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영 목사의 사진에세이/다시, 개혁으로] (7)행복하게 그리고 안전하게

사진❶ 높은 산처럼, 높은 목표만 잡아야 하는가?

“저 높이 솟은 산이 되기보다는 여기 오름직한 동산이 되길…삶의 한 절이라도 그 분을 닮기 원하네.”

한웅재 목사님의 ‘소원’이라는 곡에 담긴 가사입니다. 아마 이 곡은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오랫동안 사랑을 받고 있는 찬양 중에 하나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물론 아름다운 멜로디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아름다운 멜로디에 담긴 가사가 우리의 마음에 긴 여운을 남기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그 가사가 꽤 부정적이고 소극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산이 되려면 높은 산이 되어야지, 왜 동네 작은 동산 정도가 되려고 하느냐?” 또는 “이왕 예수님을 닮으려면 온전히 닮으려고 해야지, 그렇게 목표를 낮게 잡아서야 되겠나?”라고 반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꼭 그렇게 높은 목표만 잡아야 하겠습니까?

 

사진❷ 우리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하자!

저의 손주가 자전거를 처음 배울 때가 기억납니다. 손주 녀석이 무슨 수로 처음부터 혼자 자전거를 쌩쌩 달릴 수 있겠습니까? 다만 아빠가 뒤에서 밀어주기 때문에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아빠는 보통 자기 어린 아들이 원하는 대로 밀어 줍니다. 그러나 때론 아들이 원하지 않은 쪽으로 밀어 주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아들에게 자전거를 가르쳐주는 아빠에게 최소한 두 가지 원칙과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행복하게’, 둘째 ‘안전하게’입니다. 즉 자기 아이가 행복하고 재미있게 자전거를 타게 하는 동시에,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예정된 목적지에 도달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우리 스스로 모든 일을 다 하는 듯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방법대로, 우리가 목표한 속도대로, 우리가 원하는 기간 내에 그 일을 해 나갑니다. 그리고 그 과정과 결과를 보면서 우리는 스스로 잘 하고 있고, 또 잘 해냈다고 자평하기도 합니다. 교회가 성장하는 것도, 성도들이 잘 모이는 것도, 출석률이 점점 좋아지는 것도, 성도들이 하나 되어 함께 전진하는 것도, 심지어 성도들이 선포한 말씀에 은혜를 받는 것도 자신이 노력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사진❸ 자신을 허물고, 낮아지기 위해 결단하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뒤에서, 또는 앞에서 직접 우리를 붙잡고 운전해 주신 결과일 뿐입니다. 그 분께서 최소한 두 가지 원칙과 목표를 지키시면서 말입니다. 첫째 ‘행복하게’, 둘째 ‘안전하게’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이 두 가지 원칙을 다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때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행복이 위험한 자기중심의 행복이 아니라, 안전한 하나님 중심의 행복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도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나뭇가지에서 노닥거리는 새가 아니라, 공중 나는 새처럼 실제 행함으로 행복을 경험해야 합니다. 동시에 안전하게 가기 위해서 자신이 감당하는 사역의 핸들을 철저히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금 적지 않은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점점 양극단에 빠져들어 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한편에서는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실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또 한 편에서는 내 자신이 다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위험한 행복’ 혹은 ‘불행한 안전’ 속에서 총회 및 교회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다 하나님과 교단을 위한 일이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사역한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가 높은 산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만이 높은 산이심을 더 늦기 전에 결단 속에 행동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완벽한 존재요, 최종 판단자가 아님을 고백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완벽하신 최종 판단자이십니다.

우리는 그저 오름직한 동산이 되고, 삶의 한 절이라도 예수님을 닮아가기를 소망하며 주님사역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드디어 ‘나’만큼 ‘너’와 ‘우리’도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또한 총회 및 교회 사역을 할 때 일만큼 관계를 소중히 여기며, 늦더라도 함께 가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약할 때 강함 주시는’ 하나님이 원리요, 예수님의 방법을 따라하는 개혁주의자의 모습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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