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5/22) 교갱협 제2차 담임목회자 컨퍼런스 개회예배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한 목자들을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 (예레미야 3장 15절)

제가 시무하는 교회에 정성숙 권사님이 계셨는데 참 열심히 기도하는 권사님이셨습니다. 가끔 저에게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저희 아들이 신학교를 갔어요." 또 얼마 후에는 "목사님, 아들이 선교사로 간데요." 또 얼마 후는 "목사님, 아들이 필리핀으로 갔어요. 기도해 주세요. 기도해 주세요." 목사가 선한 것 같아도 "기도하겠습니다"라고 했지만 별로 기도를 많이 안했습니다. 그런데 정 권사님께서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장례식장에 가니까 권사님에게 말로만 듣던 아들을 그 때 처음 만났습니다.

장례를 치른 다음에 사모와 함께 오라고 해서 가서 대화하는데 제가 무슨 질문을 하면 단답으로 "예, 그렇습니다"라고만 대답을 해요. 말하다가 지칠 정도였습니다. '참 이상한 사람이다. 왜 저렇게 이야기할까?' 나중에 사연을 들어보니까 그 아들이 맥이 빠져버렸고, 번아웃되어서 완전히 풀이 죽어있었어요.

대신교단에 속해 있고 강태국 박사가 하는 성서대학을 졸업했어요. 우리 교단은 아닌데 GMS에서 선교훈련을 받았어요. GMS에서 선교훈련을 받으니까 선교사를 추천해달라는 교회가 있으니까 이 선교사를 추천해준 거예요. 교회 이름을 밝힐 순 없고 '우리 교회는 개척해서 처음부터 선교를 모토로 한다'고 해서 무조건 믿고 파송을 받았어요. 이 교회가 부흥되어서 조립식 건물을 1층 벽돌로 짓기로 했는데 욕심이 생겼어요. 2층으로 무리하게 짓다가 교회가 부도가 나버렸습니다. 교회가 부도나니까 선교사에게 후원을 할 수가 없죠. 그래서 잘렸습니다.

선교사는 필리핀에 있고 어떻게 다른 교회와 연결되었는데 그 교회도 ‘선교가 최우선이다’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그 선교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교회가 망해버렸어요. 필리핀 현지에 있는데 본국에서 원조자금 조달이 안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힘들고 갈등 속에 있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나를 선교사로 택하지도 않고 보내지도 않으셨는데 나 혼자 몸부림하는 것인가?'라는 갈등이 있었는데 그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장례를 치르고 저를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너무나 사람이 맥이 빠져있고 풀이 죽었어요. 그런데 대화하는 중에 제 마음에 '어머니가 이 아들을 위해서 얼마나 눈물로 기도하셨으면 마지막 천국 가시면서 담임목사님에게 연결을 해 주실까? 얼마나 아들을 위해서 한 맺힌 기도를 하셨을까?' 선교사는 별로 말을 화려하게 하지 않는데 대화하면서 제가 혼자 뜨거워지고 감동되어서 저 혼자 울었어요. 그리고는 즉석에서 "선교사님, 우리 교회가 파송하겠다." 그런데 사람이 빈말 헛말이라도 "목사님, 감사합니다"라고 할 텐데 그 말을 해도 아무런 반응도 없습니다. 아마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우리 고향 교회인데... 목사님이 와서 몸부림치지만 고향교회 형편을 뻔히 아는데...' 제가 세 번째 파송교회였습니다. 첫 번째 파송교회는 부도나고, 두 번째 파송교회는 망해버리고, 세 번째 파송교회는 무슨 지원이 있을까? 했던 것 같아요.

급히 출국해야 해서 수요예배 때 우리만의 약식 파송예배를 드렸어요. 그리고 그 해 여름에 저도 가고 장로님과 집사님, 청년들 모두 23명이 단기선교를 가서 선교하는 산속의 산족들을 방문하고, 밀림을 가고 지역을 다니며 빈곤한 어린이들에게 죽을 쒀서 주기도 하고, 연극도 하고 별 걸 다했어요. 그리고 가서 교회도 지었어요. 필리핀 시골교회는 우리가 다 알듯이 위에는 비만 막으면 되고 옆에는 바람만 막으면 되고 아래에는 그냥 뭐라도 깔면 되는 거죠.

그것을 보고 동네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자기들이 보니까 한국에서 온 자매들이 깨끗하고 예쁘게 생겼는데, 돌을 나르고 시멘트를 비벼서 나르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4박 5일간의 선교일정을 마치고 출발하기 전날 모여서 피드백을 하는데 우리 선교사님이 하는 말이 "제가 이제야 조금 동산교회 선교사인가 보다"라는 생각이 든대요. 우리는 열정의 땀을 쏟고, 얼굴이 까맣게 타고 같이 다니면서 선교에 협력을 하는데 하도 받은 상처가 많아서 그러시더라고요. 매년 선교지에 가고 그게 계기가 되어서 힘을 얻고 지원을 많이 받게 되어서, 지금은 예배당도 건축하고 사립학교를 운영하면서 그 일대에서 명문사립학교가 되어서 학급을 더 증설하고 학년을 더 많이 해주라고 교육청에서 요청한답니다.

무슨 얘기를 드리고 싶어서 이렇게 장황하냐 하면 사람이 다 승승장구되는 것만도 아니지요. 대나무가 올라가면서 매듭이 있는 것처럼 고비가 있고 매듭이 있습니다. 살면서 그런 과정이 있는 것처럼 목회도 얼마나 힘들고 어렵겠어요.

베이징에도 선교사를 파송했는데 거기도 중간에 파송한 선교사입니다. 한 20년 전에 갔는데 대찬 야망을 가지고 있어요. 도지사한테 50년간 30만 평 땅을 임대 받아서 어렵게 한국교회의 지원을 받아 한쪽에는 양로원을, 한쪽에는 고아원을 건축했습니다. 제일 먼저 입주해 들어온 사람들이 누구냐면 원래 연변에 태권도 선교사로 갔던 분인데 늘 탈북자들에 대해 관심이 많으니까 몰래 숨겨놨어요. 그런데 탈북자들이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살인사건이 났어요. 그래서 추방당했어요. 그 선교사를 우리 교회에서 파송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다 우리 교단도 아닌데 나중에 교단도 우리 교단으로 옮기고, 노회도 우리 노회로 소속하게 해서 이렇게 저렇게 선교사 다섯 가정을 파송해서 중국에 두 가정, 필리핀에 한 가정, 남아공에 한 가정, 일본에 한 가정을 파송하고 도와주고 있습니다. 공통점이 있다면 다 하나같이 어려운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다 하나같이 중도에 포기하고 싶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돌볼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얼마나 왕성하게, 뜨겁게 사역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 담임목사님 수련회에 제가 들어도 시원치 않은데 무슨 강사라고 서서 있는 게 겸연쩍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럴 것 같아요. 사랑하시는 옥한흠 목사님이나 김경원 목사님이나, 이건영 목사님이나 이런 분들은 제쳐놓고 좀 덜 사랑하시는 분들은 정치권에 집어넣는 것 같아요.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톡톡히 받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총회의 부총회장이라는 감투를 쓰고 보니까 이게 정치판이잖아요. 우리가 총회의 정책을 입안하고 총회의 방향도 설정하고 전국 교회의 힘을 모아서 뭔가 해 나가야지 그걸 안 하니까 소위 프로페셔널한 정치꾼들이 총회를 좌지우지하려고 드는 것 아니겠어요. 죄송하지만 죽일 놈, 살릴 놈, 하면서 성토를 하는데 성토만 하지 그 사람들이 안하면 다른 사람들이 이 총회를 바로 세워 나갈 수 있는 대안이 없는 거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교갱협이 힘을 모으고 의지를 모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아울러서 부탁을 드립니다.

오늘 성경말씀을 보니까 목자는 하나님께서 양들에게로 보내신다고 했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담임목사입니다. 담임선생님 같이요. 옛날에 학생들에게 통신표 보낼 때에 선생님의 의견을 학부모에게 보내는 칸이 있었어요. 거기 보면 선생님들이 정확하게 학생들의 개성을 꿰뚫고 있습니다. 얘는 장점이 뭐고 단점이 뭐고, 성격이 어수선하고 주의가 산만하고, 다 알고 있어요. 우리도 양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심령의 필요한 것 아픈 것 가려운 것,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는 그런 담임목사, 주님의 종입니다. 주님의 종이에요.

종은 세 가지가 없다고 합니다. 첫째, 인격이 없어요. 종이 무슨 인격이 있어요.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복종만 있을 뿐이에요. 둘째, 종은 소유가 없어요. 내 것이 어디 있습니까? 자신을 통째로 주인이 샀는데, 셋째, 종은 자유가 없어요. 내가 쉬고 싶다고 쉬지 못합니다. 밖에서 일하고 왔다고 주인이 앉아서 쉬라고 하지 않습니다. 들어와서 웨이터로 계속 주인의 수발을 들어야 돼요. 이런 목자, 이런 주의 종으로 우리를 양들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양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양들 때문에 목자가 존재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목자가 호의호식하라고 양들을 보내주신 것이 아닙니다. 목자의 생존을 위해서 양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양의 생명을 위해서 목자가 있는 거지요. 하나님께서 목자를 양들에게 보내셨습니다. 보내주실 때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목자로 부르셨습니다.

우리 모두 목회 현장에서 은혜롭게, 훌륭하게, 능력 있게, 사역하시는 줄 압니다. 그런데 어제밤에 우리 교회 교인도 아닌 사람에게서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습니다. 첫 마디가 "목사님, 우리는 속았습니다. 담임목사님이 집에 오셔서 기도하면 우리는 300만원, 500만원을 응당 드려야 되는 줄 알았습니다." 전 별로 묻지도 않았습니다. 본인에 질문하고 대답하고 다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평생 쌓아 놓은 것 하나님이 불어 버리면 다 날아간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 주의 종을 위해서 뭐 바치라 써라." 이럽니다. 감언이설로 꼬드겨서 안수 한번 해주면 300만원, 500만원 그렇게 헌금이란 명목으로 주는 줄 알았데요. 그런데 그 분이 원로목사님이 되었어요. 원로목사님이 담임목사님을 노회에 고발했어요. 이런 것 때문에 교인들이 스트레스를 받고 알고 보니까 수십 년 동안 속았구나, 사기 당했구나. 하는 겁니다. 여러분, 그것이 밝혀지면 교인들이 어떻게 보상을 받습니까?

하나님은 율법을 주실 때에도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내가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신다고 하셨는데 중간에 있는 우리 목사들 때문에 잘못하면 양들이 축복이 아니라 상처를 받습니다. 저도 목사고 여러분도 목사입니다. ‘주여, 주여! 저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선지자 노릇도 하고 권능도 행하고 얼마나 훌륭하게 잘 했습니까? 할렐루야 주님!’ 그러나 주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너는 누구냐?’ 이 땅에서 아주 화려하게, 거창하게, 대단하게, 능력 있게 목사의 직임을 잘 감당했는데 마지막 주님 앞에 설 때에 주님께서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가 언제 너에게 그런 책임을 주고 그런 사명을 주고 내가 언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 쫓아내고 권능을 행할 일들을 사명을 권세를 준 적이 없다. 너 혼자 한 거야.’ 여러분 그렇게 되면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목자는 내 지식과 꾀로 목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식과 명철로 양들을 양육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다 그렇게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생활비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차 종류 신경 쓰지 마세요. 제일 좋은 차가 뭔지 아세요? 내 차입니다. 비교하지 마세요. 나와 저 사람이 다른 것처럼 저사람 목회와 내 목회가 달라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달란트 가지고 충성하면 주님 앞에 설 때에 상급 받습니다. 비교하지 마세요. 우리는 너무나 하나님이 주신 목회의 귀한 사명을 가지고 비즈니스 하는 것처럼 덧칠되어 있습니다. 붓글씨 쓸 때처럼 덧칠되어 있어요. 목자로서의 원형을 잃어버렸어요. 목회하는 교회의 원형을 잃어버렸어요. 어떻게 하면 저 교회를 흉내 내고 어떻게 하면 이 교회를 벤치마킹할까?

그런 이야기가 있잖아요. 말발굽, 말 발바닥에다가 U자 쇠를 못으로 박잖아요. 어떤 사람이 대장간에 하나를 가져와서 똑같은 것을 100개 만들어 달라고 했대요. 쉽지요. 약속한 날 찾으러 왔어요. "100개 여기 있습니다. 샘플이 있고 100개가 있습니다." 밖에 있는 사람이 확인해보더니 화를 내는 거예요. "왜 100개를 똑같이 만들어 달라고 했는데, 한 개만 똑같고 다 잘못 만들었나?"라고 하니까 사연을 들어보니 샘플로 가져온 것을 하나 놓고 디자인을 했습니다. 하나 만들었어요. 샘플은 놔두고 만든 것 가지고 또 디자인을 했어요. 또 만든 것으로 디자인을 했어요. 샘플과 정확하게 똑같은 것은 하나밖에 없는 거예요.

성경에 있는 교회가 그런 교회에요. 그런데 너무나 비즈니스 차원의 탁월한 영특한 두뇌를 가지고 있어서 성경의 원형인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교회를 이루려는 것보다, 세계적으로 어느 교회가 모델이 되어서 벤치마킹하다 보니까 교회가 성경에서 이탈했는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아닙니다. 주님의 피 값으로 사신 교회가 아니고 목회자의 능력과 재간으로 움직이는 그런 교회의 모습으로 점점 탈바꿈하고 있습니다. 주님 오실 때에 얼마나 더 심할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목사는 세상말로 전문직입니다. 의사는 전문직이어서 의학전문대가 있습니다. 판사, 변호사도 전문직이여서 법학전문대학원이 있습니다. 목사도 전문직이여서 신학대학원이 있습니다. 이 전문직을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가지고 잘 해야 하는데, 우리의 비극이 뭐냐면 전문직을 아마추어같이 목회를 하는 겁니다. 목사가 아마추어같이 되었어요. 교회를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교회와 세상의 회사, 조직과 별로 구분이 안 될 만큼 목사가 성경에 입각한 전문적인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 아마추어 교회로 전락되는 그런 슬픔이 있습니다.

우리는 저를 포함해서, 왜 저를 포함하냐면 우리가 설교할 때 허공을 치고 큰소리 하고 웅변도 하고 제스쳐도 쓰고 멋있게 해서 은혜를 받았다. 누가 은혜를 받아요? 혼자 쇼한 거예요. 자기가 설교했으면 제일 은혜 받는 사람이 누구에요? 지금 내가 큰 소리 치고 있는데 이 말에 자극을 받을 사람이 누구에요? 바로 저 전계헌이에요. 내가 주일에 설교하고 제일 은혜 받을 사람은 전계헌 목사에요. 내가 내 설교에 은혜 받지 못했는데 누가 은혜 받겠어요? 그 다음은 누구에요? 사모님이에요. 사모님이 은혜 받지 못하는 설교에 누가 은혜 받겠어요? 그 다음은 누구에요? 아들 딸들이에요. 내 자식도 설교에 은혜를 못 받는데 누가 은혜를 받아요? 이런 비극 속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겁니다. 교리적으로 성경적으로 많은 것을 표절해서 멋있게 꾸며서 외쳤다고 해서 은혜받지 않습니다. 그냥 혼자 소리 친 거예요. 정신 차려야 됩니다. 내가 하는 설교에 내가 은혜를 받아야 되요. 내가 하는 설교에 사모님이 은혜를 받아야 되요.

그리고 우리가 함정에 빠지는 것은 뻔한 설교를 하는 거예요. 뻔한 설교가 뭐에요? 여러분, 제가 35년 목회를 하고 있는데 얼마나 감탄하는지 몰라요. 어떻게 35년 동안 내 설교를 들어주는 저 불쌍한 사람들이 감탄스러워요. 그 말이 그 말일 것 아니에요. 교인들이 주보를 보면 예측을 합니다. 본문과 제목을 번지르르하게 해도 보면 다 알아요. '아, 목사님이 설교를 이렇게 하겠구나' 예상할 때 그것을 깨뜨려야 합니다. 그런 설교를 누가 듣겠어요? 그런 설교를 주일날 아침에 듣고, 주일날 밤에 듣고, 수요일 밤에 듣고, 새벽마다 듣겠냐고요? 입장을 바꿔봐야죠. 어느 목사님이 설교하는데 권사님이 조니까 일어나라고, 설교시간에 졸면 안 된다고 하니까 "목사님이 졸게 해놓고 왜 나에게 뭐라 그러냐고요" 했답니다.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제가 앞에 서서 여러분에게 하는 얘기가 아니라 저를 포함해서 같이 하는 얘기입니다. 방콕, 방에 콕 박혀서 책도 좀 읽고 성경도 연구하고, 교회에 콱 박혀서 목회하고 해야 하는데 우리는 너무 바빠요. 사탄의 시험이에요. 너무 바빠요. 바쁜 정도가 아니에요. 외국바람이 저 시골까지 불어가지고 1년에 외국을 몇 번 갔다 와야 목사 축에 드는 것으로 생각해요. 이런 사탄의 생각에 우리가 파묻히고 있어요. 목사라는 이름 외에 더 좋은 게 뭐가 있어요? 목사라는 직분 외에 목숨 걸 것이 뭐가 더 있어요? 연구해야죠. 세상의 이야기로 하나님 말씀 덧칠하지 말고 유치부 아이들이나 중등부 아이들이나, 청년들이나 장로님, 나이많은 사람들이나 교회 찾아오는 목적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오는 겁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에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윤리의 수준도 높여야 합니다. 옛날에는 제가 목사라고 하면 "아, 그러십니까?" 라고 했는데 이제는 목사나 중이나 신부나 다 똑같아요. 달리 보지 않습니다.

두 가지만 더 얘기하겠습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을 공부하러 왔는데 길에서 고등학교 은사님을 만났습니다. 국어선생님이셨습니다. 선생님이 가만히 서 계시다가 "너 계헌이 목사 되려고 그러냐?" "예" 한참을 계시다가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쳐다보시더니 "목사는 말로 먹고 살잖아?" 속으로 기분이 나빴습니다. '선생님이 되셔서 이렇게 무식하게 말씀하시나' "말로 먹고 살아야 하니까 너 책 많이 읽어라" '국어선생님이니까 하는 얘기겠지' 하고 부동자세로 그 말을 듣고 45도 인사를 하고는 헤어졌어요. 그게 평생 제 귀에 윙윙대고 울려요. "목사는 말로 먹고 살잖아. 말로 먹고 살려면 책을 많이 읽어라. 책 많이 읽은 목사는 설교 들을만한 게 있더만, 책 안 읽은 목사는 소리만 지르니 들을 것이 없더라"라는 말이 평생 울렸어요. 은사님은 역시 은사님이시구나 생각했어요.

제가 전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고등학교 2학년 때에 교복을 입고 뭣 하러 거기에 갔는지 모르겠어요. 김종필 공화당 총재가 전주 삼남극장에서 와서 시국 강연을 하는데, 지나가는 길도 아닌데 거길 왜 갔는지 모르겠어요. 김종필 씨가 무슨 얘기를 하냐면 "정치란 네모진 됫박 속에 들어있는 된장을 둥그런 바가지로 푸는 것이다"고 하더라고요.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정치 얘기하는데 무슨 된장을 얘기를 하나? 그런데 이상하게 그 얘기도 평생 제 머릿속에 남아 있어요. 정치는 됫박 속에 들어있는 된장을 둥그런 바가지로 푸는 것이다. 저 구석구석까지 다 해결하려 하지 말고 좀 흠을 남겨 놔라 그건가 봐요. 역시 어른들의 이야기는 평생 교훈이 되더라고요.

저와 여러분이 할 일이 뭐겠어요? 예수님 앞에 불려갈 때까지 목사님은 원로 목사님도 목사님이시잖아요. 죽어도 목사라는 이름이 남아요. 죽을 때까지가 아니라 죽어도 '그 목사님은 주님의 목사님이었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정말 선하신 목사님이셨다' 그런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도록 평생 사역하시고, 물론 사람 앞에서도 당연히 칭찬을 받겠지만 목자장 되시는 주님께서 ‘너는 정말 내 마음에 합한 나의 종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는 말을 들으려면 정말 사도들처럼, 신앙의 위대한 선배들처럼, 사도 바울처럼 나는 죽고 나의 가치관이 바뀌고 나의 모든 것이 달라지면 주님 앞에 아름답지 않을까 생각하며 우리 아름다운 담임 목사님들이 더 아름답게 귀하게 사역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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