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6/20) 한목협 제19회 전국수련회 기조발제

※ 이말테 박사(Dr. Malte Rhinow)는 독일 뮌헨대, 노이엔데텔사우 아우구스티나대(Ph.D)에서 공부했습니다. 독일 기독교 바이에른주 루터회 도나우뵈르트 루터교회 목사, 한신대 독문학과 객원교수 등을 역임하고 현재 루터대학교에서 실천신학 교수로 섬기고 있습니다. 주요 논저로 ‘승리 사상과 기독교 사상’ 등이 있습니다.

16세기에 서구교회에 문제점들이 많았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문제점들을 비판했고 교회의 개혁을 기대했다. 그러나 교황청과 주교들은 그들의 비판을 거부하여 종교개혁을 요구했던 사람들을 파문했다. 이렇게 종교개혁을 실천하는 새로운 교회들이 설립되었고 서구교회가 천주교회와 개신교회로 분단되었다. 천주교회가 나중에 개혁의 필요성을 인정하여 20세기 후반부터 개혁을 시작했다. 특별히 제2바티칸 공의회 때의 예배 개혁과 1999년의 “칭의론 공동선언문”이 중요했다.1) 이로써 1960년부터 종교개혁자들의 요구가 드디어 천주교회에서도 실천되기 시작했다. 아직 멀었지만 앞으로 천주교회와 개신교회가 필요한 개혁을 계속해서 진행함으로써 교회들이 서로 가까워지고 서로를 인정하여 다양성 내에서의 일치가 기대될 수도 있겠다.

종교개혁 시대에서부터 500년이 지난 오늘에 온 세계 개신교회들은 종교개혁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21세기의 개신교회가 개혁되어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에 대해 숙고된다.
요즈음 한국 개신교회가 위기에 처하고 있고 그 위기는 본질에 대한 위기로 판단하는 자들이 많다. 그래서 종교개혁을 통하여 한국 개신교회의 본질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배울만한 것이 있는가 그리고 이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관심이 매우 많음으로 한국 개신교회에서도 종교개혁의 의미가 논쟁되고 있다. 한목협 제19회 전국수련회도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발표자가 한국 개신교회의 개혁에 있어서 16세기의 유럽종교개혁으로부터 배울만한 것이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하여 먼저 (1.)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을 논술하려고 한다. 이것을 위하여 종교개혁의 시작과 루터의 사상의 요점들을 논의하려고 한다.

한국개신교회가 유럽보다 미국의 영향을 받았고 유럽 중에 루터보다 스위스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은 교회다. 두 번째로 (2.) 루터의 종교개혁이 기여할 만한 것이 무엇인지 논의하려고 한다. 그 목적을 위하여 먼저 16세기 초의 서구교회와 오늘의 한국개신교회 사이의 공통점들을 소개하고 루터의 입장에서 한국 개신교회의 개혁을 위한 제안을 제시하려고 한다.


1.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

1.1. 종교개혁의 시작

루터가 개혁자입니다. 그 원인은 이신칭의의 재발견이었다.2) 이것은 성경을 새롭게 이해하는 것이었다. 먼저 대학교 신학 전공 과정을 개혁하려고 했다. 중세교회의 스콜라 신학의 사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1516년부터 먼저 고대교회의 교부를 통하여 성서를 해석하기 시작했고 그 다음에 성서를 직접 해석하기를 요구하여 히브리어와 헬라어 교수 자리 설립하기를 요구했다.

두 번째 원했던 개혁은 면죄부 해소이었다. 면죄부가3) 무엇이었는가? 최후의 심판 때 죄가 많은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판결을 받아도 먼저 연옥으로 가서 천국에 가기 전에 죄값을 그곳에서 내어야 한다고 했다. 교회가 면죄부를 통해 죄값을 내어야 하는 연옥에서 당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고 약속했다. 돈의 양에 따라 사람들이 자기나 돌아가신 친척들의 고통의 시간을 줄일 수 있다고 했다.

천주교회가 면죄부를 왜 팔았는가?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의 알브레히트(Albrecht)라는 추기경 때문에 면죄부 판매가 시작되었다. 천주교회의 법에 따라 각 주교마다 교구 하나만 얻는 것이다.그러나 알브레이트 주교가 욕심이 많았다. 그는 교구 세 지역에서나 주교가 되고 싶어 했다. 이것이 불법이었지만 교황이 어마어마한 뇌물을 얻고 허락했다. 교황이 로마 시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의 신축을 위하여 그 돈을 필요로 해서 가능했던 부정이었다. 문제는 Albrecht가 뇌물을 줌으로 빚이 매우 많았던 것이었다. 그래서 알브레히트가 빚을 갚을 수 있도록 교황이 그에게 면죄부 판매를 허락했다. 면죄부 판매가 대 성공이었다. 면죄부를 팔았던 도미니칸 수도사인 테첼(Tetzel)의 설교 능력으로 사람들이 연옥을 너무 두려워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루터가 교수로서만이 아니라 사제로서도 일했다. 비텐베르크(Wittenberg)시 성도들에게 고해성사를 해주었다. 루터는 고해성사 때 신자들이 예수 안에서의 하나님의 죄 사해주심을 믿는 것이 아니라 구입한 면죄부를 신뢰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죄를 후회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루터가 경악했다.

루터가 면죄부에 대한 학문적인 논쟁을 원했다. 그래서 95 개 논제를 작성했다. 논쟁을 위한 초청장과 95개 논제를 그 지역의 신학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에게 보냈다. 그리고 1517년 10월 31일에 둘 다 교회 문에다가 부쳤을 가능성도 있다. 2006년 이전까지 루터 전문가들은, 부친 것이 사실이라면 비텐베르크 성(체)교회 정문에만 부친 것으로 생각했지만 2006년에 비텐베르크시의 여러 교회 문에다가 부쳤다는 보고가 발견되었다.4)

루터가 날짜를 잘 선택했다. 다음 날이 만성절이었다. 그 날 제후였던 현자 프리드리히(Friedrich)의 성유물 소장품들을 보러 비텐베르크시로 오는 사람들이 수 많았다. 그 순례 자들도 면죄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의 이니시어티브가 완패가 되었던 모양이었다. 논쟁에서 참여하러 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답장을 보낸 자도 한 명도 없었다. 보름 동안 조용했다. 그러나 그 때 세계적인 폭풍이 일어났다. 루터가 95개 논제를 몇 친구들에게도 보냈었는데 그들이 그 논제들을 온 독일에 퍼뜨렸다. 반응이 엄청났다. 루터가 하루 아침에 온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루터가 95개 논제를 통해 사람들의 신앙과 천주교회의 구원론에 결정적인 문제점을 잡았다. 95개 논제들이 문제를 터지게 했다.

천주교회 지도자들은 상황을 오랫동안 너무 과소 평가하여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게 루터 사건을 내적인 문제로 해결하라고 했다.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가 루터 사건을 해결하지 못해서 1518년 7월에 바티칸이 루터를 로마로 불렀다. 루터가 깜짝 놀랐다. 로마 시에 가면 이단자로 화형 당하게 될 것을 걱정했다. 현자 프리드리히가 바티칸이 루터의 심문을 독일에서 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10월에 Augsburg시에서 루터의 심문이 이루어졌다. 루터는 파문 당할 위험이 있었지만 바티칸의 대사 카예탄(Cajetan)의 95개 논제의 폐지 요구를 거부했다. 체포되기 전에 루터가 밤 중에 도망갔다.

요한네스 에크(Johannes Eck)가 루터에게 천주교회의 가장 강한 반대자였다. 그는 잉골슈타트(Ingolstadt) 대학 교수이었다.5) 1519년 여름에 라이프치히(Leipzig)시에서 둘 다 논쟁했다. 에크 교수가 루터를 공격함으로써 루터의 천주교회 비판이 더 강해졌다. 루터가 여러 토론 점들에서 존 위클리프(John Wicliff)와 얀 후스(Jan Hus)의 편에 서게 되었다. 둘 다 파문 당했기 때문에 루터가 살아 남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루터는 교회의 최고의 권위가 교황이나 공의회에 있지 않고 성경에 있다는 것을 주장했다. 정 반대로 천주교회는 교황에게 성서를 해석하는 권위가 있다고 했다.

루터의 로마를 공격하는 말이 날카로워졌다. 동시에 자기의 신학사상을 발전시켰다. 1520년에 가장 중요한 글들 중에 세 가지를 작성했다:

- 독일 그리스도교 귀족들에게 고함
- 교회의 바빌론 포로에 관하여
-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

독일 그리스도교 귀족들에게 고함에서 루터가 천주교회의 사제 중심과 위계질서를 반대했고 1년 만에 만인사제직을 말하기 시작했다.6) 모든 일반 교인들도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주장하여 천주교회의 위계질서를 공격했다. 성경 이해가 실제로 매우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루터가 성경해석을 위하여 해석학적 규칙을 세웠다. 이것은 바로 성경의 핵심은 칭의론과 3가지 솔라(sola)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sola gratia (은혜만으로), sola fide (믿음만으로), solus Christus (그리스도만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경을 통하여만 알 수 있다는 것은 4번째 솔라가 되었다: sola scriptura(성경만으로). 모든 신자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기 위하여 대중을 위한 라틴어 학교 설립을 제안했고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해야 한다는 생각도 했다.

1520년 6월에 교황이 루터를 이단자로 선언했고 60일 이내에 취소하지 않을 경우에 파문하는 것으로 협박했다. 루터가 교황의 교서를 받았을 때 이미 10월 말이었다. 이미 늦었다. 바티칸이 루터의 글들을 태운 소식 듣고 루터도 교황의 교서를 태웠다.

루터가 이단자로 심판되었고 파문 당했다. 이제 황제도 루터를 파문할 필요가 생겼다. 현자 프리드리히를 통해 파문되기 전에 루터가 자기 입장을 황제에게 알릴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보름스(Worms) 시에서 모이는 독일 제국 의회에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황제가 루터를 보름스시에서 체포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이단자가 공식적으로 말할 기회를 얻었다.

1521년 4월 18일에 루터가 공포에 질려서 황제 앞에서 유명한 선언을 했다. “내게 틀린 것을 보여 줄 수 있을 때까지 내가 성경에 매여 있다. 나의 양심에 따라 해야 한다. 하나님이 저를 도와 주소서! 아멘!”7) 루터가 외적인 권위를 거부하여 진리에 따르는 판단을 요구했다.

황제가 루터를 파문했고 루터가 보름스시에서 도망갔다. 루터의 생명이 극적으로 위험에 처해졌다. 누구든지 그를 죽여도 형벌을 받지 않게 되었다. 가는 도중에 숲 속에서 납치 되었다. 루터가 죽을 때가 왔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지만 루터를 살리려고 한 친구들이었다.

그들이 현자 프리드리히의 명령으로 루터를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으로 데리고 갔다. 거기에서 루터가 11주 만에 Erasmus의 헬라어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다. 그리고 수도자의 의복을 벗고 기사의 옷을 입었다. 그리고 머리를 더 이상 자르지 않았다. 얼마 후에 아무도 그가 루터라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명을 구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그를 보호하는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지역에서만 살았다.


1.2.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의 요점들

루터의 종교개혁의 정신이 이미 종교개혁의 시작에서 잘 나타난다. 출발점은 이신칭의의 재발견이었다. 인간이 구원을 선행하므로 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선물로 얻는 것이다. 의는 하니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신자에게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 외에 다른 조건 없이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루터가 칭의 혹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성서의 중심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설명했다.

루터가 하나님의 뜻이 더 분명하게 발견되고 이루어지기 위하여 개혁을 요구했다. Wittenberg 대학교의 개혁은 성공했지만 고해성사와 면죄부 비판으로 시작된 교회 개혁은 16세기에 실패했다. 그 개혁 요구를 거부하는 교회지도자들과의 힘겨루기에서 루터는 위계질서의 외적인 권력을 인정하지 않고 대신에 진리를 결정의 규칙으로 보았기 때문에 내용에 대한 논쟁을 요구했다. 루터는 최고의 권위가 교회 지도자들에게 있지 않고 대신에 성경에 있다고 했다. 성경 해석 권리가 주교들에게만 있는 것을 거부하여 모든 신자들이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만인사제직을 루터의 성경 해석이해의 결과로 볼 수 있다. 루터에 의하면 교회란 거룩한 위계질서가 아니라 대신에 서로를 섬기는 거룩한 교인들의 공동체이다. 교회가 평신도들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종교개혁은 일반 교인들의 존엄성의 회복을 통해 인권과 평등사회와 민주주의의 기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종교개혁이란 성서이해로부터 시작된 교회의 위계질서 비판과 교회개혁으로써 시작되었지만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서양 말로 “Reformation”이란을 “종교개혁”으로 번역한 것을 부정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대신에 교회와 사회를 변혁한 “큰 개혁” 혹은 “대개혁”이었다.


2. 루터의 종교개혁이 기여할 만한 것

2.1. 한국 개신교회와 500년 전의 천주교회 사이의 공통점들

발표자가 2012년에 용인시에 위치하고 있는 루터대학교가 주관했던 독일 종교개혁지 탐방을 안내했다. 탐방 여행이 끝나기 전에 평가회의에서 “오늘의 한국 개신교회와 루터 시대의 천주교회 사이에 공통점이 있는가” 라는 질문이 참여자들에게 제시되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여행 참여자들이 총 10 가지의 공통점들을 말했다. 이 10가지의 공통점들이 다음과 같았다:

2.1.1. 율법주의적 예배 이해
2.1.2. 하나님의 은혜나 복을 얻기 위해 재물로 하나님께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2.1.3. 선행을 통하여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2.1.4. 교회의 지옥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악용
2.1.5. 교회의 교권주의
2.1.6. 성직매매
2.1.7. 많은 목사들의 지나친 돈에 대한 관심과 잘못된 돈 사용
2.1.8. 많은 목사들이 교회를 개인적 소유로 착각하는 것
2.1.9. 많은 목사들의 도덕적, 성적 타락
2.1.10. 많은 목사들의 낮은 신학적 수준

참여자들이 루터 당시의 천주교회를 부정적으로만 보았던 결과이다. 그리고 오늘의 한국개신교회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았던 것이었다. 참여자들이 말하지 않았던 다른 공통점들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500년 전의 천주교회와 오늘의 한국 개신교회를 이렇게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것을 의심할 수도 있다. 좋은 공통점들도 매우 많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위의 공통점들에만 집중하여 한국 개신교회가 16세기 독일 종교개혁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서술하려고 한다. 16세기의 천주교회와 오늘의 한국개신교회의 공통점들에 대한 루터 입장이 무엇인가?


2.2. 루터의 종교개혁이 기여할 만한 것

2.2.1. 율법주의적 예배 이해 (ad 2.1.1.)

루터가 1520년에 출판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에서도 예배의 율법주의적 이해를 문제로 설명했다. 멜란히톤이 나중에 루터의 예배 이해를 성례전적 차원(sacramentum)과 제사적 차원(sacrificium)의 구별로 해석했다. 성례전적 차원은 하나님의 행위로서 우선적이고 제사적 차원은 인간의 응답으로서 이차적인 의미일 뿐이다. 루터가 1544년 10월 5일 토르가우(Torgau) 성교회 입당예배에서 설교했을 때 멜란히톤이 구별한 것과 동일한 말을 했다: “이 집에서 우리 주님은 거룩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 우리는 기도와 찬양으로 그에게 말하는 것 외에 다른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라고 했다. 이예배 정의를 토르가우의 문구(Torgauer Formel)라고 한다.

이 새로운 예배 이해에 따라 “예배” 용어를 위해 “고테스딘스트”(Gottesdienst)라는 새로운 용어도 등장했다. 고테스딘스트는 루터의 예배 사상을 완벽하게 표현해 주는 용어이다: “하나님의 섬김”이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문법적으로 2격이 2격 소유격의 의미(Genetivus subjectivus)가 있음으로 하나님의 우리를 위한 섬기심을 뜻하며, 동시에 4격 목적격의 의미(Genetivus objectivus)도 있다: 하나님을 섬김을 의미한다. 그래서 고테스딘스트라는 용어가 토르가우의 문구의 의미와 동일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응답한다. 영어가 이와 비슷하다: 서비스(Service)란 하나님의 섬기심과 하나님을 섬김을 의미한다. 종교개혁의 예배 사상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예배의 중심이 된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개신교회의 예배에 결정적이다. 예배의 우선적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사람은 응답만 한다.

한국어 용어를 만들 때 미국 선교사들이 고테스딘스트 혹은 서비스라는 용어를 한국어로 번역하지 않고 대신에 종교개혁의 예배이해와 어울리지 않는 워십(Worship)이라는 말을 선택하여 예배라는 말로 번역했다. 예(禮)와 배(拜)라는 한문이 둘 다 인간의 행동을 말한다. 그래서 제사적 차원만 표현된다. 더 심각한 말은 ‘예배 드린다’라고 하는 표현이다. 여기에서 세 번이나 인간의 행동만 표현된다. ‘예배’ 혹은 ‘예배 드리다’라는 표현은 잘못된 토착화의 예이다. 이 한국어 용어들을 볼 때 한국 개신교회가 율법주의적 예배 이해에 놓여 있는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한국 개신교회가 예배 이해에 있어서 종교개혁을 필요로 할 것이다. 2012년 독일 종교개혁지 탐방 참여자들이 그 문제를 잘 발견했다.


2.2.2. 하나님의 은혜나 복을 얻기 위해 재물로 하나님께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는 오류 (ad 2.1.2.)

한국개신교인들이 헌금을 많이 낸다. 하나님의 복을 얻거나 복을 얻으려고 헌금을 드리는 교인들이 많을 것이다. 더 많은 헌금을 얻기 위하여 헌금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사상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고 오해를 사용하는 교회들도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는 헌금이 드리는 자에게 살아 있는 동안에 이미 보람이 된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루터 시대에는 그 기대가 사후의 삶을 향한 것이었다. 최후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교인들이 500년 전에 수많았다. 그 때 교인들이 연옥을 두려워했다. 루터 시대의 천주교회는 교인들의 연옥에 대한 두려움을 돈을 모으기 위해 악용했다. 돈을 내는 사람들에게 죄 값의 면죄를 약속했다. 교인들의 입장에서 면죄부가 비쌌지만 할만 했다. 신자들이 안심했고 교회도 좋아했다. 양쪽에게 다 유익한 비즈니스이었다. 한국 개신교회가 약속하는 기복과 같았다. 그 차이는 다만 그 때의 희망은 사후 세계를 향한 것이었고 오늘 한국 개신교회에서는 현재의 더 좋은 삶을 위한 것이다.

루터가 면죄부 제도를 95개 논제를 통해 공격했다. 이러므로 종교개혁은 올바르지 않은 교회의 돈 문제 비판으로 시작되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교인들에게 잘못된 안전을 주고, 운명을 돈으로 변경시킬 수 있다고 말하는 약속을 비판함으로 시작되었다.

한국 개신교회에서는 돈 뿐만 아니라 기도를 통하여서도 운명을 변경시키려 하는 시도도 있다. 기도를 하나님께 영향을 줄 수 있는 도구로 이해하는 개신교인들이 많을 것이다. 기도를 이렇게 가르치는 목사들도 있다. 구체적으로 기도하라, 기도에서 빌었던 것을 얻을 때까지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고 하는 목사들이 있다. 이러한 염치없이 하나님을 사용하려는 교만함은 루터 당시의 천주교인들조차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한국 개신교회의 개혁이 루터 당시 천주교회보다 더 시급하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2.2.3. 선행을 통하여 천국에 갈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는 오류 (ad 2.1.3.)

하나님께 영향을 주고 자기의 미래를 더 좋게 만들려고 하는 방법들 중에 선행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시도도 있다. 루터도 이것을 시도해보았다. 루터가 검은 수도원 입회와 열심히 기도하는 일을 통하여 천국 입장권을 얻을 수 있는 줄 알았다. 수도자로서 그의 위기는 먼저 기도를 충분히 하지 못하는 것과 죄를 충분히 발견하고 고백했는지에 대한 것뿐이었다. 그의 위기는 자기 자신을 솔직히 알았고 자신을 속이지 못했던 것에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깊숙하게 죄에 빠져 있는지를 알았다. 그러나 천국 입장권을 자기 노력으로 얻으려 하는 시도가 교만한 것임을 발견할 때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루터처럼 천국 입장권을 얻으려고 하는 한국 교인들이 있다. 그리고 사는 동안에 이미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다. 열심히 공동예배에 참여하고, 십일조를 내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전도하는 사람이 모범적인 교인이라고 하는 것에 동의하기가 어렵다. 그 이유는 우선 목사에게 보람이 되는 것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종교적 행동만이 모범적인 교인의 특징이라고 하는데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은 평소에도 용감하고, 솔직하고, 남을 도와주고, 약한 자를 변호하고 보호하고 책임 있게 행동하도록 강한 자의 양심에 호소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모범적으로 사는 사람이라고도 해야 할 것이다. 루터는 온 삶을 예배로 이해해야 함을 강조했다. 여기에는 직장생활도 포함된다. 개인 생활도 포함된다. 요즈음 그 문제를 인식하는 한국교인들이 많아지고 있지만 한국 개신교회에 아직 그 길이 멀다.


2.2.4. 교회의 지옥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악용 (ad 2.1.4.)

위에서 이미 루터 시대 사람들과 달리 한국 개신교인들은 헌금을 많이 내면서 현재 사는 동안 보람을 얻기 원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지옥을 두려워하는 것은 한국 개신교회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선교할 때 그렇다. 명동에서 전도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현수막을 보면 거기에 이렇게 쓰여 있다: “예수 믿는 자 천국; 불신자 지옥”. 인간의 사망과 사후에 대한 두려움을 교회가 악용하는 일이 많다. 500년 전에도 그랬고 오늘도 그러하다. 세례 요한의 심판의 경고와 같은 전파와, 예수의 하나님께로 초청하는 전파 사이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던 한국 개신교인들이 많은 모양이다. 어쨌든 종교개혁지 탐방 참여자들이 한국 개신교회가 500년 전의 서구교회와 비슷하다고 하면 이 분야에서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2.2.5. 교회의 교권주의 (ad 2.1.5.)

고대시대부터 교권주의가 발달되었다. 그 이유들은 다양했다. 그 중에 천주교회가 공식교회만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고 한 교리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원죄만 없앴고 각 사람의 현재의 죄를 없애지 않았다는 교리도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현재의 죄를 사함 받기 위하여 성찬식 때의 예수의 희생의 반복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 희생 제물의 반복적인 바침을 위하여 제사장이 필요했다. 미사의 진행을 위하여 중세에 회중의 참여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사제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전통이 생겼다. 회중의 중요성의 약화로 인해 제단과 회중 간의 사이가 계속해서 점점 더 멀어졌다.

종교개혁자들은 사제와 평신도의 절대적 구별을 반대했다. 모든 신자들 혹은 모든 세례교인들의 만인제사장직을 가르쳤다. 루터에 의하면 성경말씀이 분명하고 모두에게 이해가 쉽다. 그래서 평신도들이 없으며 성경을 해석하기 위하여 사제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루터에 의하면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모든 죄를 사했다. 원죄뿐만 아니라 모든 나중에 생길 현재의 죄들도 포함된다. 그래서 개신교회에서 미사에서의 예수님의 희생제물의 반복이 필요 없었다. 그리고 희생제물을 드리는 제사장들도 필요 없었다. 또한 개신교인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직접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고 신자에게 중매역할 하는 성인과 성모와 같은 중보자들이 필요하지 않다. 개신교회의 목사들은 다른 교인들보다 더 높은 자들이 아니라 한 지역교회에서 목회하기 위하여 사명을 받은 교인들이다. 공식 설교와 성례전 인도 때문에 교인들의 상대방이어도 교인에 속한다.

한국개신교회에서 이러한 종교개혁의 특징이 거의 안 느껴진다. 위계질서적 사상을 강조하는 유교적 사회에서 예를 들어서 자기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온공동예배 동안 중앙 위치에 있는 설교대에 서 있는 장로교 목사들이 많다. 찬송이나 영광송 때도 비켜서지 않는다. 목사가 비키면 예배가 멈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개혁교회의 교리에 의하면 교회 공동체가 예배한다. 목사가 교회 공동체를 위하여 예배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설교 때 청중이 동의하면 이것을 아멘으로 표현한다. 만약에 설교가 진리와 달랐다고 생각하면 주로 친절하게 침묵으로 이의를 표현하지만 중요할 때 아니라고 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자신의 설교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신하는 목사들이 많다. 그들이 스스로 아멘이라고도 하고 교인의 이의 표현을 허락하지 않는다. 목사 중심이 한국 개신교회에서 심각하다. 함께 찬송이나 신앙고백을 할 때 목사의 목소리가 크게 들리는 경우가 매우 많다. 그리고 목사들이 대부분 회중 가운데 앉아 있지 않고 제단이 있는 높은 좌석에 앉아 있다.

안수를 높은 자리를 주는 특권을 받는 것으로 오해하는 목사들도 있다. 교회개혁실천연대의 통계에 의하면 권위적 목회스타일이 교회 안에서 생겨나는 갈등들 중에 3번째로 큰 원인이다. 그래서 한국 개신교회의 교권주의가 종교개혁시대의 서구교회와 비슷하다고 하는 여행 참여자들의 의견이 사실일 것이다.


2.2.6. 성직매매 (ad 2.1.6.)

종교개혁의 시발점은 면죄부이었다. 루터는 이 면죄부를 반대하기 위하여 95개 논제를 작성했다. 종교개혁이 천주교회의 성직매매와 비리 사건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성직매매는 신약시대부터 금지된 범죄이다.

서기 313년과 381년 이후에 성직매매가 교회 안에서 문제가 되었다. 451년에 열렸던 칼케돈(Chalkedon) 공의회에서 돈을 받고 사제를 서품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이 금지법이 중세에 여러 차례 확인되었지만성직매매사건들이지속적으로생겨났다. 돈으로 자기 성직을 받은 신부들과 주교들과 교황들이 많았다. 루터가 이러한 뇌물사건인 성직매매를 공격적으로 비판했다.

한국 개신교회에서 뇌물을 주고 고위 성직을 얻었던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큰 교단에서 총회장 혹은 감독회장이 되고 싶으면 수 억 원을 써야 한다고 한다. 장로가 되고 싶을 때에도 교회에 헌금을 많이 내어야 하는 것도 문제이다.


2.2.7. 목사들의 지나친 돈에 대한 관심과 잘못된 돈 사용 (ad 2.1.7.)

루터시대와 마찬가지로 돈을 너무 좋아하는 목사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루터가 이미 1520년에 천주교회 사제들의 성직록과 이자 수익에 대한 지나친 욕심을 비판했다. 루터 시대에 영적인 동기나 목적 대신에 재정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보람을 얻기 위하여 성직을 택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자기 수입을 높이기 위하여 농민들에게 지나친 압박까지 하는 사제들도 있었다. 그래서 사제들이 서민들을 희생시키며 살았다는 것이 과언이 아니다.

한국 개신교회의 현 상황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교회의 크기와 교회 재정의 양적 현황에 대하여 지나친 관심이 있는 목사들이 많을 것이다. 1990년대에 발표자가 당시 한국 개신교회의 영향력 있던 대표자와 대화했던 기억이 난다. 그 사람이 전에 목회했던 교회에 대하여 이야기 해주었다. 필자가 그 교회를 알았기 때문에 교회가 크다는 말을 했다. 그 목사가 맞다고 대답하며 12억이라고 했다. 교인수를 말하지 않고 일 년의 총수입을 말했던 것이었다. 그 목사가 사람들보다 재정을 생각했다. 이것이 교회를 성직록으로 본 루터 시대의 천주교 사제들과 비슷하다.

교회개혁실천연대의 통계에 의하면 담임 목사들의 잘못된 돈 사용이 교회 안에서 생긴 갈등들 중에 가장 잦은 원인이다. 목사들의 돈 욕심이 가끔 무섭다. 목사 한 명이 아파트 8채나 소유한다는 기사도 있었다. 그리고 목사가 왜 큰 차를 타는가?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 한 루터가 지원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 도와주지 않는 것을 도둑질과 십 계명의 위반으로 해석했다.여러 참여자들이 한국 개신교회가 재정적인 상황에 있어서 종교개혁시대의 천주교회와 비슷하다고 하는 것에 근거가 있다.


2.2.8. 목사들이 교회를 개인적 소유로 착각하는 것 (ad 2.1.8.)

한국에서 자기 돈으로 교회를 개척한 목사들이 많다. 교인들의 헌금으로 구입한 부동산을 목사의 개인 소유로 이해하는 목사들이 많은 것을 쉽게 확인 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담임목사가 아들에게 교회를 유산으로 맡겨 주는 습관을 언급할 수 있다.

교회를 개인 소유로 보는 이 문제에 있어서도 한국 개신교회가 500년 전의 천주교회와 비슷하다.

독일 식으로 표현해보면, 교회와 돈이란 뜨거운 감자이다. 즉 까다로운 문제라는 의미이다. 교회개혁실천연대의 통계에 의하면 담임목사 임명과 세습 문제가 모든 교회공동체 내의 갈등들의 원인 중에 두 번째로 잦은 것이다.


2.2.9. 목사들의 도덕적, 성적 타락 (ad 2.1.9.)

천주교회의 도덕적 상황이 루터 시대에 좋지 않았다. 교황까지 루터가 비판했다: “교황의 변덕과 거짓을 통해 로마시가 말할 수 없을 만큼 나쁜 영향을 받는다. 적그리스도도 이 보다 더 모독적으로 지배하지 못할 만큼 장사와 무역과 소동과 거짓과 속임과 강탈과 도둑질과 호화와 간음과 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남색과 하나님을 멸시하는 다양한 것들로 가득 찼다.”

한국 개신교회에 착한 교인들과 모범적인 목사들이 많지만 드러나는 추문들이 놀라울 정도로 많다. 성적 추행에서부터 간음과 사기와 탈세와 횡령까지 하는 목사들이 있다. 교회개혁실천연대의 통계에 의하면 목사의 성적 문제가 교회 공동체 안의 문제 원인 중에 4번째로 찾은 것이다.


2.2.10. 많은 목사들의 낮은 신학적 수준 (ad 2.1.10.)

이 부분이 제가 외국사람으로서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목사들의 낮은 신학적 수준이 특별히 심각한 문제일 것이다.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도 돈만 있으면 다닐 수 있는 대학교를 찾을 수 있다. 대학교 교수들이 대부분 F점수를 주지 않아서 최하 수준의 학생들까지도 목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대학원에서만 신학을 전공해도 목사가 될 수 있다. 그래서 한국 개신교회에 수많은 목사들이 3년 동안만 신학을 공부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한국 개신교회의 신학적 수준이 낮다. 이러한 교회가 흥할 수 없다.

목사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개신교회가 세례를 아무에게나 쉽사리 주거나 세례 예비자들에게 충분한 교육을 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개신교의 양적 성장주의가 세례의 ‘대 바겐세일’을 만들었다. 잘못된 동기를 바탕으로 충분한 준비 없이 사람들이 교인이 될 수도 있고 목사도 될 수 있다.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만족할 만한 교회를 찾기가 쉽지 않다.

낮은 교육 수준과 잘못된 동기로 성직자가 된 사람들이 오늘의 한국 개신교회뿐만 아니라 루터시대에도 천주교회의 문제이었다. 루터가 신부가 될 때 신학전공 한 학기도 안 했었다. 수많은 천주교 사제들이 신학은 물론 성서도 이해하지 못했다. 루터는 이것을 꼭 변경시키려고 했다. 루터는 수준 높은 국제적인 교회를 원했기 때문에 라틴어를 포기하지 않았다. 루터가 목사 후보생들의 수준과 전체적 교육 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많은 라틴어학교 설립을 제안했다. 그리고 가정에서의 교육을 위하여 교리문답서를 작성했다. 루터가 수준이 있는 교회를 원했다. 루터의 꿈이 이루어졌다. 루터교 목사 가족들에서부터 나온 위대한 학자들과 문화인들이 수많다. 그리고 독일에서 루터교인들의 교육수준이 항상 천주교인들의 수준보다 훨씬 더 높았다.


2.2.11. 기타 공통점들

화려한 교회건물들을 건축하는 것도 공통점이다. 대표적인 화려하고 큰 교회건물(들)이 교단마다 필요할 것이다. 성공회도 덕수궁 옆에 있는 대성당 덕분에 에큐메니컬(ecumenical) 예배와 행사를 할 수 있다. 그러나 건축과 땅 구입을 위하여 어마어마한 돈을 쓰는 개신 교회가 요즈음 너무 많다. 유럽의 천주교회가 대형교회 건물을 짓기 원했다. 자기 권력을 보여주려는 목적도 있었다. 이러한 목적은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과 어울리지 않는다.

하이델베르크 공개 학술 논쟁에서 루터가 1518년 4월 26일에 매우 일찍 영광의 신학을 비판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들을 창조된 것들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하는 신학자들은 신학자들이 아니다.” 라고 했다. 올바른 신학은 십자가의 신학이라고 했다: “하나님을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라고 했다. 한국 개신교회에서 기복사상을 따랐던 목사들이 수많았다. 기복사상은 번영의 신학(Prosperity Gospel)의 한 형태이고 현재의 영광의 신학의 대표적 사상이다. 루터가 영광의 신학을 반대하고 거부했다. 다행스럽게도 최근에 기복사상을 벗어나는 한국 목사들과 교회들이 많다.

영적 그리고 정치적 권력을 둘 다 원하는 것과 교인들이 조건 없이 성직자들의 말을 순종하기를 원하는 태도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기를 원하는 입장도 루터가 제안한 종교개혁의 정체성과 어울리지 않는다.

한국 개신교회가 500년 전에 천주교회처럼 개혁을 필요로 하는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어떠한 개혁을 필요로 하는 것인가이다.


2.3. 한국 개신교회를 위한 개혁 제안들

2.3.1. 종교개혁의 모범에 따라하는 것이나 종교개혁을 upgrade하는 것인가?

한국 개신교회가 루터시대의 천주교회와 비슷한 점이 많다고 하는 말이 매우 놀랍다. 개신교회 내에 종교개혁에 반대되는 것들이 도대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개신교회의 정체성을 만드는 종교개혁의 특징들이 한국 개신교회에서 부분적으로 실천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라면 이러한 교회를 개신교회라고 할 수 있겠는가?

루터의 신학 사상에 의하면 오늘의 한국 개신교회가 16세기 천주교회처럼 개혁을 필요로 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 필요성에 대하여 개신교 신학자들과 목사들과 다른 신자들의 대다수가 동의할 것이다. 문제는 어떠한 개혁을 필요로 하는 것인가이다. 한국 개신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500년 전에 유럽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인가 아니면 다른 개혁이 필요한가? 한국 개신교회에게 제2의 종교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자들이 대다수이다. 두 번째 종교개혁이라고 말하는 것은 개신교회가 첫 종교개혁의 결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 개신교회가 루터 시대의 천주교회와 비슷하다면 둘째 종교개혁이 아니라 첫째 종교개혁이 필요하지 않은가 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반면에 오늘의 한국교회와 사회의 상황이 16세기의 독일이나 유럽과 다르기 때문에 그냥 16세기의 종교개혁에 따라 하는 것이 맞는지도 의심할만한 것이다.

발표자의 생각으로 오늘의 한국개신교회의 위기가 이미지 위기로도 볼 수 있지만주로 교회의 본질의 상실 위기일 것이다. 위에 언급한 문제점들이 따로 보고 하나 식 해결해야 했던 문제들이기 보다 다 한 가지의 문제를 가리키는 문제들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하나 밖에 없는 문제는 교회의 본질 문제이었다고 주장한다. 이 판단이 맞는다면 한국 개신교회의 위기도 교회 본질 위기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종교개혁으로부터 배울만한 것이 많을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이 교회가 본질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루터와 다른 종교개혁자들은 중세교회를 비판하고 고대교회 혹은 초기교회의 전통을 이어가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그들이 개신교회를 천주교회 외의 또 다른 교회로 이해하지 않고 올바른 서구교회 혹은 본질적 교회로 생각했다. 그래서 종교개혁이란 교회가 본질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정말 본질이 회복되었는지에 대하여 동양 개신교회와 서구교회가 논쟁해야 할 것이다. 성서만인지 text와 context인지 그리고 그리스도 중심인지 아니면 삼위일체 중심인지 같은 질문들이 토론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논쟁을 하면서 종교개혁으로부터 배울만한 것들이 본질적 위기에 빠진 한국 개신교회에 많을 것이다. 본질에 대한 논쟁을 통하여 교회의 본질을 되찾은 후에 한국다운 현재다운 교회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2.3.2. 목회자 교육 개혁

루터는 수준 높은 국제적인 교회를 원했기 때문에 라틴어를 포기하지 않았다. 루터가 목사 후보생들의 수준과 전체적 교육 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많은 라틴어학교 설립을 제안했다. 루터가 고전어를 공부하여 성서를 원어로 읽을 수 있어야 설교자들이 해석적 실수를 피할 수 있다고 했다. 설교 준비를 모국어 번역 바탕으로 하면 실수를 피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정에서의 교육을 위하여 교리문답서를 작성했다. 루터가 수준이 있는 교인들도 원했다. 루터의 꿈이 이루어졌다. 루터교 목사 가족들에서부터 나온 위대한 학자들과 문화인들이 수많다. 그리고 독일에서 루터교인들의 교육수준이 항상 천주교인들의 수준보다 훨씬 더 높았다.

한국 개신교회의 목사 후보생들을 위한 교육을 개혁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신학과와 신대원들이 신학수준을 높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총회가 안수 조건으로 5년이나 6년의 신학 전공을 결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늦게 목회자의 사명을 받는 분들을 위하여 예외를 만들 수 있다. 5년이나 6년의 신학전공 과정의 조건을 통하여서만이 학부에서 가르쳤던 것을 대학원에서 또 다시 가르치는 것을 피할 수 있다. 대학교들이 국가의 법에 따라 해야 하기 때문에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 그러나 교회들은 교회법에 따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총회만 이러한 안수 조건 변경을 결정할 수 있다. 총회들이 결정하면 대학교들도 새로운 커리큘럼(curriculum)을 만들 수 있다. 이러한 개혁을 통하여 학부에서 언어와 학문적 방법론 중심으로 가르치고 신대원에서는 신학과 실천에 집중할 수 있다. 이렇게 수준이 많이 좋아질 것이다. 항상 예외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말할 때 한국 개신교회의 수준이 너무 낮은 것은 분명하다. 2012년 여행자들이 이 문제를 잘 발견했다.


2.3.3. 교회의 사회적 역할의 회복을 위한 기독교윤리

교회가 자신으로 만족하면 본질적 문제이다.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 초기에 조선 개신교회가 사회를 변혁했고 이로써 인정을 받았다. 1945년부터 북한에서의 교회 압박과 6·25전쟁을 인하여 교회의 대다수가 사회주의를 반대하여 정치적으로 보수화되었다. 1960년대부터 사회를 제일 많이 변경시키는 자가 정부가 되었다. 박 정권의 산업화 정책이 혁명한 사회변화를 의미했다. 도시 교회들이 농사를 포기하여 근로자가 된 새 시민들에게 고향이 되었다. 이렇게 교회가 문화적으로 전통의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도 우파를 좋아하게 되었다. 북한을 떠났던 교인들이 교회를 압박하는 북한 정부에 대한 반공 정치를 찬송했고 급히 성장하는 도시교회 목회자들의 일부가 교회성장의 근원인 박 대통령을 좋아하게 되었다.

동시에 일제시대 이후에 필요한 한국문화의 회복운동이 교회에도 영향을 주었다. 교회가 유교와 무속화되었다. 산업화를 통하여 교회가 세속화되었고 자본주의와 너무 가까워졌다. 특별히 성장하는 대형교회들은 기복사상을 전파했다. 이렇게 교회가 세상과 비슷해졌다. 대학교에서 기독교윤리를 동성애, 이혼, 테러, 등 같은 문제 중심으로 가르치기 때문에 기독교윤리를 문제로 보는 목사들이 많을 것이다. 교회에서 기독교윤리 대신에 유교 질서를 가르친다. 이러한 유교 질서가 서로를 알면 잘 이루어지고 있지만 대도시의 익명사회에서 실천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럼으로 한국 사회가 무법사회로 빠지기 시작했다. 지금 벌써 유교질서가 희생자를 만든다. 세월호에서 익사한 젊은이들이 순정의 교육의 희생자로 보아야 할 것이다. 교회가 유교질서 대신에 기독교 윤리를 가르치는 것을 제안한다. 유교질서에서처럼 행동이 밖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행동을 스스로 결정하는 윤리이다. 익명사회에서도 잘 이루어지는 윤리이다.

오늘의 한국개신교회가 사회의 인정을 다시 받고 싶어하면 사회를 섬기고 변혁해야 할 것이다. 한국 개신교회가 사회를 기도와 사회복지 등으로 섬기지만 이 기여가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한다. 한국 개신교회의 사회를 변혁하는 역할이 회복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가 기독교윤리를 가르치므로 다시 중요한 사회 기여를 하게 되고 앞으로 다시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주)

1) 제2바티칸 공의회(1962-1965)의 예배개혁에 대하여 1963년 12월 4월에 결정된 Sacrosanctum Concilium 비교; 오리지날 라틴어 본문: http://www.vatican.va/archive/hist_councils/ii_vatican_council/documents/vat-ii_const_19631204_sacrosanctum-concilium_lt.html 비교; 한국어 번역: http://www.cbck.or.kr/book/book_list.asp?p_code=k5140&seq=401964&page=1&key=&kword=# 19번 비교;칭의론 공동선언문이 루터교와 천주교회가 1999년 10월 31일에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시에서 교황청의 그리스도인일치촉진평의회 회장인 Edward Idris Cassidy 주기경과 루터교 세계연맹 회장인 Chr. Krause 주교가 서명하고 선언되었다.2006년에 감리교회도 결의했다; 독일어 본문: http://www.theology.de/religionen/oekumene/evangelischerkatholischerdialog/gemeinsameerklaerungzurrechtfertigungslehre.php 비교.

2) Bernhard Lohse, Luthers Theologie in ihrer historischen Entwicklung und in ihrem systematischen Zusammenhang, Goe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95, 99 비교; 발생 연대 기입에 대해BernhardLohse (editor), Der Durchbruch der reformatorischen Erkenntnis bei Luther. Neuere Untersuchungen, Wiesbaden: Steiner 1988 비교.

3) 면죄부나 면형부 혹은 면벌부로 칭하는 것이 올바른지 논쟁의 대상이다(예를 들어서 한국 루터학회에서 2015년 9월 11일 제26차 월례연구모임에서 논쟁되었다); 루터가 95개 논제에서 죄 사함(조항 1-4)과 죄를 인한 형의 면제(조항 5-13)를 둘 다 논쟁했기 때문에 부정확하다.

4) 루터의 비서인 Georg Roerer씨가 1544년경에 작성한 보고를 Martin Treu 박사가 2006년에 발견했다 (Ott, Joachim/ Treu, Martin (발인), Luthers Thesenanschlag – Faktum oder Fiktion, Leipzig (Schriften der Stiftung Luthergedenkstaetten in Sachsen-Anhalt, Bd. 9) 2008; Martin Treu, An die Tueren der Wittenberger Kirchen (http://www.luther2017.de/252.htm)): “„Anno do[m]ini 1517 in profesto o[mn]i[u]m Sanctoru[m], p (...) Wite[m]berge in valuis temploru[m] propositae sunt (…) de Indulgentiis, a D[octore] Mart[ino] Luth[ero].“ (Volker Leppin, Timothy J. Wengert. (2015). Sources for and against the Posting of the Ninety-Five Theses. Lutheran Quarterly Volume XXIX, 393 각주 31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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