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5/30) 교갱협 설교세미나

미국에서 한달 동안 세미나 등에 시달리고 들어와 무리를 했더니 고장이 났습니다. 그래서 앉아서 하게 되었으니 양해 좀 해주시고요. 오늘은 시간이 어떻게 보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데 제가 일단 먼저 말씀을 좀 하고, 후반부에 가서는 여러분들과 자유스럽게 질의응답을 서로 하고 대답하는 그런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꼭 설교에만 관해서 질의응답을 할 것은 없고요. 나중에 질의응답 하실 때는 제가 그저 나이를 먹어서 여러분들의 선배 입장에 있으니까 이런 자리에서 꼭 좀 질문하고 싶다는 그런 내용들이 있으면 자유스럽게 시간이 허락하는대로 서로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우선 제가 강의라고 하면 강의고, 평생 설교를 해온 사람으로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고 싶은 설교에 관한 것, 제가 먼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설교에 관해서는 할 말이 많아요. 우리가 가장 어떤 면에서는 가장 많이 생각하는 영역이니까요. 할 이야기도 많죠. 또 제가 한때는 신학교에서 한 5년 동안 박영선 박사님과 설교학 강의를 한 일도 있고, 저 자신이 또 대형교회 목회자로서 설교와 씨름을 지금까지 해왔기 때문에 설교 빼놓고 다른 이야기를 할 게 별로 없죠. 그만큼 우리에게 있어서 지대한 관심을 갖는 주제입니다.

그저 우리에게 소원이 하나 있다면 좋은 설교자가 되는거죠. 목사가 목사가 된 이상은 좋은 설교자가 되고 싶다, 영향력있는 설교자가 되고 싶다, 조금 쉽게 말하면, 설교를 잘하고 싶다 라는 소원은 누구나 다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 목회자들을 가만히 보니까 설교를 잘 못해요. 일반적으로 잘 못합니다. 잘 못하는 이유는 신학적인 문제도 있습니다. 그 사람의 신학이 무엇이냐에 따라 설교가 많이 좌우되거든요. 그래서 설교 같지도 않은 설교를 가지고 평생 사역하는 사람도 있어요.

신학적인 문제도 있고, 또 그 사람의 은사 문제도 있고, 여러 가지 여건들이 좌우를 합니다만, 제가 볼 때 설교를 잘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의 하나는 투자를 안해서입니다. 설교를 놓고 목숨을 걸지를 않아요. 그냥 적당히 하는 거예요. 이유는 간단해요. 목회가 바쁘다는 겁니다. 바쁘니까 설교도 쉽게, 적당히 준비해서 하면 된다 라는 식이에요. 그래서 좀 약삭빠른 사람들은 남의 설교 카피하고, 좀 더 여러 가지 재주를 피우는 사람들은 이것저것 주워모아 잡탕처럼 만들어 시간 때우고, 그러니 설교가 질이 떨어지죠. 들어보면 시간투자를 안하는 거에요. 저는 이것이 결정적인 문제점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미 상원의 채플린으로 많은 기여를 했던 목사님이 한분 계세요. 오글비 목사님이라고요. 미 상원에서 채플린을 했으니까 굉장히 탁월한 분이죠. 이분이 은퇴를 할때 기자들이 와서 물었어요. "목사님, 목사님께서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면 무엇부터 개선을 하고 싶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참 인상적인, 유명한 말을 한마디 했어요. "설교 연구와 준비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싶다. 강단의 1분을 위해서 서재에서 1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좀 더 일찍 내가 알았더라면 그대로 실천했을 텐데, 지금은 너무 늦은 것 같다. 교회 갱신은 설교의 질에 좌우된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포인트가 뭡니까? 강단에서 하는 1분 이야기를 위해 서재에서 1시간 씨름을 한다. 서재라는 것은 책만 가지고 씨름을 하는 것이 아니고, 설교 준비자로서 정말 투자해야 할 모든 것을 투자하는 시간을 이야기하죠. "서재에서 1시간, 그것이 강단의 일부입니다"라고 하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이게 진리입니다.

제가 경험적으로 보니까 좋은 설교 원합니까? 잘 하고 싶습니까? 투자해야 합니다. 그래서 시간투자 많이 할수록 좋은 설교가 나와요. 설교를 가지고, 말씀을 가지고 씨름을 한 만큼 생명력이 나타나요. 물론 우리 한국의 어떤 목사님은 "다니면서 무슨 설교를 그렇게 준비하느라고 진액을 빼느냐? 새벽기도 마치고 1시간 정도면 주일설교 거뜬하게 준비하는데, 뭘 그렇게 하느냐?"라고 하면서 오히려 설교 준비 많이 하는 사람을 약간 비웃듯이 하는 사람도 있어요. 나는 그분과 가까운 사이이기 때문에 비판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러나 자기처럼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사람은 그럴 수도 있어요. 그렇게 해도 사람들이 모이니까 더 이상 투자할 필요가 없죠.

그러나 제가 볼 때 내 양을 치라고 명령하시고, 내가 너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령하신 주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생각할 때는, 그것은 설교 본질에 일치하는 주장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있나요? 더욱이 영혼의 생명을 좌우하는 말씀을 다루는 사람이 쉽게 그렇게 하겠다? 나는 그 목사님은 주님 앞에 서서 무슨 말씀을 들을 지 잘 모르겠어요. 그러나 좋은 말은 못 들을 거라고 봐요.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되죠. 라디오에서 나오는 이야기, 잡지에서 나오는 이야기 등 적당히 주워서 한참 하다가 막판에 가서 성경말씀 조금 인용하면서 결론 딱 내리고, 그런 식으로 준비하려면 30분이면 하죠. 누구든지 할 수 있죠.

설교가 그런 것입니까? 종교개혁자들의 설교를 여러분이 읽어보셨어요? 루터의 설교를 읽어보셨어요? 칼빈의 설교 읽어보셨어요? 칼빈의 설교는 주석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게 전부 설교인데요. 한 번 읽어보세요. 생명을 걸고 진액을 짜는 흔적이 여기저기 보이잖아요. 그만큼 투자했다는 거예요. 우리에게 결정적인 문제점이 있다면 설교에 있어서 시간투자를 안 한다는 거예요. 정말 생명 걸듯이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준비 안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자꾸 습관화되어버리면 나중에 못 고쳐요. 힘들게 설교를 하고 싶지를 않아요. 그러니까 자꾸 쉽게만 생각을 하다 보니까 내용도 그렇게 쉽게 준비가 되고, 쉽게 준비된 내용은 질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고, 그렇잖아요? 그러면 무엇이든지 투자한 만큼 성령께서를 역사하십니다. 누구든지 심은 대로 거둔다고 하잖아요. 심은 대로 거두잖아요.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성령께서 그 지도자가 어설프게 준비해 나왔는데 대단한 열매가 나오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겠어요?

제가 기억하기에는 루빈스타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천재적인 피아니스트죠. 그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하루를 연습 안하면 내가 알고, 이틀을 연습 안하면 전문가가 알고 평론가가 알고, 3일을 연습 안하면 청중이 안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어요. 천재가, 천재 피아니스트고 세계 정상에 선 사람이 무슨 연습을 가지고 그렇게 씨름을 해요? 피아노 건반에 손만 얹으면 나올 텐데... 그런데도 그는 매일 연습을 합니다. 하루만 게을러서 안하면 '여기가 부족하구나'라고 자기가 아는 거예요. 이틀만 게으름 피우면 평론가들이 딱 눈치를 채죠. 3일 게으름 피우면 듣는 청중이 아는 거예요. 이게 진리입니다. 이게 설교자들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이야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좋은 설교 하고 싶다, 설교를 좀 잘하고 싶다 라고 하면 일단 투자를 좀 하고 그런 이야기를 하세요. 양심적으로 이야기를 해야죠. 투자도 안하면서 좋은 설교 하고 싶다? "오늘 하나님이 은혜를 충만하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라는 그따위 소리 하지 말고 투자를 하란 말입니다. 성령이 그렇게 기도한다고 속을 것 같아요?

가만히 보면 요사이 목사만큼 하기 쉬운 직업도 없는것 같아요. 그래서 신학교 가는 학생들이 많은가 봐요. 왜 그러냐 하면 선배된 우리가 목사일을 매우 쉬운 것처럼 인상을 남겼어요. 요새처럼 자료 많은 시대, 인터넷으로 얼마든지 남의 설교 들을수 있는 세대, 머리와 재주만 좀 있어서 적당히 잘 배합해서 그저 입담만 좋아가지고 사람들 웃기고, 울리고 할 수만 있으면 좋은 설교자로 금방 평이날 수 있는 여건 아닌가요? 그런 설교 준비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어요? 솔직히 이야기해서 이야깃거리 한두 개 정도 준비하면 20분 이상 날라가고, 성경 적당히 끌어다 붙이고 나중에 소리 한 번 치면 끝나는거 아닙니까?

내가 너무 심하게 이야기를 해서 죄송한데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 그렇게 하지 말자고요. 누구든지 목자로 안수 받은 사람은 준비를 했든 안했든, 단상에 세워 놓으면 입만 열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말이 있어요. Vocabulary가 있어요. 내용이 있어요. 그 말을 내내 가지고 우리가 약장수 하듯이 사역을 할 수 없죠. 투자를 해야 해요. 씨름을 해야 합니다. 얼만큼 지력을 빼는지... 여러분들이 설교를 위해서 정말 썩는 밀알이 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거예요. 나는 이 이야기를 하고 끝내도 됩니다. 무슨 설교에 이론이 필요합니까? 그렇잖아요? 설교가 이론 많이 공부해서 설교에 도움이 됩니까?

제 이야기를 좀 하죠. 제가 설교를 잘 하는 사람인지, 못 하는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저는 그저 최선을 다한다는게 모토니까요. 잘 하느냐 못 하느냐, 은사가 있느냐 없느냐는 그렇게 신경을 안 써요. 그러나 제가 볼 때 타고난 설교자는 아니라고 늘 생각합니다. 타고난 설교자가 아니면 노력으로 때울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목사님들 10명 세워놓고 탁월한 설교자 하나 찾기 어렵습니다. 대부분 노력을 해야만이 어느 선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예요. 저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예요. 그러니까 별 수 없이 노력할 수밖에 없잖아요. 기억력도 떨어지고, 또 상식도 떨어지고, 언변도 떨어지고, 어쩔 수 없잖아요?

아까 제가 이야기했던 어느 목사님, 설교 1시간이면 준비한다고 하는 그 목사님, 같이 식사하기 위해서 점심시간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면요. 얼마나 언변이 좋은지, 달변이라고 하죠. 2시간을 앉아서 단둘이 점심을 먹으면 그 2시간 중에서 9/10은 그분이 모든 대화를 장악해 버립니다. 나는 조금 끼어들다가도 기가 죽어서 뒤로 물러나야 하고, 말이 막혀서 물러나야 하고, 할 말이 없어서 가만히 있어야 하고 그래요.

그런데 그분은 입만 열면 끝이 없어요. 그런 것은 기억력도 좋다는 거고, 달변이라는 이야기예요. 그러니까 설교를 더 쉽게 준비하죠. 제가 들으면 엉터리 이야기도 많아요. 말이 많으면 엉터리도 많죠. 왜 그러냐면 내가 전문적으로 자기보다더 훨씬 많은 전문적으로 많이 아는 영역에도 겁 없이 말을 하는 것을 들어보면 순 엉터리로 말을 하거든요. 그리고 아침에 똑같이 TV에 나온 이야기를 하는데도 사람 이름도 틀리고 엉터리로 말을 하는데, 놀라운 사실은 자기가 잘못 이야기한다는 것도 모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리고 말을 하는 것을 즐겨요. 이런 천부적인 언사를 갖고 난 사람은 그냥 준비를 했든 안했든, 단상에 서면 말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아무래도 조금 수월하겠죠.

그러나 저와 같이 그런 달란트가 없는 사람은 40분을 때우려면 노력해야지 어떻게 하겠어요? 저는 그런 사람이에요. 그런데 개척을 하고 10, 30명 앉혀놓고 설교할 때는, 거기 대부분이 갓 믿는 초심자들이니까 설교 준비한다고 애를 쓸 것도 없잖아요. 복음을 전해야 하니까요. 복음을 전하는데 원고 들고 하는 게 소용 있겠어요? 조그마한 메모 하나 들고 나가서 그냥 다이렉트로 눈과 눈을 마주치면서, 가슴과 가슴을 같이 맞대고 설교하는 쪽으로 강조를 했어요.

그런 설교를 토요일에 준비하면 주일날 할 수 있어요. 한 4~5년을 그렇게 설교했어요. 그러니까 그런 설교는 그런 설교대로의 강점이 있습니다. 주로 복음이니까, 또 안 믿는, 이제 갓 믿는 사람이 들어올 때는 잘 하는 설교인지, 내용이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구분을 못하잖아요?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게는 복음에 대한 진수를 제대로만 전하고, 뜨겁게만 전하고, 확실하게 마음의 감동을 줄 수 있도록만 전하면 성공한 설교에요. 저는 한 4~5년 그렇게 전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많은 열매를 주셨어요.

그러다 교회를 짓고 들어가서 갑자기 교인이 2천 명이 되고, 3천 명이 되고, 그렇게 불어나기 시작하니까 어느날 갑자기 긴장이 되더라고요. 내가 지금까지 하던 식의 설교를 해서는 안되겠다. 교회를 짓고 수평이동을 하는 성도들이 많아질 때에는 결국 그런 성도들은 어떤 면에서는 문제성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들이거든요. 이 교회, 저 교회 드나들던 사람들, 그저 선데이 스쿨 크리스천처럼 교회를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 것은 사실이잖아요. 그런 사람들을 대다수 상대하고 설교를 하는데, 지금처럼 순진한 초심자 놓고 다루듯이 하면 안되겠다라는 생각이 번쩍 드는 거예요. 그때부터 저는 원고를 쓰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듣는 자들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설교자도 수준이 같이 발전해야죠. 제자훈련을 통해서 평신도 지도자들이 영적으로 안목을 크게 갖기 시작하고, 자기가 제자훈련 받기 전에는 자기 눈에 확 차던 목사도 제자훈련 받고 영적으로 눈을뜨고 말씀에 은혜를 받은 다음에는 그 사역, 그 목회자가 똑같이 자기 눈에 가득 차기 위해서는 목회자가 발전을 안해주면 안되는 거예요. 자기가 은혜받은 다음에 목회자를 볼 때, 목회자가 눈에 차지 않으면 그것은 문제가 일어나는 거에요. 그러니까 저와 같이 제자훈련을 골똘하게 하는 교회는 설교자가 똑같이 발전을 해야 합니다. 평신도와 함께 영적으로 발전을 해야 하고, 바운더리가 자꾸 넓어져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자훈련을 철저하게 하는 목회자는 엄청난 영적인 짐을 지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바로 그런 입장이었어요. 수평이동하는 교인들마다 문제점이 많은 교인들 많이 앉혀놓은데다가, 제자훈련을 통해서 영적으로 눈을뜬 평신도 지도자의 수가 100명, 200명, 300명 계속 늘어나는 마당에 설교를 적당히 할 수가 없죠. 그러니까 대안의 다른 길이 없는 거예요. 내가 실험하는 거죠. 내가 노력하는 거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원고를 썼어요. 원고를 쓴다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아무리 자기가 쉽게 하는 말이라도 문장으로 쓰기 시작하면, 그것이 특별히 글을 쓰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상당히 어렵습니다. 진통을 합니다. 원고를 써야 되니까 설교 전체의 논리에 대해서도 생각을 안할 수가 없죠.

로이도 존스가 말한 것처럼 불타는 논리, 중요하죠. 사람들이 설교를 들을 때는 은혜를 받은 것 같은데 듣고나서는 무슨 말을 들었는지 헷갈리면 벌써 논리가 없는 설교라는 이야기거든요? 부흥사들이 그런 설교 잘하잖아요.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좋지만 결국 영혼을 변화시키는 면에서는 약해요. 불타는 논리가 필요해요. 그러니까 설교를, 원고를 쓰려면 논리가 분명해야 해요. 그 논리에 따라서 말씀을 요리해야 해요. 그리고 그 말씀을 요리한 다음에 요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아요. 더 중요한 것은 평신도 입장에서 그 말씀을 자기가 들을 줄을 알아야 해요. 내가 집사 입장에서 이 말씀을 들을 때 어떻게 들을까? 적어도 이 정도의 피드백은 스스로 할 수 있어야 해요. 이것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예요. 그래서 원고를 쓰기 시작하면 자기의 어휘력도 늘어나고, 문장력도 달라지고, 그 다음 내용도 자기가 써놓고 읽어보면 알잖아요?

그런데 어떤 때는 이걸 설교라고 하냐면서 확 찢어버릴 때가 있잖아요? 자기가 자꾸 그렇게 노력을 하면 설교가 발전하고 질이 높아지는데, 한 가지 난제가 뭐냐 하면 엄청난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목사가 얼마나 바빠요? 저 같은 경우에도 교인들이 자꾸 늘어나니까 제자반은 다 부교역자들에게 나눠줬지만, 사역훈련반 3~4개를 제가 다 맡아서 해야 되잖아요. 순장반도 해야 하고, 나머지 이것저것 행정해야 하잖아요. 거기에다가 주일설교 준비한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별 도리가 없어요. 남이 잘 때 씨름할 수밖에 없고. 어떻게 하든지 내가 시간을 아끼는 방법 중에 하나는 밖에서 요청하는 집회를 일체 삼가는 거예요. 무조건 끊어버리는 거예요. 거의 95%를 끊어요. 1년에 한두 번 빼고는 안 나가는 거예요.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을 설교에 투자해요. 그렇게 안 하면 시간이 안나는데요. 그리고 그만한 시간을 투자 안하면 설교가 준비가 안되는데 어떻게 합니까?

본문에 따라서 설교가 잘 풀리는 경우도 있지만, 본문에 따라서 설교가 지독하게 안 풀리는 본문도 있잖아요. 설교가 지독하게 안 풀리는 본문일수록 더 중요한 본문이거든요. 요한복음 3장 16절 여러분이 설교 준비하기 쉬워요? 어려워요? 어렵죠? 왜냐하면 너무 잘 아는 본문이기 때문이예요. 그런 본문이 설교를 준비할 때 진액을 뺴게 만드는 거예요. 왜냐하면 뭐든 듣는 사람들이 익히 아는 본문이기 때문에 '아, 또 그 말 하겠구나'라며 예상을 하면서 듣게 하면 안 돼요. 새롭게 들을 수 있도록 만들어야죠. 이게 설교자의 사명 아닌가? 똑같은 본문이라도, 똑같은 복음, 서로 너무 잘 아는 내용이라도, 자기도 모르게 귀를 기울일 수 있도록 설교하는게 설교자의 사명이예요.

왜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든 평신도들이 복음이라고 하면 다 아는 것처럼 거드름 피우면서 귀를 기울이지 않느냐? 누가 그렇게 만들어 놓은 거예요? 교육자들이 그렇게 만들어놓은 거예요. 준비 안하고 그냥 아는대로, 상식적으로 떠드니까 맨날 하는 소리, 그런 식으로 듣는 거예요. 복음이 그렇게 가벼운 겁니까? 그렇게 차원이 없는 겁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렇게 쉽게 설명이 될 수 있는 내용인가요? 그러니까 원고를 가지고 씨름을 하면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일이 잘 안될 때 책상 위에 주석과 함께 필요한 서적들이 30~40권 정도 쌓일 때가 있어요. 물론 그것들을 다 읽는 것은 아니지만, 필요한 자료를 위해서는 씨름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리고 원고 준비가 다 끝났을 때 그대로 들고 나가서 읽을 수가 없잖아요. 필립스 브룩스처럼, 조나단 에드워드처럼 원고를 들고 읽어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 말씀 앞에 은혜를 받고, 그래서 그의 메시지를 듣기 위해서 예배시간 전에 100미터, 200미터에서 사람들이 줄을 서는 탁월한 설교자 같으면 원고를 들고 나가도 되지만, 나 같은 사람은 권위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원고를 준비했다고 그것을 들고 나가 읽을 수가 없어요. 할 수 있는대로 내가 소화를 하죠. 원고에 매이지 않고, 원고는 놓고, 그러나 원고에 매이지 않고 설교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그 모든 부분이 시간이 얼마나 많이 걸리겠어요.

지난 번 환경부 장관 지내신 손숙씨와 같은 연예인에게 찾아가서 물어보세요. 그 사람은 연극배우죠. 무대에서 1인극을 하기 위해서 그 동작 하나하나, 대사 하나하나를 놓고, 표정 하나하나를 놓고 얼마나 씨름을 하는데요. 한 번 가서 물어보세요. 자기가 얼마만큼 투자하고 노력하느냐에 위에 앉아있는 청중이, 관객이 감동을 받는 거예요. 설교는 절대 쉬운 작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쉬운 일을 맏기지 않았어요. 오죽 하면 바울이 내 그리스도의 남은 권한을 내 몸에 채운다고 했겠어요. 설교도 그중에 하나예요.

그런데 대부분의 젊은 교역자들 보면 설교 준비를 우습게 하고 있어요. 그래가지고 조금 재미있는 예화를 해서 교인들이 막 웃고 분위기가 좋아지면 그게 바로 성령의 충만인 줄 착각하는 멍청한 사람들도 많아요. 여러분, 자기가 설교해 놓고 하나님 은혜가 충만하고 은혜가 놀라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보면 이상해요.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그 시간에 자기 설교가 은혜 충만했다는 것을 뭘로 평가하는 거예요? 설교를 능력있게 했느냐, 안 했느냐는 분위기 가지고 얘기하는 거 아니예요. 그 사람이 나가서 그 설교 때문에 얼마만큼 영향을 받아서 그의 생각과 행동의 삶이 달라지고 있느냐로 얘기를 해야죠. 그 시간의 분위기 가지고 얘기를 해요? 오늘날 우리의 생각들이 뭔가 잘못되어 있어요. 그것을 시정해야 합니다. 속지 마세요.

그래서 서론에 해당하는 얘기로, 투자하지 않고 생명을 걸다시피 자신을 던져서 설교를 위해서 씨름하지 않고, 은혜 충만하기를 바라고 좋은 설교자 되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얘기예요. 하나님은 속지 않으세요. 여러분의 설교 준비하는 패턴, 또 설교를 위해서 준비하는 시간, 잘 살펴보세요.

살펴보고 제가 오늘 이야기하는 것은 주로 주일 설교를 얘기합니다. 수요일에 설교라든가, 새벽설교라는 것은 가볍게 말씀을 터치하고 넘어가도 돼요. 그러나 주일 설교는 성격이 틀립니다. 새벽기도 나오는 분들은 어느 정도 수준이 있는 교인들이예요. 수요일 저녁 나오는 사람들도 어느 정도 수준이 있는 교인들이예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는 말씀을 주석하다시피, 강의하다시피 전해도 괜찮아요. 그러나 주일날 나와 앉아있는 청중은 나쁘게 말하면, 영적으로 오합지졸이예요. 별 사람이 다 있는 거예요. 이 사람들 앞에 놓고 말씀을 가지고 도전하는 거예요. 그러므로 이것은 신경써야 해요.

여러분이 들고 있는 페이퍼를 보세요. 서론을 봅니다. "교회는 설교와 함께 서고 설교와 함께 쓰러진다는 말이 있다. 교회의 생명이 설교와 얼마나 직결되는 말이 아닌가 한다. 현대 목회에 있어서 설교는 흔히 말하는 preeching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동안 가르쳤죠. 전파했죠. 치료했죠. 그래서 preeching, teaching, healing 이것은 예수님 사역의 골격입니다. 그런데 설교는, 오늘날 현대의 설교는 이 세 가지 사역을 다 포함하고 있어요. 다 포함하고 있는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preeching이라고 복음만 잘 합니까? 그 안에는 teaching도 있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전해야 하잖아요. 진리를 깨닫게 되잖아요. 그리고 그렇게 복음이 전해지고 진리가 가르쳐지는 자리에 healing이 있잖아요. 영혼이 치유받고, 어떤 사람은 육신도 치유받는 healing의 역사들이 일어나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복음을 전파하고, 성도를 온전케 하기 위해 진리를 가르치고, 그 결과 영과 육이 치유를 받는 은혜의 역사가 반복되는 현장이 바로 설교를 하고, 설교를 듣는 교회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설교자는 고대사에 기록된 계시의 말씀을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효과적으로 들을 수 있게 해야하는 큰 부담을 안고 있어요. 3천년, 5천년 전의 계시의 말씀이예요 그 말씀을 21세기에 사는 사람들의 귀에 들리도록 해야 하는 큰 짐을 안고 있어요. 다시 말해 들어주는 설교가 아니예요. 들리는 설교를 해줘야 합니다. '교회에 왔으니 들어주자'가 아닙니다. 자기도 모르게 들리는 설교, 영혼을 파고드는 설교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설교자의 엄청난 노력을 요구하고 있어요. 어떻게 해야 들리는 설교를 할 수 있을까? 우선 설교가 뭐냐? 제일 간단하게 한 사람이 필립스 브룩스라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이 진리를 많은 사람에게 전하는 것. 이것이 설교다"라는 얘기를 했어요. '한 사람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많은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 간단한 정의입니다. 필립스 브룩스에 대해서 여러분이 잘 모르시죠? 미국 설교자입니다. 지난 1999년 미국 프리칭 잡지사에서 지난 100년 동안 설교자 10명을 뽑았는데, 그중에 한명이예요.

이분이 워낙 탁월한 설교자였기 때문에 예일대학에서 해마다 한동안 설교 특강을 며칠씩 한 시리즈가 있어요. 거기에서 자기의 설교를 강의했는데, 그게 너무 유명해가지고 책으로 나와서 지금도 설교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필립스 브룩스의 설교를 읽습니다. 그때 그분이 "설교가 뭐냐? 한 사람이 여러 사람에게 진리를 전하는 것. 그래서 설교 안에는 두 가지 요소가 반드시 들어있다. 하나는 불변의 진리, 하나는 가변적인 인격" 바울이 하는 말로 하면 보배와 질그릇이라는 거죠. 이 두 가지 요소가 설교에 있습니다.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진리의 말씀에 대해서는 깊은 연구가 필요합니다. 시간을 투자해서 연구해야 합니다. 신학을 통해서 전문적인 수련을 쌓아야 합니다. 이 진리의 말씀을 주야로 내 마음에 담고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진리의 말씀은 내가 먼저 이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몸부림이 따라야 합니다. 이게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변하지 않아요. 시대를 초월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 진리를 전하는, 담는 질그릇이라고 할 수 있는 인격, 설교자, 이것은 가변적이죠. 그리고 불안전하죠. 불안전한 그릇이 온전한 진리를 전해야 한다는 모순을 안고 있는 것이 설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흠이 많은 인간이 전한다는, 이 어떻게 보면 전혀 조화가 안 되는 모순을 안고 있는 것이 설교입니다. 이 점을 여러분이 주목해야 합니다. 내가 천사가 되어서 전한다면 간단해요. 내가 예수님이 되어서 이 본문 말씀을 전한다면 간단하죠. 고민할 바가 없죠. 그러나 우리는 죄인이요, 불안전한 존재요, 가변적인 존재요, 이런 질그릇이 영원불변한 진리, 온전한 진리를 전해야 한다는 것. 이것 때문에 우리가 몸살을 치르는 것입니다. 이게 설교예요.

여러분, 이 사실을 진지하게 고민해 봤나요? 이런 것을 놓고 고민을 안하신다면 아직도 설교가 뭔지 모르고 하시는 거예요. 목사가 되었으니까 어쩔 수 없어서 직업적으로 하는 사람이지, 온전한 진리를 불완전한 내가 전한다는 이것 때문에, 그 두 요소 사이에 생기는 괴리를 어떻게 하면 좀 좁혀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안고 여러분들이 설교를 한다면 시간 투자를 안할 수가 없죠.

어떤 분들은 설교를 참 즐기더라고요. 그런 분들 보면 저는 참 부러워요. 참 설교하는 것을 너무 즐기는 거예요. 그래서 운동 따로 할 것 없고, 단상에 올라가서 춤추고 소리지르고 하면 운동도 되고 스트레스도 풀고, 모든 것이 다 해결돼요. 즐기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저에게는 그런 은혜를 안 주신 것 같아요. 그래서 저 자신이 설교자로서 고민을 하는, 설교를 엄청난 십자가로 생각을 하는, 이런 의식이 밑바닥에 딱 깔려 있기 때문에 어둡죠. 약간 우울하죠. 저는 이것을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은퇴한 마당에 두 가지 짐을 지고 평생 설교했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우울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는 완전한 진리를 내가 전해야 하는 불안전한 인격이라는 것 때문에 고통하는 것, 이것이 짐이었고, 또 하나는 뭔지 아세요? 내가 전하는 것만큼 내가 살지 못한다고 하는 이 무서운 모순 때문에 설교가 무서워져요. 여러분은 이런 고민 안해봤어요? 내가 하는 말을 따라갑니까? 그래서 겁이 나가지고 내가 25년 동안 설교한 리스트를 가만히 보면 도덕적인 설교가 별로 없어요. 겁이 나가지고요. 산상수훈을 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도덕적 설교가 전체의 불과 20%도 안되는 것 같아요.

겸손합시다! 사랑합시다! 정직합시다! 경건하게 삽시다! 거룩합시다! 왜 내가 그런 설교를 많이 못했느냐 하면 겁이 나가지고 그래요. 내가 못 따라가는데 말만 해놓고 내가 못 따라가는 설교를 자꾸 해서 내가 어떻게 하냐? 그래서 겁을 지레 먹고 그런 설교를 피할 때도 있었거든요. 이게 짐 아닙니까? 무거운 십자가 아닙니까? 불완전한 내가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이것도 짐이고요. 내가 전한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도 짐이고, 그러니가 설교라는 것을 즐길 수 있는 기회가 없었어요. 수만 명을 앞에 놓고 설교해도 하나도 즐겁지 않아요. 오히려 겁이 나요.

그래서 나만 그런가 생각을 하고 고민을 했는데, 저는 루터를 통해 위로를 받았어요. 루터도 저와 비슷한 설교 우울증이 뭔지 아는 사람이예요. 그는 이 설교가 너무나 어려운 일이고,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실토를 했습니다. 그대로 읽을께요. 루터는 어느 정도 설교를 했느냐 하면 1517년 종교개혁 시작하고 나서 1546년까지 34년 동안 설교를 했는데, 4천 번 정도의 설교를 했어요. 굉장히 많이 했죠? 4천 번 정도면 굉장히 많이 한 거예요. 이렇게 설교를 하고 루터만큼 대단한 설교자가 있습니까? 역사적으로 완전히 불변의 위치를 확보한 설교자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런 말을 했어요.

"설교를 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치고 설교하는 것은 진짜 힘들다. 차라리 수레를 끌고 돌을 운반하는 것이 훨씬 좋을 것이다. 양심이 있다면 수레를 끌라. 설교를 하지 말아라" 하는 이야기예요. "설교를 맡은 사람은 항상 괴롭다. 내가 자주 말했듯이 저주받은 악마가 설교자가 되어야지, 선한 사람은 설교자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여러분, 여기서 루터가 회까닥 한 거 아니예요? 설교자로서 얼마나 내면의 고민이 많았다는 것을 우리가 읽을 수 있잖아요. 이것은 설교가 나쁘다는 것도 아니고, 설교를 해서는 안된다는 말도 아니고, 설교를 가볍게 보지 말라는 이야기예요. 그만큼 해야되는 작업이 설교라는거죠. 왜? 불안전한 존재가 하나님의 진리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이게 설교이기 때문이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진리를 연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파는데도 전력을 쏟아야 하겠지만, 제가 볼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내 자신의 인격이라는 것을 좀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 더 노력을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옛날에 제가 어릴 때, 신학교 다닐 때만 해도 설교자로써 고민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성경을 깊이 연구해서 살아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까?' 거기에만 신경 썼어요. 그것만 되면 나머지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우리는 생각했어요. 그런데 제가 설교를 막상 하기 시작하면서 이것은 내가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알았어요.

진짜 고민해야 할 부분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내가 깊이 깨닫지 못해서가 아니예요. 그 말씀을 전달하는 내 자신에게 문제가 너무 많기 때문에 더 나에게는 고통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설교를 능력있게 못한다는 것을 내가 알았어요. 그러니까 적어도 우리가 설교를 잘하려면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해서 그 진리의 말씀을 드러내는데 50% 할당해야 하고, 나머지 50%는 그 말씀을 내가 전달하는 수단으로서, 하나님의 성령의 채널로서, 내가 좀 더 완전한 자리에 이르도록 실현해야 합니다. 설교학적으로 말하면 내용을 위해서 50% 투자하고, 그다음에 설교자로서의 연출을 위해서 50% 투자해야 해요. 연출이라는 말을 해서 여러분이 이상하게 들을 지 모르겠지만 사실이예요.

헨델의 '메시아', 얼마나 은혜스러운 것입니까? 그 '메시아'고, '할렐루야'를 우리가 들을 때 가슴이 뛰지 않아요? 그 곡 자체가 영감이 많아요. 헨델이 죽으면서 쓴 거니까, 작곡한 거고, 가장 인생의 어려운 밑바닥을 헤맬 때 그 곡을 썼으니까 영감이 넘치죠. 그 곡은 영감이 있어요. 그 자체로도 은혜가 되는거에요. 그러나 성가대가 기도 많이 하면 됩니다. 다른 거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는 연습도 더 많이 하고, 또 소프라노나 알토나, 테너나 베이스나 적당한 솔리스트를 찾아서 세우는 일을 등한시하고, 왜냐하면 아무나 적당히 목소리 크게 나온다고 세우고, 그렇게 해서 '할렐루야'를 부른다고 합시다. 그 곡을 들으면서 감동받고 은혜받을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어요? 아무도 없어요. 연출이 그래서 중요한 거예요. 아무리 진리의 말씀을 들고 나와도 전달하는 내 자신, 성령의 도구가 되어있는 내 자신이 연출을 잘 못하면, 연출하기에 그만큼 미숙하면 그만큼 은혜는 끼치지 못하는 거예요.

옛날에 채병용 목사님처럼 '예수 천당' 하고 외쳐서 능력이 나타나는 영역은 따로 있는 거예요. 우리는 1년, 10년, 20년, 똑같은 강당을 지켜야 하는 목회자예요. 그런 목회자가 나와서 말씀을 전하는데, 성도들이 항상 새롭게 듣도록 만드는 일이 쉽나요? 내가 그만큼 전달자로서, 연출자로서 최선의 노력을 하면서 발전을 하지 아니하면, 사람들은 나중에 들어주는 것이 아니고 안 들어요. 안 들립니다. 그래서 이 가변적인 인격이라는 부분을 놓고 연출자로서, 설교자로서, 전달자로서, 커뮤니케이터를 맡은 사람으로서 여러분이 자기 노력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설교자는 거울을 보고 열심히 설교를 해보면서 자기 표정, 자기의 모든 것을 다시한번 체크하는 사람도 있어요. 어떤 사람은 자기 와이프를 앞에 놓고 열심히 설교하면서 좋지못한 버릇들을 지적하기도 해요. 기억력이 나쁜 사람들은 밤새도록 외워서라도 중요한 내용은 마음에 다 담아서 자연스럽게 전달하려고 노력해요. 어떤 사람은 사투리를 줄이기 위해 피눈물나는 노력을 해요. 주석만 들고, 성경만 파지 마세요. 50% 하세요. 나머지 50%는 그 말씀을 전달하는 나를 위해서 투자하세요. 나의 발전, 나의 개선을 위해서 투자하세요. 설교자가 해야할 사명이예요.

여러분이 보면 아이컨택을 전혀 못하는 설교자도 있잖아요? 원고 아니면 천장식으로요. 그런 것은 고쳐야 해요. 그리고 어떤 사람을 보면 말소리가 또렷하지 못한 사람도 있잖아요? 고쳐야죠. 입안에 모래를 넣어서, 혀를 굴리더라도 고쳐야죠. 어떤 사람은 설교하면서 너무 얼굴이 굳어 있는 사람도 있잖아요. 고쳐야죠. 그리고 어떤 사람은 내용을 전개하는 면에서 너무 로직이 안되는 사람이 있잖아요. 피눈물나는 노력을 해야죠. 헷갈리게 해서는 안되잖아요. 내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하나님 대신 전하는데, 그 전하는 도구가 되는 나를 놓고 씨름을 한다? 이것은 설교자가 아니죠.

들리는 설교를 위해서 여러분, 몇 가지 제안을 하고 싶어요. 우선 상식적으로 하는 이야기지만 여러분, 은혜를 좀 아세요. 은혜를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참 고민이예요. 왜냐하면 제가 이제 선배로서, 목회일선에서 물러난 사람으로서 고민이예요. 은혜를 모르는 젊은 목사들이 너무 많아요. 은혜가 뭔지 아시죠? 그러니까 젊은 목사들 중에서 은혜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고민을 하는 거예요. 은혜를 좀 알아야 되는데,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라는 사실을 전할 수는 있지만, 내가 그 십자가 밑에서 울어본 일이 있나요? 예수님이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소리는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내가 그 용서받은 자의 감격이 얼마나 큰 지 체험한 적이 있나요? 은혜를 모르는 거예요. 지금 세상 돌아가는 환경이 은혜를 체험하기가 굉장히 어렵게 되어 있어요. 조금 가스펠송 부르면서 가슴이 뜨거워지면 그게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펄쩍 뛰다가, 이것저것 해보다 안 되면 신학교 가라는가 보다 해요. 기가 막힙니다. 그래가지고 목사가 됩니다.

그 젊은 친구들도 이제 은혜 면에서 고민이 되니까 이런 농담까지 하잖아요. "나도 폐병이 좀 들었으면 좋겠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했더니, "우리 한국의 유명한 목사님들 보니까 전부 이력에 폐병 경력이 있더라고요. 참 유명한 목사가 되려면 폐병을 앓아야 되나 보다." 그런 농담을 한다고요. 그래서 듣고 보니까 실제 그렇더라고요. 가만히 보니까요. 한 10명은 뽑을 수 있어요. 그런데 그것은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폐병이 걸린 것도 아니고, 너무나 가난해서 영양보충을 못해 걸린 것이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그럴 필요가 없잖아요.

한 가지 그런 게 있는데 폐병에 걸려 사경을 헤맨 사람은 은혜를 아는 특별한 기회를 하나님이 주신 것은 사실이예요. 옛날에는 폐병 하면 죽음을 각오해야 되었잖아요. 그런 병을 안고 씨름을 하면서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려고 하면, 아무래도 건강한 사람은 모르는 은혜의 세계를 알죠. 십자가 앞으로 더 가까이 갈 수 있죠. 그러니까 설교가 답이죠. 사람들의 영혼을 쥐고 흔들 수 있는 무언가 영역이 있죠. 일리가 있는 말이예요.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놓고 볼 때, 꼭 은혜는 병을 얻어 사경을 헤매야 하는 성경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은혜를 알아야 설교자가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이것을 위해 고민하십시오. 제가 이래라 저래라 할 필요가 없어요. 여러분이 잘 압니다.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길이 어디 있는지 잘 알아요. 은혜를 받으세요. 은혜를 받기를 사모하는 사람은 날마다 볼링이나 치고, 골프나 치고, 그럴 수 없어요. 은혜를 받기 원하는 사람은 자기 가정만 싸고 돌면서 가정이 우선시되는 삶을 살지 못해요. 은혜를 아는 사람은 내 건강을 앞세워 걱정하는 사람이 아니예요. 은혜를 아는 사람은 모험도 할 수 있어야 해요. 은혜를 아는 사람은 자기 희생도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 원하는 설교가 얼마나 많아요. 그러나 진짜 은혜를 끼치는 설교가 얼마나 되느냐? 우리는 목사로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골방에서 은밀히 보시는 주님 앞에 은혜에 감격하고, 은혜에 소리치고 찬송하고, 은혜 때문에 가슴이 떨리는 자기 자신의 은혜의 세계가 없는 사람이 남 앞에 가서 은혜받은 것처럼 춤출 필요가 없잖아요. 뭐 할 짓이 없어서 강연하면서 해요. 맞아요, 안 맞아요? 뭐 할 짓이 없어서 성경 들고 강연하러 다니냐는 거죠.

제가 극단적인 이야기를 하죠. 은혜가 없어서 고민되는 사람은 죄를 좀 범하세요. 죄 좀 짓고, 나중에는 하나님 앞에 두들겨 맞아 가지고 사막의 음침한 골짜기에 떨어져서 죽을 고비를 겪으면서 씨름을 해보세요. 그러면 은혜를 알 수 있어요. 왜냐하면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치니까요. 바울의 말을 거꾸로 제가 뒤집어서 마음이 아프지만 오죽 답답하면 그러겠습니까?

그리고 여러분, 들리는 설교를 위해서는 최선을 다하세요. 이미 서론적으로 제가 말씀드렸어요. 절대 장난처럼 할 일이 아니예요. 설교가 장난입니까? 어느 목사처럼 설교지 하나 툭 던져주면서 설교 제목들 가운데서 어느 설교가 제일 마음에 드나? 교회 사찰 보고 물어보면 어쩌라는 겁니까? 어느 설교 제목이 제일 마음에 드냐? 항상 자주 묻는 질문이니까, 나중에는 "이 설교제목이 참 좋으네요" 그러면 "그것을 요약해 놔라. 토요일날 오면 나에게 줘라" 그러면 그게 주일 설교라는 거예요. 너무 그렇게 가니까 하나님이 가만히 안 두시데요. 그 설교자, 나중에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장난인 줄 알아요. 장난이라도 그렇게 안 하죠.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어요? 최선을 다하세요. 바쁘다는 변명하지 마세요. 목회는 항상 바빠요. 바쁘다는 것이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된다는 명분은 되지 않아요. 목회는 원래 바쁜 거예요. 그 바쁜 중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목회자예요. 그래야 양떼가 살아요. 쉽게 설교를 준비하려고 하지 마세요.

성육신의 원리를 체득하세요. 이거 굉장히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서 우리에게 복음을 들려주시지 않았어요. 그는 찾아오셔서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이루시고 우리가 입는 옷, 우리가 신는 신을 똑같이 신으시고 우리가 서있는 자리에서 말씀하셨어요. 이게 성육신이예요. 설교자는 내려 앉아야 합니다. 청중이 있는 자리에 서야 해요. 눈높이를 낮춰야 합니다. 이게 설교예요. 이런 이야기를 해도 이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사람이 많아요. 설교자는 인카네이션을 해야한다는 말을 못 알아듣는 사람이 있어요. 성경에 있는대로 전하면 되는데 어떻게 보면 참 설교가 뭔지 모르는 소리죠. 인카네이션 해야 합니다. 내려가야죠. 그래서 청중과 눈높이를 맞춰야 해요.

제가 제자훈련 세미나 가면 자주 하는 소리지만, 박윤선 박사님이 저에게 아주 충격적인 말한마디를 해주셨어요. 제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기 위해서 LA에 와 있을 때, 박윤선 박사님께 인사를 가서 만났어요. 그분은 그 당시에 70세 중반 정도 되시던 나이예요. 둘이서 공원을 산책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제가 생각지도 않은 질문을 하게 되었어요. "목사님, 목사님은 참 대단한 설교자였습니다. 물론 신학자였고, 성경주석가였지만 제가 기억하는 것은 굉장한 설교자였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옥 목사처럼 다시 젊어질 수 있다면 무엇을 좀 새롭게 해보고 싶습니까?" 그랬더니 주저하지 않고 답이 나왔어요. "옥 목사, 내가 당신처럼 젊어질수 있다면 나는 설교를 다시 하고 싶어." "어떻게요?" "나는 그동안 너무 추상적인 설교를 해왔어. 지금 돌이켜보면 설교가 추상적이었어. 조금 구체적인 설교를 하고 싶어."

쇼크를 받았습니다. 박 박사님은 대단한 설교자입니다. 고려신학교 학생들 채플시간에 설교를 하시면 자주 자주 일어나는 사건이 있었어요. 학생들이 그 말씀 듣고, 은혜를 받아 눈물을 흘리고, 통곡하면서 기도하느라고요. 채플이 끝났는데 안 일어나요. 그 다음 시간 휴강, 그래도 안 일어나요. 이런 일들이 왕왕히 있었어요. 얼마나 대단해요? 그 정도의 설교가면 다른 소리 할 것 없잖아요? 그런데도 노년에 와서 자기 설교를 회고하면서 나는 너무 청중을 모르고 설교를 한 것 같다는 이야기예요. 그러니까 좀더 구체적으로 설교하고 싶다는 거예요. 이게 인카네이션입니다. 오늘날 21세기에 우리 성도들이 이 험악하고, 음란하고, 더럽고, 악하고, 교만한 세상에 흩어져 살면서 어떤 일을 겪고 있고, 무엇으로 고민하고 있으며, 그들이 영적으로 참 해결하지 못해 씨름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좀 더 우리가 성도들이 사는 자리에 내려가서 들여다 보면서 설교해야 한다는 거예요.

이것을 위해서 제일 좋은 방법이 제자훈련 하는 거예요. 설교자를 발전시켜 주고, 특별히 설교자로 하여금 평신도가 귀담이 들을 수 있도록 설교하게 만드는 가장 빠른 지름길은 제자훈련이예요. 이 가운데 여러분이 잘하고 계시는 것도 있겠지만, 한 십여 명 되는 제자훈련생과 앉아서 일주일에 한 번씩 둘러 앉아가지고 세 시간, 어떤 때는 네 시간, 한번 말씀을 놓고 서로가 주고받으면서 골로새서의 말씀대로 말씀이 너희속에 풍성히 고하여 모든 지혜를 피차 가르치고 근면하는 아름다운 소그룹의 환경속에서 말씀을 한번 쉬어간다고, 나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시간은 목사는 지도자가 아닙니다. 목사도 학생입니다. 평신도가 학생이 아닙니다. 평신도도 지도자입니다. 성령께서 각자에게 주신 은혜를 공유하는 거예요.

그러므로 다 들을 수 있어요. 들어보세요. 듣다가 어떤 때는 깜짝 놀랍니다. '아, 내가 너무 사람을 모르고 설교했구나. 너무 교회 안에만 있어서 세상을 모르는 채 설교했구나. 구름 위에서 혼자 설교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내 설교 좀 바꿔야겠다. 아, 이런 설교를 이렇게 좀 해야겠다. 내가 다음주 설교를 준비하다가도 이 내용을 들려줘야겠다'라고 생각이 나는 거에요. 내가 내려앉아서 눈높이를 같이 비슷하게 맞추다 보니까, 내 설교가 이래서는 안되겠다 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제자훈련 하셔야 합니다. 제자훈련 하면 여러분의 설교가 달라져요.

그래서 제자훈련을 통해서 인카네이션이 무엇인가를 체득하게 되면, 그 다음에 그 설교는 '적절성'이라는 것을 갖추게 됩니다. 이게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존 맥스웰이라고 하는 분 잘 아시죠? 리더십에 대해 탁월한 책들을 많이 써내는 목사님이죠. 그분이 98년도 '프리칭'이라는 잡지에서 이런 말을 했어요. "위대한 설교자는 뛰어난 전달자이다." 그 말은 아까 제가 연출한다는 말을 했죠? "위대한 설교자는 뛰어난 전달자여야 한다. 뛰어난 전달자가 아니면서 훌륭한 설교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설교를 하려고 할 때 가장 먼저 해야할 것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청중이 어디에 서 있는가를 파악하는 것이다." 아시겠어요? 무조건 전하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안되죠. 내가 전하는 말씀을 들어야 하는 청중이 어디 서있는가를 파악하는 것. 이것이 인카네이션이예요.

그러기 위해서 '적절성'이라는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말씀이 자기 자신과 적절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에 그 설교말씀에 끌리게 됩니다. 이게 '적절성'이거든요. 다시 말하면 청중들은 설교자가 전하는 말씀이 자기와 적절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 느껴질 때에 자기도 모르게 말씀에 끌리게 됩니다. 나와 별로 관계가 없다고 하면 마음이 끌리지 않는 거예요. 적절성을 수반한 진리는 메시지를 뜨겁게 만듭니다. 더러 목사는 세상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한다고 했어요. 설교의 적절성을 위해서 세상에서 사람들이 어디에서 있으며,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를 더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서 그들을 만나야 합니다. 적절성을 위해서요. 그런 노력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이게 성육신입니다.

잘못 하면 우리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런 문제는 별로 생각을 안하고 설교만 준비하잖아요? 그러니까 결국은 사람들과 매치가 안 되고, 설교는 설교대로 돌고, 청중은 청중대로 따로 있는 이런 괴리 현상이 일어나잖아요. 이런 부분을 우리가 최소한으로 메워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또 한 말씀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을 가지고 100명의 설교자가 설교하면 100가지 설교가 나옵니다. 절대 똑같은 설교가 두 개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양한 개성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설교자는 자기 설교를 가지고 있어요. 여러분이 아무리 실험을 해도 옥 목사 설교를 모방 못합니다. 저 자신이 하는 설교예요. 저는 죽었다 깨놔도 김진홍 목사님 설교 모방 못합니다. 몇 마디 하면 사람들은 마음을 확 빼앗기지요. 무슨 심사인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저는 서울의 어느 목사님처럼 세상이야기를 가지고 재미있게 묶어가면서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재주가 없어요. 물론 설교 자체에는 동의를 안하는 부분이 많아요. 어쨌든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니까요.

이 말은 뭐냐하면 각자 자기 설교가 있다는 거예요. 자기 설교를 개발하세요. 처음에는 모방도 하고, 카피도 하고, 그러나 모방을 통해서 창조성을 발휘하잖아요. 자기 설교를 찾으세요. 스토리 텔링을 좋아하는 사람, 아주 구수하게 말을 자연스럽게 하는 은사가 있는 사람은 설교를 그런 식으로 개발을 하세요. 어떤 목사님이 막 웅변식으로 하는 설교가 굉장히 감동스럽다고 생각해서 그 다음부터 웅변식으로 열을 토하고... 안 맞는 사람이 있어요. 저에게도 안 맞아요. 악을 쓴다고 하고 웅변한다고 생각을 안하죠. 자연스러워야 하거든요. 자기 개성에요. 그러니까 자기 설교를 찾으세요. 그러면 간단합니다.

내가 사람들과 만나서, 가장 친한 사람들과 만나서 커뮤니케이션을 할때 나는 보통 어떤 스타일로 대화를 하는가, 그런 것을 캐치해 보세요. 그러면, 난 내가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할 때는 귀를 기울이더라, 그리고 내 주변에 사람들이 모인다. 이것은 나만이 갖고 있는 하나님이 주신 장기일 수 있거든요. 이런 것들이 무엇인지 찾으세요. 그리고 개발하세요. 그러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설교 청중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큰 교회나, 작은 교회나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마지막으로 6번의 설교의 기쁨과 소망을 가지라. 필립스 브룩스의 글을 다시 인용합니다. 우리 한번 같이 소리내서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잘 아신다. 고로 우리가 쓰임받을 수 없는 자리로 결코 몰아넣지 아니하신다." 우리를 설교자로 세웠으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시키시는 법이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를 목사로 부르신 것이 확실하다면, 내가 쓰임이 받을 수 없는 자리로 몰아넣지 않으신다. 그리고 설교자가 자기를 철저하게 즐기는 것이 성공의 필수적이다.

저는 솔직히 그러지를 못했어요. 즐기지를 못했어요. 제가 즐긴 것은 제자훈련이었어요. 저는 수만 명이 와서 앉아 들어도 재미없어요. 강단에 올라가면 재미가 하나도 없어요. 그러나 10명, 8명 앉혀놓고 함께 말씀을 나누는 그 소그룹에서는 너무 신나요. 행복해요. 그런데 어떤 목사님들은 설교하는 자체를 참 즐기는 분이 있어요. 굉장히 좋은 은사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도 할수 있으면 그렇게 되세요. 그래서 정말 생명 걸고 진액을 뽑아도, 그게 너무너무 즐겁고 기쁘다는 말을 할 수 있도록 하세요. 저와 같이 말하지 마시고요. 루터와 같이 말하지 말고요. "정말 너무 힘들지만 그래도 기쁘다. 정말 이것보다 더 보람있는 일이 없다"라고 말할 정도로 여러분이 설교를 즐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보세요. 설교를 즐기면 즐길수록 더 잘할 수 있다. 송아지가 도살장에 끌려가듯이 설교하는 사람보다, 정말 순교자가 될 것 같이 신이 나서 설교하는 사람이 더 잘할 수 있죠. 참 중요한 말이 있는데, 여러분 줄을 그어 놓으세요. "세상은 아직 들어야 할 최선의 설교를 듣지 못하고 있다." 가장 좋은 설교를 아직도 세상은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설교는 앞으로 언젠가 누군가가 할 거예요. 여러분 자신이 할 수도 있습니다. 최고의 설교는 아직도 우리는 듣지 못했다. 누가 할 거냐? 내가 할 거다. 이런 꿈을 가지고 여러분, 말씀과 씨름하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이런 은혜와 특권을 주실 것입니다.

한순간이라도 설교자의 사역에 비교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이것은 저도 동의합니다. 이것보다 보람있고, 이것보다 능력있는, 또 영향력을 끼치는 사역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10명을 모아놓고, 세상을 모두 놓고 설교하듯이 하세요. 50명을 놓고도, 한국 모든 사람들을 앞에 놓고 설교하듯이 하세요. 그것보다 더 귀한 일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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