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등 너머 사거리 광장에 성탄절을 알리는 캐럴이 흘러나오고 트리 위를 장식한 큰 별이 반짝거리고 있다. 공교롭게도 쿵소리와 함께 화물차가 하늘을 보고 누워있고 실려있던 컨테이너가 나뒹굴면서 신호등마저 애처롭게 대롱대며 불빛을 껌뻑거리고 있다. 이윽고 싸이렌 소리가 주위에 울려 퍼지며, 교묘하게 신호등과 트리의 별빛이 겹쳐 보인다. 마치 부조화 속의 조화라고나 할까?

동쪽에서 서쪽으로 동방박사들의 발걸음을 이끌고 있는 하늘 위의 작은 별빛과, 그리고 오랫동안 이스라엘이 소망해 왔지만 그 색이 퇴색되어져 버린 다윗의 별빛이 서로 교차되어 보이기 시작한다.

이스라엘에게는 동방박사들의 등장이 매우 생소해 보이며, 무언가 접촉점이 없어 보인다. 또한 이들로 통하여 이스라엘의 변화가 생긴다면 결코 인정하기 싫은 이질감마저 들 것이다. 반면에 동방박사들은 무언가에 이끌려 작은 별 하나를 노선삼아 자국을 이탈하여 줄곧 동에서 서로 이동해 왔다. 그 노선의 종착점이 자기들로서는 전혀 생소하고 학문적 연결고리가 전무한 유대의 한 어린 아이라는 사실이 가장 큰 고민거리요 과제였을 것이다. 나아가 타국에 와서 외국인으로서 별과 어린아이가 가지는 연관성 때문에 정치적 오해와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기에 두려움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듯 사전에 많은 문제점을 내재하고 있는 작은 별과 작은 별이 이끌고 있는 베들레헴의 구유에 누워있는 어린아이는 과연 이스라엘에게 소망의 별빛일까? 아니면 잠결에 노선을 이탈해 대형사고에 이르게한 절망의 불빛일까? 이를 아는 것이야 말로 별빛의 의미를 아는 중요한 관건이 될 것이다.

성경은 동방박사들의 입을 통하여 작은 별이 이끄는 실체를 명확히 밝힌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별이 머물고 있는 장소를 확인하고 갓난 어린아이에게 왕에게 갖출 예의를 다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림으로 경배를 올린다. 그리고 작은 별이 이끌는 노정의 끝이 무엇이었는지를 확인케 한다. 이러한 그들의 선포는 믿는자에게는 큰 소망으로 다가오겠지만 믿지않는 자에게는 절망과 두려움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예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갓난아이와 유대인의 왕.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이슈가 고스란히 내재된 난제 중의 난제가 고스란히 이스라엘에게 남겨진 것이다.

과연 이 작은 별이 동방박사들에게 신호등이 되어주었듯이 과연 땅에서는 이 갓난 어린아이가 이스라엘에게 신호등으로 다가올 수 있을까? 하나님을 신봉하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형상을 잊어버렸고, 심지어 이스라엘을 인도해줄 별빛이 빛을 잃은 상태에서 이방인에 의해 전해지는 유대인의 왕을 과연 이들이 인정하고 왕의 백성으로 그 노선을 갈아탈 수 있을까?

신호등의 불빛이 자신들의 노선을 바로 수정해주는 역할을 해나가는 것이라면, 먼저 이스라엘은 이미 이탈된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어야하고 나아가 바른 노선을 향하여 전진할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할 것이다.

사도바울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의 원인을 한마디로 요약한다. 그것은 율법이 신앙을 가리워 버렸다는 것이다. 다른 표현으로 하나님의 것을 사람의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율법적 행위가 믿음을 대신할 수 없다는 뜻이며, 나아가 그 어떠한 고상한 종교적 모습으로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언약을 져버렸기에 율법에 대한 잘못된 적용이 있어진 것이고 그러한 연고로 자신들의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 못하고 자신의 하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였다는 것이다. 하늘에 떠있는 작은 별은 동방박사들 위에서만 반짝였던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 위에서도 반짝였기 때문이다.

바로 확인된 이스라엘의 모습은 율법적 토대 위에 유대인의 왕으로서 아기예수를 부인하고 교묘하게도 원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그들의 계략으로 사전에 없애버리려는 시도에서 가차없이 드러난다. 이러한 그들의 일상적이고 습관적인 현상들이 바로 이스라엘의 현재의 모습이었으며 오늘의 우리의 모습이다. 이를 율법의 노선이라 부른다면, 율법의 노선은 실패와 정죄와 좌절의 노선이라 할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사랑, 그리고 부활의 영광은 좌절한 이스라엘을 구원시키실 회복의 노선, 즉 자비와 긍휼의 노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들은 하나님의 자손이라는 자부심이 아니라 자신들은 하나님 앞에서 한낱 미물에 불과하다는 죄에 대한 바른 인식이라 할 수 있다. 믿음이란 죄에 대한 바른 인식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믿음을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 바로 작은 별빛이 인도한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어린아이다. 이 아이를 믿음으로 이탈된 노선이 제 노선을 찾고 죄인이 의인으로, 죽음이 생명으로 뒤 바뀌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 모든 회복의 노선이 바로 아기예수에게 있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인간의 시간의 영역과 공간의 영역을 초월한 영역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브라함이 그리스도의 구원의 때를 소망하였다고 하지 않는가?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얼굴을 맞대고 서로 대화를 나누지 않던가? 구약의 선지들이 고대하고 고대한 존재가 바로 구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잊지 말자. 즉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신앙의 출발점은 언제나 구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분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 참 믿음이다. 이로 인해서 그들은 어떠한 고난과 핍박이 눈앞에 있더라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작은 별이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의 이탈된 노선조차도 획기적으로 바로 잡아줄 신호등이 되어줄 것임은 자명하다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만이 율법의 노선에서 대형사고로 수습키 어려운 이스라엘의 운명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노선으로 제대로 틀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긍휼과 자비의 노선의 길에서는
실패가 있는 곳에 격려와 위안으로,
상처가 있는 곳에 치유로
미움이 있는 곳에 용서로

죽음이 있는 곳에 생명으로 향하게 하는 새 생명의 소망을 가지게 하며, 이 방향의 노선으로 틀어준 작은 별의 불빛이 신호등이 되어 자신의 죄인 됨을 보게되며 육신으로 오신 참 하나님을 향하여 경배와 찬양을 드리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결국 지금 우리가 용서치 못하고, 풀리지 않는 세상의 문제에 정체되어 있는 이유는 아직도 여전히 작은 별의 인도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며,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이의 존재를 부인하며, 나아가 그분께 나아가 경배드리기 보다는 여전히 자신은 죄인이 아닌 의로운 존재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도바울을 보자 그야말로 하나님을 신앙한다면서 하나님을 핍박한 우리의 현상적 모델이 아닌가. 거짓 하나님을 참 하나님으로 잘못알고 있던 종교적 오류가 그를 터무니 없는 인생으로 내 몰았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의 불빛은 본질적인 죄인된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하였고 철저하게 육으로 나시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하나님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결국 죽은 자를 생명으로 이르게 하실 분은 율법에 갇힌 하나님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한분임을 믿음으로 응답하지 아니하였던가. 이후 그이 삶의 노선은 어떠했는가? 자신을 죄인중의 괴수로 여기며 오직 예수, 오직 십자가와 부활만을 의지함으로 이루어진 인생의 노선이 아니던가. 율법의 억압에서 풀려나 그리스도의 사랑의 자유함으로 전환된 그의 삶의 노선이야말로 작은 별의 신호에 이끌려 참 하나님의 나심을 예비하고 경배하는 자비와 긍휼의 노선에 선 자들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잘못된 노선을 바로 틀어주신 주님께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자는 십자가 앞에선 죄인의 모습으로 그저 값없이 주어진 생명에 자신의 의를 내세우지 아니하며 언제나 율법적 토대를 넘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하고 위로하고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자일 것이다.

멀리서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트리의 위의 별빛, 오늘 우리에게 신호등이 되어 유대인의 왕으로 이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이 율법의 노선에서 여전히 물러섬이 없는 한국교회를 자비와 긍휼의 노선으로 갈아탐으로서 개혁하고 새롭게 되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게 하심을 잊지말고 그 성탄의 은혜가 교회 가운데 가득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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