 없고 외치는 설교밖에 없다고 합니다.

제 손자가 열 살인데 학교에서 장래희망을 조사했습니다. 손자 이름은 고은찬입니다. 은찬이는 장래희망을 ‘목사’라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 장래희망의 좋은 점을 적는데 은찬이는 목사가 되어서 좋은 점은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라고 적었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손자가 볼 때 목사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목사가 되었을 때 나쁜 점은 제 마음이 조금 아팠는데 ‘항상 목소리가 쉬어 있고, 잠을 못 잔다.’라고 적혀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볼 때는 하찮은 담임목사인 것 같아도 그 분들은 산전, 수전, 공중전, 또 육탄전을 수없이 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이 볼 때 그 분들은 항상 밝고 추진력이 있는 것 같죠. 그 분들의 뒤에는 검은 커텐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실 것입니다. 사랑의 법 외에는 다른 법을 꺼낼 수 없는 외로운 곳에서 고독을 느끼면서 지난 날 받았던 여러 가지 상처와 아픔, 치열한 고통이 표현되지 않기 위한 본능의 뒤에는 검은 커튼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

저는 얼마나 밝은지 교인들이 저보고 기생이라고 합니다. 제가 이렇게 밝고 목회를 추진력있게 하는 것은 저에게도 검은 커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수중전, 공중전 뿐만 아니라 육탄전도 현실적, 영적으로 계속하시는 분들이 담임입니다. 그 분들을 보면서 수많은 교회 가운데 나를 이 곳에 보낸 이유는 목회의 겸손을 누구를 통해서 배우라고 할 까? 여러분이 달리 생각해도 괜찮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동일한 과정을 정확하게 거쳤던 사람이기 때문에 그 분을 통해서 배우라고 하나님이 강권하신 것입니다.

솔직히 고백합니다. 저는 부교역자 생활을 혜성교회, 성천교회, 장충교회에서 했습니다. 저는 그 10여 년 동안 작은 노트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 노트에는 혜성교회 담임목사님, 성천교회 담임목사님, 장충교회 담임목사님의 장점과 단점을 기록했습니다. 장점을 주욱 쓰고 단점을 조금 썼습니다. 그리고 담임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솔직히 고백하면 1년도 안되서 그 노트를 버렸고 어디 있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내가 담임이 되면 절대로 하지 않으려고 조금 적은 그것을 제가 똑같이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변질되었나? 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현실 속에서 배울 것은 배우고 버릴 것은 버리면서 나를 만들어가는 그 분을 생각하면서 여러분이 점점 변질되지 말고 변화되는 은혜를 꼭 받으시기 바랍니다.

사도바울은 이곳이 하나님의 은혜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에서는 오직 아버지 하나님만 영광을 받으시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선포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직 예수, 더욱 예수, 결국 예수, 절대 예수님 외에는 교회에서 주인이 될 수 없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이듯이 너희들이 하나가 되어야 성숙한 교회를 아버지 하나님께 받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부교역자끼리 하나되지 못하고 어떻게 교인들간의 연합을 이야기 합니까?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보시는 하나님이 계시는데 말입니다. 우리 교갱협 끼리도 하나되지 못하면서 어떻게 연합과 일치와 갱신을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삼위일체를 믿으면서 삼위각체로 교역자 생활을 하면서 어떻게 두 얼굴과 두 말을 교인과 교단 앞에 할 수 있습니까?

제가 하나가 되자고 하는 것은 교회 안의 거짓과 이단과 하나되자는 것이 아닙니다. 총회와 총신을 어지럽히는 일부 정치세력과 하나되자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교갱협 우리끼리라도 하나 되는 척이라도 해야 됩니다. 내 배에서 난 자식도 다 다르고 한국교회 생태계가 엄청 바뀌고 있는데, 교갱협 내에서도 광야에서 외치는 분도 존중하지만 썩어져가는 총회와 총신에 들어가서 혹은 세계선교위원회나 공적인 자리에 들어가서 갱신을 외치는 분들을 굉장히 격려하며 축복할 수 있는 하나됨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수례는 두 개의 바퀴가 잘 굴러갈 때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교갱협은 광야에서 외쳐야 합니다. 성명서도 필요합니다. 기도회도 필요합니다. 비상시국대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현장에 들어가서 선한 정치, 착한 정치를 하여 점점 하나님의 나라가 잘 이뤄져 갈 수 있도록 두 개의 수례바퀴가 굴러가는데 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나와 다른 의견, 뜻을 갖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도 경청하고 말을 줄이면서 늦더라도 함께 갈 수 있는, 그런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교갱협의 임원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교갱협에 속했고 임원이라고 하더라도 교갱협 외의 다른 단체에 대해서도 너그럽게 보아야 합니다. 하나됨은 다양성을 먼저 전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자주 만나지 않지만 갱신의 정신을 가지고 다른 단체에 들어가서 누룩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분들에 대해서 격려해야 합니다.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변질됐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교갱협 회원의 교회가 심히 아픔을 당할 때 같이 비판하거나 비난하지 마십시오. 밀물이 있으면 썰물이 있는 것입니다. 비난하는 시간에 한번 정도 기도해 본적이 있는가? 내가 비판하는 동안에 한번이라도 격려의 문자나 카톡이라도 띄운 적이 있는가? 다시 말씀 드립니다. 모든 것이 여러분이 생각한 것처럼 단순하게 목회할 수 있는 현실이 아닙니다.

영성수련회에 참석하는 것 귀합니다. 그러나 참석하지 못한 분에 대해서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격려하고 축복해야 합니다. 우리끼리도 하나되지 못하면 밖에 있는 사람들이 볼 때 가관이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는 교갱협을 위해서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이듯이 할 수 있거든 하나 됨과 격려가 우리 내면에 깔려서 우리만이라도 초심과 열심과 뒷심이 흔들리지 않고, 돈과 명예와 패거리에 자신도 모르는 순간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 기도와 언행 속에서 잘 실천해 나갈 수 있는 아름다운 동행을 하다가 천국에서 영원한 동행을 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요한 칼빈은 교회는 교회의 담임목사만큼 성숙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결코 숫자가 아니라 우리들에게 무한 책임을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그 교회는 그 교회 목회자만큼 성숙한답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기도제목이 생겼다고 하면 오늘밤 기도회 시간에 아버지 하나님께 올려드리면서 점점 성숙해가는데 승리하셔서 2박 3일이 끝난 후 예수님께 성공을 받쳐드리고 다시 사역지로 흩어지는 모든 동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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