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8/19) 교갱협 제14차 영성수련회 폐회예배

신명기 1장 27~33절

여러분도 최근에 읽으신 분들이 많겠지만 제가 읽은 최근의 책은 알렌 록스버그의 "길을 잃은 리더들"’이라는 책이었습니다. 제게 상당한 생각을 하게 하는 그런 책이었습니다. 급작스런 변화 상황속에서 그 변화에 대처하는 리더들의 어떤 모습, 그 리더의 잘못된 생각과 판단이 일을 그르치게 되는 그런 내용들을 담고있는 꼭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으로 생각이 되어졌습니다.

길을 잃어버리면, 개인이면 그 개인의 삶을 방황하고 또 길 아닌 길로 가 버리면 자신이 파면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리더가, 우리가 리더라 할 때 큰 한국교회나 큰 그런 분들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리더입니다. 목회자는 리더입니다. 목회자가 길을 잃어버리면, 길을 바른 길로 가지 못하면, 자신의 파멸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모든 교회나 집단, 함께 따르는 많은 사람들을 파멸시키는 잘못되게 만들어버리는 그런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어디로 갈까 길이 안보일 때에 '야! 길이 없어져 버렸다. 어디로 갈 것인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갈레길들이 여럿 있을 때에 '어느 길로 가야될 것인가? 역시 어디로 갈까' 하는 말씀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목회 현장에서도 때로는 목회를 진행해 가고 있다가 어떤 때는 앞에 콱 막히는 때가 있습니다.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길이 안 보인다는 것입니다. 혹은 여러가지 선택의 길이 있을 때에 정말 어느 길로 가야 될까 망설여질 때가 있고,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과거 여러분이 그런 경험을 하신 분도 있고, 아니 지금도 그런 현장을 앞두고 계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저 역시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목사된 지 34년, 지금 있는 교회 30년, 꽤 많은 세월이 흐른 것 같아요. 돌아봤습니다. 이게 아픈 경험들이 있더라고요. 제 주변에 저를 보는 사람들은 "아이고, 김 집사님이 그게 걱정이요." 그 교회 뭐 어쩌냐고 좋게만 봐 버립니다만은 세상에 어느 목사치고, 어느 목회현장치고, 고통이 없는 현장이 없습니다. 고민이 없는 현장은 없습니다. 때로 여러분들이 강단에 서서 설교하거나 강의하는 사람을 쳐다보면, 저 사람은 저 강의하는 거나 설교하는 거 들으면 진짜 대단한 사람인 것 같고, 슈퍼맨인 것 같고, 초인적인 목사인 것 같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똑같습니다.

저는 크게 한 두번의 이 길이 보이지 않는 경험을 했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하나는 예배당에 화재가 났을 때입니다. 79년도에 부임하고 화재가 난 것이 83년이니까 한 4년 만에 예배당 전체가 전소되는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그때 30대 초중반이었기 때문에 경험도 없고 아주 굉장히 당황을 했습니다. 앞이 캄캄해지는 거에요. 길이 안 보이는 거에요. 길이 막혀버린 거에요. 화재 현장에 갔을 때, 어떤 여집사님이 발을 동동 구르면서 제게 하는 말이 "목사님, 어떻게 할 겁니까? 어쩝니까? 이제는" 대답을 못했습니다. 그런데 제 속으로 한 말은 있습니다. '어떻겠냐고 발을 동동 구르는데.. 나도 모르는데, 내가 무슨 대답을 하겠단 말인가.'

그것도 큰 앞이 막히는 경험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큰 앞이 막힌 일이 있었습니다. 재정 사고였어요. 회계가 돈을, 상당한 돈을 떼먹어 버린 거에요. 사실 그때 예배당 불난 건 큰 문제인 것 같지만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닙니다. 지으면 되니까. 그런데 내부적으로 일어난 재정사고는요. 진짜 눈앞이 캄캄해지더라고요. 길이 안보이는 거에요. 해결할 길이 없더라고요. 그 순간에는.

요즘은 은행이 인터넷뱅킹 등등 해가지고 통장에 어떤 기록이 의미가 없잖습니까? 통장의 기록이 수 억 있어도 인터넷 뱅킹을 통해서 돈 다 빠져나갈 수 있죠. 그러나 사고가 날 당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런 인터넷뱅킹이나 폰뱅킹 같은 것이 없을 때였습니다. 은행 통장잔고로는 가지만, 그것만 가지고 사실증명을 할 때 보통 그렇지 않습니까? 회계감사할 때 통장잔액, 그리고 회계장부, 그리고 '맞구나, 맞다.'

임마가 어떻게 했냐면요. 회계가. '임마'라는 표현을 어떻게 할 수 있냐면, 제가 중등부 때 가르친 놈이거든요. 이제 안수집사 되어가지고 교회 회계가 되었는데, 여러분이 양해하고 들으십시오. 이 친구가 회계를 하면서 통장을 가져왔어요. 저도 한번 봤거든요? 연말에. 1억이 들어있는. 예를 들어서 돈이 4억이 있어야 된다고 하면 딱 1억만 있는데, 1자를 4자로 바꾼 겁니다. 정교하게 요렇게 딱, 잘 모르는 거에요. 그러니 통장에 4억을 봤거든요? 그런데 1억 밖에 없던 거에요. 3억이 날라간 거 아닙니까? 알 수가 없는 거에요. 그것 가지고는. 은행에 가서 확인하지 않는 다음에요. 사실 그 1억 조차 날아가버렸지만요.

좌절이 되고, 내가 그것도 왔다갔다 하는 친구처럼, 내가 중학생 때 가르친 놈이 회계가 되어가지고 나한테 그렇게 하니까 그냥 인간적으로 배신감도 느끼고, 내가 뭘 했나 싶기도 하고, 어떤 좌절감이 확 드는데요. 이 진짜 감당이 안되데요. 물론 불났을 때도, 목회 집어치우려고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너, 자격없다. 임마! 목사가. 불낸 놈이 무슨 목사한다고 말야." 그래서 그만두려고 생각했었는데, 그래도 그렇게 힘들지 않게 극복했는데... 이것을 가지고는 도무지 의욕 자체가 없어져가지고요. 길도 안 보이고, 교인들에게 할 말도 없고... 그래서 차 타고 설악산까지 갔다 왔습니다. 혼자서. 혼자가 아니고 같이 간 친구가 있어요. 박 목사.

그런데 작은 위로가 된 것이 어떤 집사님이 편지를 썼어요. 저 제직하면서 울었습니다. 제직하면서 "난 못하겠습니다." 길이 안 보이는데 할 수 없잖아요. 난 못하겠어요. 이게 다 내 책임인데 그냥 다 엎어버리고 싶은 거에요. 도망가고 싶어요. 그냥 울면서 "제가 내 잘못이고 나는 더 이상 못하겠습니다." 그러고 이제 월요일날 가는데, 주일날 그 제직한 뒤 저녁이었던거 같아요. 집사님이 편지를 봉투에 넣었는데. 길지도 않아요. "목사님, 목사님이 방황하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딱 그 요지였어요. 리더가 이 상황속에서 길이 없다고 방황하고 그냥 헤매면 우리는 어떻게 하냐 이거에요.

그러면서 부자 아닌 가난한 사람이라 돈 50만원을 넣은 거에요. 뭐 몇 억이 날라갔는데 돈 50만원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액수로 따지면. 그런데 그것이 제게 격려가 되더라고요. 아, 내가 길이 없다고 방황하고, 울고, 헤매고 있는데 많은 교인들은 '그래도 목사가 정신차리고 어떻게 끌어줘야 따라가지. 우리는 어떻게 하라고' 이겁니다. 그때 다시 한 번 리더의 중요성, 리더는 혼자 방황하고 있을 수 없어요. 오래 할 수도 없어요. '정신을 차려야 되는구나.'

요즘 교단에 혼란상이 있습니다. 여러분 아시는대로, 요새 제가 묻고 싶은 것이, 오히려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이 "내가 어디로 가야 되겠습니까?" 그것을 묻고 싶습니다. 작년 총회 이후 지금까지 이루어지는 양상. 제가 총신 재단이사를 10년 했습니다. 이런 일이 없었어요. 이런 위기 상황이 없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어떤 사람인 이 길로 가야 된다고 막 그럽니다. 어떤 사람은 이 길이라고 합니다. 중간에 서서 옛날 유행가에 이리갈까 저리갈까 차라리 돌아갈까 가사가 생각나는데, 이리 가면 이쪽에 가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엄청나게 욕을 퍼붓습니다.

그런 욕을 조금 먹기도 했어요. "김경원 목사, 저럴 수 있냔 말야." 제대로 생각하고, 제대로 가는 줄 알았는데 저 길로 갔다는 거에요. 그리고 나 하나만 욕 얻어먹으면 괜찮겠어요. 교경협이 절로 갔다는 거야. 교회를 안 가고 절로 갔다는 거예요. 여기로 갈라 그러면, 이쪽 길로 갈라 그러면, 또 이쪽에선 모든 사람이나 언론이나 여론들은 또 똑같은 비난을 퍼붓습니다. 어떻게 김경원 목사, 제대로 생각하고 제대로 가는 줄 알았는데 저 길로 갔다고 야단입니다. 그래서 제가 운신의 폭이 좁아요. 내 개인 같으면 자유스럽겠어요. 나 하나 욕 얻어먹으면, 나하고 싶은대로 해버리면 되요. 그렇지 못해요. 이리 가면 교경협이 저리로 갔다. 또 이리로 갔다고 그래서 사실 제가 이번에 짐을 벗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 후배들하고. 내가 좀 자유스럽고 싶다. 그런데 안 된대요. 또다시 덮어썼습니다만. 좋은 판단력 있는 분은 제가 어디로 가야할 지 좀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 28절 "우리가 어디로 가야" 옛 성경번역은 "우리가 어디로 갈꼬"입니다. 그 편이 더 좋은거 같아서 제목을 그것으로 잡았습니다. "우리가 어디로 갈꼬." 이 본문은 우리가 아는대로 신명기는 결국 출애굽 2세들에게 한 말이죠. 모세가 유언적인 설교를 했습니다. 한 2개월 정도의 기간 동안 모세가 유언적으로 출애굽 2세들에게 한 설교입니다. 즉, 내용은 40년의 광야생활을 회고하면서 과거의 역사적인 교훈을 갖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된다는 것을 가르친 내용들입니다.

그 가운데 40년의 과거 회고 가운데서 오늘의 본문은 민수기 13장, 14장 사건을 회고하면서 한 말씀입니다. 민수가 13장, 14장 우리가 아는대로 정탐꾼 사건입니다. 가데스 바네아에 정탐꾼을 보냅니다. 각 지파에 한 사람씩, 12명을 보내지 않습니까? 40일 동안 정탐하고 오너라. 그 사건입니다. 와서 보고합니다.

그런데 사실 정탐꾼을 보낼 필요가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보낼 필요가 없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너희들 먼저 정탐하고 와서 가라" 이러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이 스스로 말이에요. "우리 정탐꾼 한번 보내고 가자" 그렇게 막 요구를 한겁니다. 그 요구를 듣고 하나님께서 "그래. 한번 가봐라" 그렇게 하신 것이지, 하나님께서 미리 정탐 사건을 지시하신 것은 아닙니다. 아니, 가라면 가면 되는데 정탐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냥 가면 되었어요. 그런데 정탐해 보자고 그러니까 "그래. 너희들 하고 싶은대로 해봐라" 해서 40일간 정탐하고 열 사람의 보고와 두 사람의 보고가 다르지 않습니까?

열 사람의 보고는 "우리는 메뚜기다. 가면 우리는 죽는다. 가지 말자" 그것이었고, 두 사람 여호수와 갈렙은 "아니다. 가자. 그들이 장대한 사람이지만 하나님 떠나고 없더라. 우리는 하나님 계시지 않느냐. 가자." 이 보고를 들은 60만 장정, 남자 장정만 60만 명, 결국 10:2가 60만:2가 된 것 아닙니까? 60만 명은 이 부정적 보고에 동조를 한 것입니다.

이상하게 인간의 전적 타락. 칼빈이 잘 지적했어요. 전적 타락한 인간은 긍정적인 생각보다도 부정적인 생각을 더 잘합니다. 그래서 열 사람의 보고, 뭐 다수결이니까 10:2 맞다. 그러니까 60만이 다 그쪽으로 따른 것입니다. 그래서 가지 말자. 밤새도록 아우성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가나안 가지 않는다. 못 간다. 가면 죽는다." 그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말이 "그러면 우리가 어디로 갈 겁니까? 어디로 가느냐? 목표점을 상실하지 않느냐? 갈 방향을 잃어버리지 않느냐?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 되느냐?" 이겁니다. 탄식입니다. 길이 안 보인다는 말이죠.

여기서 신앙의 눈과 불신앙의 눈의 차이를 봅니다. 두 사람의 신앙의 눈은 길이 보입니다. 그런데 불신앙의 눈을 가진 사람은 길이 안 보입니다. 그 차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눈은 결국 믿음으로 보고 모든 사물을 믿음으로 보고, 믿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말하고, 믿음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은 방법이 보이고, 하기 싫은 일은 핑계가 보인다고. 그러면 이 본문에서 "어디로 갈꼬?" 하는 것에 대한 대답은 무엇입니까? 어디로 갈까? 가나안을 향해서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대답은. 왜 가나안을 향해서 가야 하느냐? 그것은 아브라함 때부터 약속한 땅이기 때문에, 그리고 축복의 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디로 갈꼬?" 하는 것은 결국 목표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그 목표는 가나안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변적인 것입니다. 왜? 약속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곳이기 때문에. 그러면 반드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길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길을 조금 다른 각도로 넓게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3장 33절에 사람들이 와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 합니다." 빨리 이 길을 떠나 도망가라고 했습니다. 지금 행하는 이 길로 가지 말고. 그때 예수님 하신 말씀이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길이 있다는 것이 예수님 가셔야 하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명입니다.

바울도 길에 대해서 이런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에 에베소의 장로들과 작별하는 그 장면 아닙니까?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갔을 때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그가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혹은 예언을 통해서 듣고 알았습니다. 그때 바울이 하는 말입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내가 달려갈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목표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향해서 나는 갈 수밖에 없다. 그것을 향해서 나는 갈 수밖에 없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그래서 그가 생을 마친 뒤, 마지막 디모데후서 4장 7절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했습니다. 갈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에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 아까도 제가 말씀드렸던 내 자신도 어디로 가야 되냐는 그런 방황의 순간이 있고, 우리의 삶에도 그런 것이 있습니다. 혼돈합니다. 가나안입니다. 가야 될 곳은. 물론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만, 예수님의 경우와 바울의 경우에 대해서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부르심, 목회자로서의 원초적인 부르심에 충실한 것,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사역과 사명의 길, 그것 향해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나안입니다.

때로는 우린 어떤 명예 때문에 가선 안 된다는 길을 갈 때도, 돈 때문에 가선 안 되는 길도 있습니다. 길 아닌 길로 오라는 많은 유혹을 받습니다. 저는 신학을 가르치면서 그런 표현을 한적이 많습니다만, "목사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향해서 질문해야 할 것이 있다. 뭐냐? 내가 왜 목사가 되었는가" 이 질문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왜 나를 목회자로 만드셨는가? 목사로 만드셨는가" 이 질문을 부단히 내 자신에게 하고, 그 받은 질문에 대해서 대답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건 내가 길이 아닌 길 쪽으로 갈 때, "너, 이 짓 하려고 목회자 되었는가? 너, 이 짓 하려고 하나님께서 목사 만들으셨는 줄 아냐?" 그 소리를 들어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미안하지만 때로는 길 아닌 곳으로 가는 목사들이 많습니다. 가고 싶은 길과 가야 될 길은 다릅니다. 신학교 다닐 때는 선배 목사님들 교단 형편 보고, 정치적인 못된 일하는 것을 많이 손가락질하고 비판합니다. 어떻게 저럴 수 있나? 좋아요. 나는 그런 학생들에게 그런 말을 했습니다. "너희들이 목사 되고 10년 뒤에 꼭 같은 판단을 할 수 있는 목사가 되어야 된다." 그렇게 그냥 순수를 부르짖고, 원리에서 그렇게 하다가도 자기도 목사되고, 한 10년 지나고 혹은 20년 지나면 정치판에 여기갔다, 저기갔다 가선 안될 길로 기웃거리고, 옛날 선배들이 했던 그것보다 더 못된 짓을 하더라고요. 그것 하려고 목사되었냐 이거에요. 주일예배 마치고 월요일부터 전국으로 돌아다니면서 이 호텔 저 호텔 기웃거리고, 이 돈 저 돈 받아가면서 야합하고, 그 짓 하려고 목사되었냐 이거에요. 결국 우리가 가야 될 길이 있고, 그것은 가나안이고, 그것은 저는 하나님의 부르심, 그 소명에 충실한 것이다. 그것을 상실해선 안된다는 것이에요.

두번째는 그러면 어떻게 그 가나안을 갈 것이냐 이겁니다.

어디로 갈까? 애굽으로 돌아가 버릴까? 아닙니다. 가나안으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가나안으로 가는 것은 쉽지 않거든요. 쉬운 길이 아닙니다. 정탐꾼의 보고가 틀린 게 아닙니다. 열 사람의 보고내용이 틀린 게 아닙니다. 장대한 사람 있다, 가면 힘들다, 여리고성 정복 정말 힘들다. 그리고 거인들이 있어서 우리는 메뚜기 같은 존재다, 힘들다, 안된다, 어렵다 그겁니다.

여호수아서 1장에 보면 하나님꼐서 여호수아에게 같은 말씀을 하는 것을 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를 대신해서 지도자가 되어서 이제는 이끌고 가나안땅을 가야 하는데, 그 하나님께서 그래도 강조하신 여호수아서 1장에서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나옵니다. 그 말을 거꾸로 돌려 말하면 여호수아가 두려워하고 있단 뜻입니다. 두려워하지 않는데 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겠습니까? 여호수아가 막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 두려워합니까? 요단강 어떻게 건너지? 여리고성 어떻게 점령하지? 여호수아는 자신이 생각할 때, '이때 모세가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모세는 위대한 종인데.. 능력의 종인데.. 40년 광야를 이끌어간 종인데...' 그 모세하고 자신을 비교하니까 너무 초라하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할 수가 있나 그래서 두려움이 생긴 겁니다.

목회 소명에 충실하고, 목사 된 사람 치고 목회 잘하고 싶지 않은 사람 어디 있습니까? 목회 소임만은 세상의 기준에서라도 성공하고 싶지 않은 사람 어디 있겠습니까? 잘하고 싶고, 대단하게 하고 싶죠. 김인중 목사님만큼 하고 싶죠. 그런데 미안합니다. 예외적인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요. 죽었다 깨어나도 김인중 목사만큼 못합니다.

내가 김 목사님 부러워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학교 만든 거에요. 그래서 내가 저걸 하고 싶어서 기억하시는지 모르지만 전화를 했어요. 그때 가까이 교제하지 않을 때인데도 김 목사님은 어떻게 했습니까? 나는 그걸 하고 싶은 생각인데 어떻게 하면 됩니까? 아마 대답이 생각 안 날 거에요. 나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딱 한마디 하신 게 뭐냐. "목사님, 목사님 교회 가운데 중고등학교 총무과장 출신 있습니까?" 학교 선생 출신은 있어도 총무과장 출신은 없었어요. "없는데." "그러면 참 힘듭니다." 총무과장의 역할이 학교의 기초를 놓는 모든 것을 다 하는 것인데 목사가 뭐 압니까? 학교 내용 같은거. 그런데 총무과장 출신은 살림살이를 다 한다는 거에요. 아무리 생각해도 없어서 시작하지도 못했고, 한 번 할 수 있는 기회가 제게 주어졌습니다만 그 타이밍을 놓쳐서 학교를 못했어요. 그래서 김 목사님 보면서 부럽다는 그런 생각을 가집니다.

그런데 내가 김인중 목사가 될 순 없잖아요. 여러분, 김인중 목사 될 수 있습니까? 여호수아가 모세 될 수 있습니까? 못 되는 거에요. 자신 없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지금 한국교회 정말 위로 볼 수 있는 분이 돌아가신 박윤선 박사님 그런 분들은 어떻게 저렇게 되었을까? 미치지 못할 수준입니다. 여러분, 예를 들어 옥한흠 목사님, 와~ 어떻게 못 따라가요. 김 목사님 표현대로 흉내는 조금 낼 수 있어요. 그러나 못 따라갑니다. 그러면 참 미안하지만 소위, 비교해서 좌절감이 생겨요.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들, 비교해서 좌절감이 생깁니다. 저는 이런 주문을 하고 싶네요. 절대로 비교하지 말라. 지는 지고, 나는 나다 이겁니다. 여러분 주변에 있는 큰 교회 목회하고, 굉장히 부흥하는 사람과 비교하면 좌절감 생깁니다.

설교 탁월하게 잘하는 분 있어요. 나는 왜 저렇게 못할까 비교하면 좌절감이 생깁니다. 지금 한국교회 손꼽는 몇 사람의 탁월한 설교자 가운데 한 분이 그런 아주 오래전에 자기 자신의 간증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자기 사모님이 한번은 어느 집회에 갔다와서 자기 남편보고 하는 말이 "당신은 아무개 목사만큼 설교 잘 못하냔 말이야?" 엄청나게 좌절감을 느꼈다는 겁니다. 제일 기분 나쁜 게 비교하는 겁니다. 사모님 여러분들, 남편 기 죽이지 마세요. "아무개 목사님은 말이야. 설교도 잘하고 그런데 당신은 왜 그 모양이냔 말이야." 더 기죽어서 더 못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주일날 설교하고 들어왔을 때 잔소리 좀 하지 말고, 바로 위해서 한다고 하면서 찌부되면 그게 더 못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격려해야 합니다. 오늘 은혜받았다고, 당신 최고라고. 그러면 목사님은 최고 아닌 줄 알아요. 오늘 설교 잘못된 줄도 잘 알아. 그래도 옆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면 기분이 좋아서 다음주 더 잘해야겠다는 용기가 생기잖아요. 목사 살릴 겁니까? 죽일겁니까?

목사들도 마찬가지에요. 사모님 비교하지마세요. 다른 사람, 다른 여자는 관심 둘 필요가 없어요. 내 여자가 최고인 줄 알고 살아야지. 여호수아가 모세와 비교할 때에 낙심이 된 겁니다. 하나님 대답이 뭡니까?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모세의 위대한 것 안다. 모세 자신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모세와 내가 함께 했기 때문에 모세가 그리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너와 함께 한다면 너도 그와 같은 역사를 이룰 수 있다"는 겁니다.

문제는 내가 가진 기본적인 어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이냐 아니냐,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내 사역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느냐, 아니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면 세상의 기준에서, 어떤 기준에서 규모가 크고 안 크고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 목회의 승리는 몇 십명이든지, 몇 백명이든지 끌어안고 영혼 산화하고, 전도해서 구원시키고, 양육시키고, 하나님의 백성 만들고, 제자 만들고, 참신자 만드는, 그리고 온전히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한 사람 한사람을 만드는 사역이 얼마만큼 내게 있느냐가 문제지, 수천 명 수만 명 거느리고 그런 건 요새 말씀대로 목사가 CEO 아니에요. 목사는 목자지.

저는 그 표현 싫어합니다. CEO라는 말. CEO 예수님 아니오, 목자 예수님이요. 오늘에 대교회를 한다고 CEO 노릇하는 목자들이 신념이 없다면 아니요. 내 어느 곳에 가든지, 얼마만큼 많은 규모의 목회를 하든지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한 영혼 붙들고 정말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그 소명 앞에 부끄럽지 않게 눈물 뿌려 기도하고 사역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최근에 어떤 한국교회에 정말 지도자 가운데 한 분입니다. 우리 교단은 아니에요. 이름 안 밝힙니다. 큰 교회를 하는 분입니다. 어떤 기회에 식사를 하며 대화를 하게 되었는데 그분이 뜻밖의 이야기를 해요. 만명 이상 모이는 교회입니다. 두 가지를 이야기했는데, 하나는 공감이 가요. "자기는 애국적인 설교를 해야 되겠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게 쉽게 공감이 갔어요. 두 번째 하는 뜻밖의 말이 "대교회 하지 말자"는 거에요. 자기는 대교회 하면서 남 보고는 대교회 하지 말라는 거냐. 대교회가 가진 장점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대교회 할 필요가 없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분으로서의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대교회 해보니까 신자 만들지 못하고 교인 만들더라"라는 겁니다. 자기 경험에 그렇다고 대교회 하는 사람 다 신자 많이 못 만들고 교인 만든다는 이런 것은 아닙니다. 이분의 이야기입니다. 그럼 적게 한다고 다 신자 제대로 만드느냐. 그것도 아니에요. 이분에 자기 자신의 경험 속에서 이야기합니다. "나는 그랬던 거 같아. 교인 많이 만들어 놓은 거 같아." 자기 스스로를 좀 비판하는 표현을 씁니다. 깜짝 놀랐어요.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이 소명의 사역에 충실하려면 쉽지 않습니다. 어렵죠. 어렵습니다. 사명을 바로 감당하는 개개인의 사역도 힘들고, 소위 '갱신'이라는 이름 붙인 것, 교회 갱신을 한다는 것은 더더욱 힘듭니다. 이 이름 지을 때 15년 전에 옥 목사님하고 머리 맞대가면서 이 이름 짓고, 규약 만들고, 조직하고 할 때에 지금 가진 이름을 만들었거든요. "교회갱신을 위한 목회자협의회" 굉장히 신선하더라고요. 이름이 좋게 나왔어요. 그런데 10주년쯤 되었을 때인가요. 이 이름이 너무 무거운 거에요. 이게 사람을 짓눌러서 임원들이 한 번 회의한 적이 있습니다. "이름 바꾸자. 좀 거시기 해도 괜찮은 이름으로 좀 바꾸자." 그런 이야기까지 논의하다가 "그래도 이미 브랜드가 상당히 알려졌는데 어떻게 바꾸겠냐?"

중간에 못 바꿔가지고 지금까지 옵니다만, 이 이름이 우리를 억누르고 운신의 폭을 좁게 합니다. 까딱하면 손가락질합니다. "갱신? 니네나 잘해라." 통합 교단 전의 이름이 지금은 생명목회지만 전에는 바른 목회였지요. 똑같더라고요. 통합 교단 바른 목회한 사람들도 "니네나 바른 목회해라." 이런 조롱을 자기들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쉽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그 길을 향해 갈 때에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1장 7절에서 8절에 가나안 땅으로 가는 여호수아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 목표, 가나안 땅 상실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그 길을 가는 방법이 정로로 걸어가라. 가나안 땅 가서 삶도 율법을 중심해서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 즉 신앙과 삶에 있어서 정도를 걸으라는 말이죠.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갈레길이 너무 많아 이 길로 갈 수도 있고 저 길로 갈수도 있을 때, 이 정도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원리에서 벗어나지 말라.

요새 "꿩 잡는게 매다."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뭐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그건 아니지요. 사회적인 분위기도 그렇고, 교회 안에도 그렇고, 목회에도 그렇고, 우리는 알게 모르게 포스트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도 받고 있고, 교인들이 삶속에 많이 받고 있습니다. 여러가지 그 영향 가운데 하나를 지적한다면, 절대 신앙, 절대 진리에 대한 생각이 옅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안된다." "왜 절대로 안되요? 그럴 수도 있지요." 이런 식의 반응입니다. 애들에게 "너 그거 절대로 하지마." "아니. 그럴 수도 있지요." 그렇게 나옵니다. 이게 포스트 모더니즘의 영향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 진리, 우리의 생명이거든요.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도 희박해져가고 있습니다. 적당히 하자는 것이죠.

적당히 하는 것은 쉽습니다.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좁은 길로 걸어가라 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해보면 좁은 문, 좁은 길은 힘들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넓은 길로 가려고 하면 이건 비성경의 잘못된 거거든요. 넓은 길은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만든 길이 뭡니까? 중간 길이에요. 아주 편합니다. 이쪽에서 보면 넓은 길에서 보면 좁은 길이고, 좁은 문이 되는 거거든요. 신앙도 정로가, 사역도 정로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본질과 현상을 혼돈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질을, 신앙의 본질과 목회의 본질을 놓쳐버리고 현상을 붙잡을 때가 있습니다. 현상 붙잡고 하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본질을 붙잡아야죠. 그래서 우리 여름수련회는 어떤 목회 방법을 가르쳐 이렇게 하면 된다라기보다는 본질을 이야기하자. 목회자가 하나님 앞에 바로서고, 이야기하고, 박희천 목사님 첫 시간의 말씀대로 말씀과, 기도 그것 놓치고 현상, 방법 찾아가면 안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내일이 장미빛으로 여겨집니까? 목회나 사역이 내일은 장미빛이다? 환경적으로는 결국 장미빛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 질문 같은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할 경우가 있습니다. "어디로 갈꼬? 어떻게 될 것인가?" 당부하고 싶은 것은 가야 할 길, 가나안을 놓치지 말라. 그것을 다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명, 이것을 놓치지 말라. 이것을 확실히 붙잡아라. 그리고 정로로 걸어라.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현상 붙잡지 말고, 본질 붙잡고. 어렵습니다. 힘듭니다.

그러나 한 가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마치고 돌아가실 여러분들. 무엇을 붙잡았습니까? 붙잡은 거 있으면 참 감사하고요. 그러나 나는 별로 이번에 붙잡은 것도 없다. 한 가지만 생각합시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 내 사역에 내 목회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하나님 나와 함께 하시옵소서. 나와 함께 하시고 내 사역, 우리가 가는 목회에 달라지는 것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더 힘있게, 우리의 가슴팍 속에 간직해야 될 '그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하나님이 나와 계신다.' 임마누엘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과 사역이 모든 목회가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말미암아 가나안을 성취할 수 있는 큰 승리의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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