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0/02) 교갱협 제2차 장로섬김수련회 개회예배

사도행전 20장 28~38절

여러분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은 무엇입니까? 아마 신앙생활 하면서 나는 어느 구절이 제일 마음에 든다. 늘 암송한다. 또 그 말씀에 은혜를 받는다 하는 구절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 시간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저도 역시 좋아하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여러 구절들 가운데 하나는 디모데전서 1장 12절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바울 자신이 부름을 받고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다는 그것에 대한 자부심, 긍지, 감사를 고백한 말씀입니다. 신앙 안에서 이방인의 사도 바울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당시 사회 속에서 이방인의 사도는 그렇게 인정받는 직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가 가졌던 로마의 시민권보다 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다는 것에 대한 감사와 감격 그리고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저도 '하나님께서 나를 목사로 삼아주시고 세워주셨다.' 여기에 대한 감격은 그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감격스럽습니다. 아마 장로님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내가 장로가 되었다는 것 때문에 감격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통해서 볼 때 영광스러움과 동시에 우리의 직분에 대한 무한한 책임이 있음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오늘 사도행전 20장을 통해서 몇 가지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사도행전 20장은 바울이 두 번째 전도여행을 통해서 에베소에서 3년간 복음을 전하고, 그곳을 떠나서 다른 지방을 다녀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밀레도라는 곳에 도착해서 에베소 교회 장로님들을 밀레도로 초청합니다. 거기서 한 바울의 고별 설교가 오늘 본문입니다. 물론 그 앞에 17절부터 고별 설교는 시작되고 있습니다. 17~21절까지는 먼저 자신이 과거 3년 동안 에베소 교회를 목양했던 것을 회상합니다. 22~27절까지는 지금 현재 그리고 장래를 내다보며 자신의 장래에 대해 전망하고, 28절부터 마지막까지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당부한 부탁의 말씀입니다. 저는 굳이 목사와 장로를 구별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장로교에서 목사와 장로는 똑같은 장로며 단지 저는 가르치는 사역을 함께하는 장로입니다. 베드로는 "나는 너희들과 함께 장로된 자"라고 베드로전서 5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교회를 잘 섬겨 오신 줄 믿습니다. 그러나 이번 기회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이 가진 영광스러운 직분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나를 장로로 세우시고 하나님의 기대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새기는 그런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에 충성할 때에 여러분 자신과 가정과 자자손손까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있을 것을 믿습니다.

첫째, 28절 말씀 가운데 나타난 ‘삼가라’는 단어입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바울의 당부입니다.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향해서 바울은 "삼가하십시오" 그렇게 당부를 합니다. 장로는 삼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삼가한다’는 단어적인 의미는 무엇에 대하여 마음을 견제하는 것, 어떤 것에 대하여 마음을 견제하는 것입니다. 또 다르게 표현하면 조심하는 것, 함부로 방종하거나 나태하지 않는 것, 또 영적으로 표현을 하면 영적으로 깨어있는 것, 이런 것이 삼가하는 것입니다. 장로님들은 삼가해야 한다. 즉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방종하거나 나태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사도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장로님들에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삼가야 합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내 자신 한 사람 한 사람 각자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는 신앙에 있어서 삼가야 합니다. 그리고 생활에 있어서 세속화 되지 않고 성결함을 유지해갈 수 있도록 성도로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장로로서의 성결성을 견지해가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삼가야 합니다. 목사나 장로가 신앙과 삶이 바르지 못할 경우, 즉 삶에서 도덕성을 상실했을 경우, 그것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크게 잘못되는 것은 두말할 것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믿음과 성결한 삶을 힘쓰지 않으면 내가 목사라는 이유, 장로라는 그 이유 자체가 우리에게 믿음을 주거나 우리의 삶을 성결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직분 그 자체가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 자신도 고린도전서 9장 27절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라고 했습니다. 바울과 같은 위대한 사람조차도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지 않으면 신앙적으로 버림이 될까 두려워하며 자기 경성, 자기 채찍질을 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대부분의 장로님들이 잘 하시고 계시지만, 가끔 안 좋은 소문이 들릴 때 참 황당하기도 하고 가슴 아픈 경우가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장로님을 선출하는데 그 교회는 순장들을 통해서 추천되어서 가장 훌륭하신 분을 교회 장로님으로 세우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교회 이야기입니다. 그 교회에서 거의 모든 사람이 '저 분 같으면...' 하고 그냥 1번으로 추대될 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 소문이 나자 여튼 친구에 의해서 드러났는데, 이 분이 이중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분명 가정이 있으면서 이중적인 생활을 하는 그런 것이 터져서 교회적으로 큰 낭패를 당했던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에 "네 발의 신을 벗어라"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신을 벗는 것의 의미는 성경학자들의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만 종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 당시 종은 신을 신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성결입니다. 출애굽의 큰 사명, 거룩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성결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하는 어느 누구든지 자신의 신앙과 성결한 삶을 제대로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떻게 하면 신앙생활 잘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성결한 삶을 살 수 있을까?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기본, 예배에 충실하고 기도생활, 말씀생활을 제대로 하면 됩니다. 내가 직분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어떤 신앙인으로 서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바른 예배생활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기도생활과 말씀생활이 기본이 안 되면 다른 모든 것은 다 무너지게 되어있습니다.

두 번째 삼가해야 할 이유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고 합니다. 18절에 양떼는 결국 교회죠. 왜냐하면 평신도보다도 장로님들은 높은 신앙과 도덕성이 요구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5장 3절에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교훈한 것입니다. 적어도 나로 인해서 양떼가 실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성도들을 위해서라도 목사와 장로는 삼가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사회 속에서 교회가 영광을 잃어버렸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다움을 상실하고, 세상에서 교회를 볼 때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 전체 속에서 가장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 중 하나가 어떻게 하면 오늘의 교회의 영광을 다시 회복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영광을 추락시킨 여러 가지 이유 가운데 목사, 장로의 잘못이 중요한 이유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내 영적인 삶이 약화된다는 것은 내 개인의 위기뿐만 아니라 내가 몸담고 있는 교회의 위기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영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짧은 1박 2일이지만 이 짧은 기간 속에서라도 우리의 영성을 다시 한 번 회복시키는 그런 기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말씀에 좀 더 깊이 들어가야겠다' '기도생활 좀 더 힘써야겠다' '예배의 영광이 나타나고 예배를 통해서 내 자신이 은혜 받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그런 예배의 삶이 되어야겠다'는 이런 다짐들을 우리가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번 집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는 19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하는 말이 있습니다. 둘째는 섬기라는 말입니다. 이 부분은 바울 자신이 3년 동안 어떻게 에베소 교회에서 일했는가 하는 것을 장로님들에게 이야기하는데, 그는 '나는 섬겼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섬겼다'는 단어는 '라트류오'라는 헬라어입니다. 이것은 '둘로스'라는 말에서 파생된 말인데 '둘로스'의 뜻은 종입니다. 사도 바울이 3년간 종의 심정으로 섬겼다는 말 입니다. 종은 섬기는 것 이고 절대 순종이죠. 종은 자기 의지가 없습니다.

섬길 때에 겸손, 눈물, 인내 세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종으로 섬겼는가? 19절에 보면 모든 겸손으로 섬겼다. 눈물로 섬겼다. 주의 몸 된 교회를 섬기다가 울 때도 있었고 여러 가지 시험들이 있었지만 인내로 잘 참았다. 겸손과 눈물과 인내로 종으로 섬겼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교회의 모든 직분은 섬기라고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자칫 섬김이 아닌 군림으로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한국교회 병패를 신학자들이 목회자들을 지적하는데 그 하나가 교회 안에 직분에 대한 계급의식입니다. 교회 안에 모든 직분은 섬기기 위해서 주어진 직분이지 계급이 아닙니다. 계급의 특징은 점점 올라갑니다. 군대 계급이 올라가고 회사도 직급이 점점 올라가지 않습니까? 그러나 교회 안에서 주어진 직분은 온전한 섬김이지, 계급이 아닙니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계급의식이 한국교회 안에 참 많습니다.

저희 교회 돌아가신 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이 안수집사였다가 장로가 됐어요. 그래서 회사에 가서 자신이 교회 장로가 되었다고 했더니 교회 안 다니는 사람들이 잘 모르니까 하는 말이 “그러면 몇 년만 더 있으면 목사되나?” 그러더래요. 교회 안 다니는 사람들은 목사가 제일 높지 않겠나 생각하는 거죠. 아니죠. 목사가 결코 높은 계급도 아니고 장로가 결코 높은 계급이 아니죠. 권사님들도 이런 표현하는 사람이 있어요. 여자 집사가 권사가 되었습니다. 그분의 표현이 "나 권사 땄다" 그래요. 뭘 땁니까? 따기를... 권사 직분 따는거 아니잖아요? 그런데 생각이 그렇다는 겁니다. 이것이 알게 모르게 몸에 베어있는 교회 직분에 대한 계급의식이에요.

이것은 잘못된 한국교회의 병패입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내가 종으로 섬겼는데 겸손히 섬겼다." 결코 쉽지 않지만 자격이 없다고 고백할 때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내가 목사로서 자격이 없다고 고백할 때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장로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자격이 있다고, 장로로서 넉넉한 자격이 있다고 '내가 안 되면 이 교회에서 누가 돼?' 그런 마음이 있으면 절대로 겸손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자격이 없는 사람인데 교회의 장로가 되었다는 무자격을 선언하면 겸손히 섬길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학벌이나 재산이나 세상적인 지위나 더 나아가서 교회 안에 어떤 주어진 직분으로 인해서 교만해선 안됩니다. 바울사도가 섬겼다는 것은 사명에 대한 충실성을 말합니다. 사명에 충실했다는 거죠. 그래서 24절에도 그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과거에도 사명에 충실했지만 앞으로도 나는 사명에 충실하고 싶다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그의 생에 마지막 죽음을 앞두고 디모데후서 4장 7절에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는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장로는 섬김의 사명감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이름만 무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섬기는 장로상을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가야 합니다. 저는 목회자들에게 하는 설교가 많습니다. 그때 꼭 해주는 말은 “하나님이 왜 나를 목사로 만들었을까?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 대답을 바로 한다면 목사의 걸음걸이가 제대로 가지, 삐뚤게 가지 않습니다. 어떤 잘못된 생각과 길을 가다가 이 질문을 한다면 바로 설 수 있습니다. 똑같은 질문을 여기 오신 장로님들께 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왜 장로로 세우셨을까?" 그 질문에 제대로 대답한다면 자신의 위치를 바로 세워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5장 2절에 보면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책망이 나옵니다. 처음에 가졌던 그 정신을 잃어버렸다는 겁니다. 디모데전서 4장 14절에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네가 장로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받았던 그 은사를 계속 불같이 일으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감격스러웠던 장면을 생각한다면 아마 목사 안수 받을 때, 장로 안수 받을 때일 것입니다.

지금 우리 헌법에는 나이가 30세가 되어야 목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목사 될 때는 지금으로부터 33년 전인데, 27세면 목사가 되었습니다. 저는 미안하지만 국가에서 군대 오지 말라고 해서 군대 안 갔습니다. 대학 나오고, 신대원 다니고, 강도사 고시 떨어지지 않으니까 27세가 되었습니다. 딱 만 27세. 제가 생일이 8월인데 노회가 9월이었거든요. 딱 만 27세 3주 만에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일찍 된 사람도 잘 없을 것입니다.

지금도 기억이 나는 것은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을 때 새파랗게 어린 사람이 목사가 되는데, 머리가 희끗희끗 하신 어른 목사님들이 머리에 손을 얹고 노회장이 기도하시는데, 그 노회장님이 연세가 높아 손을 좀 떨었습니다. 막 떨면서 안수기도 해주시는데 더 감격스럽데요. 기도하시는데 그 때 가슴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감격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눈물, 콧물 막 쏟아지면서 '이제 난 죽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 당시에 목사는 죽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요새 젊은 목사들은 목사가 되면 사는 거로 생각하더라고요. 생각이 다른 것 같아요. '이젠 죽었다.'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아골 골짝 빈들에라도 복음 들고 가겠습니다.' 그 당시에는 결심하고 굉장했습니다. 그 감격이 있어요.

지금은 제가 노회 안에서 후배 목사님들 안수하는 나이, 위치가 됐습니다. 다른 노회는 잘 모르겠지만 요즘 목사 되는 사람들은 눈물 한 방울 안 흘려요. 똘망똘망해요. 안수 받고 눈물 닦고 나오는 사람 거의 보기 힘듭니다. 이거 도대체 어쩌자는 거에요. 안수 받을 때도 그 정도 감격 없이 목사가 된다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서 수년 동안 강도사님이 목사 안수 받는다고 하면, 목사 안수 받기 일주일 전에 무조건 기도원에 보냅니다. "아주 낡고 오래된 기도원에 가서 심각하게 일주일 동안 기도하고 오너라. 정말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목사로 세우시냐 안 세우시냐 내가 정말 목사가 되야 하는가 기도해 봐라. 그리고 금식하면 더 좋고. 여러 번 금식 못하겠어도 한 끼라도 금식하고 하여튼 몸부림치고 결단 내리고 오너라" 그렇게 주문하고 있습니다. 금년에도 세 사람인데 이번 주간인가 다음주간인가 기도원 갈 겁니다.

장로님들은 어떠세요? 장로 안수 받을 때에 어떤 심정이셨습니까? 1년 전, 5년 전, 20년 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내가 장로 안수 받을 때에 어땠는지... 눈물, 콧물이 안 되더라도 그래도 가슴이 좀 뭉클해지고 '이제 장로가 되는구나.' '하나님이 나를 장로로 세우시는구나.' '장로로서 내가 교회를 잘 섬겨야겠다.' '정말 목사님께 큰 힘이 되는 장로가 되야겠다' 하는 뭐 이런 여러가지 생각했을 것 아니에요. 이제 그것이 내 마음 속에 제대로 살아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회복해야 합니다. 만약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떨어졌다면 회복해야 합니다. 처음 안수 받았을 때의 그 감격과 그 결심을 다시 한번 회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그런 장로 본이 되고 온 성도들이 좋아하는 그런 장로가 되자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37절입니다. 37절에는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바울의 계속된 설교가 끝나고 마지막에 같이 목을 안고 울며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이 표현은 결국 사랑입니다. 목사와 장로 사이에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마음으로 사랑하는 겁니다. 또 다른 하나의 연민은 사역으로서의 동역자 의식입니다. 여러분의 목사님을 사랑하십니까? 여기에 오신 분들은 다 좋은 분들만 오세요. 질문할 필요가 없죠. 이거는 우리 목사들이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사역을 할 때에 장로님들을 동역자 의식으로 대하는 겁니다. 함께 목사님이 장로님을 생각할 때에 경쟁자나 대립각을 세우는 식이면 안 됩니다. 장로님들이 목사님을 대할 때에 함께 교회를 섬기는 동역자라는 의식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나는 목사의 목회를 돕는 조력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출애굽기 17장 사건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비딤에서 아말렉과 전쟁을 치를 때에, 여호수아는 나가서 전쟁을 치르고 모세는 뒷산에 가서 손을 들고 팔이 아파서 내려올 때에 아론과 훌이 모세를 앉히고 한 팔씩 끝까지 받들어 올렸더니 이스라엘이 마침내 이기게 되었다는 그 사건이 나옵니다. 그 사건 속에서 출애굽 집단은 오늘날의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7장 38절에 보면 구약 최초의 교회는 바로 출애굽 집단입니다. 광야교회라고 불려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비딤에서 승리했다는 것은 광야교회의 승리입니다. 오늘의 신약 교회의 승리입니다. 교회가 어떻게 승리할 수 있는가 하는 모델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습니다. 그것을 끝까지 받들어 물론 두 손을 높게 드는 모세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것은 아론과 훌이 한 팔씩 받들어주는 협력이었습니다. 만약 그것이 없었더라면 모세는 손을 들 수 없었을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은 패배할 수 밖에 없었을 것 입니다. 이런 관계성의 회복이 참 중요합니다.

많은 한국교회가 목사님과 장로님들 사이에 동역자 의식, 협력자 의식이 상실되어지고 대립적인 존재로 나가는 경우가 있고, 그것 때문에 교회의 권위가 실추되어지고 성도들이 아파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이것들을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목사는 장로님들을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동역자 의식으로 함께 끌어안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 입니다. 장로님들도 동시에 사랑하고 목회 동반자로서 주의 몸 된 교회를 섬긴다는 그런 의식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영광을 회복할 수 있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바울이 에베소교회 장로들이 하는 이 설교를 통해서 '삼가라'는 말, 삼가하자, 그리고 종으로 섬기자, 목회자와 장로와의 관계 속에서 동반자 의식으로 동역자 의식으로 서로 사랑하자, 그럴 때에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교회들이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좋은 장로님들 때문에 교회에 기쁨이 있고 성도들이 신이 나고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는 그런 축복이 한국교회 위에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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