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1/20) 교갱협 제3차 장로섬김수련회 개회예배

마태복음 20장 1~16절

제3차 장로섬김수련회에 오신 여러 장로님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일반적으로 성장학자들이 이야기하기를 교회가 성장하고 잘 되는 것은 첫째는 목사에게 달려 있다. 그러나 그것과 동시에 목사는 좋은 동역자를 만나는데 있어서 승패가 갈린다. 동역자 가운데서 첫째가 장로님들입니다. 좋은 동역을 할 수 있는 장로님들을 모시고 있는 그 목사는 행복한 목사가 될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오늘 참석하신 여러 장로님들 여러분의 섬김을 통해서 여러분의 교회가 잘 되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 함께 동역하시는 목사님들이 행복한 목회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속한 교회 목사가 좋고 교회가 잘되는 거기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한국 교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쳐갈 수 있는 그런 장로님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전할 말씀은 포도원 품꾼의 비유라고 이름을 붙이기도 하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0장에서 예수님께서 천국 비유를 하시는 가운데 지상 즉 현세 교회를 통한 천국을 비유적으로 교훈 하고 있는 것 입니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있는데 포도원 수확기에 일꾼들이 필요해서 불러들이는 것 입니다. 일꾼들을 불러들이고 6시, 9시에 차례로 필요한 일꾼들을 불러들이는데 마지막 11시에 일꾼들을 불러서 포도원에 일하게 했다는 것 입니다. 먼저 부름 받은 사람도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고 약속을 했고 마지막 부름 받은 사람 역시 약속을 하고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제일 나중에 온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자 일찍 온 사람은 우리는 더 많이 받을 것 이라는 기대를 했습니다. 왜냐면 훨씬 더 많은 시간동안 열심히 일을 했기 때문에입니다. 그런데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습니다. 불평이 나옵니다. 왜 저 사람과 우리를 똑같이 취급하냐. 우리는 더 많이 일했으니까 더 많이 받아야 한다는 그런 불평을 합니다. 그 때 주인이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지 않았는가. 적게 일한 사람에게 똑같이 많이 주는 것은 바로 내 뜻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결론으로 하신 말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 그런 결론을 냈습니다.

 

이스라엘은 목축과 더불어 포도밭 경영하는 것이 참 많이 있죠. 그래서 성경에도 포도원과 관련된 교훈이 많습니다. 이사야 5장에 보면 이 포도원을 조성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어 좋은 포도를 기대했는데 덜 포도를 맺었다는 탄식이 나오고 노아도 포도농사를 지었고 요한복음 15장에 예수님 나는 참 포도나무요 아버지는 농부고 너희는 가지다. 그렇게 비유를 하신 것도 있습니다.

 

농사를 지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잘 아시겠습니다만 수확철 특히 포도 수확철인 9~10월 사이 이스라엘 땅에는 일꾼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일찍 나가서 소위 인력시장을 통해서 일꾼들을 부르는데 지금 우리 시간으로 말을 하면 아침 9시에 부르고 12시에 부르고 오후 3시에 부르고 마지막 오후5시까지 계속해서 일꾼들을 불러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 하게 했다는 내용입니다. 물론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비유가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제일 중요하죠. 여기 주인은 물론 하나님을 가르킵니다. 그리고 일꾼은 우리를 가르키죠. 저물때는 마지막 때를 의미합니다. 비유 전체 속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11시에 온 사람, 제일 마지막에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이 누린 은총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할 한 단어가 있다면 은혜라는 단어입니다. 은총이라는 단어입니다. 그것을 중심으로 해서 오늘 이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교훈을 몇 가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꾼들이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동네 합정동 사거리에서도 이른 아침에 사람들이 쭉 서있으면 봉고차 한 대가 와서 사람들을 실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인력 시장을 통해서 일꾼으로 부름을 받는데 만약 그날 일꾼으로 부름을 받지 못했다면 그 하루는 허탕 칩니다.

 

일 할 수 있는 일꾼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일 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 아닙니까? 그런 이야기 있죠? 나이가 들어서 꼭 필요한 것은 첫째 건강이다. 나이가 들수록 건강을 잃어버리면 큰일 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돈이 있어야 합니다. 나이 들수록 돈이 없으면 초라하고 힘듭니다. 집사님 권사님들 사모님들 미안하지만은 아내는 세 번째 입니다. 할 일이 있어야한다. 일 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보통 일이 아니라 포도원의 일입니다. 포도원은 하나님의 교회를 가르킵니다. 목사로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도록 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우리 목사들은 늘 이 축복을 간직하고 그 은혜에 감격해서 교회를 섬기는 것 입니다. 장로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섬길 수 있는 장로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이 세상에 누릴 수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축복들이 많이 있죠. 첫 번째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것이 첫째 축복입니다. 두 번째 축복은 교회를 섬길 수 있는 직분을 받아서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 다른 축복인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온 우리 모두는 이 두 가지 축복을 동시에 받고 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은 것만해도 엄청난 축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교회를 섬길 수 있는 직분까지 받았으니 더 큰 축복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를 섬길 때 이 축복에 대한 감격에 의해서 섬기는 것 입니다. 이 감격이 없다면 제대로 섬길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 3장 7절에 보면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다고 감격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도바울이 그 당시에 이방인의 사도로 일꾼 되었다는 것은 별 자랑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서 돈이 생겼습니까? 떡이 생겼습니까? 아무것도 안 생겼습니다. 오히려 두들겨 맞고 파산 당하고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2절 부터 보면 바울은 감사함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전에는 폭행자, 훼방자였지만 다메섹 길에서 나를 불러주시고 이방인의 복음화를 위해서 부름받고 일꾼으로 일하게 되었다. 이 감격이 없다면 우리는 제대로 섬길 수 없습니다.

날마다 목사님이나 장로님이나 할 것 없이 나 같은 죄인 구원해주시고 나 같은 못난 인간 목사로 불러주시고 장로로 불러주시고 이게 왠 은혜인지 모르겠습니다. 왠 축복인지 모르겠습니다.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을 하라고 불러주셨으니 이 감사와 감격으로 주님을 섬겨야 될 줄로 믿습니다. 더욱이 11시에 부름 받은 종을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진짜 은혜 중에 은혜거든요. 이것을 꼭 늦게 믿게 되고 나이가 많아 장로가 된 것에 비유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11시에 들어온 일꾼입니다. 11시에 부름 받은 일꾼은 더욱 더 감격스럽습니다. 교회에서 장로가 되면 다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주의 몸 된 교회를 앞장서서 섬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희 집안에서 목사는 제가 처음입니다. 저희 아버님 형제가 8남매이신데 목사는 하나도 없어요. 두 분만 장로가 안되고 다 장로입니다. 저희 부친이 장로가 되셨어요. 제 기억에 아버님이 장로 시험에 한번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두 번 째에 됐어요. 장로님이 되시고서 달라진 게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새벽기도에 매일 나가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집사 때는 새벽기도에 한 번도 안 갔는데 장로님이 되시니까 딱 새벽기도 나가기 시작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 사실 제가 어릴 때는 가정예배 드리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왜 그렇게 싫었는지 모르겠어요. 요즘 가만 생각해보면 우리 아버지도 장로 되신게 엄청 좋으셨던 것 같아요. 그렇게 딱 두 가지가 달라졌습니다.

그만큼 장로의 직분에 대해서 감사와 감격을 가지고 자신이 어떻게 좀 더 교회에 본이 될까를 생각 하십시요. 은혜의 감격이 없이는 목사도 장로도 제대로 못합니다. 포도원에 부름 받았다는 은혜에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이 감격을 갖고 일하자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 비유 속에서 예수님께서 경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공로주의를 버리라는 것 입니다. 이 공로주의가 뭡니까? 먼저 온 사람들이 자기의 공로를 내세웁니다. 우리는 일찍 와서 이만큼 일했으니 내 공로를 인정해달라고 하는 것 입니다. 그리고 보상해달라는 것 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럴 수 있지 않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부름 받을 때에 한 데나리온에 계약을 했습니다. 그럼 더 이상의 요구를 할 수 없죠.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도 상당히 공로의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 19장 27절에 보면 베드로가 그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다 버리고 주님을 따르지 않았습니까? 그러면서 그럼 우리에게 무슨 혜택이 있습니까 하는 말을 합니다. 내가 이만큼 희생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더 받을 것이 뭡니까? 혜택이 뭡니까? 그렇게 기대하는 것을 봅니다. 요한과 야고보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를 섬길 때에 이 공로의식에 빠질 수 있습니다. 물론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도 예수님에 대해서 많은 희생을 했고 예수님께 남다른 사랑을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만 그것 때문에 내 공로가 인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주님이 경계하시는 것 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이 공로의식에 빠질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내가 몇 십년 동안 교회를 어떻게 섬겼고 교회를 위해서 얼마나 기도를 했는지 자기의 공로를 내세우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 속에서 예수님이 그 공로를 내세우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공로를 내세우면 교만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공로의식은 바로 특권의식입니다. 특권의식을 가질 때에 갈등이 생깁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의 이야기 입니다. 부임을 했는데 장로님 한분이 오시더니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 오셨으니까 앞으로 교회 모든 일을 할 때 저하고 꼭 의논 하셔야 합니다. 만약 그러지 않으면 목사님 하시는 일에 일체 협조를 안 하겠습니다.” 이것이 특권의식입니다. 그럼 이제 갈등이 시작됩니다. 목회자와 갈등이 생기기도 하고 다른 장로님들과도 갈등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특권의식이라는 것은 곧 자기 절대화를 의미합니다. 이건 참 무서운 함정입니다. 목회자도 자기 절대화의 함정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자기 생각을 절대화 시키면 대화와 타협이 없어져버립니다. 진리 문제가 아닌 이상 항상 대화하고 타협할 수 있어야하거든요. 그런데 자기 절대화의 함정에 빠져버리면 그걸 하지 못합니다. 장로님들도 마찬가지. 자기 절대화 하면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단절시켜버립니다.

공로의식 대신에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은혜의식입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말한 대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 이 은혜의식이 필요하지 공로의식을 가져서는 안되는 것 입니다. 내가 믿고 구원받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이 직분을 받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지금까지 섬겨온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입니다. 거기에는 공로의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은혜의식이 약해지면 공로의식은 강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철저하게 말씀하시는 것은 공로의식은 버리고 은혜의식으로 살으라 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 10절에 우리는 청지기로서 일을 다 하고 난 뒤에 “나는 무익한 종이라. 내가 해야 할 것 했습니다.” 그렇게 고백해야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부인과 오직 은혜만이 강조되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본문 속에서 이것을 경계하고 있는 이 경계를 우리가 겸손히 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라는 것 입니다. 여기 먼저 온 자들이 비교합니다. 아까 말씀드린대로 한 시간 일 한 사람하고 똑같은 대우를 받는 것을 못 견딥니다. 어떻게 저 사람하고 내가 똑같은 취급을 받아야 되느냐 하는 것이죠. 공로의식이 조금 더 발전된 모습입니다. 늦게 온 사람에게 더 많이 주는 것은 주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왜 불평하느냐 이거죠. 많은 사람들이 불행함을 느낍니다. 불행함을 느끼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비교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절대 평가를 받는 것이 아니라 상대평가를 하기 때문입니다. 비교평가 입니다. 즉 다른 사람이 나보다 잘되는 것은 나는 못 본다는 것 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교회를 더 잘 섬기는 것을 나는 못본다. 내가 그만큼 잘하려는 것이 아니라 더 잘하는 사람을 끌어내고 싶은 것이 우리의 악한 심성입니다.

 

신앙생활은 상대평가가 아닙니다. 우리의 불행은 내가 잘못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더 잘되는 것 때문입니다. 신앙과 섬김은 하나님 앞에서 각자 절대평가를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섬김을 통해서 여러분의 교회가 더 좋은 교회, 여러분을 동역자고 섬기는 목사님들이 더 행복해지고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할 수 있다는 이 축복, 행복함 속에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삶을 결산 할 때에 정말 잘 했다고 칭찬 받을 수 있는 섬김의 본이 되는 그런 귀한 장로님들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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