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록도 장인심 할머니 이야기(3)

순교자 김정복 목사가 기도하던 굴(6.25 때 순교)

세상 사람들이 전설의 땅처럼 이상한 사람들이 살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어떤 사람들은 천형天刑의 섬이라 말하기도 하는 남도 땅 남해안의 작은 섬 소록도, 한센인으로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는다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하운의 시 <전라도 길-소록도 가는 길에>은 슬프기만 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고/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고향 사람들의 배척으로 집을 나와 타향에서 걸식하며 방황하는
한센인들의 비참한 모습, 소록도로 가는 절망이 생생하다. 그 때는 먹고 살기도 어렵고, 좋은 약도 없었다. 여자라면 더 슬프지 않았을까? 이제 막 곱게 피어나는 꽃송이 나이라면 더더욱. 그러나 거기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가족은 없어도 환자들끼리 동병상련의 이해와 위로와 돌봄이 있었다.

장인심이 처음 배정받은 신생리 숙소는 여덟 명씩
열여섯이 두 방으로 나누어 생활하고 있었다. 할머니와 어머니 같은 분도 계셨다. 세상일에 철이 덜 들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까마득한 소녀를 먼저 들어온 그들이 품어주었다.
수목이 아름다운 공원과 이웃 마을 그리고 바닷가를 돌아다닌 지 사흘째 되던 날은 수요일이었다. 그 날,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서 신앙생활로 들어서는 기적의 날이었다. 거의 모든 사람이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할머니를 따라 처음 간 곳이 신성교회였다. 소록도 일곱 교회 있었다. 고향에 있을 때는 바깥출입도 못했고, 집안은 전통적으로 제사를 지내왔던 터라 교회는 전혀 아는바가 없었다.

소녀 장인심이 찾아간 교회는 별천지였다.
몸이 불편한 남녀 교인들이 예배당에 가득모여 온 몸으로 찬송하고, 소리 높여 기도하는 모습은 이 세상 분위기가 아니었다. 신비하고 놀라웠다. 그 때 어둡고 답답했던 어두운 심령에 한 줄기 밝은 빛이 비추듯 마음이 평안해지고 짓눌렸던 짐을 부려놓은 것 같았다. 처음 느껴보는 감동, 그것은 깨닫고 보니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녀의 마음이라도 잘 아는 듯 그 날 목사님의 설교 말씀이 마음에 파고들었다. “자살은 살인입니다. 지옥에 떨어질 죄악입니다.” 이 한 마디가 가슴에 꽂혔다. 내일이라도 바닷가 어디에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으리라 생각하고 있는 철없는 인심의 마음을 찾아오신 것이다.

“아, 이런 좋은 말씀도 있네. 그래, 나는 살거야. 죽지 않겠어...” 짊어지고 있던 ‘자살 보따리’를 벗어버렸다. 그녀의 마음을 옭아맨 올무, 죽음의 그림자를 벗어버린 것이다. “하나님이 그날 목사님을 통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나를 그렇게 구원해주신 것이지요.” 권사 된 그녀의 신앙 간증이다.

그렇다. 사람마다 특별한 경우에 하나님을 만난다.
물론 평탄한 인생길에 믿음을 갖기도 하지만, 많은 분들이 어려운 때, 절망의 순간이나 죽을 수밖에 없는 형편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형편과 때를 따라 자기 백성을 부르는 것이다. 설교 말씀이나 전도자의 권면, 또는 두꺼운 성경책 가운데 그 어떤 한 말씀이 영혼을 살리는 것이다. 회개시키고, 소망을 주시고, 위로와 치유와 회복으로 이끌어 주시는 것이다. 고향산천, 부모형제를 떠나온 인심이를 하나님은 그렇게 만나주셨던 것이다.

교회에 열심히 나갔다. 노래를 좋아하던 그녀가 찬송하는 것은 무엇보다 큰 즐거움이었다. 어르신들이 좋은 말씀을 들려주고 생활도 돌봐주었다. 또래들도 많았다. 혼자가 아니었다.
바다로 사방을 막아버린 깊은 감옥 소록도,
가족과 헤어진 서러움에 통곡하는 섬,
한센인들을 찾아오신 소록도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셨다. (계속)

광주늘기쁜교회에서 간증하고(이정철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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