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8/22) 교갱협 제16차 영성수련회 개회예배

저는 최근에 책 제목부터 조금 도발적인 ‘하나님을 팝니다?’는 책을 읽었습니다. '스카이 제서니'의 책인데 제목 자체가 상당히 도발적이었습니다.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화가인 고흐의 그림을 중심으로 해서 오늘의 교회를 진단하고 비판하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핵심은 오늘의 교회가 소비자 중심 교회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이키나 코카콜라 같이 하나님이 상품화되어 소비자의 기호에 따라 바꾸고 변질시켜, 오늘날의 하나님이 상품화가 되어서 소비자인 교인들에게 판매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는 수단을 사명으로 알고, 프로그램을 성령의 힘으로 오해하고 있는 오늘의 북미 교회의 현실을 지적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머징 교회도 그런 한 부류라고 합니다. 물론 저는 그 책을 읽으면서 100% 다 공감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상당 부분 북미 교회뿐만 아니라 오늘 한국교회에도 그대로 일어나고 있고 또 비판되어져야 하는 상황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결국 궁극적인 것은 복음의 본질이 훼손되어가고 있다. 본질에서 궤도이탈하고 있다. 마치 기차가 레일을 따라서 정상적으로 가야 하는데 그것이 이탈이 되었다고 표현해 볼 수가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의 사건은 저나 여러분이나 거의 공감하고 있는 것처럼 한국교회가 이 세상으로부터 이렇게 지탄을 받은 적은 없을 것입니다. 부끄럽게도 그 중심에 목회자가 있고, 그 중심에 우리 교단이 있다는 것이 더더욱 수치스럽습니다. 전에는 교회가 세상을 걱정했는데 이젠 거꾸로 갑니다. 세상이 교회를 염려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목회자가 성도들의 삶을 염려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거꾸로 교인들이 목회자를 염려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 모든 것은 다 본질에서 이탈되어졌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입니다. 그래서 회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뭔가 본질로부터 이탈된 것에서 본질로의 회복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오늘의 본문을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세겜 땅에 있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벧엘로 올라가라"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벧엘로 올라가라고 야곱에게 명령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28장에서 벧엘 사건이 나옵니다. 야곱이 그의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먼 외삼촌 집으로 도망가는 길에 루스라는 곳에서 하룻밤을 지내면서, 그가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28장에 보면 야곱은 거기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거기에서 그가 소위 신앙에 대한 엄청난 결단을 내립니다. '하나님 잘 섬기겠습니다' '신앙생활 잘 하겠습니다' '십일조 늘 드리겠습니다' 등등의 그 첫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 속에서 그 이전에 갖지 못했던 신앙, 그리고 그 이후에도 이 정도 수준의 신앙을 갖지 못했을 정도의 벧엘은 야곱에게 있어서 잊을 수 없는 그리고 아주 독특한 장소입니다.

그 이후 외삼촌 집에서 세월을 보내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세겜에서 10년을 지냅니다. 34장에는 그의 딸 디나가 그 곳 사람들로 인해 몸을 더럽히게 되고, 그의 두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칼날로 그 사람들을 할례의 제도를 이용해서 쳐버렸습니다. 그것을 안 야곱이 두려움에 쌓여집니다. '큰일났다. 우리 식구는 얼마 되지 않는데... 이 세겜 사람들이 다 우리의 가족, 나를 향해서 달려들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린 이제 다 죽었다.' 그렇게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서 하신 말씀이 “야곱아, 네가 지금 어디 있느냐? 벧엘로 올라가라.”

물론 장소적인 의미에서 벧엘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소적인 의미보다 벧엘에서 만났던 그 하나님, 벧엘에서 가졌던 그 신앙, 그것에 대한 회복을 요구하시는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벧엘로 올라가라는 것은 결국 야곱을 향한 회복의 요구입니다. 네가 지금 있는 이 곳, 이 세겜 땅에서의 신앙의 상태가 어떤지? 왜 이렇게 되었는지? 그리고 과거 네가 가졌던 벧엘의 신앙을 기억하라 하신다. 물론 벧엘과 세겜은 엄청난 지형적인 높이의 차이도 있지만, 단순하게 지형적으로 높은 곳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가졌던 신앙을 회복하라는 말씀이다.

오늘 우리 자신의 신앙이 펄펄 끓는 아주 높은 수준의 상태라면 더 말할 것 없습니다만, 뭔가 지금 갖고 있는 목회자로서 자신의 영적인 상태, 신앙적인 상태, 사역적인 상태, 이 모든 것이 떨어져 있고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면, 저는 간절히 원하는 것은 이번 수련회를 통해서 우리 자신이 회복되어지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진리로 거룩하게 되어지는 역사일 것입니다. 이런 역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하는 것은 오늘 본문과 혹은 본문에 없는 이야기라도 오늘 우리 상황에 비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보려 합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첫째는,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목회자들에게 믿음을 회복하자는 것은 생뚱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고 했습니다. 나는 과연 바른 믿음의 사람인가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목회자이기 때문에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면 엄청난 오산입니다. 여러분, 목회하면서 가끔 장로님들, 교회 중직자들이 나는 장로이기 때문에 믿음이 있다고 스스로 착각에 빠지는 모습을 많이 봤을 것입니다. 목사의 눈에는 믿음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데 스스로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목사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믿음이 있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직분과 본질은 다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냉철하게 하나님 앞에서 나는 과연 믿음의 사람인가 돌아봐야 한다는 겁니다.

야곱이 벧엘을 떠나 세겜에서 살 때 야곱에게 과연 믿음이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없다고 말하십니다. 그래서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면서 너 자신의 믿음을 회복하라고 하십니다. 야곱과 같이 우리도 신앙 상태를 돌아보고 믿음의 회복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다 총신을 졸업하셨기 때문에 대부분 총신의 교훈을 잘 아실 것 입니다. 그 중 첫 번째가 뭡니까? 신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목회자에게 신자가 되라는 것을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도 신대원 다닐 때에 좀 웃기는 교훈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목회를 하면 할수록 느끼는 것은 진짜 필요한 교훈이라는 것입니다. 목회자 되기 전에 먼저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성도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우리 교단의 연세 높으시고 원로급에 속하시는 어떤 목사님이 병이 들었습니다. 권사님이 문병을 가서 위로하면서 목사님에게 십자가를 말하고 부활에 대한 소망을 이야기했습니다. 그 때 그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너 지금 진짜 그거 믿나? 부활하고 천국 믿나?” 이러더래요. 이 권사님이 뒤로 자빠질 뻔 했다고 합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저도 두려웠습니다. '저럴 수도 있구나.' 내가 이름 대면 여러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고 한경직 목사님께서 목회자들에게 하신 말씀 가운데 하나가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해요. 충격 아닙니까? 오늘 우리 자신이 가져야 하는 절대 신앙인 오직 예수, 오직 십자가, 이 절대 신앙을 우리는 가져야 합니다.

베드로가 마태복음 16장에서 고백하는 그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에 의해서 이 십자가의 절대 신앙을 상대화시켜 버리는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심지어 아주 보수적인 신앙을 가졌던 교회 어른이 불교에 가서 불교의 자비사상이 하나님의 사랑이랑 거의 같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같습니까? 그것이 참 믿음인가 묻고 싶습니다. 아니잖아요. 오늘 우리 자신이 그런 오류에 빠지고 있지 않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두 번째, 소명을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목회자에게 중요한 요소가 참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이 바로 소명의식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우리가 목회자로 사역하는 것은 내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쓰시기 위함입니다. 투철한 이 소명감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이것이 점점 약화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한국교회의 위기를 말합니다. 한국교회 위기는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의 위기인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소명감의 약화입니다. 어느 정도 사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오늘 신학대학원을 지망하는 사람들 가운데 아예 소명 없이 목회직을 좋은 직업으로 선택해서 오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들으면서 큰일났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가 이방인의 사도가 되고 싶어 된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9장에서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꺾으시고 그를 부르셔서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택한 그릇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삼으시고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3장 7절에 내가 일꾼이 되었다는 이 자부심 속에서 디모데전서 1장 12절에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고, 세우셨고, 일을 맡기셨다는 의식 속에서 평생을 복음을 위해서 살았던 것입니다.

오늘 이것이 과연 우리 가슴팍 속에 가득 차있냐는 것 입니다. 소명은 거절할 수 없는 부름 앞에 두 손 드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직이 결코 인기 있는 직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목회직이 인기 있는 직업이 되어가고 있는 이것이 바로 위기입니다. '하기 싫고 도망가고 싶은데 하나님이 부르셔서 마지못해 여기 서 있었다.' '십자가 지는 이 길은 죽는 길이다.' 이것이 소명입니다. 소명이 약화되거나 혹은 소명이 없으니까 오늘 목회자와 한국교회 안에 많은 문제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소명은 절대 순종입니다. 소명은 후회가 없습니다. 소명은 늘 감사하면서 살아갑니다. 소명은 생명을 겁니다.

이 일에 내가 생명을 걸고 죽음을 각오하는 것은 소명에서 나오는 것이지, 직업적 선택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자신을 돌아보면서 소명인가 직업인가 질문을 하면서 이번 짧은 집회를 통해서 약화되어가고 있는 자신의 소명 의식을 다시 회복하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 거룩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번 주제가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입니다. 목회자가 가진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한다면, 첫째는 소명의식의 약화이고, 두 번째는 거룩성의 약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교회가 거룩성을 상실해가고 있습니다. 부끄럽게도 오늘 목회자가 거룩성을 상실하고 세속화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 삶, 가치관이 세속화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의 목회 방법론조차도 세속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세속화는 뭡니까? 세상을 닮아가고 세상적인 수준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손가락질 당하고 있고, 목회자가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수준에 살아도 오늘 교인이나 목회자가 그런 수준에 살면 비난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오래전 일입니다만, 어떤 철물점 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은 외상을 줘도 목사가 오면 외상 주지 말라고 했다고 합니다. 거룩성이 상실되니까 온갖 명예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이 있습니다. 부도덕해집니다.

야곱은 세겜 땅에서 거룩성을 상실했습니다. 세겜 땅에 살면서 세겜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 같아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벧엘에서의 거룩성을 회복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서있는 모든 사람들, 특히 목회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비추고 이사야 6장에서 고백한대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는 철저한 고백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삶이 안일에 빠지고 평안해지면 거룩성을 상실하기가 쉽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거룩해질 수 있습니까? 요한복음 17장대로 "진리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옵소서." 이번 집회를 통해 다시 한 번 진리를 붙잡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진리를 붙잡고 나아갈 때에 진리의 말씀을 들을 때에 거룩성이 회복되는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네 번째 회복해야 될 것은 사역자로서의 능력입니다. 한국교회가 세상 속에서 서서히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 다르게 표현하면 영향력을 상실해가고 있다는 지적이 보편적인 지적입니다. 오늘 목회자의 능력이 점점 약화되고 있다는 지적을 같이 받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의 목회 환경은 굉장히 어렵고 힘듭니다. 예전에는 개척교회를 하면 30% 정도는 제대로 정착을 하고, 성장한다는 통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새는 30%가 아니가 3%라고 합니다. 그만큼 개척이 힘들고 어렵습니다. 안 됩니다. 100개 개척하면 한 3개 교회 정도만 제대로 뿌리를 내립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죠. 그만큼 목회 환경이 어렵고 힘듭니다. 기존 교회의 양적 성장도 거의 멈춘 상태 아닙니까? 교회 안에 내적 갈등은 자꾸 생깁니다. 어떻게 보면 이 전에 우리 선배들이 가졌던 능력에 배가 더 필요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환경이 이래서 못한다고 그냥 둘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환경을 이겨내는 것이 목회자의 능력이고, 이것을 이겨내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느 시대건 어렵지 않은 시대는 없었습니다. 모세가 출애굽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끈 40년이 쉬웠습니까? 바울이 이방 사도로서 사역하던 그 환경이 쉬웠습니까? 제자들이나 선지자들이나 초대교회 기독교 2000년 역사 가운데 어렵지 않았던 환경은 없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도 마찬가지입니다. 쉽고 편한 목회는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목회가 어렵고 힘들면 왜 이렇게 못할까 하는데 아니요. 전부 비슷합니다. 스스로 좌절하고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복음사역 능력을 회복하는 것 입니다. 능력 있는 사역자로 회복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제가 71년도에 신학교 입학했으니까 아주 오래 전인데, 그때는 개강수련회가 아니라 봄 부흥회였습니다. 그 때 강사님이 박희천 강도사님이셨습니다. 지금은 목사님이시지만, 그 당시 헬라어 가르치던 강도사님인데 그 어른이 집회 강사로 오셨습니다. 그 어른이 비장하게 금식하시면서 집회를 인도했습니다. 비장한 각오로 신학생들에게 여러 설교를 하셨는데 그 가운데 지금도 제 머리에 떠오르는 설교는 '엘리사입니까? 게하시입니까?'였습니다. 제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던지 지금도 그 설교 전체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떤 여인이 있죠. 애기를 못 낳았습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기도해서 애기를 낳게 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애기가 죽어버렸죠. 그 여인이 왔습니다. 그 여인이 엘리사의 발끝을 만지는데 이 여인의 괴로움이 있는데 무언지 모르겠다. 나중에 이 아이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자기 종 게하시를 보냅니다. 자기가 든 지팡이를 가지고 그 애한테 가서 놓아라. 게하시가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엘리사는 뒤따라갑니다. 그런데 게하시가 그 막대기를 놨다 들었다 놨다 들었다 아무리해도 안 됩니다. 나중에 엘리사가 와서 아이 몸 위에 얹고 그 애를 살려내지 않습니까? 왜 게하시는 안 됩니까?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목회자가 능력이 없으면 안 된다는 거에요. 설교라는 지팡이를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아무리 해봐라 되나. 안 됩니다. 굉장히 충격이었습니다.

'능력 있는 목회자가 되어야 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낙심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설교를 잘하고 아멘도 하는데 생활이 하나도 안 변합니다. 그럼 내가 설교하나마나 이게 뭔가 낙심이 된 경험이 있습니다. 설교를 백날 해도 아무 소용없는 것이 아니라 설교의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머리 깎인 삼손은 굉장한 능력의 소유자 아닙니까? 능력이 떠나버렸습니다. 능력 있는 사역자가 되야 합니다. 그럼 어디에서 능력이 올 것인가? 그 능력은 말씀과 기도 외에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 능력은 말씀으로 충만해야 하고, 기도로 충만해야 합니다. 말씀의 능력과 기도의 능력이 오늘 우리에게 부어져야만 내 자신이 살고, 내 목회가 살고, 한국교회에 소망이 있습니다. 이 짧은 수련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능력 있는 종으로 다시 회복시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출애굽기 40장 20절에 보면 모세가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한 가지 달라진 것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다는 것입니다. 그 지팡이가 홍해도 가르고 온갖 재앙도 내립니다. 그 지팡이가 반석에 물도 냅니다.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다시 사로잡혀야 합니다. 사역의 방법을 연구하는 것보다 재헌신이 더 중요합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한 능력의 회복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교갱협 정신을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옥한흠 목사님께서 교갱협을 시작할 때 1995년 어느 날 뜻밖에 저한테 전화 한통을 하셔서 좀 보자고 하셨습니다. '왜 나를 부를까?' 하고 갔더니 옥 목사님 하시는 말씀이 "오늘의 한국교회를 보니까 너무 탄식스러운데 우리 목회자 이래서 되겠는가? 더 좁혀서는 오늘 우리 교단의 꼴을 봐라. 이걸 그냥 보고 넘어갈 수 있냐?" 옥 목사님은 원래 교단에 관심이 없고, 제자훈련이랑 사랑의교회만 목회하시던 분이셨습니다. '갑자기 왜 이런 말씀을 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어른이 그 때 눈이 트인 것입니다.

전에는 사랑의교회 하나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보니까 나만 잘 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교회도 잘 되야 하고, 우리 교단이 바로 서야 한국교회가 바로 서야 된다는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이런 말을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어요. 우리 목회자 갱신, 목회 갱신, 우리 교단을 다시 살리는 운동을 해서 한국교회에 선한 영향을 미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감동을 받고 하기로 해서 시작된 것이 교갱협입니다.

처음에 시작될 때 소위 말하는 교단의 정치꾼으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았습니다. "너나 갱신하라" 하면서 욕 엄청 먹었습니다. 우리부터 갱신하려는 거지 당신들 갱신하라는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초기에는 굉장히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투표할 때니까 여러분이 상상할 수 없는 정도의 돈이 오갑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세상적인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예를 들면 어떤 후보가 총회장 되기 위해서 봉투에 그 당시에 5만원씩 넣어서 나눠줍니다. 받은 사람은 그 사람을 찍어주려고 합니다. 그러면 다른 후보는 10만원을 넣어 줍니다. '목사 양심에 적게 준 사람 찍어서 되겠는가? 많이 주는 사람 찍어야지.' 그것도 양심입니까? 그런데 그렇습니다. 그래서 돈 많이 쓴 사람이 됐지, 돈 적게 쓴 사람이 된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돈을 나눠줄 때에 정치권에서 교갱협한테는 주지 말고 들키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피했습니다. 그래서 제비뽑기로 바뀌고 또 제비뽑기의 문제가 있으니까 다시 어떤 방법을 찾아야 하는 지경까지 현재 왔습니다. 교갱협 한 10년쯤 지났을 때 옥 목사님 하는 말이 “이건 뭐 아무리 해도 더 나빠진다” 그래서 제가 “목사님, 교갱협 없으면 지금 상태보다 훨씬 더 나빠졌을 겁니다. 우리가 이렇게 떠들기 때문에 요만큼만 나빠진 겁니다” 하고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오늘 이 시점에 우리의 존재감을 생각해야 됩니다. 교갱협 과연 뭐하는 곳인가? 자칫 친목 단체로 전 할 위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한 친목 단체가 아닙니다. 그저 마음 맞는, 뜻이 맞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고, 정치단체도 더욱 아닙니다. 철저하게 갱신을 추구하는 모임입니다. 내 자신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바로 서겠는가? 우리는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 앞에 부름 받은 목회자로서 바로 서겠는가? 이것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갱신시키니까 교회가 갱신되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뜻을 합하고 힘을 합해서 교단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입니다. 맛 잃은 소금이나 불 꺼진 등 같은 존재가 아니라, 작지만 소금이 되고 작지만 빛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갱협 정신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 16차 수련회를 통해서 교갱협의 정신이 회복되고,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바로 세우는 역사가 우리에게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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