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몸의 구조는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왜 가만두면 좋지 않은 쪽으로 기우는 것일까? 거의 가만두면 부정적인 쪽으로 기울도록 되어있으니 말이다. 공동체를 가만히 돌아보라. 주변에 매사를 좋게 생각하고 사람들의 위로자가 되고 힘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많은가? 그런 이들이 있다는 것은 그들을 생각만 해도 즐겁고 힘이 난다.그런데 현실을 돌아보면 대부분의 공동체 구성원들이 그렇지 못하다는데 큰 안타까움이 앞선다. 사실 따지고보면 주변에 좋은 일이 얼마나 많은가? 대다수의 사람들이 좋은 일들을 무시하고 오히려 좋지않은 한두
지금 사회적인 변화에 대해서 둔감하거나 적응능력이 취약해서 경쟁력이 떨어진 곳이 있다면 어디일까? 아마도 보수교단이 아닐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급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전혀 그에 대해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이와 관련하여 특히 우리 교단에서 시행하고 있는 총회은급기금 납입제도와 세례교인 의무 부담금에 대해서는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규제 일변도로 어떤 것이든지 그냥 명령만 내리면 되는 것인가? 또는 그 명령에 따르지 않을 때는 총회서류 미발급이라는 기발한(?)
최근 교단 내에서 커다란 반발을 일으키고 있는 세례교인 의무금 제도는 개선의 여지가 많은 제도이다. 이와 관련하여 발전적인 개선을 위해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고자 한다.첫째, 무엇보다 강압적이어서는 안 된다. 의무금이란 용어 자체도 그렇거니와 총회에 제대로 의무금을 납부하지 않는 교회에 대해서는 총회에서 서류발급 제재 등과 같은 불이익을 당하게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모든 헌금은 자발적이어야 한다. 억지로 하는 헌금, 더구나 강압에 못이겨 하는 헌금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지 않는다. 또한 전국교회의 협조를 기대할 수도
신.구약 성경의 여러 주제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 중 하나가 선교이다. 하나님은 성경 곳곳에서 당신의 모습을 선교하시는 하나님(Missionary God)으로 계시하고 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책은 두 말 할 것 없이 사도행전이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얼마나 세밀하게 선교 사역을 이끌어 가시는가 잘 나타나 있다. 성부 하나님은 독생자의 십자가 구속을 바탕으로 예루살렘으로부터 전 세계로 선교의 지경을 넓혀 가는 주권자로 일하신다. 성자 예수님은 부활 후 제자들에게 선교 사명을 위탁하시고(행1:8), 승
한국교회 안에서 우리 교단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지난해 총회가 마쳐진 다음에 교단별로 보고된 통계치만 가지고 본다면 예장통합과의 차이가 미미하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 교단이 수적으로 가장 많은 성도가 있는 교단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교단의 모습을 통계 수치만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단이 가지고 있는 신앙과 신학적인 성숙도, 그리고 교단의 정체성과 정책에 있는 것이다.이것이 우리의 관심이다. 총회를 보면 전에 비하여 상당히 많은 기구와 조직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그 내용을
1999년 7월 세계 142개국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서울에 모여 "역사의 주, 미래의 주, 예수그리스도"란 주제로 IVF 주최 WORLD ASSEMBLY 99가 열렸었다. 이때 JOHN STOTT는 21세기 기독교는 종교 상대주의, 물질주의, 성적 타락의 3대 도전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21세기 교회는 존폐의 위기를 맞을 것이라고 했다.첫째, 종교 상대주의는 기독교 역시 여러 종교중의 하나라는 주장이다. 상대주의자들은 기독교가 주장하는 유일신 하나님과 예수의 유일성을 기독교의 독선으로 치부해 버리고
지난 연말 어느 날, 이메일을 열어보니 잘 기억나지 않는 이름의 목사님 인사가 들어와 있었다. 서울에서 부목사로 지내고 있는 분이었다. 알고보니 필자가 신학교를 다니던 때에 반년 정도 목회자 없는 시골교회의 예배를 인도했었 는데 그곳에서 자란 분이었다. 당시 그 곳에서 교인 두 세분 모시고 설교를 했고 때로는 한 분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열심히 설교를 했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의 인사내용인 즉 그 때 들었던 설교가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떻든 감동을 받고 나도 목사가 되겠다고 소원했는데 지금 목사가 되었다는 인사였다. 광주에서 총신을
경제 한파와 함께 우울하게 시작한 2001년은 우리 국민의 정서와 삶을 예측할 수 없는 한 해가 될 것을 예고하고 있다. 또한 작년 한해 동안 연이어 터진 교회에 관련된 방송매체의 포문은 우리의 정체성을 다시 생각케 하는 유쾌하지 못한 일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들에 대해 인간적인 반응이나 세속적인 대응을 모색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결코 우리 모두에게 궁극적 손해로 작용하지 않으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오히려 쓴 약이 될 것이다.교회는 다시 본질적인 시각으 로 돌아가 밝아온 진정한 신 천년의 원년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 것인가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왕의 왕으로 재림하셔서 통치하시는 천년 왕국시대를 의미하는 '뉴밀레니엄' 즉, 새천년의 첫해인 2000년이 성경의 거룩한 제비뽑기 선거제도의 '입법원년'이라면 새천년의 둘째 해인 2001년에는 성경의 거룩한 제비뽑기 선거제도의 '시행원년'으로 한국기독교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교갱협은 출법이후 지속적으로 한국 교회의 갱신과 교단의 좋지 못한 임원선거풍토 개선을 위해 그 대안으로 성경의 거룩한 제비뽑기 선거제도를 제안해 왔었다. 그러다가 지난해인 새천년 첫해에 열린 우리 교단 제85회 총회에서 거의 총대
21세기가 시작되기 전 사람들은 "디지털 시대는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인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그것은 단순한 시대적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혁명 즉 지금까지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미래를 우리에게 가져오게 된 것이다. 디지털 시대를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따라 국가와 개인과 교회의 미래가 달려있다. "디지털 시대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라고 까지 말하였다.디지털 시대는 단순히 0과 1의 2진법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으로 1위만이 살아남고 그 외는 전무한 시대이다. 디지털(Digit
세상 앞에서 한국 교회가 욕을 먹은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닌데 그 이유가 뭘까? 내용이 잘못 되어서가 아니라 태도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난 몇 년간 개신교인의 수가 급감하는 현상을 통탄스러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 상당수의 국민들이 불교와 천주교 쪽으로 발길을 돌리는 모습을 보면서 한국 교회의 땅에 떨어진 윤리성과 도덕성을 회복하지 않고는 소망이 없음을 본다.지난 시간 동안 교회는 세상 앞에 보여줄 것을 다 보여주었다. 옷 로비 사건을 시작으로 해서 온갖 추태를 다 부리고 급기야 한 목회자는 교회의 쪼들리는 재정을
새천년에 열린 제85회 총회에서 총대들이 결의한 제비뽑기 임원선거 방법은 한국기독교 역사상 전례가 없는 초유의 일로서 획기적 사건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교단 정서상 총회선거법 개정연구위원회가 제비뽑기를 총회에 상정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는 그 누구도 낙관적으로 보는 이들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그러나 정작 총회 마지막날 제비뽑기 제도를 선관위원회가 보고를 통해 제안했을 때 믿을 수 없는 일대 사건이 벌어졌다. 대부분의 총대들이 "허락이요"라고 외쳤고, 상정 후 5분 여만에 미비점을 총회임원회에 맡기기로 단서를 붙인
금년 85회 총회를 통해서 차년도 부터 총회임원선거제도가 제비뽑기가 시행되게 된 것은 너무나 다행스러운 일이다. 일각에서는 제비뽑기로 제도로 인해 아무나 임원선거에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므로 제비뽑기가 한계성이 있다고 하지만 시행세칙만 잘 세운다면 전혀 문제가 발생하지 않고 오히려 효율적으로, 뿐만 아니라 과거에 나타났던 좋지 못한 교단 내의 선거풍토를 일소할 수 있는 제도이므로 굳건히 정착시켜야할 선거제도라고 본다.먼저 제비뽑기를 하기 위해서 임원으로 입후보할 수 있는 자격기준을 엄격히 세워 시행하면 후보자들이 난립하는 어려
며칠 전 노회 교역자들이 기도회로 모였는데 이구동성으로 목회가 힘들다고 한다. 목회자가 계획하는 일들이 잘 진행되지 않고 오히려 교인들이 불평하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서울에 있는 모모 교회들에서 일어났던 갈등도 이러한 사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근래 사회변화의 영향인 듯 하다. 기업이나 단체의 구조조정과 숨가쁜 변화의 욕구가 교회에 들어오고 있는데 이러한 때를 오히려 기회로 삼아 발전적인 변화를 모색해야할 것이다. 즉 불변하는 말씀은 굳게 붙들어야하지만 목회방법은 변화를 시도해야하는 것이다.필자는 지금 섬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