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21) 종교개혁 500주년기념 공동학술대회

 

먼저 정치란 말을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정치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람들과 관계를 만들고, 조직하고, 의논하고, 행동하는 행위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그런데 교회정치는 일반 정치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교회는 공동체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들의 이익을 위해 - 궁극적으로는 그러하지만 - 정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그가 목적하신 바를 성취하기 위해서 정치한다. 다시 말하면 교회정치는 교회로 하여금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뜻을 받들어 순종하도록 이끄는 행위이다.

따라서 교회정치는 넓은 의미에서 예배에 속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고 거기에 순종으로 응답함으로써 그의 영광을 드러내는 예배다. 따라서 회의는 기도이며, 투표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실현하기 위한 민주적인 성사(聖事)이고, 권징은 믿는 자들을 제자 삼는 양육과 훈련이다.

그런데 요즘 교회 안에서 “정치한다”는 말은 대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교회에서 파벌을 짓고, 파벌에 속한 개인이나 그 집단의 이익이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세속적인 정치 행위를 의미한다. 이런 경우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이나 목적을 하나님의 공의와 목적보다 앞세운다. 왜 이렇게 되는 것일까? 그 원인(遠因)은 인간의 부패성이요 근인(近因)은 신앙의 연약함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정치하는 교회지도자들은 신앙의 연약함을 지나 부패와 타락에 이르고 있다.

무엇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의 주되심(the Lordship)에 대한 신앙고백이 현저히 약화되었는데, 그 고백이 입술의 고백일 뿐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고백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신앙의 약화는 교회의 정치영역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다. 무엇보다 놀라운 일은 교회의 직원인 지도자들이 그리스도의 주권을 훼손하거나 찬탈하는 행위에 앞장 서 있다는 것이다. 거기다 이런 행위도 은밀한 중에 하는 것이 아니라 공공연히 행하고 있다.

이런 행위의 가장 뚜렷한 예는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선거운동이다. 곧 목사 장로들이 교단총회나 교회연합기관들에서 소위 “명예롭고 힘 있는” 어떤 직책을 얻기 위해 선거운동을 하는 일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주권을 훼손하는 무엄한 일인 것은 교회의 직원임명권은 그리스도에게 있기 때문이다. 엡 4:11에서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라고 하고 있다. 또한 장로교가 말하는 교회정치의 원리에서도 이것을 분명히 밝혀놓고 있다. “교회의 머리이신 주 예수께서 그 몸 된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직원을 세우신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는 교회 안에서 “성직매매” 현상이 심하게 일어나고 있는데 특히 각 교단총회나 연합회 등에서는 금권선거운동이 일반화되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이런 선거운동에 대해 후보자들도 투표자들도 신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죄책감도 양심의 가책도 거의 없는 것 같다. ‘총대들에게 식사대접하고 여비 주는 정도를 가지고 금권선거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고 말하는 목사들도 있다. 이런 생각을 가진 목사들, 그것도 교단의 최고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목사들 중에 많으니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한국교회의 정치는 그 정치의 주체자인 교회의 직원들[특히 목사와 장로]이 그리스도의 주권을 훼방하는 것으로 시작하니 거기에 영적인 권위가 있을 수 없다. 교회정치의 권위는 교회의 주되신 그리스도의 권고와 은총으로부터 온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뜻을 받들어 공의를 실현하기 위해 충성하는 곳에 주어진다. 그런데 교회의 직원 된 자들이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주권을 훼손하면서 정치를 시작하니 그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리스도의 권고와 은총이 함께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런 결과는 심각한 이차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그것은 교회치리회의 재판이 불공정하게 소위 정치적으로 이루어질 때가 많아 그 권위를 상실해버렸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교회 안팎의 많은 사람들이 한국교회의 자정능력을 매우 회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여기에 잇대어 나타나는 현상은 교회문제를 일반 법정으로 가져가는 일이다. 교회지도자들이나 교인들이나 지금은 교회치리회의 판단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 역시 보편화되고 있어서 “한국교회를 지도하는 사람들은 목사나 장로가 아니고 불신 법정의 젊은 판사들이다.”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다.

일찍이 바울 사도는 “너희 중에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않느냐”고 책망한 바가 있다. 여기서 “불의한 자”란 그리스도를 주로 믿지 않는 일반인들을 칭한다. 따라서 일반 법정에 소송하는 일은 그리스도를 주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서 주님의 뜻을 확인하려는 어리석고 불경스런 행위이며, 그리스도의 주권을 훼방하는 행위이다.

(물론 필자가 일반 법정에 소송하는 일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치리회의 불법과 횡포로 인권이 유린당하는 것은 물론 재산상의 손실까지 입는 경우들이 있기 때문에 교회 밖의 일반 사법기관에 호소하는 일을 무조건 반대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런 경우라도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의 교훈(마 18:15-18)에 따른 절차를 밟아야 한다.)

교단총회는 산하 교회의 신학, 정치, 행정을 총괄하는 치리회다. 총회는 성경을 연구하여 교리를 채택하고, 이단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며, 신학교를 운영하여 지도자를 양성한다. 총회는 헌법을 제정하고 개정하며 해석하는 권한을 가진다. 그리고 노회(지방회, 연회 등)의 설립, 분립, 폐지 등에 대한 전권을 가지며 노회에서 올라오는 모든 안건들 - 행정건이나 소송건 등을 최종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한다. 이렇게 총회가 해야 하는 일들을 수행하는 모든 행위가 교단정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대로 치리회를 구성하는 지도자들이 타락하면 이 모든 일들은 혼란 속에 빠지게 되고, 교회가 공의를 지켜내지 못하게 되며, 결국에는 교회정치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게 되는데 그때에는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되는 일도 없게 돼버린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교회는 영적인 공동체이며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주재하는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교회직원들이 신앙에 바로 서지 못하면 교회도 교회정치도 바로 설 수 없다. 그리고 교회지도자들의 회개와 신앙의 부흥 없이는 교회갱신의 희망도 없다. 그런데 너무나 안타깝게도 현하 한국교회에서는 교회정치의 터와 기둥이 무너지고 있는 상황이다.

신앙의 중심은 그리스도다. 그리스도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그 기초다. 그러므로 세속화된 교회정치의 개혁은 교회지도자들이 그리스도의 주되심 앞에 두려움으로 서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청교도들이 표어로 삼았던 성경구절 중 하나는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시 99:1)였다. 주 앞에서 겁 없이 설치는 자들은 마지막 날에 “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참으로 무서운 주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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