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8/23) 교갱협 제11차 영성수련회 폐회예배

에스겔 3장 17절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교회 갱신과 제목 그대로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모였습니다. 여러분 이 ‘갱신’이라는 말과 가장 잇닿아 있는 단어가 바로 ‘혁신’이라는 단어입니다. ‘혁신’이라는 말은 참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를 새롭게 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말인데, 최근 ‘혁신’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생각을 많이 하게 됐습니다.

‘혁신’이라는 말은 가죽革 라는 말에서 유래하여 가죽을 벗기는 일을 말합니다. 그만큼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오늘 우리 모두가 사역을 위하여 가죽을 벗겨 보겠다는 마음으로 마무리를 하고 이 자리를 내려갔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참 쉽지 않은 시대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새로운 시대가 우리 앞에 펼쳐진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는 'Glocal'이란 말을 많이 썼습니다. 이것은 'global'과 'local'이란 말의 합성어인데, 생각은 'global'하게 행동은 'local'하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Globalution'이라고 합니다. 'global'과 'revolution'으로 세계가 ‘혁명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서울에 있는 teenager나 상하이에 있는 teenager나 L.A에 있는 teenager나 아프리카에 있는 케이프타운의 teenager나 뉴욕에 있는 teenager나 도쿄에 있는 teenager나 모든 teenager들 즉, 젊은이들은 의식이 비슷합니다. 인터넷 때문에 천하가 통일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어떤 사역의 platform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것입니다.

중앙아시아에 키르키즈라는 1인당 GNP 400불도 안 되는 가난한 나라가 있는데 산골 초원에 사는 율타르라는 지역의 여자 아이도 골반 청바지를 입고 있었습니다. 전에는 오프라인의 헤드라인이 온라인의 헤드라인이었는데, 지금은 온라인의 헤드라인이 오프라인의 헤드라인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러분이 과거에 구속되어 관성으로 사역하면 덫에 걸립니다. 올무에 걸립니다. 그래서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새로워져야 됩니까? 다른 길이 있습니까? 말씀으로 새로워져야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저도 주일 설교를 방송하고 있지만 참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방송이라든지 TV라든지 기독교계를 보면 수십 명의 목사님들이 나와서 말씀을 전하는데, 은혜도 많지만 많은 경우 하나님의 말씀이 조금 더 깊이 있게 전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간에는 에스겔서 1장, 2장, 3장 이 내용을 가지고 주께서 우리 교단과 개인, 그리고 사역을 어떻게 새롭게 하시길 원하시는지 주님의 뜻을 알기 원합니다.

에스겔 3장 17절에 보면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라고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에스겔은 하나님 나라의 귀한 파수꾼,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신비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원래 제사장 가문 출신입니다. 1장 2절에 "여호야긴 왕이 사로 잡힌지 오 년 그 달 초닷새라"와 1장 1절에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라고 나옵니다. 이 내용은 자기 이야기입니다. 에스겔이 30세 되었을 때에 그발 강가에 사로잡힌 중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2절에 있는 것처럼 25살에 바벨론 포로가 되었습니다. 25살에 포로가 되어 5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는 가운데서 30세에 오늘 이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그 때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에스겔의 상황은 어떠했을까요? 그는 본래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나서 제사장 역할을 하기를 원했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귀한 수종을 들기를 원했으며, 그 일을 위하여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훈련을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사역자 훈련을 했던 것입니다. 아마 이와 비슷한 분들이 여기 많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 훈련을 받은 에스겔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장 직무를 다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30살에 에스겔을 포로로 보냈습니다. 드디어 30살이 되었습니다. 레위지파 아론의 자손이 제사장들이 되는 나이가 대략 30세입니다. 에스겔도 30세 되어서 제대로 제사장 직무를 다하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바벨론 포로, 특별히 3장 15절에 보면 ‘델아빕’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Tel Abib인데요 이곳은 홍수로 폐허가 된 척박한 지역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이 그곳에서 하나님의 파수꾼으로 살도록 하셨습니다. 에스겔은 성전 뜰에서 예루살렘 제사장의 직무를 다하기를 원했는데 하나님은 비참한 포로 생활과 함께 척박한 Tel Abib에서 사역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늘 문이 열린 것입니다.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음성을 듣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하늘이 열리고 하늘의 비전을 볼 때는 절망과 어둠의 때였다는 것입니다. 어둠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귀한 말씀이 선포되었습니다. 가장 척박하고 피폐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에스겔의 입장에서는 숨 막힐 정도로 낙심될 때에 숨 막힐 정도의 엄청난 영광을 체험한 것입니다. 이것이 1장부터 3장까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귀한 말씀이 선포되었습니다. 수백 년 동안 예루살렘 성전에서 나타났던 ‘쉐키나’의 영광이 지금 오늘 이 순간, 바벨론 ‘텔아빕’에 ‘쉐키나’의 영광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섬기지 못했던 절망과 우울함에 사로잡혀 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 것입니다. 숨 막힐 정도로 힘든 이런 상황에서 ‘쉐키나’의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길 원합니다.

이러한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타락하고 부패했던 바벨론에서 보았다는 사실을 본다면, 정말로 어려운 사역의 환경에서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반면에 사역이 쉽게 풀리고 모든 것이 탄탄대로로 나아갈 때는 주의 영광을 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장 28절을 보면 "그 사방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여기서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은 바로 ‘쉐키나’의 영광입니다. "내가 보고 엎드려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들으니라"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 수백 년 동안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지 않았던 ‘쉐키나’의 영광이 이방인의 땅 바벨론에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절망적인 상황에서 ‘쉐키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두신 바로 그 장소에 주의 임재와 능력을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가 있는 그 자리가 하나님이 임하시는 자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녁 필요하면 "안성의 하늘 문이 열리게 도와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길 바랍니다.

야곱이 형 에서의 낯을 피해 도망쳤을 때 하나님은 밤에 야곱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찾으셨던 그 장소는 ‘루스’라는 곳이었습니다. ‘루스’란 곳의 뜻은 ‘본래 길을 잘못 들었다’, ‘이탈하다’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하나님을 만남으로 그 ‘루스’는 ‘벧엘’로 바뀌었습니다.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야곱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괴로웠고 앞뒤가 막혀 있었습니다. 그 때 뜨거운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였습니다. 가장 진실되고 순수할 때 하나님께 서원할 수 있는 그런 장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때로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저 사람보다 좀 더 나은 교육을 받았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제가 좀 영어를 잘하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제가 좀 더 어렸을 때부터 철저하게 사역자로 무장됐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더 좋은 기회, 더 좋은 사역의 위치를 누렸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더 잘 드러냈을 것인데...’ 그런 생각을 우리가 충분히 할 수 있는데 이제는 그런 사고의 틀을 바꿔야 합니다. 세상적으로 사람들이 인정하든 말든, 축복이 있든 없든, 하나님은 우리가 있는 이 척박한 자리에서 주의 임재와 쉐키나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에스겔은 바벨론의 그발 강가에서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열고 나타내신 하나님의 비전을 보았습니다. 1장 1절 다시 이야기합니다.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 문이 열렸습니다. 여러분, 이번 1년 동안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을 만나길 바랍니다. 가톨릭은 직접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경험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가톨릭은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종교가 아닙니다. 중간에 있는 해석자의 권위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은혜주시면 지금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저는 개척해서 지금까지 사역하면서 죽을 것 같은 고통을 가졌을 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개척교회를 하여 20, 30명 모일 때 좀 괜찮은 사람들이 오면 ‘저분이 교회에 남아서 좋은 일을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분들은 잘 안 남아줬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주일학교나 중고등부 인원이 한두 명 밖에 없으니까 왔다가 다 가는 겁니다.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기댈 곳이 아무 곳도 없었습니다. 그럴 때 주신 하나님의 음성은 ‘너, 한 영혼에 목숨 걸어라’ ‘한 명과 씨름해라’였습니다. 그래서 ‘1년에 많으면 10명, 적으면 5명, 3명이라도 제대로 예수의 사람, 예수의 제자로 무장시킬 수 있도록 마음을 다하고 전력투구했습니다. 그 때 깨달은 은혜는 더 이상 교회가 크든 작든 상관없이, 내가 배웠든 못했든, 내가 가졌든 못 가졌든 상관없이, 더 이상 두려워 할 것도 없고 낙심할 것도 없고 절망할 것도 없다는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사역의 본질을 붙잡아 하늘 문이 열리고 사역의 본질을 붙잡는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28절 뒤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이 나타났습니다. 그 때 에스겔이 납작 엎드렸습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납작 엎드렸습니다. 정말 엎드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도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도 되지 않기 때문에 납작 엎드려 벅벅 기는 겁니다. 2장 1절 보겠습니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납작 엎드렸을 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납작 엎드린 사역자를, 납작 엎드린 제사장을 하나님께서는 붙잡으셔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인간적으로, 엎어졌을 때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것입니다. "내 발로 일어서라!"

‘캐넷 헤이건’이라는 미국에서 오랫동안 힘 있게 사역하신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분은 본래 17세까지 다리를 못 쓰고 휠체어에 앉아 있었습니다. 근데 2장 1절에 있는 이 말씀을 보고 이것을 그냥 그대로 믿었어요. "케넷, 네 발로 일어서라!" 그냥 믿었어요. 그 자리에서 그냥 일어났어요. 그리고 휠체어를 던져 버렸습니다. 납작 엎드려서 너무 힘든 상황에 있다 할지라도 오늘 이 말씀을 믿읍시다. 일어서라는 주의 음성을 들읍시다. 왜 우리가 일어날 수 있습니까? 납작 엎드린 인간이 일어날 수 있는 이유는 하나에요. 2장 1절 뒤에 "내가 네게 말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니까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2장 2절에 "그가 내게 말씀하셨을 때 그 영이 내게" 임하셨습니다. 할렐루야! 말씀과 함께 기름 부으심이 함께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패한 인간은 일어날 힘이 없습니다. 부패한 인간은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그래서 2절에 "그가 내게 말씀하실 때 그 영이 내게 임하셨다"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하나님의 영이 말씀 속에 임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아무리 힘들고 어렵고 문제가 되어도 하나님의 말씀 속에 사로잡혀 있어야 할 이유가 된다고 확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고 일으키실 때 에스겔의 입장에서는 ‘이제 하나님이 은혜 주시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셔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대로 제사장적 사역과 직무를 감당하게 하시겠구나!’라는 그런 기대를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그렇게 일이 잘 풀리기를 기대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3절에 보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그들과 그 자손들이 내게 범죄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렀나니 그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 자니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루살렘 성전에 모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뻔뻔한 백성들, 패역한 백성들, 하나님을 배반한 자들을 향하여 유대 백성의 목자로 삼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지금 패역한 유대백성에게는 목자가 필요한데 그들에게 선지자와 파수꾼 역할을 할 자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너!”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4절 보십시오. "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 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뻔뻔하고 패역하고 배반한 백성들에게 보내겠다! 거기서 네가 할 일은 주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2장에서는 ‘패역’과 ‘배반’, ‘범죄’ 이런 말들이 자주 나옵니다. 개역성경에서 이 ‘패역’이라고 번역한 단어는 히브리어로 두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마라드’라는 것이 있고, 또 하나는 ‘마라’라는 것이 있습니다. ‘마라드’라는 말은 정치적인 폭동을 뜻하고 ‘마라’는 배반 행위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앞에서 ‘마라드’와 ‘마라’를 범했습니다. 3절에 이 ‘패역’과 ‘배반’과 ‘범죄’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세 단어는 아주 특별한 반역 행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대항하고 거역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패역한 백성들이 말씀을 듣든지 아니 듣든지 간에 에스겔을 그들 가운데서 선지자, 파수꾼으로 달아 놓은 것입니다. '뻔뻔해도', '반역해도' 4절 뒤에 있는 것처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전하라는 것입니다.

저 자신은 이 말씀을 보면서 많은 반성을 합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하다”라고 가감 없이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는 메시지와 강단이 많이 약해졌습니다. 수많은 TV와 방송들을 들어보아도 많은 경우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사람의 생각과 사상을 많이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이러하다”라고 그대로 전해주는 경우가 많지가 않습니다. 영적인 깊은 공감대가 없어졌습니다. 말씀의 깊이로 돌아가야 합니다.

지난 주 8월 12일자 뉴스에 '빌리 그레이엄'의 인터뷰가 나왔습니다. 제가 그것을 읽고 마음의 감동을 받았습니다. 거기서 뉴스 기자가 빌리 그레이엄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에게 다시 한 번 사역과 섬김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무엇을 가장 우선적으로 하시겠습니까?” 빌리 그레이엄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만일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성경을 깊이 읽는 것과 신학공부에 더 많은 시간을 쏟겠다. 그리고 가장 후회스러운 일이 있다면 좀 더 말씀을 공부하고 좀 더 성경을 읽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빌리 그레이엄은 다시 사역을 한다면 철저히 말씀을 연구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이 선포하기를 원했다는 것이에요. 한 생애를 살펴본 아쉬움이었습니다. 빌리 그레이엄을 통하여 우리는 사역자의 후회를 봅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하다”라고 그대로 전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말씀에 깊이 잠겨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내수동교회의 박희천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1947년 5월에 최원철 목사님이라는 스승으로부터 “목회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필수조건은 성경 말씀을 한 없이 읽는 것이다”라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 말씀을 듣고 지금까지 하루에 본문을 4시간씩 읽는 분이셨습니다. 주일은 설교 때문에 4시간을 못 읽습니다. 그래서 월요일에 8시간을 읽습니다.

한 번은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오 형제, 내가 오늘은 성경 읽다가 그 말씀의 깊은 진리를 깨닫고 너무 좋아서 그 말씀을 머리에 이고 방 안을 빙빙 돌아다녔어.” 그리고 나중에 “설교함에 있어서 설교의 능력이 나타날 때 설교의 웅변술과 마술사적인 언어의 감각, 그리고 대단한 스킬 같은 것들이 나름대로 역할을 한다. 말씀을 5cm 정도 파는 수준에서는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씀을 50cm나 1m 깊이로 파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것들이 상관이 없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분의 책상 앞에는 늘 이것이 쓰여 있었어요. "돌에 구멍이 나는 이유는 물의 힘 때문이 아니라 물이 얼마나 자주 떨어지는 가에 달렸다." 끊임없이 떨어지는 물방울이 돌을 뚫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시편 같은 것은 거의 1,000번 이상을 읽고 거의 다 외우셨습니다. 작년에 그분의 사무엘상 강의집이 나왔는데 거의 78세이신데 900 페이지 책을 냈어요. 우리가 말렸어요. “목사님 누가 읽겠습니까? 300 페이지도 긴데...” 그분이 이렇게 답해주셨어요. “아닙니다. 그냥 합니다.” 작년에 목사님이 저에게 말씀하기를 “은퇴하기 전까지는 성경을 하루에 11시간 반 공부했는데, 요새는 7시간 반밖에 못하니 많이 아쉽습니다” 하시는 겁니다. 연세가 79세나 되시는데 하루에 성경 공부를 7시간 이상 하고 있어요.

제가 그저께 그분에게 우리 교회 설교를 부탁했어요. 우리 교회 강단 만만하지 않습니다. 미국에서 박사 받은 목사님이 와서 강단에서 설교하다가 “와, 땀 납니다. 그러고 내려갔어요.” 그런데 80이 다 되는 분을 모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제가 그분의 말씀의 깊이를 알기 때문에 그래요.

빌리 그레이엄이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사상도 다 지나간다. 정치도 다 지나간다. 남는 것은 말씀 사랑하는 것하고, 하나님 사랑하는 것하고, 영혼 사랑하는 것 외에는 남긴 것이 없다.”

말씀을 그대로 전하면 능력과 역사가 일어나면 좋은데 그렇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2장 6절에 보면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지어다" 말씀을 전하는데도 ‘가시’와 ‘찔레’와 ‘전갈’이 있습니다. 이 가시와 찔레는 목양적 사역과 선지자적 사역에 있어서 ‘어려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진정 목회자의 길을 걸어간다고 하면 가시와 찔레와 전갈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사람들의 마음이 강퍅하기 때문에 어떤 때는 부정적인 반응이 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 에스겔에게, “부정적인 반응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대로 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2장 10절에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그 위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 하나님의 말씀이 애가와 애곡과 심판의 말이기 때문에 파수꾼 노릇하기가 쉽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는 가시와 찔레와 전갈이 있습니다. 순수한 복음이 아니라 종교 다원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의 비위 맞추고 적당히 타협하면 영웅 됩니다. 그러나 복음적 진리를 수호하고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전하면 온갖 욕을 다 먹습니다. 아마 인터넷의 공격 때문에 심적으로 힘든 상황이 우리 앞에 닥칠 것입니다. 기독교에 대해서 반역하고 상처내고 공격해냅니다.

드디어 8절에 "너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라고 하십니다. 저는 여기서 ‘패역하지 말고’라는 말이 참 도전이 되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전하고 바로 세우기 위해 노력하는데 이 패역한 사람들은 말씀을 듣지 않고 반항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쉽게 패역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패역’이란 말이 ‘르벨리우스’ 즉, ‘반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전할 때에 가시와 찔레와 전갈의 위협이 오면 목회자들은 속이 상하여 하나님을 섭섭하게 생각하고, 그냥 입 다물고 좌절하고 주저앉아서 하나님을 일을 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사역의 좌절이 있습니다. 이 시대의 온갖 어려움들을 보고 댓글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의 상처가 자리 잡혀서 주저앉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저들과 같이 패역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뭐라 말씀하시는지요?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6절에는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무서워하지 말라" 무려 4번이나 나옵니다.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말고 8절 뒤에 나오는 말처럼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반항으로 힘들어하고 있는 그의 종들에게 “내가 주는 것을 받아먹으라”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9절에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바로 두루마리 책입니다. 한 손에 있는 두루마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두루마리 책에 대해서 3장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하시기로" 또 2절에도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3절에도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한 없이 읽고, 접하고, 이 말씀을 소화시키고, 이 말씀 그대로 전하기를 원한다는 말입니다. 머리로만 받아들이지 말고 이 말씀을 먹고 소화시키라. 그 말씀을 내면에 받아들이라. 말씀의 인격화를 가지라. 말씀을 말씀되게 하고 소화시켜 말씀과 인격이 같이 가는 그 수준으로 올라가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사역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소화시키고 인격화시켜가지고 이 말씀을 있는 그대로만 전한다면, 한국교회 다시 회복될 수가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소화시키고, 그 말씀을 내 것으로 삼고, 그 말씀을 인격화시켜, 그 말씀을 선포하는 일이 너무나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이 일을 잘 안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적당하게 타협을 취합니다. 물론 우리가 주일날 말씀 전하는 것은 영광스럽고 즐겁고 감사한 일이지만, 이 말씀을 제대로 준비하고 소화하고 내 것으로 삼고 내 창자에 채우기까지 그 과정까지 얼마나 힘이 듭니까? 고통스러운 작업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저는 오늘 이 예배 설교를 안 하려고 지난 한 달 동안 온갖 용을 다 썼지만 결국은 할 수 없이 올라왔습니다. 오늘 새벽에도 일어나서 4시간 이상 묵상했습니다. 제가 하는 이거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고통스러운 작업입니다. 정말 쉽지 않습니다.

지금 옥 목사님이 수술을 하셨지만 수술하기 전에는 저하고 가끔 갈등을 일으키실 때가 있었는데 뭐 때문에 서로 갈등을 일으키느냐면 서로 설교를 안 하려고 하는 겁니다. 너무 힘든 것을 알기 때문이에요. 옥 목사님은 어떨 때 제 말씀을 들어주셔서 “두 달에 한 번은 해보자” 하시고는 작년에는 3번 밖에 못하셨어요. 저는 목사님을 정해진 그 때 설교 해주시기를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얼마나 기다리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설교 일주일 전에 전화하셔서 “오 목사, 나 몸이 좀 안 좋다” 하십니다. 처음에는 그 말씀을 그대로 순종했는데 나중에는 제가 아프더라고요. “목사님, 저도 아픕니다.”

옥 목사님이 왜 몸이 안 좋으신지 제가 이유를 알아요. 설교를 무거운 십자가라고 생각하시고 준비하시는데, 정말 창자가 끊어지듯이 얼마나 수고하시는지 제가 압니다. 왜 수술하셨는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제가 볼 때는 설교의 무게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힘이 드는지... 다시 이야기하지만 설교를 선포할 때는 즐겁고 감사한 일이지만 준비하는 것은 대단히 힘들고 어렵고 고통이 따릅니다. 옥 목사님이 이런 글을 쓰셨어요. "설교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저의 경우를 생각하면 설교 때문에 평생 즐겨본 일이 한 번도 없습니다. 저는 평생 설교만큼 무거운 십자가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가 제일 좋을 때가 언제냐 하면 주일 예배 마치고 저녁에 집에 갔을 때, 그 시간은 해방의 날이고 자유의 날이고 기쁨의 시간입니다."

루터의 글을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루터는 1546년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34년 동안 약 4,000번 이상의 설교를 했다고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설교를 한다는 것은 가장 힘든 일이다. 선한 양심을 지닐 수 있다면 설교하기보다 차라리 큰 수레를 끌고 돌을 운반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설교를 맡은 사람은 항상 괴롭다. 내가 자주 말했듯이 그것은 너무 힘들기 때문에 저주받은 악마가 설교자가 되어야지 선한 사람은 설교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그는 한동안 설교를 중단하고 있었을 때도 있었습니다. 이런 내면의 고민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 이야기들은 그 만큼 설교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너무 어려워요. 특별히 교갱협 설교가 어렵습니다. 말씀 사역자의 괴로움을 우리는 이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 그대로 전하라고 하십니다. 교단이 회칠한 무덤 같고 정치권이 날 뛰며 사회가 아무리 패역하고 가시와 찔레와 전갈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고 창자에 소화시켜서 힘들어도 함께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십시다!

특히 설교자에게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는데, 좋은 말만 하지 말고 하나님 경고하는 것을 그대로 외치는 파수꾼의 외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파수꾼은 영적인 전쟁임을 인식하고 복음적인 야성을 가지고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거짓 선지자는 다 평안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하여 파수꾼으로 세우시고 거짓 선지자들에게 경고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에스겔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에스겔이 무능한 설교자였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에스겔은 대단한 웅변가였습니다. 수사학이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에스겔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어요. 그 내용이 너무 어렵고 거슬리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싫어했습니다.

따라서 저는 지나간 10년 동안 한국교회 설교의 방향이 무엇을 전하느냐 보다 어떻게 전하느냐에 신경을 많이 써가지고 '어떻게 하면 설교를 다양하게 잘 전하느냐' 여기에 온갖 관심이 다 들어가 있었습니다. 'How to'의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회복하기 위해 이제는 무엇을 전하느냐로 다시 한 번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좀 못해도, 부족해도 우리의 심장을 내놓고 좀 'urgent' 즉, "우리의 영적 긴박함을 내놓자" 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심장을 같이 선포하자” 이 말입니다. 다시 회복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늘 목양의 균형을 생각합니다. 사역자, 목회자는 두 가지로 부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제사장적 사역의 부름 받음’ 또 하나는 ‘선지자적 사역’ prophet과 priesthood, 제사장적 사역은 사람들을 양육하고, 키우고, 아껴주고, 위로하고, 치료하는 것이고, 선지자적 사역은 도전하고, 파수꾼 노릇하는 것입니다. 근데 이런 것을 모르고 아무나 신학생 되는 것이에요. 이런 것 모르고 아무나 목회자 되는 것이에요. 1년에 3,000명이 안수를 받습니다. 뭐, 온갖 신학교를 합치면 1년에 8,000명이 안수를 받습니다. 한국교회 큰일 났습니다! 말씀 선포의 고통과 괴로움을 모르는 자들이 강단에 서기 시작하였습니다.

미국에 가면 태평양 신학교 출신이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Pacific Theological Seminal’ 자기가 태평양을 건너오면서 자기가 자기 머리에 손 얹고 “나는 목사다” 이렇게 내려오는 것입니다. 이걸 막을 사람이 없어요. 키르키스탄 중앙아시아에 가보니까 한국교민 회장님이 있었습니다. 목사 회장입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목사가 교민회장이 됐습니까?” “작년에 한국 3개월 있을 때 신학교 졸업해서 목사 안수 받았습니다.” 여러분 이런 비참한 일이 일어나고 있어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시대입니다. 교갱협에 속한 저와 여러분들이라도 제대로 말씀 선포의 고통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제대로 전하기만 하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양화가 악화를 구축하는 영적인 역 그레샴의 법칙이 통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이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을 깨닫고 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쉽게 입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기를 원하셨습니다. 입으로만이 아니라 삶과 고백과 심령의 깊이에서 나오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전하는 말씀이 인격과 생명의 은혜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전하는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삶의 일부분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정말 인격적인 말씀을 나눈다면, 인격과 삶이 서로 상호작용하여 삶에 나타날 수만 있다면 한국교회는 반드시 다시 한 번 일어서리라고 믿습니다.

마포삼열 목사님의 생애를 읽다가 마음에 와 닿은 것이 있었습니다. 이분은 1890년에 인천 제물포를 거쳐서 마포 강변에 역사적인 첫 발을 내딛었습니다. 그리고 평양에 가서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근데 평양에 있는 깡패들이 마포삼열 목사님이 하는 그 숙소 방 안에다가 돌멩이를 던지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래도 가만히 있으니까 평양 깡패 중에서 유명한 깡패 하나가 친구들을 동원해가지고 갑니다. 그들은 마포삼열 목사님이 설교를 하고 있을 때 설교하는 목사님의 턱에다가 돌멩이를 던졌습니다. 목사님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마포삼열 목사님은 청년을 향하여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를 예수의 사랑으로 용서했습니다. 그걸 보고 깡패 주동자, 그 돌멩이 던졌던 주동자가 깨어지고 회개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이기풍 목사님이십니다. 한국 초대 7인 목사 중에 한 사람이고 제주도에서도 개척을 한 선교사가 되었던 이기풍 목사님이십니다. 당시의 평양은 1894년도 청일 전쟁에 폐허가 있었고, 또한 1904년 러일 전쟁의 폐허 때문에 완전히 엉망이었습니다. 시체가 곳곳에 부패하고 피 비린내 나는 희망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이기풍 목사님도 마포삼열 목사님처럼 말씀을 소화하고 소화된 말씀이 인격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때에 한국교회 부흥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말씀의 인격화에 대해서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의 딸이었던 엔 그레이엄 로스가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빌리 그레이엄의 말을 들면 말씀이 인격화 된 사람들이 어디에 관심을 갖느냐? “세상의 일관성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 앞에서는 빛을 잃는다. 세상의 부차적인 것은 점점 더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성경의 중요한 것들이 삶의 중요한 것들을 차지하는 그것이야 말로 바로 말씀의 인격화 된 삶이다.” 저는 이것을 제자훈련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닮아갈 수 있도록 사람을 키우는 것입니다.

8절에서 "그들의 얼굴을 마주보도록 네 얼굴을 굳게 하였고" 무슨 말입니까? ‘이마를 굳게 한다’ ‘얼굴을 굳게 한다’는 것이 무슨 말씀인가 하면 우리를 능력 있는 파수꾼으로 무장시킨다는 그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말씀 사역 제대로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무장시켜주신다는 그 말입니다. 3장 9절을 보십시오 "네 이마를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 같이 하였으니 그들이 비록 반역하는 족속이라도 두려워하지 말며 그의 얼굴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하시니" ‘금강석처럼 했다’ ‘틈틈이 우리를 견고하게 세우신다’라는 말씀입니다. 다이아몬드처럼 강하게 하신다 이 말이에요. 패역한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말씀 가운데 금강석처럼 든든히 무장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하나님의 사역자들, 목회자들로 하여금 목회의 본질에 충실하게 하시고 성도의 무장을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십니다. 따라서 세상의 흐름, 교단 정치 이 모든 것들도 다 잘 해야 되겠지만 너무 이곳에 신경 쓰지 말고 다시 한 번, 하나님의 파수꾼으로서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사람으로 세우길 위해 힘써야 하며,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성령의 능력과 우리에게 주시는 은사를 마음껏 발휘하여 금강석처럼 단단하게 무장하기를 기대합니다.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를 해도 에스겔은 사람인지라 또 마음이 좌절되고 낙심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3장 14절에 보십시오. "주의 영이 나를 들어 올려 데리고 가시는데 내가 근심하고 분한 마음으로 가니" 이렇게 하나님께서 힘 있게 하시고, 세워주시고, 무장시켜 주시고, 축복해 주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파수꾼들은 때때로 근심과 불안함이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애를 써주시고 도와주셔도 에스겔은 속으로 '하나님, 어렵습니다. 이 백성에게 가는 것 싫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파수꾼으로 가는 것은 어렵습니다. 바벨론 나라도 싫고, 이스라엘도 싫고, 여기서 전파하는 거 싫습니다.' 근심하고 분한 마음이었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사역하다 보니까 다 싫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와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3장 11절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사로잡힌 내 민족들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마음에 분함이 있고 힘들어도 파수꾼으로의 역할을 감당하기를 요구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 위하여 에스겔이 먼저 그 말씀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15절입니다. "이에 내가 델아빕에 이르러 그 사로잡힌 백성 곧 그발 강 가에 거주하는 자들에게 나아가 그 중에서 두려워 떨며 칠 일을 지내니라" 에스겔이 분하고 답답하고 다 그만 두고 싶은 그런 마음을 갖고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기 위하여 하나님은 에스겔이 말씀의 경험을 하기를 원했습니다. 텔아빕에서 백성들과 두려워 떨며 7일을 지내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이 7일을 지내는 것이 에스겔에게 있어서는 파수꾼 되기 위한 죽음의 시간이었습니다. 이 7일은 두려움에 떨면서 선지자와 파수꾼의 사명을 다 하기 위해 깨어지고 준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아라비아 기간이요, 우리로 말하면 사역의 연단기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병이 들 수도 있습니다. 사역에 대한 좌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절망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으로 선포되기 위하여 반드시 텔아빕, 그 황폐한 곳에 가서 7일 동안 백성들과 함께 깨어지고 거하는 시간을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16절 "칠 일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깨어지고 깨어지는 그 시간 그 이후에 하나님의 말씀이 드디어 임하셨습니다. 아까 말씀하셨듯이 17절의 요절처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시는대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반드시 7일 기간 동안 텔아빕의 고통 속에서 깨어짐과 아픔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과 재능으로 주님을 섬기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가슴 아프고 분하고 답답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왕창 깨셔서 그들이 ‘사역자’, ‘파수꾼’이 되어 일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또 7일 동안 있으면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목자의 심정을 회복시키셨습니다. 뻔뻔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찔레와 가시와 전갈 같은 그 백성들을 향하여 에스겔의 마음속에 목자의 심정이 생겼습니다. 그들의 상처를 보고 외로움과 향수병에 걸려 아파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7일간 있으면서 ‘영적인 감정이입’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15년, 16년을 이민교회 사역을 했습니다. 이민교회에서는 사람들이 평균 5번에서 8번 교회를 옮깁니다. 그만큼 상처가 많다는 것이에요. 한 번 떠난 사람은 또 떠날 수 있어요. 고국을 떠났기 때문에 교회 옮기는 것은 너무나 자연적인 것이에요. 서로 상처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어떨 때는 너무 가슴이 아파서 '저런 사람들과 같이 목회해야 하나? 하나님, 차라리 저 사람들 하나님이 알아서 처리해 주시옵소서'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런 기도할 때 제가 잊을 수 없었던 사건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 그 사람 바꾸려고 하지 말고 네 기도제목이나 바꿔라” 그러면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십자가에 달려 죽기 전까지는 제자들 가운데 한 명도 바뀐 사람 없었다.” 맞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기 전까지 제자들은 안 바뀌었습니다.

여러분, 텔아빕에서 자기 죽음의 경험이 없이는 목자의 심정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역자들, 모든 파수꾼들, 모든 목자들에게는 에스겔과 같은 7일간의 자기 죽음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목자의 심정이 안 생깁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과 목자로 세웠다. 내 말을 그대로 전하라.”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좋아하는 곳에 우리를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필요한 곳에 우리를 데려가십니다. 내가 사역하기를 좋아하는 곳에서 계속 사역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이 원하는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이 마지막 시간,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그 장소에서 좌절하지 말고 말씀을 인격으로 소화시켜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먹이면 하나님이 목자의 심정 주시고 파수꾼 삼으셔서 반드시 시대를 섬기는 귀한 사역자로 만들어 주리시라고 믿습니다.

다윗을 왜 세우셨습니까? 시편 78편에 하나님이 다윗을 세우신 이유가 나옵니다. 그 우리에서 목자의 심정을 가진 다윗을 취하여 이스라엘 목자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안드레를 취하셨습니까? 빌립처럼 없는 200 데나리온 돈을 한탄하고 있지 아니하고 뭐 좀 굶어 죽어 가는 사람들이 내 아버지고 내 식구고 내 자녀고 내 가족이라면 가만히 둘 수가 없는 것이에요. 우리들의 어머니가 자녀가 하루 종일 굶었다면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그는 그런 마음으로 막 먹을 것을 찾아 다녔어요. 그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찾아 온 것이에요 남들이 볼 때는 별 것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가져왔습니다.

내게 없는 것 가지고 고민하지 말고 내게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 봐야 됩니다. 이것이 목자의 심정입니다. 저는 그래서 목자의 심정을 이렇게 한 번씩 결론을 내릴 때가 있습니다. 가난하지만 자식을 많이 가진 엄마의 심정이라고. 자식이 많으니까 먹을 것을 달라하는데 가난하니까 먹을 것을 줄게 없어요. 그렇다면 그 어머니가 자식이 배고파서 고통스러워 할 때 “그래, 너 배고파라” “그래, 너 고통스러워해라” 이렇게 하실 엄마가 없어요. 뭐 없나 하고 이웃집에도 가보고 정 안 되면 자기 머리라도 잘라서 자식들에게 먹이고 싶은 것이 엄마의 심정이에요. 저나 여러분이나 우리가 본래 가진 사람이 아니에요. 우리가 다 갖춘 사람이 아니에요. 우리가 부족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자의 심정으로 섬기는 영혼을 위하여 뭐 좀 먹일 수 없나? 내 머리카락이라도 팔 수 없나? 내 손이라도 자를 수 없나? 이런 마음을 가지고 하다 보니까 오늘까지 주님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목자의 심정이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말씀했습니다. 오늘 마지막 시간 하나님 나라의 파수꾼 7일 동안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다시 한 번 무장됨으로 말미암아 목자의 심정으로 우리 교단과 이 시대를 섬길 수 있는 거룩한 주의 종들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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