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순교자 박병근 전도사 이야기(4)

가문의 대를 이어 신앙생활을 하며 교회를 섬기는 이들의 간증을 들으면 좋은 교훈이 되고 큰 은혜가 된다.

손양원 목사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경찰에 체포되어 갈 때 부친 손종일 장로가 하셨다는 말씀이 잊히지 않는다.

“손 목사야, 누가복음 9장 62절과 마태복음 10장 37절로 39절을 기억해라.” 했단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는 말씀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이다.

사명자가 믿음을 지키고 십자가의 길을 가는데, 가족 염려로 흔들리지 말고 일사각오를 결심하라는 말씀이었을 것이다. 손 목사가 8‧15 해방으로 출옥했을 때 그 부친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만날 볼 수 없었다.

다시 순교자 박병근 이야기이다.

박병근 전도사의 부친 박문택(朴文澤)은 미국 남장로교회 초기 선교사들에게 복음을 듣고 신자가 되었고, 선교사들과 함께 전남지역 복음 전파자로 살았다. 전남지역을 맡은 배유지(유진 벨, 1868-1925) 선교사의 전도로 1899년에 설립된 구소리교회(광산구 대촌동) 교인이었다.

구소리 교회 역사는 다음과 같다.

배유지 선교사가 1896년에 우산리(광주 광산구) 주민들에게 전도하여 1897년부터 예배를 드렸다. 나주에 선교부를 세우기 위해 군산에서 나주로 여행하는 길에 들렸던 마을이다. 그렇지만 일부 주민들의 반발과 교회에 대한 심한 반대로 1899년에 삼도리교회와 구소리교회로 나누어 모이게 되었다.

박문택은 선교사들에게 신실한 믿음을 인정받아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성경을 배포하고 전도하는 매서인으로 활동했었다. 그는 의료선교사 오웬(한국명 오기원, Owen)을 도와 매서인賣書人으로 직접 활동 했으니 오웬이 다녔던 지역인 남평, 나주, 영암, 장흥, 보성, 능주, 동복, 화순, 옥과, 낙안, 순천, 광양, 구례 등의 어느 곳을 다녔을 것이다. 손자 박환규 목사는 할아버지가 마을 사랑방을 찾아가서 찬송을 부르고, 사람들이 모여들면 복음을 전했었다고 말했다.

박문택의 부인도 전도자로 살았다. 나주군 덕림 마을을 다니며 전도했었는데 그곳에는 1904년에 덕림교회가 설립되었다. 박환규 목사의 증언이다.

아들 박병근도 아버지 따라 복음 전도자의 길로 나섰다.

오웬 선교사 추천으로 광주숭일학교 고등과에 입학하였고, 학업을 마치자 전남노회 전도사가 되어(1924년) 농촌지역에 있는 교회들을 맡아 사역했다. ‘나는 목사 될만한 자격이 없다.’며 총회 신학교에 가지 않고 평생을 전도사로 사역한 것이다.

그의 아들 박환규(은석교회 은퇴목사)는 부친의 목회를 보면서 성장했다. 그것이 신앙훈련이었다. 강진읍교회에서 열린 연합사경회에 참석했던 일을 잊지 못한다. 교인들과 함께 읍내까지 걸어 다녔다. 그때는 부흥회가 귀한 때라서 군내 여러 교회가 식량을 짊어지고 모였고, 교인들이 나서서 식사를 준비하고 함께 나누니 사경회는 그야말로 천국 잔치 같았던 것이다.

박환규는 부친이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감옥에 갇혔을 때는 신문배달, 버스 차장, 양복점 일, 사진관 일을 하며 가족 생계를 챙겼다. 그렇게 훈련받은 두 아들(박환규 박남규)은 목사가 되어 농촌교회와 광주지역에서 목회를 했다.

예수님께서 삼 년이나 훈련한 제자들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하시더니 바로 박문택 성도의 가문도 이런 믿음의 대를 이어 국내와 해외에 복음 사역자로 세움을 받았다.

필자가 목회 초년부터 전남노회를 함께 섬겼던 박환규 목사는 교회사를 연구하는 내게 가문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셨다.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총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관을 네게 주리라’

믿음의 꽃을 피우고 예수 향기를 날리신 분들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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