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록도 장인심 할머니 이야기(2)

소록도 시인 강창석의 ⌜긴 세월」 이다.
새털구름처럼 흐르다/ 세상살이에 채이고/ 얄궂은 이에게도 쫓겼었다// 인파를 헤집고 움츠려 찾아온 곳/ 망가진 몰골 쳐다보는 이 없어 좋다만/ 고향 그리워 향수에 젖어본다// 변화의 길목에 서서 슬픔을 거두고/ 원하던 세상 손잡아주는 이와/ 아름다운 영혼을 나누며 비상하리라//
얼굴이 이상하다며 쳐다보는 이가 없어서 마음이 편했다는 말이 있다. 소록도가 그렇다. 그는 대한민국 군인으로 병역의무를 반듯이 마쳤지만 한센병을 늦게 발견해서 치료시기를 놓쳤다. 소록도 역시 사람 사는 세상이었다는 것이다.

다시 장인심 할머니 이야기다.
1952년 8월 3일. 열여섯 소년가 소록도에 오던 날은 무더운 여름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집을 나서는 길에 오빠와 형부도 동행했다. 동네 사람들 만나지 않으려 외진 길을 걸었다. 소록도 배를 타는 녹동까지는 2십리 길. 동네 사람들 피해 산으로 들로 걸었다. 비선동 고개를 넘어 녹동 북촌 바닷가 선박대기소에 이르렀다.
소록도 사람들만 이용하는 선박대기소 붉은 건물이 있는 곳을 녹동 사람들은 달림 머리라 불렀다. 사람들이 소록도로 가는 사람들을 무서워해서 달음질을 친다고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인지도 모르겠다(사실은 달님 머리인데). 병이 무서웠다.
노 저어 다니는 작은 목선이 닿았는데, 한센인 주임이 안내자로 나왔다. 오빠는 한센인에게 울며 동생을 부탁했다. 여동생을 떼어 보내는 심정이 오죽했으랴. 소록도가 생각보다 가까워서 건너편 병원과 동네가 훤히 보였다. 인심이는 속으로 울음을 삼키고 어머니에게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마음으로 작정한 일이 있었다.
소록도로 가는 배에서 깊은 바다에 빠져 심청이가 될 각오였다. 그래서 이불이나 옷 보따리를 마다하고 나섰다. 그런데 사정이 그렇지 못했다. 작은 배라서 바다에 빠지면 함께 타고 있는 사람들이 금방 건져낼 것이고, 바다도 잠잠했다. 바닷가에 서있는 어머니와 오빠가 소록도에 닿기까지 바라보고 있을 것이니 그 앞에서 궂은일을 보일 수도 없었다.
포기했다. 소록도 경치나 좋다니 사흘쯤 구경 잘하고 죽자. 자살이야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마음만 먹으면 사방이 바다인데 하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안내를 맡은 주임은 일본에서 발병해서 소록도에 들어왔다는데
인심이를 측은히 여겨서 잘 돌봐주었다. 오빠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는 입원 후에도 보살펴주면서 동생으로 삼았다. 소록도에 사람들은 서로를 돌보며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이 딸, 삼촌이나 이모를 삼았다. 부모형제를 떠나온 그들은 이렇게라도 잃어버린 혈육의 정을 대신했다.
그때는 소록도 입원 자가 6천여 명이었다. 그가 배정받은 신생리 여자 숙소는 한 방에 8명씩, 두 방을 합쳐 16명이 함께 살았다. 방마다 사장(舍長)이란 책임자가 있어서 규칙이 엄했다. 녹산초등학교를 다니는 아이들 가운데 또래도 있었다.

보리와 밀을 배급받았다.
각자 자기 식기에 양식을 담아 그릇을 한 솥에 넣고 밥을 했다. 집에서 양식을 가져오는 사람 아니고는 누구나 식량이 부족했다. 양식만 아니라 옷이며 불 때는 화목도 형편없이 부족해서 고생이 여간 아니었다. 밤에는 빈대 벼룩이 어찌나 많은지 하얗게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래도 눈치 안보고 어디든지 다닐 수 있는 것이 자유 천국 같았다. 강 시인의 글 가운데 ‘망가진 몰골 쳐다보는 이 없어 좋다’ 한 그대로였다. 한 방에 있게 된 또래 안내로 구경을 잘했다. 고개 넘어 아늑한 포구 구북리, 교도소, 중앙리 마을 감금실, 병원, 수목이 아름다운 공원도 둘러보았다.

사흘째 되던 수요일, 한 할머니가 교회에 가자며 인심이를 챙긴다.
“나도, 교회 갈 수 있어요?” 하고 물었다. “가자, 너 같은 처자들이 많아” 하며 함께 나섰다.
아! 소록도에 버려진 불쌍한 영혼을 찾아오시는 분,
칠흑 절망에서 내미는 구원의 손. 오! 사랑의 하나님이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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