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순교자 박병근 전도사 이야기(2)

《죽으면 죽으리라》를 쓴 안이숙은
1948년에 미국으로 떠나면서 어머니에게 ‘제가 없는 동안에 먼저 천당 가시지 마시고 기다려야 합니다. 석 달 후면 꼭 돌아오겠습니다.’ 다짐했으나 그렇게 헤어져 미국으로 간 것이 마지막 이별이었다. 이젠 천국에서 반갑게 만나지 않았을까.

지난 5월 20일 91세로 소천하신 박환규 목사도
매서인이었던 조부(박문택)와 6·25 순교자인 부친(박병근)을 천국에서 만나 뵙고 선교사와 목사 세 아들을 응원하고 계실 것 같다.

박병근(朴炳根)전도사(박환규 목사의 부친)는 1950년 6·25 때 나산교회(함평군 나산면)를 맡고 있었다. 그 해 9·28 서울 수복이 이루어지면서 잠시 물러섰던 국군과 경찰이 다시 치안을 회복하자 그동안 지방에서 일어났던 좌익세력이 도망하면서 공직자와 유력인사 그리고 기독교인들을 학살했다. 박 전도사도 그렇게 9월 30일쯤에 순교했다.

그는 광주숭일학교를 나와 평생을 전도사로 사역했다. ‘나 같이 부족한 죄인이 어찌 목사가 되겠느냐’며 평양신학교 진학을 사양했던 것이다. 그래서 평생을 전도사로 사역했다.

부친 박문택은 유진벨 선교사가 1899년에 개척했던
구소리교회(현재 광산구) 초기 교인이다. 배유지(유진벨) 선교사는 광주 전남지역 선교를 책임 맡아 자주 전남지역을 답사했다. 전주를 출발하면 영광과 나주를 거쳐 목포로 다녔고, 그 길목인 구소리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소리교회가 세워졌다.

박문택은 의료선교사 오웬(오기원)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전도자로 나섰다. 선교사에게 전도지와 성경을 받아 마을마다 다니며 배포하는 매서인으로 나선 것이다. 매서인 박문택은 아들을 선교부에서 설립한 광주숭일학교에 보냈다.

아들도 부친을 따라 복음 전도자로 나섰다.
숭일학교를 다니며 구소리교회가 운영하는 학교와 보성군 운림학교, 광산군 조산학교를 다니며 기독교 진리를 선포했다.
한 편으로는 선교부 성경학원을 거쳐 평양신학교가 주관하는 통신과정 신학을 마치고 1924년에 전남노회 전도사가 되었다. 담양창평교회를 맡았다가 제주도 신창교회로 들어갔다. 그 때는 제주도가 전남노회 소속이었다. 민속신앙과 미신이 극심한 곳에서 복음전파에 진력했다. 1930년에 육지로 나와 장흥군 부평교회를 개척했고, 삭금리교회와 진목교회까지 겸임했다.

1934년에는 장흥읍교회로 옮겨 예배당을 건축하고,
1937년에는 영암읍교회를 시무하면서 영보교회, 구림교회, 장사리교회, 도장교회까지 담당했다. 이어서 신흥교회와 장암교회도 개척했다. 한국 교회의 개척기에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설립하며 예배당을 건축했다. 전남지역 교회의 기초석을 든든히 놓은 것이다.

조선예수교장로회가 1938년에 신사참배를 결의했지만
박 전도사는 이를 거부하고 일경에 체포되었다. 강진읍교회에서 모인 장강영시찰회(장흥, 강진, 영암) 연합사경회 강사로 나섰다가 붙잡힌 것이다. 교역자들과 교인들 수십 명을 끌려갔다. 영암경찰서에 13개월 갇혀있으면서 고문과 회유를 받았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광주형무소에 3년을 복역하고 1943년에 석방되어 신흥교회를 섬기다 8·15 해방을 맞았다.

무안현경교회를 시무할 때 나산교회로부터 청빙을 받았다.
지방의 좌익세력이 교회를 극단적으로 핍박하자 못 견딘 교역자가 떠났다. 그 후임으로 가게된 것이다. 박 전도사는 ‘내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라 생각했고, 나산교회에 부임하자 반공운동에 앞장섰다. ‘일사각오’로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믿음을 지키기로 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눈엣가시가 된 것이다.

6·25에 공산군이 내려오자 지방의 좌익들이 합세하고 나섰다.
공무원이나 교회 지도자들도 끌려갔다. 교인들이 전도사에게 피난을 권했지만 ‘교회를 지키겠다.’며 거절했다. 하나님의 뜻이면 순교의 제물로 드리기로 작정한 것이다.

믿음의 선진들을 기리는 복음성가처럼
‘그러므로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요 날 위해 피 흘리신 내 주님의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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