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순교자 박병근 전도사 이야기(1)

목사님들이 모이면 자녀들이 목회하는 분들을 만난다.
그럴 때면 "목사님은 목회 기도를 못 쉬시지요. 아들이 교회를 섬기고 있으니..." 하며 인사를 나눈다. 목회자의 길이 십자가의 길임을 알고도 아버지를 이어 목회를 지망하는 자녀들이 대단하는 생각을 한다. 근래에 돌아가신 박환규 목사님 장례식장에서 목회하는 세 아들을 만났다. 케냐에서, 캄보디아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광주에서 개쳑교회를 하는 분들이었다.

그 때 그 가문의 아름다운 믿음과 헌신 이야기를 신문에 올리기로 마음 먹었다.
그들의 역사가 바로 광주전남 선교 역사와 맞물려 있어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첫 이야기는 이런 것이었다.

박환규 목사(광주 은석교회, 현재 단비교회 은퇴목사)가 지난 5월 20일 당년 91세(1926년 생)로 육신의 생명을 거두었다. 6‧25 때 순교한 박병근 전도사의 아들로 목회자 대물림으로 평생을 살았고 아들 셋을 선교사와 목회자로 두었다. 전남노회 역사를 오래도록 이어온 전남지역 교회사 증인이었다.
장례식장에서 케냐에서 달려온 아들 박성기 선교사를 만났다.
20년 전, 의료봉사팀을 이끌고 갔던 일을 추억하며 그곳 나무밑 교회(이야니교회)의 안부도 물었다. 그에게 “당신의 아들 5대까지 가문이 광주 전남 선교 역사의 맥”이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광주에 은석교회를 개척해서(1979년) 시무하다 은퇴하신 박환규 목사에게 들은 이야기다.

그는 내 앞에 부친 박병근(朴炳根) 전도사가 공산당 흉탄에 순교할 때 입고 있었던 옷, 총탄 흔적 뚜렷한 핏빛 바랜 옷 조각을 내놓았다. 어찌 끔찍한 옷 조각을 갖고 계실까. 부친의 순교신앙, 절대 믿음을 유산으로 간직하고 싶었던 것 같다. 본인의 생각이 그렇지만 선교사와 목사 된 세 아들과 후손들에게도 순교자 가문의 자존감을 유산으로 물려주고자 하는 가보였을 것이다.

박환규 목사의 조부되신 박문택(朴文澤)은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유진벨(배유지)이 전라도에 처음 들어왔던 시기에 광산구에 세운(1899년) 구소교회 교인이 되었다. 말하자면 전라도 선교 초기 교인으로 금보다 더 귀한 신자였던 것이다.

박문택의 아들 박병근이 순교한 날이 1950년 9월 30일이다.
나산교회(함평군)를 시무할 때이다. 지방 유지 30여 명과 함께 공산당에 붙잡혀서 향교 뒷산으로 끌려가 그들의 흉탄에 죽은 것이다. 일제 때는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8‧15 해방 후에 반공교육에 앞장섰던 것이 그들의 눈에 가시였을 것이다. 만행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무참하게 죽어갔던가.

아버지와 아우를 잃은 박환규 전도사는 어린 딸도 잃었다.
장흥 관산교회로 부임하면서 찬바람에 병을 얻어 숨을 거둔 것이다. 목회자가 건너야 할 강이요 불같은 연단이었을까? 감당하기 어려운, 빠져나올 수 없는 슬픔의 늪 같았다.

목회자로 5-60년. 지상 교회에서의 사역이 어찌 순탄했겠는가.
교회의 어려움과 함께 교단 분열로 인한 노회의 갈등까지 겪으며 전남노회를 지켜왔다. 농촌 교회를 섬기다 마지막에는 광주에 개척하여 지내다 중병으로 쓰러지더니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세상 수고를 그치라’며 부르신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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