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록도 장인심 할머니 이야기(4)

예수님께서 십자가 피 묻은 손으로 세상에서 가장 추한 손을 잡아주는 곳,
그곳이 한센인들의 교회이다. 고칠 수 없었던 몹쓸 병으로 신경 손상을 입어 몸이 굳어지고, 손가락과 발가락이 끊어지고, 심하면 팔다리를 자르고, 중도에 시력을 잃기도 했다. 후유증으로 엄청난 장애가 남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몸을 어루만지시고, 기도하는 손을 잡아주시는 것이다. 소록도 사람들은 그 사랑으로 살았고 또 살아가는 것이다.

신성교회 정오기도팀과 몇 년을 만나면서 시 한 편을 썼다.
<기도> “예배당 종소리 섧이 우는 소록도/ 구부정 지팡이 짚은 할머니/ 잃어버린 얼굴 가린 색안경 할머니/ 하체 장애로 전동차 탄 할머니/ 정오 맞춰 하나님 만나러 예배당 온다// 신경손상으로 붙고 꼬부라진 꼬막손/ 짧고 길어 맞닿지도 않는 손/ 두셋 남았던 손가락마저 잃은 몽당손/ 뭉툭한 손을 어설프게 합장하고/ 말로 다 못하는 심사를 눈물로 아뢴다// 나인(癩人)이기에/ 벌레처럼 천대받고 서러웠던 세월/ 눈물 골짜기에서 만난 구원자 하나님/ 나그네 인생 황혼기도 올린다/ 주여! 하늘나라 은총을 베푸소서”

신성교회 정오기도팀을 오랫동안 인도하는 분이 장인심 권사이다.
열여섯 나이에 소록도에서 처음으로 교회에 나갔던 그녀의 믿음이 자라서 평생 교회를 섬기고, 지금은 열댓 명 할머니들과 소록도교회의 전통인 정오기도를 드린다.
장인심 권사의 입원 시절 이야기로 돌아간다. 교회에서 만난 또래 친구들과 어울렸다. 숙소에서 가족처럼 함께 생활하는 한센인 가족, 교회에서 함께 예배드리는 믿음의 사람들과 어울렸고, 언니라, 이모라, 삼촌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생겼다. 고향에서는 병 때문에 아이들이나 이웃과도 어울리지 못했다.

초등학교에도 못 들어갔다. 언니들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다.
하고 싶었던 공부, 날마다 가서 어울리고 싶었던 학교생활, 소록도에서 그 길이 열렸다. 한센인 지역에 있는 녹산초등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학생들은 나이가 고르지 않았다. 나이 많은 학생이 많았다. 배우고 싶은 사람이면 누구나 공부할 수 있었다. 학생이 3백 명이나 되었다. 다 환자가 아니었다. 입원하는 부모 따라 들어온 아이들이 많았다. 자녀들을 맡아 줄 사람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온 슬픈 사연이 있었다.

죽지 않고 열심히 살아야한다고 다짐한 인심이는 공부를 열심히 했다.
53명 가운데 8등을 했었다고 기억한다. 배우고, 어울리고, 함께하는 생활은 그녀로 하여금 지금껏 포기했던 생활에서 새로운 꿈으로 꽃이 피고 향기를 발했다.
교회 학생회에도 들어갔다. 주일마다 성경을 배우고 토론도 했다. 학생찬양대에 들어가면서는 장년예배 찬양을 맡고, 노래 잘하는 그녀가 종종 독창을 하면서 어른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가수 꿈을 꾸었던 그녀가 심령의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쁘고 똑똑하고 믿음 좋은 교인이 되었다.

18세 때는 장년예배 찬양을 맡은 교회찬양대에 들어갔다.
세례 받기 전이었지만 어른들이 그녀를 찬양대에 넣어준 것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늘 감격하여 불러온 찬송이 있다. “나 위하여 십자가에 중한 고통 받으사 대신 죽은 주예수의 사랑하신 은혜여…”, 나 “예수 앞에 나오면 모든 죄 사하고 주의 품에 안기에 편히 쉬리라…”는 눈물로 드리는 신앙고백이다.

어머니가 그립고 형제들이 보고 싶었다.
손녀를 불쌍히 여겨서 늘 아이처럼 돌봐주던 할머니를 못 잊었다. 당장이라도 바다 건너 고향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그럴 때면 소나무 언덕에 에 올라가 고향 하늘 바라보며 노래했다.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 저 하늘 저 산 아래 아득한 천리 언제나 외로워라 타향에서 우는 몸 꿈에 본 내 고향이 차마 못 잊어...”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지금도 그 노래를 부르면 파도 같은 서러움에 목이 멘다. 사람들 앞에서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한 많은 반 백 년 세월, 여기까지 주님 손잡고 걸어온 것이다.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또 나의 슬픔 알까
주 밖에 누가 알아주랴 영광 할렐루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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