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8/22) 교갱협 제16차 영성수련회 저녁집회

본문: 예레미야애가 1장 1~11절

저는 교갱협 창립멤버입니다. 조용히 교역자들과 16년동안 한번도 빠짐없이 귀한 은혜의 잔치에 참여했습니다. 제가 왠만한 말은 잘 안 듣는데 두 분의 말은 너무 잘 듣습니다. 첫 번째가 지금은 천국으로 이사를 가진 고 옥한흠 목사님의 말씀이라면 껌뻑 죽습니다. 그 다음에 대표회장이신 김경원 목사님의 말씀입니다. 괜히 오금이 저리고 성령이 주시는 말씀 같아서 거절을 못합니다. 저보고 영성수련회 첫 날 저녁 강사를 하라고 해서 세 분의 임원 목사님께 거절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대표회장님이 저한테 직접 전화를 하셔서 하시는 말씀이 “이 목사, 하라면 해” 하시는데 성령의 음성으로 들렸습니다. 솔직히 하나님 존전에서 저의 목회나 삶이 추악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갱신하자는 모임의 강사로는 아니라고 생각하다가 회장님이 말씀하시니까 정말 순종하는 마음으로 섰습니다.

여러분, 서울도 부산도 아닌 인천에서 지방 목회를 조용히 하는 사람도 교갱협의 강사가 될 수 있구나하는 소망을 가지시고 여러분도 한 번 도전해보시기 바라는 마음으로 섰습니다.

성경은 기록될 당시나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이나 그 말씀대로 적용되고 응답되고 있습니다. 그것을 성경 예언의 이중적 성취라고 합니다. 예레미야 애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레미야 애가에 보면 선민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의 실망스러움, 그리고 징벌과 회복의 말씀이 기록되어있는데 이 말씀은 지금 한국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악이 많아 멸망하는 예루살렘을 보면서 예레미야는 두 가지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전에는’ 과 ‘이제는’ 입니다. 슬프다 이 성이여, 영광의 거룩한 성이 어찌 이리 슬픈 성이 되었는가 하면서 ‘전에는’ 여호와만 경외하는 신앙의 구심점이었던 예루살렘이, ‘이제는’ 우상과 형상으로 득실거리는 고통의 성이 되었는가? ‘전에는’ 경제가 부흥해서 많은 사람이 왕래하던 예루살렘이 ‘이제는’ 쓰나미가 지나간 도시처럼 어찌이리 적막한가? 이 말씀을 들으면서 한국교회가 연상이 되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이여 ‘전에는’ 열방과 열국 중에 큰 자였는데, ‘이제는’ 남편을 잃고 심지어 자식까지 잃은 처절한 신세가 되었는가, ‘전에는’ ‘이제는’ 이 말씀이 시공을 초월하여 이미 한국교회에 다가 왔음을 어떤 사람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멸망하고 포로로 잡혀가는 선민들을 바라보면서 ‘어찌하여’ ‘어찌하여’를 반복하여 사용하며 그 시대를 반영하고 있고 지금 우리들에게도 경고의 말씀으로 들리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외동딸, 공주와 같았던 예루살렘이 이방에 포로로 잡혀 강제 노동을 하게 되었는가? 강압하는 사람들 때문에 낮에는 울지도 못하고 있다가 밤에 슬피울며 얼굴에 눈물이 범벅이 되고 그동안 사랑하던 사람들이 위로 한마디 없고 그동안 가깝던 열국들이 원수가 되었는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선민 이스라엘, 하나님의 선택과 축복을 받은 이스라엘이 ‘어찌하여’ 이방 바벨론에 세 번 씩이나 포로로 잡혀가는 조롱거리가 되었는가? ‘어찌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순례자들의 웃음소리와 감사소리가 충만했는데 ‘어찌하여’ 이제는 적막하게 바람소리만 들리는가?

‘어찌하여, 어찌하여, 예루살렘이’, ‘어찌하여, 어찌하여, 한국교회가’, ‘어찌하여, 어찌하여, 우리들의 목회 현장이’,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전에는 있었는데 지금은 그 구름이 안개와 이슬처럼 사라지고 있는가? 대적들이 머리가 되고 원수들이 형통하여 심지어 저항 능력이 없는 주일학교까지 이렇게 황폐되어 가는가?

성경의 이중적 성취, 그것은 예레미야 시대뿐만 아니라 지금 이시대의 한국교회에 말씀 그대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우리 또래들이 모이면 지금이 아닌 60년대와 70년대의 한국교회의 영광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마치 60년, 70년대의 프로레슬러들이 프로에 나와 옛날을 곱씻듯이 한국교회의 모습을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교회갱신협의회 수련회로 모였다는 것은 참 아름다운 모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모임을 아버지 하나님께서 굉장히 행복해 하시고 소망을 보고 계시다는 것을 여러분이 느낄 수 있는 은혜의 저녁이 되기를 바랍니다.

많은 분야의 전문가들이 한국교회의 쇠퇴기와 정체기에 대해서 원인 분석을 합니다. 어느 분은 ‘지난 과거 어느 역사를 봐도 국민소득이 20,000불이 넘으면 그 나라의 기독교는 정체나 쇠퇴기에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경험적 객관적 결과로 봤을 때 한국교회의 쇠퇴기는 이 정도면 다행이다.’고 표현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주 5일제 근무 때문이야. 내년 이면 완벽한 주5일제가 된다는데 큰일 났어.’ 또 ‘극심한 저 출산율 때문에 한국교회에 아픔이 들어온 것이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한국교회를 조금 깊숙이 들어온 중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국교회의 당회나 일부 지역 장로 연합회 때문에 한국교회의 목회가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우왕좌왕하는 사람중심으로 바뀌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분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어느 분은 인터넷과 페북을 통해서 전에는 일반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고 한국교회 중진들은 금기로 여겼던 사항들이 문제화 되고 믿지 않는 사람들도 알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비판을 위한 비판이 극성을 피워서 우리가 정체를 맞게 되었다고도 말씀하시대요.

또 이념적으로 이렇게 말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대학 다닐 때 이념서적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이념을 확립했던 분들이 사회 초년병이 되었고 지난 정권 10년을 통해서 그들이 각 분야와 언론매체의 중진이 되어서 그들은 의식적, 사상적으로 또는 성장과정 속에서 기독교인으로부터 받았던 피해의식이 있어서 할 수 있거든 불교와 천주교보다 기독교에 대한 기사는 더 확장, 과장, 확대해서 퍼트림으로 말미암아 한국교회가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이아몬드는 다이아몬드로만 자를 수 있듯이 한국교회와 우리 목회의 정체, 쇠퇴에 대해서는 성경으로만 해답을 내려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장 5절에 보면 ‘예루살렘이여, 대적들이 머리가 되고 원수들이 형통하다. 이 모든 것들은 너희들의 죄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하나님이 친히 곤고케 하신 것이다.’ 1장 8절 말씀에 보면 ‘너희들의 죄가 크고 심히 많음으로 내가 너희를 세상의 조소거리를 만들고 업신여김을 받게 하니까 너희들이 할 수 없이 뒤로 물러가고 포로로 잡혀가는구나’

누구를 탓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지금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입니다.

우리들이 전에는 세상을 염려하는 교회였는데 지금은 세상이 우리를 염려하고 전에는 우리가 세상을 선도했는데 지금은 세상이 우리를 선도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과 타협하지 말고 세상을 변화시켜야 되는데 하나님의 교회가 어찌 이리 되었는가? 20,000불 때문인가? 주5일제 때문일까? 저출산율 때문인가? 장로연합회 때문인가? 인터넷 때문인가? 이념 사상 때문인가?

아닙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교회의 지도자들인 우리들의 죄가 많고 큼으로 하나님이 너희들을 곤고케하고 하나님이 너희들의 징벌을 내리시는 과정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는 저녁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사단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말합니다. ‘다음 공격은 너의 교회야, 너야, 조심해’ 너의 죄악이 큼으로 내가 너를 곤고케 하고 너의 교회를 곤고케 할 수도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한국교회를 곤고케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오래 참으셨습니다. 그 사실을 우리가 입으로 말하지 않을 뿐이지 다 압니다. 자신은 자신이 제일 잘 알지요. 우리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다가 이제는 더 이상 견디시기 어려운 거예요. 그러나 감사하게도 우리 하나님에 대해서 좀 알지 않습니까? 한국교회 뿐만 아니라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조롱을 받고, 업신여김을 당하고 때로는 군중속의 고독을 느끼고, 때로는 하나님의 채찍과 책망을 받는 증거가 보일 때에 그것이 하나님의 징계이고 하나님이 곤고케 하는 것을 아는 교회와 성도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런 교회와 성도와 목회자는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알기에 회개할 수 있습니다. 작은 회개의 열매라도 받칠 수 있습니다. 때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면 싸매어 주시는 분도 하나님 이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소망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반복적이고 점진적인 죄악에 대해서도 즉각적으로 치지 않으시고 때를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열매맺고 돌아오는 자는 마치 치매에 걸린 것처럼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고 기억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해서 총회를 바라보며 소속된 노회를 바라보며 혹은 동기나 선배 목사님의 삶을 바라보면서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30년이 지나도 정치 목사, 정치 집사들은 변하지 않는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들이 변하지 않는 것 만큼 교회갱신협의회 너희들도 어떻게 이렇게 변하지 않을 수가 있느냐? 어쩌면 그렇게 회개하지 않느냐? 어쩌면 그렇게 회개의 열매가 없느냐? 어쩌면 내게 돌아온 흔적이 없느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래된 자아에서 벗어나는 교갱협 수련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8년 된 병자가 하나님이 기회를 주자 38년 동안 깔았던 자리를 내어던지고 새로운 방향으로 전진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하나님께 보여드렸습니다. 우리도 작은 모임이지만 한국교회에 좋은 나비효과를 나타내서 징벌위에 회복의 역사를 우리 당대에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출발점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하나님을 다함이 없는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직자로서 반복적이고 연속적이고 계속적인 죄에 대해서 회개하지 않으면 사랑의 하나님이 어느 날 갑자기 갈라디아서 4:4절 ‘때가 차매’말씀과 같이 공의의 하나님으로 바뀌고 채찍을 드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우리에게 채찍을 드시는 것도 좋은데 우리 자녀와 손주에게까지 그 벌이 임합니다. 예루살렘 의 어른들의 잘못으로 인해 그 자녀와 어린 손주들까지 저항능력없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세상 언론과 할 수 있거든 교회와 우리들의 약점을 발견해내기 원하는 기독교계 내의 언론에 우리가 포로로 질질질질 끌려가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예레미야의 영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서 전체를 보면 놀라운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예레미야는 예언자로서 하나님께 받은 말씀대로만 선포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이 적을 수도 있고 하나님께 받은 말씀이 혹 있다 할지라도 교회와 장로님들을 바라보면서 말씀을 적당히 변색하여 번영과 축복의 말씀으로 바꾼 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일반 사람들은 모릅니다. 장로님들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시고 바벨론과 산발랏과 도비야 같은 사람들을 끄집어내서 그들의 글과 사진과 논평으로 우리를 계속 포로로 만들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교회가 점점 쇠퇴하거나 멸망케 하거나 분리케하는 역사를 봤습니다.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할 것은 하나님께 직접 받은 말씀, 컴퓨터에서 뽑은 말씀이 아닙니다. 경건 서적에서 받은 말씀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통제와 감독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예레미야 같은 말씀이 있게 하여 주시옵시고 이 말씀을 그대로 선포할 수 있는 영성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권위를 훼손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는 어떤 이방의 신비하게 보이는 신상이나 태양의 여신이나 농사의 번성을 주는 바알신이라 할지라도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의 권위 앞에서는 굴복하고 결국 멸망합니다. 바벨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만 신뢰하며 눈치보지 않고 전할 수 있는 예레미야의 영성이 있어야 합니다.

예레미야 44:17에 거짓선진자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너희들이 이만큼의 평강과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으며 자녀들이 잘되고 재난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은 바로 저 귀한 신상 바알과 아스다롯 덕분이니 여호와를 버리고 아스다롯 앞에 절하라고 했을 때에 예레미야는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예레미야의 영성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소망합니다.

말씀 전하는 저부터 우리들이 너무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인들이 알고 우리를 삯군으로 생각할 수 있는 시대가 다가왔다는 것이예요. 거짓선지자들과 고관들이 말하기를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수도 없고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하나님을 섬겼는데 받은 것이 뭐가 있는가? 계속 하나님만 섬기면 이 만큼의 가정의 평강도 무너지고 칼과 기근으로 멸망받을 것이니 내 말을 들으라 했을 때 예레미야는 중심을 잡고 주의의 눈치를 보지 않고 원색적으로 받은 말씀을 그대로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은 연합은 좋아하시지만 혼합은 싫어하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교갱협’이라는 단체나 기타 크고 작은 모임을 통해서 연합하는 것은 그 분이 너무나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을 다른 신상과 우상과 여신과 같이 묶어서 섬기는 혼합은 너무 너무 싫어하십니다. 유기농 요쿠르트에 독약을 조금 섞어 보십시오. 유기농 요쿠르트의 기능을 상실하고 독약이 영향력을 주게 됩니다. 그것을 예레미야가 알고 있기 때문에 백성들을 축복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그들에게 번영을 주는 선지자의 역할을 잠시 포기하고 선민들이 우상숭배를 할 때 맞는 하나님의 징벌과 포로, 그리고 멸망의 먹구름에 대해서 거침없이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그 때는 지금과 달리 가나안 땅에 들어간 선민들의 생사화복이 농업에 의해서 주장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날씨에 굉장히 민감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보니 많은 이방사람들이 신상과 우상 앞에서 경배하면서 나타난 결과가 괜찮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흔들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예레미야는 말씀으로 경고하고 멸망을 말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야, 하나님을 섬겼을 때 보다 태양신과 여신에게 경배했을 때 수확이 좋았어”, 어쩔 수 없이 예레미야는 스라야라는 사람을 동원해서 하나님의 사람들의 멸망을 예언한 후 그 예언이 담겨져 있는 책에 큰 돌을 묶어서 유브라데 강에 던져버리는 장면이 예레미야 51:61~64절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시청각 교육인 것입니다.

말씀으로 경고하고 돌아오라고 해도 끝까지 돌아오지 않자 시청각 교육을 보이면서 바벨론이 잠시 번성하나 결국은 이렇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끝까지, 끝까지, 컴퓨터가 아니고, 경건서적이 아니라 친구들의 설교가 아니라 성령의 통제와 감동 속에 원천적으로 받은 말씀이고 그 말씀을 하나님의 성도들과 장로님들과 안수집사님들이 싫어한다고 할지라도 그대로 선포해서 그것이 결국은 당신에게 복이라고 선포할 수 있는 예레미야의 말씀, 영성, 그것을 그림자라도 쫓아갈 수 있다고 하면 하나님은 한국교회와 우리들의 목회를 보면서 새로운 희망을 주고 새로운 은혜와 축복과 은사를 개발할 수 있는 계기를 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선민들은 말씀 선포자 예레미야를 체포하고 여러번 때리고 옥에 가둡니다. 오랜 시간 동안 뚜껑이 덮인 구덩이에 집어넣습니다. 그래도 번영신학에 푹 빠졌던 선민들은 예레미야의 그 모습이 마음에 차지 않았습니다. 목회는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받으면서 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때로는 핍박받을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어떤 핍박이냐? 내가 잘못하고 약점이 드러나서 나의 치명적인 잘못이 드러나서 고난받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말씀대로 선포하다가 핍박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목회인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많은 다수는 예레미야를 죽이라는 여론을 형성해갑니다. 할 수 없이 권세자들이 더 깊은 구렁텅이에 집어넣습니다. 거기에는 물이 없습니다. 진흙창입니다. 하루에 한 끼, 떡 하나 먹습니다. 서서히 합법적으로 죽이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그러한 죽음의 그림자가 눈 앞에 보이는 순간 “하나님, 이러다가 저 죽는 거예요? 두렵습니다.” 라고 예레미야 37장에서 고백합니다. 그러면서도 포기하지 않은 것이 세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바른 말씀을 받자, 바르게 선포하자, 바르게 살자 이 세 가지였습니다.

경청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바른 말씀을 받고 바르게 선포하자. 내 선포에 하나님의 은혜와 감동이 있어서 바른 삶을 유지해나가자 하고 싶어도 내가 선포된 말씀이 약화될 것 같으면 하지말자. 하고 싶어도 내가 주일날 주일학교와 장년에게 선포한 말씀이 약화될 것 같으면 하지 말자. 바르게 말씀을 받고 선포하고 바른 삶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권위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님이나 신부님처럼 의식을 집례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개신교 성직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그 말씀에 합당한 삶이 우리가 마지막으로 갱신해야 할 부분 중에 최고입니다.

예레미야뿐만 아니라 사도바울도 로마서1장 1절 말씀에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이라고 표현합니다. 종이라는 단어는 사도바울의 인간적 성품과 그리고 그의 삶의 겸손을 의미합니다. ‘나는 당신들의 말씀의 종이고, 삶의 모범의 종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저는 권위주의는 철저히 배격합니다. 그러나 성직자는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권위가 아닙니다. 나는 담임목사나 교역자라는 직함을 가지고 만든 권위가 아닙니다. 사도바울의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겸손하게 선포하고 그 말씀대로 합당하게 살기 때문에 생긴 진정한 권위였습니다.

그런 권위가 우리들에게 있는가? 나에게 있는가? 권위주의가 아니라 그런 권위가 있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먼저 부교역자 분들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총신 신대원 입학 할 때 성경시험 보듯이 그렇게 하라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아직 담임도 안되었는데 왜 설교를 준비할 때만 성경을 보고 있습니까? 자신을 자신 밖에서 보셨는지요? 왜 어느 때 부터인지 설교를 준비할 때만 주로 성경을 피고 있습니까? 내 권위는 어디서부터 무너진 것일까? 저는 목회하면서 컴퓨터에서 뽑은 것 같은 설교를 하는 부교역자도 만났습니다. 그 분이 평소에 사용하는 언어습관과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는데 설교는 전혀 달랐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설교를 몇 달치 준비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저도 굉장히 바쁩니다. 그런데 할 수 없습니다. 몇 년 전까지는 주일 오전 설교 1년치를 탈고했습니다. 이것은 자랑이 아니라 간증입니다. 지금은 너무 바빠지니 6개월치 주일 오전 설교는 항상 탈고된 상태여서 어느 출판사에서 가져가서 당장 책을 내도 될 정도로 완벽하게 되어있습니다. 제가 6개월 교통사고를 크게 당해서 병원에 드러누워 있어도 전혀 문제없습니다. 6개월치 중에 하나 뽑아서 단에 설 수 있는 여유가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그렇게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새털같은 한 주간이 지나고 있는데 토요일 밤이 되어도 전도사님, 강도사님, 부목사님, 아직도 원고가 탈고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아시고 내가 압니다. 어디서부터 내 목회의 권위는 무너지고 있을까?

저는 1978년 12월 13일 첫 번째 교육전도사로 주일 오후예배 설교를 했습니다. 그 설교를 준비하면서 하나님 앞에 멍청한 서원을 했습니다. 저는 그 서원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 서원은 “하나님, 제가 은퇴할 때 까지 어떠한 설교든지 원고를 보지 않고 설교할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서원을 했습니다. 저는 열정이었지 그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몰랐습니다. 서원은 해롭더라도 갚으라고 해서 갚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첫 설교부터 지금까지 주일 오전 설교, 오후 설교를 한 번도 원고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적당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저희 교회 장로님들도 와계시는데 1부, 2부, 3부 설교가 똑 같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IQ가 높은 것도 아닙니다. 저는 IQ가 두 자리 수입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원고를 단에 가지고 올라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은 절대 자랑이 아니라 간증입니다. 들어주십시오. 정말 치명적으로 그렇게 하실 수 없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월요일부터 화수목금토 주일 새벽에 조금만 시간을 내면 다른 사람의 원고가 아니고 내가 만든 원고라고 하면 어느 정도는 교인들과 눈과 눈을 마주치면서 말씀을 전할 수 있는데 제가 스님도 아니고 신부도 아니고 의식을 집례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으로 권위를 인정받아야 하는 사람인데 나는 왜 이렇게 말씀을 늦게 준비하고 주일학생들과 청년들과 장년들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말씀을 전하지 못하고 있을까요?

나는 과연 준비된 말씀으로 성령의 임재가 때로는 폭포수와 같이 때로는 이슬처럼 임재하도록 준비하는 시간이 얼마인가?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리처드 박스터는 말하기를 ‘네가 준비한 원고에 너의 마음이 불붙기 전에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불붙일 생각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과연 준비된 원고를 가지고 거기에 성령의 불이 임하시도록 준비하는 시간이 일주일에 얼마나 되는가? 지나간 우리교회 부교역자 중에는 설교를 성경보다 더 어렵게 하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너무 어려워요. 교인들이 저한테 자꾸 물어봅니다. ‘목사님, 오늘 설교의 중심은 무엇이예요?’ 그러면 저는 “저도 모르겠어요.” 그럽니다. 무슨 주제가 그렇게 많아요. 그런데 자기 사모가 은혜받았다고 하니까 좋아가지고 똥 오줌을 못가리고 있어요. 천생연분입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고 그냥 천생연분이라는 단어밖에 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계속 그러다가는 평생 원수가 되지 않겠는가? 아내의 은혜 받았다는 말에 똥 오줌을 못 가리니 참 어이가 없습니다.

자기 아내를 위해 설교했습니까? 기도와 헌금과 찬송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이고 말씀은 성도들에게 하는 것인데 성도들이 성경 본문보다 더 어려운 설교에 대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는데 주위 가까운 사람들이나 자기 아내가 은혜받았다고 하니까 그것에 만족하는 모습이 혹시 여러분 가운데는 없습니까?

설교의 대가중의 한 분이신 스펄젼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따라와서 장년 설교를 듣는 초등학교 5학년, 6학년 학생이 “우리 목사님 설교 너무 좋다.” 라고 할 수 있는 설교가 최고의 장년 설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성경보다 더 어렵게 설교하고 그 교회 간지도 얼마인데 아직도 파악을 못했는가? 잠언 19:6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수많은 교회와 수많은 사역자가운데서 그 교회의 담임 목사로 발걸음을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의 섭리이십니다. 담임 목사님도 부교역자의 설교에 대해서 함부로 평하지 못하고 우회적으로 이런 부분이 개선되면 좋겠다고 하는데도 끝까지 바뀌지 않는 부교역자를 보면서 저는 소망을 볼 수 없었습니다.

전도사, 강도사 시절에는 조금이라도 말씀의 기름부으심을 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자주 부교역자가 설교할 때 맨 뒷자석에 앉아서 성경을 보시는 다른 부교역자 분을 봤습니다. 정말 지나가는 교인들 보기에 부끄럽습니다. 그런 분들을 볼 때에 교인들이 무슨 권위를 주겠습니까?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아야 되듯이 다른 교역자 설교를 통해서 배우기 싫어하거든 교역자 생활을 그만 중단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또래 같은 부교역자입니다. 같은 부교역자끼리 하나 되지 못해서 잡음이 들린다면 어떻게 교인들을 향하여 하나가 되라는 설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말씀의 권위가 서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권위를 잃어버리고 다른 것에 열중했기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곤고함을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임당하고 바벨론으로 포로로 질질 끌려가는 것과 같이 현재 우리들도 잘 못된 것 때문에 스스로 포로됨을 자처하고 있다고 봅니다.

다시 말씀 올립니다. 저는 담임목사이기 때문에 여러분 보다 숨겨진 약점과 숨겨진 죄악이 많습니다. 그래도 하나 말씀올리고 싶은 것은 경건서적을 통해서 짜집기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바른 말씀, 바른 선포, 그리고 삶으로 입증이 되도록 기도를 올리고 회개하고 선한열매를 하나님께 받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매년 다람쥐 채바퀴 돌듯이 이 수련회에 참석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담임목사들도 똑 같습니다. 구약의 우상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 진 것이 우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우상은 마음과 삶 속에 있는 무형의 우상입니다. 담임 목사들의 우상은 <골로새서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하나님보다 더 탐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담임 목사 초기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언제부터인지 하나님 보다 다른 것이 탐스럽고 사랑스럽습니다. 담임 목사들은 스스로 다 압니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하나님과 교회보다 그것이 더 탐스럽고 거기에 많은 정성과 마음과 시간을 빼앗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선포와 준비, 성령의 기름부음, 흠과 티가 없는 말씀 선포에 산재물로 드리기 위해서 완전히 자신을 투자하고 때로는 사모가 혼자 있어서 우울증이 걸릴정도이지만 이해를 바라며 준비했던 말씀 선포의 열정이 어느 때, 어느 순간인지 모르지만 우리 담임 목사들에게서 점점 사라지고 다른 것에 더 시간을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하면서 자기 합리화를 시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우상입니다. 저도 우상이 있습니다.

전 코카콜라 회장이 자신의 몸 혈관에는 코카콜라가 흐른다고 했습니다. 세계적인 기업의 코카콜라 회장으로 정체성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나는 가수다’라는 TV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그 한곡을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연습을 하는지를 봤습니다. 나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요즘 저는 손주랑 같이 있는 게 낙이라 ‘나는 손주다’ 아차하면 손주가 우상이 될 수 있겠더라구요. 내 정체성은 무엇일까? 전 코카콜라 회장의 피에는 코카콜라가 흐른다고 했는데 내 목회와 설교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흘러야 하는데 그러면서 ‘나는 담임목사다.’ 나 하나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와 교인들이 영광과 기쁨과 회복을 얻을 수 있고 나 하나 때문에 그들이 평생 잊지 못할 상처를 받으면서 무종교로 전락할 수 있는데 그 핏 값을 하나님이 찾으시면 어떻게 할까? 주님, 저는 담임목사입니다. 나의 혈관에 그리스도의 보혈이 흐를 수 있도록 저를 회개시키시고 열매를 주시고 변화시켜 주시고 갱신시켜 주시고 다시 한 번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솔직히 우리 담임 목사들은 오래 되다 보니까 장로님들이나 권사님들이 설교를 터치하는 것이 싫을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아내의 충고도 싫을 때가 있습니다. 왜 우리는 담임목사로서 왕이 되고 내 목회와 내 설교는 건드리지 못하게 합니까? 우리는 왕이 아닙니다.

담임목사인 나도 하나님의 종이고 부교역자들도 똑같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아직 담임목사가 안된 종입니다. 일부 담임 목사들이 부교역자들이 설교를 하면 그도 인격인데 설교 끝나자마자 그 즉시 회쳐버리는 것이 그 부교역자에게 평생 잊지 못 할 상처가 된 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담임 목사로서의 위치는 인정하시만 인격은 인정 안 할 수가 있습니다. 담임 목사는 조폭의 두목이 아닙니다. 저는 이 부분에 있어서 굉장히 노력하고자 합니다. 담임 목사가 자신의 혀처럼 구는 부교역자를 자신의 친위대로 만들고 그 친위대에게만 특별 대우를 한다면 나머지 부교역자들도 인정받기 위해서 친위대처럼 하려고 할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말씀처럼 ‘나는 비천하오니 여호와여 나를 돌보시옵소서’ 예레미야가 ‘나는’ 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담임목사들이 갱신되어지면 하나님의 성도들이 갱신되어지고 하나님의 교회가 바뀌며 한국교회에 희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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