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으면 죽으리라' 안이숙 이야기

믿는 자에게는 다른 사람이 못보고 못 느끼는 신령한 세계를 보는 영안靈眼이 있다.
8‧15 조국광복으로 출옥한 옥중성도였던 안이숙에게 이런 신령한 눈이 있었던 것 같다.

1946년. 출옥 이듬해 어느 봄날이었다.
6년 만에 다시 맞는 봄이건만 안이숙의 심령은 무엇엔가 짓눌리듯 답답했다. “이것이 웬일일까요? 대자연은 수심에 잠기고, 벚꽃은 웃는 게 아니라 울고들 있는 것 같으니 말입니다... 대자연은 우리 앞에 다시 큰 고난이 올 것을 알아서 우리에게 그 무엇을 알려주느라고, 또 우리와 다시 이별할 것을 슬피 울어 보이는 것일까?“ 하였다. 계절은 봄이로되 봄이 아닌 내 심령이었던 것이다.

1945년 8월18일, 일제에 의해 처형되었을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에 의해 8월 17일, 그 하루 전날 평양형무소를 나오지 않았던가. 믿음의 승리요 교회의 승리요 기적이었다. 환희와 감격에 들떠 있던 분위기는 잠간이고 다시 캄캄한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평양성은 불안과 공포의 도가니였다. 새벽이나 밤중에 총소리가 들려오면 야만적인 소련군이나 공산당에 의해 누구인가 죽어가고 있었다. “부녀자들은 일체 출입을 못하게 집안 식구가 깊은 벽장 안이나 광에 숨겨두고 지켜주어야 했다. 어쩌다 붙들려 간 부녀자들은 죽을 욕을 당하고 병신도 되고 죽기도 해서 이러한 소문은 무시로 전해지고 천지는 다시 캄캄해지는 것만 같아졌다.”고 썼다.

안이숙의 세 모녀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공산당 당원과 소련군 여자 고급장교가 찾아왔다. 그들은 죽은 후에 가는 천국이 아니라 지상 천국인 모스크바로 모시고 가겠다고 제안했다. 영향력이 있는 인물들을 납치하려는 기도였던 것 같다. 그리고 며칠 후에 다시 찾아와서 특별한 모임(파티)에 초청했다. 거절하지 못하고 그들의 차에 탔다. 이 길로 납치된 것 아닌가 싶었다. 안이숙은 어떤 건물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당장 이 호랑이 굴을 피해야했다.
잠시 혼자였다. 사방을 둘러보았다. 뒷문이 열려있다. 지체하지 않고 보선발로 도망쳐 나왔다. 신발이나 손가방과 목도리를 그대로 두고 급히 나왔다. 이리저리 살피며 달려간 곳은 윤원삼尹原三 장로 댁이었다. 그 자리에서 평양 탈출과 서울행을 결정했다. 열 명의 청년들이 안이숙 모녀를 38선 넘어 서울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자진해서 나섰다.

안이숙은 몹시 슬펐다.
“고향과 집과 소유를 다 내어버리고, 정처 없이 낯선 땅으로 흘러가야만 하는가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고 설움이 복받쳐서…분하고 슬프기만 했다...어머니를 모시고 먹고 살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닌 낯선 서울로 가는 길이니만큼 불안도 크고 깊었다.” 그러나 동행하는 믿음 좋은 청년들, 자원해서 나선 젊은이들의 지켜보면서 힘을 얻었다.
새벽 한시, 평양에서 기차를 타고 해주로 가다가 중간 역에 내렸다. 공산당이나 소련군의 눈을 피해야했다. 남한을 오간 경험이 있는 안내자를 따라 걸었다. 고령의 어머니와 안이숙은 무척 힘들었다. 소련군 초명이 있는 38선. 발소리나 말소리가 들리면 총탄이 날아올 것이다. 갑자기 천둥번개가 진동하고 소낙비가 내렸다. 걷고 또 걸었다. 생사의 갈림길 아닌가.

어디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가 그치고 구름이 걷히면서 햇빛이 내린다. 38선을 이미 지난 것이다. 하나님이 사나운 일기로 저들을 지켜주신 것이다. 일행은 트럭을 얻어 탔다. 찬송가를 목소리 높여 불렀다. 검문하는 미군들이 이들의 찬송가를 듣고는 손을 들어 무사통과 사인을 보냈다. 기독교 신앙, 자유 대한이다. 38선은 지옥과 천국의 경계선이었다.
서울에 도착한 안이숙은 어머니와 함께 한 성도(윤장로의 딸)의 단칸방에 짐을 풀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못해요... 아버지여 팔 붙드사 평탄한 길 주옵소서” 그녀는 어디로 가야하는 것일까?

한국 교회의 에스더.
‘죽으면 죽으리라’며 믿음을 지킨 안이숙의 ‘십자가의 길’은 아직도 멀고도 불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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