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08/20) 교갱협 제6차 영성수련회 개회예배

디모데전서 1장 12~17절

제가 신학교 다닐 적 이야기므로 약 3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요즘도 신학생들이 컨닝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때 우리 클래스에서는 신학생들이 시험 칠 때 컨닝을 하는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은 한 사람씩 신학생으로서 시험시의 부정행위에 대한 규탄을 발언하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시험부정 행위에 대해서 발언하면 또 다른 학생이 같은 취지의 발언을 한는 식으로 몇 명인가의 발언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앞에 나가서 발언하는 사람은 전부 부정행위를 안 한 사람이고 가만히 앉아서 듣고 있는 사람들은 마치 부정행위를 하는 듯한 분위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서두에 제가 이런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유는 6년 전 옥한흠 목사님을 모시고 교회 갱신 운동을 시작했을 때에 주변에 있는 교단 목사님들로부터 이와 같은 유의 비난을 참 많이 들었습니다. "너희들이 뭐 잘났다고! 갱신! 너희들이나 갱신해라! 갱신의 대상자들이 모여서 갱신하겠다고 외치느냐!" 하는 비난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 말이 맞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갱신을 하자고 누구를 향해서 외칠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향해서 외치는 것이 갱신운동의 첫 걸음이기 때문입니다.

17세기 영국교회를 일깨웠던 우리가 잘 아는 리처드 백스터의 우리말로 번역된 “참 목자상” 이라는 이 책은 목회자들에게는 고전으로 읽혀지는 그런 책입니다. 이 책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목회자의 자기 성찰입니다. “목회자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라는 주제하에서 목회자의 자기 성찰에 대한 여러 가지 내용들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우리 목회자 자신이 우리의 내면 세계, 우리의 신앙 자세, 우리의 섬김의 모든 것을 한번 돌아볼 때에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저는, 자신을 돌아보면서 일종의 위기감을 느끼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한국교회 목회자의 현주소가 과연 어떻게 되어 있는가? 정말 우리가 부름 받은 목회자로서의 삶과 사명완수가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되고있는가? 거기에 대한 긍정적인 답변보다는 부정적인 생각이 더 들기에 어떤 위기감이 더 든다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디모데전서 1장 12절 이하의 이 본문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어떻게 보면 목회자 사도바울의 간증이라고 볼 수도 있고, 자기고백이며 자기 정체성을 표현하는 내용입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하면서 그 하나님의 은혜로 죄인 괴수인 내가 구원받았고, 그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고, 그 하나님의 은혜로 내게 능력을 베풀어 주셔서 이 사도의 능력을 감당케 하셨다는 자기 고백입니다.

이런 바울의 자신 있는 고백에 비추어 볼 때, 오늘 이 시점에서 교회를 섬기는 “우리 목사들은 과연 하나님 앞에서 바른 목회자 상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만이 느끼는 위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같이 느껴야 할 위기가 몇 가지 있다고 생각되어집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에는 목회자의 자기성찰이라는 주제하에 오늘을 사는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의 위기를 본문을 중심으로 몇 가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럼 무엇이 오늘날 우리 목회자의 가장 큰 위기인가?

첫째는, 소명감의 상실입니다.

소명감의 상실은 결국 목회자의 직업의식의 변화를 뜻합니다. 목회자의 출발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 소명에서 출발이 되어집니다. 즉,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출발이요 그,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 오늘의 목회자로서의 출발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사도행전 9장에서 그는 전혀 생각할 수도 없었던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극적 체험을 가지면서 사도바울 자신이 꺽어지는 부르심을 듣게됩니다. 또한 아나니아를 통해서 들려진 이방인을 위한 택한 복음을 담는 그릇이라는 항거할 수 없는 부르심을 받고 거기에서 이 귀한 사도직을 받게됩니다. 사도바울뿐만이 아닙니다. 성경에 나타난 모든 선지자들은 자신이 하고 싶어서, 자신을 위한, 자신의 일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출애굽의 일꾼이 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그는 순종했을 따름입니다. 이사야를 비릇한 많은 선지자들도 자신의 의자가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고 그 부르심에 응답한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본적인 사실 앞에서 우리 목회자의 모습은 과연 이러한 소명의식으로 가득 차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 봅니다. 많은 경우 이 소명의식은 약화되어져 가고 있고, 부끄럽게도 직업의식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나온 목사님들은 들으시면 불쾌하시겠지만 적어도 이, 삼십년 전만 해도 목회직으로의 출발은 소명에 의한 출발이었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혹은 여러 가지 방편을 통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여러 가지 모양으로 하나님이 나를 주의 종 되라고 부르시는 내적인 부르심을 강하게 느끼며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결코 육신적으로는 편하고 영광을 누리는 목회직이 아니었기에 너 나 할 것 없이 이 길은 십자가 지는 길이요,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부름이 있기 때문에 “순종하며 십자가지며 이 길 가겠습니다” 하는 그런 소명에 의한 출발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그런 소명에 의한 출발보다는 자신이 선택한 좋은 일로, 좀 더 지나친 표현을 한다면 하나의 생계 수단으로 목회직이 선택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저는 전에 어떤 장로님으로부터 아주 혹독한 비난의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목회자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신분 상승을 노려서 목회직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굉장히 기분 나쁜 비난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의 목사직은 옛날에 비해 많이 편안해진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안정을 주는 하나의 좋은 직업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한 예로 어떤 청년 목사님이 선을 보는데 그 목사님은 서울 시내의 아주 큰 교회의 부목사님이셨습니다. 상대편 아가씨가 몇 가지를 물었답니다. 그 중에 "이 정도 큰 교회의 부목사 정도이면 월급이 많겠군요? 그리고 차는 제공되죠?" 등등의 누려야 될 여러가지 육적인 삶의 여건을 묻더라는 것입니다.

소명과 직업의 차이가 뭡니까? 소명은 하나님의 부르심이요, 직업의식은 나 자신의 선택입니다. 소명은 절대적인 것이지만 직업은 선택적인 것입니다. 소명은 보수에 매이지 않지만 직업의식은 보수에 매입니다. 소명에는 자기 희생이 따르지만 직업의식 속에는 목회직에 자기희생이 없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부교역자 모집시 인터뷰에서 첫 마디로, 월급이 얼마인지부터 묻는답니다. 전체는 아니지만 이러한 분위기가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분명하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목사직이 절대 좋은 직업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저희 신학교 1학년 수련회 때 지금은 돌아가신 박윤선 목사님으로부터의 설교를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는데 그때 그분이 외치시던 말씀 가운데는 “여러분 가운데 소명감 없이 이 자리에 앉아 있다면 당장 그만 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저희 클래스에서 한 친구가 그 말씀을 듣고 그만 자리를 떠나버렸습니다. 지금은 모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더 양심적인 선택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 자신이 점점 잃어가고 있는 이 소명의식! 이것의 약화는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위기며, 우리 목회자의 위기입니다.

목회자의 위기 가운데 가장 첫 번째로 손꼽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소명의식의 약화입니다. 그렇다고 옛날에 목사 된 사람은 소명의식이 강한 사람이고, 요즘 목사 된 사람은 소명의식이 없는 사람이냐?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강한 소명의식을 가지고 출발했지만 점점 약화되어서 오늘의 지금으로 전락한 경우도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제 자신이 자꾸 그렇게 되어간다는 위기를 느낍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이 가슴속에 너무 뜨겁기 때문에 “십자가지고 고난을 당해도 정말, 아골 골짝 빈들에도 가겠습니다“ 하는 자기 헌신적인 결단이 계속 우리 마음속에 살아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지금의 목사직을 집어치워야 합니다! 소명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목회하는 목사들 때문에 교회가 문제가 되고, 내가 섬기는 이 교회 문제 때문에 한국교회 전체가 위기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두 번째는 성결성의 상실입니다.

성결성의 상실은 곧 세속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목회직은 성도라는 부름 그 자체만으로도 거룩한 부름이지만, 목회직은 거룩한 직이며 그 어떤 직보다도 거룩성이 요구되고 있는 직입니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오늘의 이 시대 상황 속에 있는 저와 여러분을 포함한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성결성을 유지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선지자들이 부름 받을 때에 출발이 어떠했습니까? 이사야 6장 1절 이하에 보면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 순간에 “화로다 나의 망하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다. 감히 이 부정한 입술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복음을 전하는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을 것인가”라고 그는 고백했습니다. 그 때 제단에 핀 숯으로 그의 더럽다고 고백한 입술을 정결하게 만들어 주시자 그 정결한 상황 속에서 선지자의 사역이 시작되었습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모세를 부르실 때에 첫 번째 하신 말씀이 뭐였습니까? 3장 5절을 보면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신을 벗는다는 것은 성경학자들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으나 그중 가장 중요한 해석 가운데 하나로서 성결성을 요구했다는 사실입니다. 신은 신고 다니면서 더러워집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모세의 더러운 행위를 뜻하는 것이며, 이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부름 앞에 출애굽의 대 역사를 위해서 일하러 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 더러움을 버리라는 사실입니다.

성결해지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도 요즘 목사들의 가치관의 세속화와 삶의 세속화에 더 큰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신자는 적어도 불신자 보다 더 성결성을 유지해야 되고, 목회자는 그 가운데 성도들보다도 더 높은 수준의 성결성이 요구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그 성결성을 보다 높은 수준의 성결성을 유지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사실들을 몇 가지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그분은 한국교회에 유명한 부흥사입니다. 그 분이 은혜를 많이 끼치고 부흥회를 마치자 목사님들이 몇 사람 모인 가운데 어떤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그렇게 부흥회를 잘 인도하십니까?" "어쩜 그렇게도 은혜스럽게 말씀을 증거하십니까?” 그때 그 부흥사 되시는 그분의 대답이 “거짓말 안 하고 되나?” 충격이었습니다. 예화로 드는 여러 가지들을 거짓말로 꾸며낸다는 것입니다.

부끄럽게도 그 정도는 약과입니다. 오래 전 신문에 난 것은 목회자들이 매 월요일에 모여 여관방에서 도박한다는 사실입니다. 목사들이 놀음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단의 어떤 부흥사는 부흥사 회장까지 하며 전국을 누비는 부흥사인데 부인 외에 또 다른 여자를 두고 살았답니다. 그것을 알게 된 교단 측에서 그 사실을 지적하며 정리하기를 원하자 오히려 목사직을 팽개쳐 버렸답니다.

한국교회에 이혼율이 높아간다고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혼율이 30%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위기입니다 가정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목사가 주례한 가정이 이혼했다는 사실을 들으면 허탈해 집니다. 그런데 목사도 이혼을 하더군요. 이혼하는 목사를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목사도 사람이니까 이혼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목사가 이혼했다면 목사직을 집어치워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당당하게 목사로서 일하고 있습니다. 노회가 그것을 방관한 채 교묘하게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더 부끄러운 사실은 제가 주례한 목사가 이혼하고 목회한 목사가 있습니다.

우리 교갱협에서 주장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우리 교단의 총회의 부패상입니다. 특히 임원 선거의 문제를 지적하고 제비뽑기를 오래 전부터 주장했으며, 작년 총회에서는 그것이 가결이 되어 이번 총회에서 적용하려 앞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문지상이나 들리는 소문으로 이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크다는 것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왜 반대할까요? 왜 옛날 식으로 하자는 걸까요?

제비뽑기 총회를 두고 어떤 목사님은 그렇게 되면 선거하는 것이 재미가 없답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에게 “선거하는 게 재미있어서 뭐합니까?” “왜 재미가 없습니까?” 하고 묻자 그 목사님께서는 노골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돈이 안 생긴다. 전 같으면 출마할 목사장들이 와서 굽신거리고 찬조금 좀 내라면 천만 원이고 이천만 원이고 들고 오는데, 제비를 뽑는다니깐 오는 사람도 없고 주는 것도 없어 허탈하다"고 합니다. 그런 건 안주고 안 받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번 총회가 어떻게 될 지 모르지만 우리 교단 안에서는 이번 선거를 앞두고 소위 말하는 선거 브로커가 약 30명 정도 있다고 합니다. 그 브로커들은 선거를 앞두고 전국을 누비며 출마자에게서 돈을 갈취해 좋지 못한 일을 하던 그런 사람들입니다. 제비뽑는 선거가 재미없답니다! 제비뽑기가 성경적이냐, 민주적인 법에 합당하냐는 등 지금 야단들입니다. 정말 허탈한 모습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비뽑기를 하자는 것은 우리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비뽑기 방법을 선택하지 않으면 전부 돈 받아서 돈 쓰고 하는 정도 밖에 안되니 우리는 이 방법이라도 해보겠습니다“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얼마나 부끄러운 모습입니까?

교단의 증경 총회장 혹은 중진 어른이 사석에서 이런 이야기들을 하더군요. 자신은 제비뽑기를 반대한다고 그게 뭐냐며 열을 냅니다. 저보다 10년, 20년 이상의 어른들입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당돌하게 대놓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돈 쓰고 하자는 말입니까? 10억 뿌리고 또 하자는 말입니까? 이게 뭐 하는 겁니까?” 아무 말도 안 하더군요. 벌써 몇 년 전이지요. 갤럽에서 직업에 관한 윤리 수준을 평가하며 순위를 측정한 적이 있습니다. 목사가 몇 등이었는지 아십니까? 신부보다 못하고, 교수보다 못하고, 신문 기자보다 못하고, 절간의 중보다 못해요! 이런 정도의 수준 갖고 제대로 하겠습니까? 제 가까이에 있는 어떤 목사님이 저에게 개인적으로 말씀하시더군요. “김 목사, 우리 나실인 운동 좀 벌여보는 게 어떻겠는가?" 즉 성결운동을 벌이자는 겁니다. 너무나도 세속화가 되어가는 지금의 모습 속에서 목회자들의 성결운동을 벌여보자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목회자의 겸손의 상실의 상태입니다.

교만해진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고, 하나님께서 내게 직분 주시고 하나님께서 내게 능력을 주셨다는 그 은혜를 강조한 사람입니다. 본문에서 말한 것처럼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헤로 된 것이다.” 그런 고백입니다. 사도바울은 “나는 죽노라 때로 내 자신이 교만해질 때 나는 나 자신을 쳐 복종시킨다.”

고린도후서 12장에서는 그는 찌르는 가시의 아픔을 느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세 번 기도하고, 주님께서 그것이 있는 것이 좋다고 했을 때 약할 때 강해지는 것이며, 나를 자고하지 않도록, 교만해지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 이 가시를 준다. 사도바울 같은 사람도 교만해지려 하는 우려를 그 자신도 느꼈습니다. 주님이 실제적으로 그것을 느끼셨기에 찌르는 가시를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천성적인 성품부터 겸손할는지 모르지만, 저는 교만해질 가능성을 늘 품고 있는 사람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리차드 백스터의 "참 목자상"에서 가장 강조되어지는 단어 하나가 '겸손'입니다. 목회자의 기본자세가 겸손이요, 양떼를 돌봄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으로 겸손이라는 것이 굉장히 강조되어짐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교만하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의 눈에 비친 목사의 교만한 모습, 아니면 같은 목회자들끼리 다른 목회자의 눈에 비친 우리 자신의 교만성, 부인할 수 있습니까? 미안합니다만은 교회가 크면 얼마나 크다고 교회 자랑할 겁니까! 보수를 얼마나 많이 받는다고 보수 받는 거 자랑할 겁니까! 그뿐입니까? 좋은 차 타고 다닌다고 자랑합니다.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 목사들이 그것 누리려고 목사합니까? 우리 자신이 이런 면에서 깨어져야 합니다! 사람들도 교만한 사람 싫어하지만 하나님은 철저하게 교만을 싫어하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도 이런 문제로 큰 시련에 빠졌던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짦은 저의 얘기입니다만은, 제가 지금 섬기고 있는 교회에 22년 전에 왔습니다. 그 때 제 나이가 32살이었습니다. 그 때 교회 규모는 장년신자만 650명 정도였습니다. 79년도니까 목사안수 받은 지 불과 4년쯤 밖에 안됩니다. 제 친구, 제 동료들은 개척교회 하면서 100명을 모으니 못 모으니 하던 때이고, 아직까지 많은 저의 목사 친구들이 부목사로 일할 시절입니다. 아마, 옥한흠 목사님도 그때 개척하셔서 100명에서 200명 모았을 시기입니다.

그런데 어린 사람이 철모르게 목회를 하는데 교회가 부흥해 갔습니다. 1년에 100명씩 성도가 증가했었습니다. 80년도가 되니깐 칠백, 팔백을 넘어 천 명이 넘어갔습니다. 저 자신은 잘 모르고 있었겠지만 상당히 자만심을 가졌을 것으로 생각되어집니다. 친구들을 만나도 목에 힘을 줍니다. 그 때에는 각 교회에 봉고가 있으면 잘 있는 거고, 중견 목사님들도 포니 정도 타시면서 차 있다고 폼 내고 타시는 걸 교인들이 감시하고, 사모님들이 그 차를 타면 차 탄다고 비난하던 그런 때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당시 중형차 마크5를 타고 다녔습니다. 그러니 잘 나갔죠. 제 친구 목사는 제가 차 샀다고 하니까 드라이브 한번 시켜달라고 해서 남산으로 드라이브 간적도 있습니다. 잘 나가지 않았습니까? 한창 목회가 총 나간다 칼 나간다 할 때입니다. 교인들이 깜빡 깜빡 넘어지는 걸 어떡해요? 제 속에 자만이 가득 찾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창 잘 나가던 83년 1월 16일 예배당에 불이 났습니다. 주일날 밤에 예배당이 다 타버렸습니다. 저는 그 때 다른 교회 예배를 인도하고 나서 가 보았는데, 불이 났다길래 대학부실이나 어느 한 쪽이 탔겠구나 생각했는데 본당이 활활 다 타버렸습니다. 그날 밤 누가 신고를 했는지 MBC 카메라가 밤 9시에 전국에 생중계를 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조선일보에는 사회면 톱기사로 “일요일 예배당에 불! 대한예수교장로회 서현교회 담임목사 김경원” 전국에 떡칠을 해버렸습니다. 망신은 다 당하고 전 그 당시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가 섬기는 교회의 예배당에 불 내는 목사를 무슨 목사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다음날 새벽기도 한다고 유치원 하려고 사둔 곳에서 새벽기도를 하는데 참 많이 울었습니다. 그렇게 많이 울기는 그때가 처음일 겁니다. 제일 궁금한 건 “하나님, 왜 불이 납니까?” 불이 나는 이유로는 실화, 방화, 전기누전 세 가지 밖에 없습니다. 불이 난 이유를 경찰이 아무리 조사해도 미수에 끝났습니다.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실화나 방화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인데.. 예배당에 불나는 건 보통 사건이 아닌데.. 왜 예배당에 불이 납니까? 내가 섬기는 예배당에 왜 불이 납니까?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제 귀에 바로 들리는 소리는 아니었지만, 제 마음에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은 바로, "네가 너무나 교만하다" 이겁니다. "네가 뭐 잘났냐" 이겁니다. "넌 아무것도 없어! 하루아침에 불나버리면 넌 아무것도 없어!" 정신이 번쩍 들더군요. '하나님이 꺽으시는구나!' 우리 스스로 겸비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꺽으실때는 굉장히 아프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이론적으로 말합니다. 다 섬기는 종이다. 종! 종은 종놈이지, 종님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를 종님 되기 원하지 종놈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이론적으로 섬긴다고 하면서 참으로 섬기는 자세인지, 아니면 섬김을 받으면서 스스로 자만에 빠지는 어리석은 목회자가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겠습니다.

누군가가 만들어낸 이런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어떤 집사가 죽어서 천국에 갔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어서 오라며 반기시더랍니다. 그리고 장로가 죽어서 천국에 갔답니다. 역시 예수님이 반기셨지만 집사보다는 덜 반겼답니다. 그리고 이제는 목사가 죽어서 천국에 갔더랍니다. 어땠을까요? 예수님이 반가워하기보다는 자리에서 꼼짝도 안 하시더랍니다. 목사가 섭섭하고 화가 난 마음에 예수님께 물었답니다. “그래도 제가 목사였는데 사람 차별하십니까?” 라고. 그 때 주님의 대답! “내가 일어나면 너 이 자리에 앉으려고?” 누가 만들어낸 농담인지 모르지만 오늘날의 목회자에게 굉장한 도전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자신이 그렇지 않다고 자신 있게 부인할 수 있습니까? 우리 자신을 성찰해 볼 때 이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 가진 위기라는 사실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로 능력의 상실입니다.

곧 무능한 목회자로의 전락입니다. 다시 본문의 12절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셔서 나를 능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내게 능력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바울은 신유도 베풀었습니다. 기적도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능력은 그런 능력보다는, 오히려 말씀의 능력 말씀을 통해서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으로 생각하고 싶습니다.

빌립보에 갔을 때 루디아가 마음 문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빌립보 옥에 갇혔다가 간수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그 간수가 회개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말씀을 증거했을 때 내가 증거한 그 말씀으로 인해 불신자가 신자가 되고, 약한 신앙이 강한 신앙으로 바뀌는 역사! 이것은 말씀의 능력이고, 복음의 능력이고, 오늘 목회자가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역했던 모든 사역자들은 이렇게 능력 있는 사역자들이었습니다.

모세가 능력 있게 사역했습니다. 나단 선지자도 범죄한 다윗 앞에서 "당신이 바로 그!"라고 외쳤을 때 다윗이 그 자리에서 꺽어졌습니다. 나단은 개인의 위대함이 아닌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자는 능력 있는 사역자들입니다. 베드로가 전도했을 때 하루에 삼천 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오늘의 목회자들, 저와 여러분이 안고 있는 한 가지 문제가 뭡니까? 능력이 상실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약화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매주일 설교를 수없이 합니다만은 내가 증거한 이 설교, 즉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설교하시다가 한계를 느껴보신 적이 없으십니까? 저는 한계를 느껴본 적이 참 많이 있습니다. 설교가 어떤 때는 벽에 부딪쳐 버리는 것을 느낍니다. 어떤 때는 그렇게 준비하고 기도하며, 심혈을 기울여서 외쳤는데도 교인들은 아무런 반응도 없습니다. 전혀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럴 때면 '이렇게 설교 해서 뭐 하나' 하는 자문을 해 봅니다. 제 자신의 설교에 한계가 왔나하고 몸부림칠 때도 있습니다. 5년, 10년 사역해도 교회와 교인의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 그 수준일 때 우리는 흔히 말하기를 "이건 장로 탓이다. 장로들 때문에 목회가 안 된다" 혹은 "교인들 탓이다. 양이 아니고 전부 염소 같은 교인들만 모였다. 강팍한 심령들만 있어서 안 된다"고 교인들 탓할 때가 참 많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교인 탓입니까? 누구 탓일까요? 우리는 능력을 상실한 우리 자신을 돌아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치 머리 깍인 삼손처럼 하나님의 능력이 임재하고 있을 때 삼손은 엄청남 일을 해 냈습니다. 그러나 머리가 깍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능력이 떠나가 버린 것입니다. 그런 상태 속에서 힘이 있던 옛날과 같이 힘을 써보려 안간힘은 써보지만 안 되는 것입니다. 사사기에 보면 하나님이 그를 떠나신 것을 알지 못했다 했습니다.

엘리사의 사건 속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것을 보게 됩니다. 엘리사가 기적을 베푸는 가운데 한번은 그를 잘 공경했던 수넴 여인, 나이는 많았지만 자식 없는 수넴 여인에게 하나님의 기적으로 아이를 낳게 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아이가 죽었습니다. 이 여인이 달려와서 엘리사에게 엎드렸습니다. 아이가 죽은 사실은 알고 게하시를 데리고 그 집으로 갑니다. 그 때 웬일인지 엘리사가 게하시에게 자기가 가진 지팡이를 주면서 “너는 이 지팡이를 더 빨리 가지고 가서 그 아이에게 놓아라” 그리고서 엘리사가 뛰어 갔습니다. 죽은 아이에게 지팡이를 놓았습니다. 지팡이를 몇 번이고 들었다 놓았다 해도 죽은 아이는 꼼짝을 않습니다. 나중에 엘리사가 도착해서 눈, 코, 입을 맞대고 죽은 아이에게 엎드립니다. 그러자 죽은 아이가 살아납니다. 옛날 신학교에 다닐 때 박희천 목사님이 이 사실을 가지고 이런 제목을 얘기했습니다. 엘리사입니까? 게하시입니까? 설교로는 지팡이를 아무리 들었다 놓았다해도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출애굽기 4장 20절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나 망설이며 여러 번 안 가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라고 했을 때 순종하며 가는데, 출애굽기 20절 한 절의 말씀은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았더라”는 한 구절입니다. 모세가 40년 전 애굽을 떠날 때와 다른 점은 40년이 지나 나이 80세의 노인이 되어 기력도 쇠하고, 기억력도 없어지고, 더 나아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단 한 가지, 40년 전 애굽에서 가지지 않았던 하나님의 지팡이, 그것을 들고 갔다는 겁니다. 그 지팡이는 역사를 일으킵니다. 그 지팡이와 함께 하나님의 능력이 있었던 겁니다. 그 능력 앞에 바로가 굴복되어집니다. 그 능력을 들고 칠 때 홍해가 갈라집니다. 그 능력을 들고 기도할 때 아말렉을 이깁니다. 그 능력으로 바위를 칠 때 바위에서 새 물이 솟아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임재했다는 겁니다.

우리는 능력 있는 사역자입니까? 오늘 이와같은 하나님의 임재와 더불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알아가는 것이 오늘 우리가 처하고 있는 이 시대에 나와 여러분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배출되어지는 목사들은 옛날에 비해 실력이 훨씬 좋습니다. 책도 많이 읽고, 신학적인 실력, 어학적인 실력이 탁월합니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그와 반비례해서 영적인 힘은 점점 약화되어가고 있지 않는가 하고 생각되어집니다. 제 자신의 지나친 판단일지 모르겠지 만은 그런 판단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점점 약화되어 가는 영적인 힘은 배제한 채, 어떻게 하면 목회를 잘할 수 있을지, 온갖 방법론과 비결을 배우러 다니기 바쁩니다. 그러나 목회가 방법이요 비결로 되어집니까? 기본적인 하나님의 능력의 회복부터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그 능력이 어디서 오느냐? 어디서 옵니까? 간단합니다. 말씀과 기도 외에 그 무엇도 있을 수 없습니다. 신학적인 실력이 향상되는 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는 시간은 점점 없어지고 있습니다. 세상적인 방법을 많이 추구하지만, 무릎꿇고 기도하는 시간은 점점 적어지지 않느냐 하는 것이 오늘의 목회자의 위기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럼 나이 많은 목사들은 말씀과 기도의 능력이 있느냐, 그렇지 않다 이겁니다. 무슨 회의는 많아서 새벽부터 뛰어다닙니까? 사실은 저 자신도 그래요. 부끄럽게도 옛날에 읽던 성경의 분량보다도 요즘 성경의 분량이 적습니다.

능력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재주 부려 목회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목회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아야 합니다. 이왕에 목사가 되었다면 한 시대 능력 있게 사역하는 목회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회복이 필요합니다. 엘리야가 탈진했을 때 "어찌하여 네가 여기 있느냐"며 새 힘을 주셨습니다. 분명히 믿는 것은 우리 목회자가 살면 교회가 삽니다. 우리가 살면 교단이 삽니다. 우리가 살면 한국교회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이번 수련회 주제가 뭡니까? "여호와께서 우리를 살리시리라!" 이번 기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는 역사가 나타나길 바랍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시는 회복의 은총, 소명의식의 회복입니다. 성결성의 회복입니다. 겸손의 회복입니다. 더더욱 능력 회복의 역사가 이번 수련회 기간 동안 나타날 수 있기를, 회복의 능력을 힘입는 이번 수련회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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