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록도 장인심 할머니 이야기(1)

‘인명재천人名在天’이라 한다. 생명의 길고 짧음이 하늘의 뜻이라는 것이다.
신자도 그렇다. 하나님께서 누구를 자기 백성 삼으려 작정하시면 그 일을 이루기까지 어떤 환경도 생명을 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한 사람이 장인심 권사이다.

소록도에 갈 때면 집으로 찾아가거나 정오기도회 시간에 맞춰 예배당에서 만나는 할머니 장인심 권사(81세. 신성교회)도 그런 분이다. 1952년, 6 25전쟁이 한창이던 해 여름. 녹동에서 조그만 목선을 타고 소록도에 들어와서 갇힌 듯, 묶인 듯 60년 넘게 살았다. 고향이 바다 건너 지척이라서 그곳을 바라보며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 애끓는 망향가를 불렀다.
꽃봉오리 같던 10대 소녀가 이제는 백발 할머니가 되어
‘길이 살겠네 나 길이 살겠네 저 생명 시냇가에 살겠네’ 찬양하며 교회와 이웃을 섬긴다. 예수 닮은 사랑의 밀알인 것이다.

고향(고흥 도덕) 가상부락은 가족처럼 살아가는 농촌이었고,
아버지는 마을 유지로 6남매(1남 5여)를 두었다. 막내 인심이가 열 살도 못되었을 때 한센병이 들었다. 언니들이 그때 다녔던 초등학교는 너무 멀어서 동네에 학교가 지어지면 가려 했는데 입학도 못하고 그렇게 된 것이다. 아이들과 못 어울리고 골방 생활을 했다. 한약국 하는 친척이 있어서 좋다는 약을 많이 썼지만 병세가 더 중해졌다. 부모의 근심은 오죽했으랴.
오빠가 여동생을 소록도로 보내서 치료해보자며 부모에게 권했지만 부친은 가문의 수치이고 부끄러운 일이라며 거부했다. 그 시절 한센병에 대한 이해가 그랬던 것이다.
그때는 소록도에서도 치료가 어려웠다. 좋은 약이 개발되기 전이었고, 경제적으로 어려워 배를 곯고 헐벗을 뿐 아니라 인권 사각지대였다. 열악한 환경에 집단생활이 비참했던 것이다. 인간 이하의 절망적 생활이었을 것이다.

고향에서도 오해와 편견이 극심해서 살기가 어려웠다.
전염병으로 오해해서 병자의 가족이 공동우물 마시는 것이나, 빨래터에서 세탁하는 것까지도 노골적으로 가로막았다. 환자나 그 가족까지 모두 동네에서 떠나라 했다. 아픈 사람과 가까이만 해도 병이 옮을 것처럼 경계했던 것이다. 그래서 걸식하는 한센인들이 동네에 들어오면 내쫓기도 했다. 발붙일 곳이 없었다. 가족들은 죄인처럼 외면당하고 형제들은 결혼도 어려웠다.
지금은 한센병이 흔하지 않고 또 그런 병자가 있다 하더라도 단기간에 완전하게 치료된다. 지금 소록도에 사는 분들은 다 나은 분들이다. 다만 후유증으로 장애가 남았을 뿐이다. 장인심 권사도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연한 순 같은 인심이는 세상이 싫어졌다.
좋은 가문에 왜 내가 이런 병에 걸려서 어머니와 아버지, 오빠 언니들을 근심하며 고생하게 하는가. 나 한 목숨 세상 떠나면 불행의 사슬이 끊어지리라 생각되었다. 그러면서도 시집 간 언니 한 번 더 보고 싶었고, 설 한 번 더 쇠고 싶었다. 나이를 먹어갔다.

아버지가 별세했다.
50 조금 넘은 나이에 마음에 큰 가시가 찔린 채로. 아버지가 친척에게 딸 이야기를 하며 슬피 울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못 들은 척하며 숨죽여 울었다.
어느 날, ○잡으려고 사놓은 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것이 가문의 저주를 끊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늘이 노랗게, 하얗게 소용돌이를 쳤다. 끔찍한 고통이 몰려왔다. 온 집안으로 내닫고, 바닥을 기고, 몸부림쳤다. 할머니가 주는 것을 받아 마시고 속엣 것을 다 토했다. 몸부림치며 울부짖었다. “할머니, 양잿물 주세요! 왜 나는 죽지도 못해요…”하고 목 놓아 울었다. 그때 아픔이었다. “칼로 속을 긁어서 소금을 뿌린 것 같았어요. 위를 상해서 밥을 못 먹어 몸이 약하게 살았고, 지금도 커피를 못 마십니다.”하며 슬픔에 젖는다.

오빠가 달래며 말했다.
“절대로 죽으면 안 된다. 나을 수 있는 거다”하며. 부모가 반대했던 소록도로 보내주라 했다. 섬에 내리기 전에 세상을 작별하리라 독한 마음을 품었던 것이다.
열여섯 꽃다운 나이, 칠흑 질곡에서 핏 소리 울음 토하던 소녀.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이 소녀를 어디로 인도하시는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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