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8/18) 교갱협 제8차 영성수련회 개회예배

사도행전 7장 54~60절

 

교갱협이 시작된 지 벌써 7년째 접어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소박한 마음을 가지고 우리 몇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의 뜻을 좀 더 분명하게 이 시대에 구현하기 위해서 깃발을 들어야겠다 라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시작을 했습니다. 세월이 빠르다는 느낌도 듭니다마는, 지금 돌이켜 보면 참 겁 없이 시작을 했다는 생각입니다. 교단을 갱신하고 또 더 나아가서 한국교회를 갱신하자고 할 때는 내가 깨끗해야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쟎아요. 그런데 내 자신을 돌아보는 눈보다도 눈앞에 보여 지는 여러 가지 답답하고 안타까운 상황들 때문에 더 가슴이 타서 일단 우리가 시작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나중에는 남에게 돌질을 하기 전에 내 자신이 문제라는 것을 자주 느꼈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회개도 했습니다.

또 막상 시작을 하고 보니까 금방 고쳐질 수 있을 것 같은 이런 저런 교회와 교단 안에서의 바르지 못한 것들을 고치기가 정말 어렵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 가장 개혁되기 어려운 대상은 교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가장 개혁되기 어려운 존재는 교회지도자들이 아닌가 하는 절망적인 생각까지도 여러 번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귀한 형제들이 변함없이 마음을 모으고 기도하고 또 실망하지 않고 앞을 내다보고 달려갈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리고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다시 모인 것은 단순히 내 자신이 은혜 받겠다는 차원에서 떠나서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를 위해서 좀 더 크게 말하면 21세기를 위해서 큰 사건을 일으킬 수 있는 굉장히 의미 있는 모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의미에서 눈을 좀 더 크게 뜨고 멀리보고 “하나님이여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나이까? 보내시면 나는 어디든지 가겠습니다.” 하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단 며칠이지만 주님 앞에 우리 모두 나아가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스데반을 주목하면서 스데반을 통해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또 경고하시는 말씀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교회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고 국가도 그렇습니다. 문제나 혹은 어떤 위기가 일어나면 그 문제와 위기가 역기능을 할 때도 많이 있지만 순기능을 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문제가 일어나면 그 문제를 통해서 인물이 발굴된다는 것입니다. 위기를 만나면 사방이 캄캄해지는 안타까움도 체험하지만 그런 위기 속에서 위대한 지도자가 발굴될 때가 참 많습니다. 예루살렘교회가 그랬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사도들이 너무 가슴이 뜨거워서 복음을 전하다가 구제도 해야 되고 가난한 사람도 도와야 되고 뭐 이런 일 저런 일에 욕심을 부리다가 나중에는 어려움을 당했지 않습니까? 사람이 하는 일이고 특별히 돈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할 때는 반드시 잡음이 나게 돼 있어요. 그렇게 성령 충만한 사도들도 실수를 했어요. 그래서 교회가 어려워지자 어떻게 보면 이것은 사탄이 교회를 공격하는 신호탄이었습니다만 사도들이 대처를 잘 했습니다.

그렇게 재정을 공평하게 사용하지 못하는 데서 교회가 시험에 빠질 뻔한 그런 위기를 만났을 때에 스데반이라고 하는 위대한 인물이 발굴이 된 것입니다. 잘 아는 대로 일곱 집사가 전 교회의 동의를 얻어서 선택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사도들이 하던 일부 일을 맡아서 봉사를 하도록 했습니다. 그 일부 일이 재정을 가지고 헌금을 잘 관리해서 가난한 자를 돕고 또 선교에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래서 일곱 집사가 등장을 했는데 그 가운데 스데반, 이 사람은 교포 유대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말로 디아스포라입니다. 어디서 살았던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예루살렘에 와 있었고 예루살렘에 와서 은혜를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헌신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일곱 집사의 이름 대부분이 헬라 문화권에서 사용되는 이름인 것을 보아서 그들 대부분이 교포, 혹은 이민 갔다 온 유대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스데반 이름의 의미는 왕관이라는 뜻으로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신약교회가 등장한 이후에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운 왕관을 제일 먼저 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과 걸 맞는 인생을 산 것입니다.

그리고 스데반은 충만의 대명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그의 이름이 붙는 곳마다 충만이라는 단어가 따라다닙니다. 6장5절에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6장8절에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사람, 6장10절에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사람, 7장55절에는 마지막으로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은 모든 면에서 충만했어요. 믿음도, 지혜도, 권능도, 성령도, 능력도, 은혜도 충만했던 사람입니다.

신약교회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스데반은 평신도 운동의 선구자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평신도라는 말이 통하지도 않는 시대였고 또 평신도는 누구고 성직자는 누구고 하는 것을 구별할 만한 시대도 아니었습니다만 스데반은 사도가 아니었습니다. 일반 신자였습니다. 일반 신자로서 집사의 일을 합니다만 그는 집사라고 해서 집사의 사역을 하는 데서 머물지를 않았어요. 재정 관리나 하고 재정을 집행하는 일에만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았어요. 성경을 보면 사도들과 맞먹는 사역을 대범하게 펼칩니다. 다니면서 복음을 공중 앞에서 힘 있게 전하고 6장 8절에 보면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한다는 말들은 사도에게만 붙여진 내용인데 스데반에게도 거침없이 그렇게 사용을 합니다.

스데반의 손을 통해 하나님이 기사와 표적을 일으켰습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은 다 특별한 소명자라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 사람이 어떤 직책을 갖고 있든 일단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주님을 위해서 헌신된 사람은 그가 사도든, 평신도든, 목사든 관계없이 모두가 주님에게 드려진 종이며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소명자라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스데반은 최초의 순교자입니다. 성경가운데서 한 사람의 죽음을 놓고 스데반처럼 상세하게 기록한 사례가 없습니다. 예수님 빼놓고는 마지막 죽음의 장면을 스데반처럼 소상하게 기록한 내용이 없습니다. 그만큼 그의 죽음은 기독교 역사에 절대로 지워질 수 없는 영광스러운 죽음이었고 세계복음화를 위한 썪는 밀알이 되는 위대한 죽음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스데반을 놓고 보면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볼만한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저는 이 스데반의 간단한 일대기와 죽음을 놓고 저에게 도전을 주는 것이 있어요. 나도 잘 죽어야 되겠다는 겁니다. 잘 죽었으면 좋겠다는 도전입니다. 스데반처럼 그렇게 영광스럽게 죽지는 않겠지만 잘 죽어야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스데반이 구원받은 것처럼 나도 구원받았고 스데반이 예수님을 위해서 살려고 했던 것처럼 나도 그렇게 살려고 하고 있고 스데반이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했던 것처럼 나도 그 사랑에 감동한 사람이니까 스데반이 죽은 것처럼 나도 잘 죽어야한다는 생각을 스데반의 기사를 읽을 때마다 저 자신이 도전을 받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저 불러 가실 때 부름 받는 것 뿐 입니다. 그러나 내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일이지만 잘 죽어야 되겠다고 하는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항상 살고 그것을 기도의 제목으로 놓고 하나님 앞에 구하면 만년, 천년 죽을 것 같지 않게 사는 사람하고는 다르겠지요.

오늘날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흐리멍텅한 이유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가?’ 라고 하는 중요한 명제를 앞에 놓고 진지하게 옷깃을 여미는 겸손이 없기 때문에 오늘날 교역자들이 이렇게 영적으로 힘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짧은 생은 항상 죽음을 전제하고 해석해야 되고 죽음을 전제하고 검토할 때만이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는 항상 십자가의 죽음이 마지막 그가 올라가야 될 피크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죽음을 놓고 모든 생각을 정리했으며 그 죽음을 가지고 자기 행동을 절제했으며 그 죽음 때문에 자신의 모든 삶의 패턴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어떻게 사느냐 보다 어떻게 죽느냐가 더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삶을 특징지어주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그 삶이 남다른 데가 있기 마련입니다. 더 경건할 수 있겠지요. 더 진지하겠지요.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사람은 더 쉽게 자기의 마음을 비울 수 있겠지요.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사람은 더 헌신할 수 있겠지요. 그러므로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질문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질문과 동일합니다. 내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이것은 바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대답을 요구합니다.

마르크스 아릴레우스 라는 철학자의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죽는 행위는 사는 행위의 일부이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앞뒤입니다. 따라서 진지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진지하게 죽을 것을 생각하는 겁니다.

스데반의 죽음을 놓고 제가 도전도 받고 또 본받았으면 하는 것 네 가지가 있습니다. 오늘 이것을 함께 생각해봅시다. 죽음은 사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더 그렇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예수님을 위해서는 생명도 아끼지 않겠다고 큰 소리 치면서 목사 된 사람들에게는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첫째는 나도 예수를 위해서 일하다가 죽고 싶다는 것입니다.

일 다해놓고 놀다가 죽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일 다해놓고 내 맘대로 푹 쉬다가 죽고 싶다가 아닙니다. 예수를 위해서 마지막 순간까지 일하다가 죽고 싶다. 스데반에게서 이런 도전을 받습니다. 스데반은 벌써 만 명이 넘는 큰 예루살렘교회의 기둥입니다. 가장 필요로 하는 유능한 인재입니다. 그의 나이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모르지만 30-40대에 해당하는 젊은이였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받은 은사와 능력으로 보아서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예루살렘교회를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사람 이예요. 가장 전성기에 서있는 그였지만 하나님이 그를 불러가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루아침에 일하다가 주님의 부름을 받아버린 겁니다.

이렇게 가장 필요한 사람, 꼭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되는 사람, 앞으로 장래가 양양한 사람을 하나님이 이렇게 갑자기 불러 가시는 것을 보면 우리 하나님은 참 놀라우신 분입니다. 사람에게 의지해서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 마음대로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저 사람이 꼭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 안하실 때가 많아요.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일하십니다. 그래서 스데반을 불러갔어요.

어떤 면에서는 얼마나 오래 살 것이냐는 것보다도 어떻게 하면 끝까지 일하다가 죽을 것이냐는 것이 더 진지한 질문입니다. 우리는 주를 위해서 우리의 가진 것을 다 드려도 우리가 받은 은혜의 몇 천만분의 일도 보답을 할 수 없는 정말로 빚진 존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까지 있는 힘을 다해서 주를 위해서 살다가 가도 아무것도 안하고 가는 사람처럼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존재들입니다.

시키스터드라고 아시죠? 웩 선교회 창시자 되시는 위대한 선교사 이십니다. 그 분이 한 유명한 말 중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하나님이요,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서 죽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분을 위해서 내가 드리는 희생이 아무리 대단한 것이라도 그 희생을 크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가 주님을 통해서 받은 은혜가 진짜라고 한다면 그 은혜를 위해서 내가 드린 것을 가지고 많이 드렸다. 많이 헌신했다라고 절대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터드는 그런 은혜에 감격해서 마지막 순간까지 정말로 은혜에 빚진 자답게 살다가 갔습니다. 자기의 가진 것을 완전히 주님께 드리고 갔어요. 우리 모두는 이렇게 살다가 가야 합니다.

사도행전 20:24절 바울도 같은 심정으로 살았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예수께 받은 소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 뜨거운 불타는 가슴을 안고 있는 사람이 바로 스데반처럼 일하다가 죽겠다는 사람 이예요. 이런 가슴을 안고 사는 사람이 스데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위대한 대각성 운동의 선구자였던 휘트필드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이렇게 질문했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나중에 세상을 떠날 때 어떤 간증을 하고 싶으십니까?” 그러자 휘트필드가 정색을 하고 “천만에요. 나는 임종 때 간증안합니다. 왜냐면 나는 내가 살아있을 때 날마다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간증하다가 죽지 죽을 때 간증하려고 남겨 놓지를 안습니다.” 그 말속에는 휘트필드의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끝까지 일하다가 가지 죽을 때를 준비하느라고 할 말을 안 하고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루하루를 주를 위해서 살다가 죽겠다는 자세로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30여년을 사역하면서 일주일에 40내지 60시간을 설교하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자살행위입니다. 초자연적인 힘입니다. 요사이처럼 스피커가 있고 마이크가 있어서 힘을 덜 들이고라도 많은 사람에게 설교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지요. 그가 3만명을 앉혀놓고 설교할 만큼 탁월한 볼륨을 가진 성대를 가졌지만 일주일에 40내지 60시간을 말씀을 전하는데 자신을 던졌다면 이건 죽으려고 각오한 겁니다.

그래서 그는 복음을 전하는데 소진된 삶을 살았고 1770년 56세에 토요일 날 늦게까지 피곤함을 무릅쓰고 설교하다가 저녁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갔습니다. 그는 평소에 입버릇처럼 말하기를 “녹이 슬어 없어지기보다 닳아서 없어지는 것이 낫다. 나는 닳아서 없어지는 망치가 되지 녹이 슨 망치가 되고 싶지 않다.” 고 했습니다. 이 휘트필드의 말 한 마디 한 마디 속에 스데반처럼 주를 위해 일하다가 죽겠다는 강한 의지가 들어있는 것을 봅니다. 앞으로 80년 90년 살 것을 계산하면서 건강관리 하느라고 거드름을 피우는 그런 인생을 안 살았습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 교회의 사역 장로님 두 분이 저에게 찾아 오셔서 한담을 나누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요사이 저는 설교도 안하고 참 좋거든요. 그러니까 할 일 없는 사람들이 찾아와요. 그리고 또 제가 18년 동안 사용하던 사무실을 비우고 후임자를 위해서 리모델링하느라고 정신이 없고 제 사무실은 4층에 있는 조그마한 방으로 옮겼어요. 어떻게 보면 부모가 자식에게 안방 내주고 문간방으로 옮긴 것 같은 기분이 좀 있기는 하죠. 그래도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정말로 I am so happy!입니다.

아마 장로님들이 위로하느라고 제 방을 찾아 왔겠죠. 와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목사님 앞으로 오래 사셔야 합니다.’ ‘지금 통계가 나오는데 우리도 가능하면 앞으로 90까지 살아야 됩니다. 그러니까 요즘 환갑을 맞았다는 사람들이 앞으로 적어도 30년을 더 산다는 것을 전제하고 모든 인생 설계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제가 농담으로 ‘당신들이나 90까지 사시오.’ 했는데 정말 그렇게 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얼마나 늙은이들이 천대받는 세대가 우리 앞에 있는지 정말로 비참할 거예요.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나는 우리 어머니가 88세이십니다. 새벽마다 교회에 가서 기도하십니다. 저는 지난 60년이 넘도록 어머니의 기도 때문에 살고 있는 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어머니를 보면서 난 저렇게 오래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해요. 건강을 관리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만 오래 사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 건강, 건강 하는 것만큼 추한 것이 없어요. 우리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주를 위해서 일하다가 죽을 존재이지, 세상 끝, 수명 다할 때까지 살다가 죽기 싫어서 안달하는 그런 초라한 존재들이 아닙니다.

뱅겔이라는 유명한 주석가가 매일 이런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주님, 나는 공장에서 일하던 직공이 집에서 누가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너무 반가워서 뛰어나가듯이 죽고 싶습니다. 주님 저에게 그런 은혜를 주세요.” 그랬는데 정말로 뱅겔이 평생 썼던 성경의 주석 원고를 다시 교정하고 정리하다가 그 자리에서 깜빡하고 하나님의 부름 받고 가버렸어요. 마지막까지 일하다가 간 사람입니다.

저는 지난 수개월 동안 짐 엘리엇 선교사 때문에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영어로는 50년 전에 나왔는데 감사하게도 한글로 두 권이 나왔습니다. ‘전능자의 그늘’과 ‘영광의 문’인데 짐 엘리엇의 아내가 쓴 책으로 먼저‘영광의 문’이 나왔을 때는 미국교회와 전 세계 교회를 완전히 흥분시켰습니다.

짐 엘리엇은 친구 다섯 명과 함께 베네주엘라에 있는 살인 인디언인 아우카족을 전도하기 위해서 들어갔다가 그들의 창에 찔려 29세에 세상을 떠난 순교자들입니다. 엘리엇은 자기 아내의 뱃속에 유복자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500명에서 1000명도 제대로 안되는 소수 아우카족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들어가서 결국은 희생되었습니다. 그 희생의 대가로 오늘날 아우카족이 복음화 되었습니다. 그 엘리엇의 책을 읽으면서 저 자신이 참 여러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휘튼 대학의 우등생이었고 교내의 레슬링 챔피언이었고 학생 해회 선교회 회장이었고 아마추어 시인이었으며 또 학년 대표 회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졸업할 때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그의 일기장에 기록되었던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주시기만을 바랍니다. 주여, 이 생에 그것 말고 귀한 일이 또 무엇이겠습니까? 그것보다 나은 일을 저는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주여 저를 보내주소서. 하나님은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주여 저를 활활 타오르도록 성령의 기름을 흠뻑 적셔주옵소서. 하지만 불꽃은 잠깐이며 대개 단명입니다. 내 영혼은 단명을 견딜 수 있는가? 내 안에는 위대하신 단명의 성령의 영이 살아계신다. 주여 저를 주의 연료로 삼으소서. 하나님의 불꽃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잠깐 살다가 불꽃처럼 사라져도 좋사오니 저를 사용해 주소서.” 결국 그는 그의 기도대로 복음을 위해 소모품이 되었습니다.

그의 친구 다섯 명은 항상 서로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우리는 소모품이다. 주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서 우리는 소모품으로 부름 받았으니 언제 죽어도 좋다.” 이런 자세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왜 그들이 소모품이라는 용어를 썼는가 하면 그 다섯 명 가운데는 파일롯도 있고 또 군대 갔다 온 사람들도 있는데 제2차 대전 때 미국군대에 나가면 훈련병들에게 “너희들은 국가를 위한 소모품이다”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말을 하나님 나라의 십자군병으로서 자기들에게 적용을 한겁니다. “우리는 소모품이다.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는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주를 위하여 끝까지 일하다가 죽는 것, 이것이 더 중요하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았고 그렇게 생각하고 죽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자세를 가지고 목사 일을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가슴에 하나님을 위한 불꽃이 타고 있습니까? 하나님, 언제 나를 불러도 좋사오니 나를 사용하시옵소서. 활활 타오르는 횃불처럼 사용하세요. 저나 여러분에게 이런 자세가 있는지 다시 돌아봅시다. 떠벌리지 마세요. 쇼하지 말라구요. 강단에서 은혜 받은 것처럼 쇼하지 말라구요. 가슴에는 다 엉뚱한 생각하고 있으면서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그렇게 행동하지 말고 진실하자구요. 정말 진실하자구요. 교회갱신은 목회자들이 진실한데서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목사를 직업처럼 알고 강단위에서 쇼하지 말자구요.

 

두 번째로 스데반으로부터 도전받는 것은 성령 충만해서 죽고 싶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이 뭔지 대충 압니다. 성령 충만을 몇 마디 말로 정의하기는 어려워요. 그러나 성령 충만이 무엇인지는 알아요.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을 통하여서 나를 통제하는 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내가 성령되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는 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나에게 어떤 은사가 나타나느냐 안 나타나느냐는 부수적인 것예요. 내 가슴이 뜨거우냐 뜨겁지 않느냐 그것도 부수적인 거예요. 성령의 손에 붙들려서 성령이 원하는대로 내가 움직인다면 그 사람은 성령 충만한 사람 이예요.

스데반은 성경에 유일하게 기록된 죽을 때 성령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충만했겠지요. 다른 사도들도 충만했겠지요. 그러나 성경에서 죽을 때 성령 충만했다고 지적한 사람은 스데반이 유일한 존재예요. 스데반이 죽음 앞에서도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에 공포가 없었습니다. 돌이 날라 와도 공포가 없었어요. 살기위해서 비겁하게 행동하지 않았어요. 주를 위해서라면 생명을 기꺼이 주의 재단위에 올려놓겠다는 일념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게 성령 충만한 사람의 태도입니다.

고린도 후서 5장 9절에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살든지 죽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원하노라. 이것 하나만 가지고 죽음 앞에 떳떳하게 맞설 수 있었던 사람, 바로 성령 충만한 스데반이었습니다. 정말 부러운 사람입니다. 죽을 때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살아있을 때 성령 충만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살아있을 때 성령 충만에 무관심했던 사람이 죽을 때 갑자기 성령 충만해지는 법은 없어요. 내가 건강할 때, 내가 젊을 때, 내가 일할 때, 항상 성령 충만하기를 사모하고 성령에게 사로잡혀있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죽을 때도 성령 충만 할 수 있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죽을 때 성령 충만하기를 원한다. 이 말은 내가 살아있을 때 오늘도 성령의 손에 붙들리기를 원한다는 말과 똑 같은 이야기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사람 되기를 원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 송달 장로님을 늘 생각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회계사로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탁월한 분입니다. 그 분이 우리 교회 재정을 맡아있었습니다. 건강했습니다. 전혀 무슨 표가 없었는데 기침이 자꾸 나서 병원에 가서 진단을 했더니 폐암 3기입니다. 수술도 못하고 손을 쓸 방법이 없었습니다. 내가 미국에 있을 때 그 소식을 들었는데 그냥 눈앞이 캄캄해 지더라구요. “주님, 나이도 이제 50대 중반인데 주님, 정말 사랑의 교회를 위해서 필요한 지도자입니다. 좀 살려주세요.” 제가 그렇게 안타깝게 기도를 하면서 귀국을 했습니다. 귀국을 해서 병원에 입원해 있는 분한테 전화를 먼저 했어요. 전화를 하는 제 마음이 얼마나 무거웠겠어요. 장로님이 어떤 반응을 하실까? 전화기를 붙잡고 우실까? 어떻게 반응할까? 좀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전화를 했는데 “목사님, 오셨군요. 아 반갑습니다.” 평소에 장로님을 만났을 때와 똑같이 껄껄껄껄 웃으면서 “목사님 죄송해요. 염려 끼쳐서요. 폐암3기래요. 수술도 안 된데요. 그저 하나님 앞에 맡겨야죠.” 하면서 껄걸 웃고 있어요. 내가 쇼크를 받았습니다. 평소에 그분이 성령 충만한 사람인 줄 내가 알아요. 다락방 순장으로서 많은 순원 들에게 감동을 주는 영적 지도자라는 걸 평소에 보아 왔거든요. 그랬는데 대부분의 사람이면 60이 안된 나이에 폐암3기라면 얼굴이 노래가지고 말이나 제대로 하겠어요? 그래서 당장 병원으로 갔어요. 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얼굴이 정말 스데반의 얼굴처럼 천사와 같아요. 훤해가지고 노상 감사하고 있어요.

그 때 마침 대각성 전도 집회가 바로 앞에 있었는데 “목사님, 우리 기사가 여태까지 전도를 받아들이지 않아요. 나하고 10년이 넘도록 같이 차를 타고 다니면서 자주 전도를 했는데도 내가 삶의 모범을 보이지 못해서 그런지 우리 기사가 안 믿어요. 이번에 전도해야 되겠는데...” 아 이런 걱정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자기 병에 대한 이야기는 안 해요. 결국 그 기사가 대각성 전도 집회 때 결신하고 예수 믿었습니다.

나중에는 병원에 있을 필요가 없으니까 집에 와서 누워계시는데 제가 몇 번 방문을 했습니다. 똑같애요. 항상 얼굴이 밝고 바로 눕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하게 엎드려가지고 호흡이 힘든데도 얼굴이 얼마나 밝은지요. 성령 충만하지 않고 어떻게 그렇게 하겠어요. 그러다가 결국에는 의식불명이 되어서 하나님이 데려가셨어요. 아마 지금도 껄걸 웃고 있을겁니다.

평신도가 이렇게 살다가 죽는 것을 보니까 제가 고민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내가 죽을 때 망신을 안 당해야 될 텐데요. 그래서 저는 가끔 기도해요. “주님 제발 망신당하지 않게 해주세요.”

 

세 번째로 도전받고 싶은 것은 주님의 영광을 보면서 죽고 싶다는 소원이고 도전입니다.

55절을 보면 스데반은 죽음을 앞두고 주의 영광을 보았어요.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그는 참을 수가 없어서 소리를 질렀죠. 예수님이 재판을 받던 산헤드린공헤 그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는데 “인자가 구름을 타고 장차 나타날 것을 너희들이 보리라.” 예수님이 서서 증거 하던 그 자리에 바로 그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본다고 소리쳤어요. 그러니까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이 분을 못 참은 겁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어요.

글쎄요 하나님께서 저나 여러분이나 마지막에 영안을 열어서 주의 영광을 볼 수 있도록 해 주실지 모르겠어요. 우리의 믿음의 눈을 가지고 우리가 죽음 앞에 있을 때 하나님의 나라를 조금 들여다보도록 커튼을 옆으로 밀쳐주실지 잘 모르겠어요. 그러나 그렇게 해 주시든, 안 해주시든 우리는 마지막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더 주님이 기뻐하신다면 어떤 환상을 통해서 보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얼마나 복된자이며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주님 앞으로 부름을 받는 사람인가를 모든 주변 사람들이 간증할 수 있도록 우리를 사용하여 주셨으면 좋겠어요. 욕심이죠. 그러나 이런 욕심은 가질 만 하다고 봅니다.

죽을 때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무서운 공포를 끌어안고 죽으시던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공포대신에 주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늘의 영광을 보고 죽을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네 번째로 스데반에게서 도전받고 욕심나는 것은 예수님을 닮은 죽음을 죽고 싶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마지막 장면을 조용히 묵상하면 어쩌면 그렇게 예수님을 닮았는지요. 예수님이 세상 떠나시면서 ‘하나님이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스데반도 똑같이 ‘하나님이여,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또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하나님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하나이다.’ 스데반도 죽으면서 ‘주 예수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어쩌면 그렇게 닮았어요. 마지막까지 예수님을 닮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꼭 작은 예수를 보는 것 같습니다. 참 부럽다고 생각됩니다. 그 뿐 아니예요. 예수님은 이미 예언한 것처럼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많은 열매가 맺힌다고 예언했습니다. 그렇게 되었지요. 스데반도 마찬가지예요. 스데반이 썩는 밀알이 됨으로 인해서 스데반 때문에 바울이라고 하는 위대한 사도가 탄생했고 스데반이 순교의 피를 뿌림으로 예수살렘교회가 온 사방으로 흩어져서 주님의 복음을 전 세계에 전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죠. 그래서 어거스틴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스데반이 죽으면서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를 하지 않았다면 바울이라고 하는 탁월한 복음의 사도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옳은 말입니다. 스데반이 썩는 밀알이 되어 죽었습니다. 죽었기 때문에 그로부터 엄청난 열매가 맺혀졌어요. 예수님을 닮은 죽음입니다. 이와 같이 마지막의 모습이 주님을 닮고 싶다. 참 큰 욕심인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이런 욕심은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동생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작은 예수들입니다. 나중에 결국 주님 앞에 설 때는 예수님과 우리는 똑같은 모습으로 서로 쳐다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 때도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줘야 되겠지만 죽을 때도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는 것은 조금도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조금도 지나친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이렇게 스데반의 죽음을 놓고 몇 가지 참, 욕심나고 나도 그러고 싶은 것 네 가지를 여러분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왜 우리가 스데반의 죽음을 놓고 이렇게 진지하게 어둡고 무거운 개념이지만 죽음에 관한 얘기를 해야 합니까?

이점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봅시다. 왜 우리가 이런 어둡고 무거운 이야기를 해야 합니까? 어둡고 무거운 이야기이지만 정말로 꼭 필요한 도전을 스데반으로부터 받아야 되는 이유가 뭡니까?

우리의 목회현장을 한번 냉정하게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목회가 뭡니까? 목회는 내 양을 치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에 따라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양떼들을 책임지는 목자의 신분이 목회입니다.

여러분! 목회가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다고 생각합니까? 한국교회 목회가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있다고 판단하세요? 여러분은 저보다 나이가 젊기 때문에 더 예민할 줄 압니다. 만약에 저보다 예민하지 못하다면 여러분은 문제가 있는 사람 이예요.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떤 상황입니까? 스데반처럼 죽을 각오하고 목회 안하면 우리 자신이 주님 앞에 충성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자기만 그저 건강하고, 그저 기쁘게 살고 평안하게 살고 개 교회 성공좀 하고 그래서 명성을 좀 얻고 그것으로서 여러분이 한 생을 살겠다고 하는 사치스런 생각에 빠져있으면 오늘 목회가 어느 길로 갈 것이라고 생각됩니까? 우리의 목회를 한마디로 이야기 한다면 스데반처럼 생명을 걸지 아니하면 전망이 보이지 않는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21세기에 접어들어서 우리는 여러 가지 위기를 조금씩 조금씩 감지하고 있습니다. 한국을 봐도 위대한 종들이 지난 50년 동안 하나님께서 크게 쓰시던 종들이 서서히 서서히 다 뒤로 물러가고 있어요. 제가 이름을 일일이 대지 않아도 알거예요. 그러나 그 분들의 바통을 이어받을 만큼 또 그 분들보다도 더 탁월하게 쓰임 받을 수 있겠다고 기대되는 사람들이 눈에 잘 들어오질 않아요. 미국은 더 심각합니다. 빌리그레함이 물러갔습니다. 빌브라이트가 죽었어요. 조지 부어가 이제 은퇴해요. 그 외에도 여러 위대한 거인들이 서서히 뒤로 물러가는데 이들을 대신할 다름 차세대가 별로 눈에 보이질 않아요. 교회는 이렇게 리더쉽의 위기를 만나고 있고 교회마다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도자는 책상에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도자는 환경에서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진정한 지도자는 위기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은 위기입니다만 이 위기를 바로만 사용하면 전무후무한 지도자들이 배출될 수 있지만 이 위기를 감지하지 못하고 적당히 그저 목회하고 넘어간다면 한국교회도 전망이 어둡습니다. 여러분 제가 왜 위기라고 하는지 한 가지만 예를 들지요. 모교육개발원의 설문조사에서 어느 부모들이 이런 대답을 했어요.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도덕교육, 윤리교육을 시켜야 된다고 대답한 사람은 모든 학부형 중에서 100명 가운데 7명 밖에 없었어요. 아이들에게 윤리교육, 도덕교육 시켜야 된다고 그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부모는 7% 밖에 안됩니다. 그러면 그 100명 가운데 크리스챤이 몇 %라 될 것 같아요. 우리가 흔히 계산하는 데로 한다면 아무리 안되도 25명이고 만약에 강남, 서초구를 예로 든다면 40명은 예수 믿는 사람이었지 않겠어요? 그런데도 7명 밖에 안되요. 도덕에 관심이 없어요. 이런 현상이 어디에서 오는지 잘 알고 있쟎아요. 오늘날 사람들의 이슈, 그들의 관심을 둘 수 있는 중요한 화두는 도덕이 아니예요. 가장 인기없는 화두가 도덕이예요. 그러므로 관심이 없어요. 선하고 악한 것은 큰 문제가 안되요.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목회해야 되는 현실이예요.

지난 6월 7월 월화드라마로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켰던 ‘옥탑방 고양이’ 제가 볼 때는 아직도 성숙하지 못햇다고 할 만한 26살 된 어떤 여성이 자기의 경험, 혼전동거를 근거해서 뭔가 써가지고 낸 것이 그렇게 반응을 일으킨 것 아니요? 그런데 그것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는 것은 무슨 이야기 입니까? 그만큼 관심이 많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 연세대학교에서 조사한 내용을 보면 혼전동거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20대에서 63%이고 30대에서는 59%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10명중에 6명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우리가 오늘날 목회하는 현실이예요. 거기에 또 기가막힌 것은 옥탑방고양이를 쓴 작가가 예수믿는 집의 딸입니다. 자기 아버지가 집사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혼전동거하다가 얼마 전에 교회에서 결혼식을 했습니다. 이게 오늘날 우리가 목회하는 현실입니다.

21세기 중요한 코드 중에 하나가 문화입니다. 한 사람이 드라마를 쓰고 한 사람이 그것을 가지고 T.V에서 방영을 함으로써 얼마나 무서운 영향력을 끼치는지 금방 모든 것이 뒤바뀌는 것 같은 소용돌이를 치쟎아요. 우리가 살고있는 현실이예요. 인터넷을 자주 들어가는데 포르노 스팸이 얼마나 많이 들어오는지 여러분 아시죠? 하루에 20-30개 까지 들어오는데가 있어요. 어느 5학년 여학생의 수기가 기억이 납니다. 남자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남자 애가 신기한 것 보여줄까? 그러면서 틀었는데 음란 사이트 포르노가 떴어요. 그러니까 그 5학년 여학생이 얼마나 기절을 하겠어요. 기절을 하고 소리를 지르고 도망을 치고 그랬는데 이 애가 이렇게 썼어요. 그 때 받은 충격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요. 이런 세대가 우리 교회 안에 주일학교 있쟎아요. 우리가 어떡해야 될 것 같아요? 선과 악을 구별하는 절대 권위가 없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자연스럽게 인정해버리는 세대에 우리가 살고 있어요. 내게 좋으면 선이고 내게 나쁘면 악이예요. 남에게 내가 선하다는 것을 강요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늘날 세대입니다. 네가 좋으면 되었지 왜 나에게 강요하느냐? 부모가 좋으면 좋았지 왜 자식된 나에게 강요하느냐? 오늘날 이런 풍조가 온통 만연된 세상에서 우리가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합니까?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지금 우리가 설교를 그렇게 참, 힘을 들여서 합니다마는 설교가 무슨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합니까? 이혼하는 사람에게 설교가 어떤 좋은 점을 그들에게 가르쳐주었다고 생각합니까? 사람을 바꿉니까?

2만불 시대를 요사이 이야기하는데요 2만불 시대되어보세요. 불란서나 영국교회와 같이 한국교회도 똑같은 전철을 밟을 것입니다. 지금 1만불에도 이모양인데 2만불 시대가 되어 보세요. 자 그렇게 되었을 때 오늘날 한국교회가 지금처럼 이렇게 목회하고 지금처럼 이렇게 흐리멍텅하게 모든 관심이 좋은 차 끌고 다니는 것, 좋은 사택에 사는 것, 그저 월급 많이 받는 것, 교회에 머리수를 세어서 많이 모이는 것을 자랑하고, 크게 건물 지어가지고 으시대는 것, 날마다 교역자들의 의식이 거기에 가있고 그저 골프치고 운동열심히 해서 그저 건강해야 된다. 건강해야 된다 하며 날마다 생각이 그런대서만 맴돌고 있다고 한다면 도대체 우리가 다른 점이 뭐예요? 세상 사람하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하고 구별할 만한 것이 뭐가 있느냐 그 말이예요.

오랫동안 대사로 일하시다가 이번에 외무부에서 은퇴를 하시는 믿음 좋은 분하고 같이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 분이 친구들하고 만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윤창열이라는 사람이 어느 교회 집사라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리고 뭐 교회이야기 겸해가지고 나왔나봐요. 그런데 그 가운데 앉아있는 어떤 사람이 ‘윤창열씨 집사기에 다행이예요. 목사가 아니기에 얼마나 다행인지요’ 평신도 입에서 그렇게 나와요. 그 말은 목사라고 다른게 뭐가 있느냐는 얘기죠. 우리가 이런 시대에 살고 있어요. 이런 시대에 목회합니다.

우리나라가 큰 부흥을 두 번 경험했는데 1910-1930대까지 엄청난 부흥을 해서 불과 몇 천명밖에 되지 않던 교인이 30만 명으로 늘었습니다. 그 당시 부흥의 화두는 회개였습니다. 주기철 목사님, 길선주 목사님, 이용도 목사님들이 중심이 되어가지고 펼친 부흥은 회개가 주제였습니다.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회개했어요. 변화되었어요. 삶이 바뀌었어요. 그래서 세상사람들과 예수믿는 사람이 어떤 점에서 다른 가를 분명하게 칼라를 가지고 보여주는 부흥이었어요.

그 다음에 부흥을 맞이한 것이 1950년대 후반부터 시작해서 80년대 중반까지입니다. 그래서 불과 30만명 밖에 안되던 교인이 갑자기 1천만 명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폭발적인 부흥을 했습니다. 이 때 부흥의 화두는 복이었습니다. 형통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 부흥때에 은혜 받은 사람은 나라를 지켰고 그들은 순교를 했고 그들은 나라의 장래를 위하여 썪는 밀알의 역할을 할 수가 있었지만 두 번째 부흥기에 형통과 복에 매력이 있어서 예수 믿은 사람들은 천 만이 넘는 부흥을 했습니다마는 결국은 교회를 더 속화 시키고 교회를 더 타락시키는 역할을 하는데 앞장서게 된 것을 압니까? 어떻게 인정 안하시겠어요? 오늘 우리가 이런 상황에 목회하고 있어요.

19세기에 찰스 휘니를 통해서 일어났던 부흥은 주제가 회개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말씀을 듣고는 죄를 떠났습니다. 직업을 바꾸었습니다. 의로운 가난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그 때 은혜 받았던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서 193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개혁운동의 주체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개혁운동의 주체가 되어서 노예제도 폐지에 앞섰습니다. 금주운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백인과 흑인의 회해운동에 앞장섰습니다. 여성의 인권을 위해서 투쟁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미국사회의 기초를 닦았어요. 사회에 영향을 주었어요. 사회의 선두적인 역할을 교회가 담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의 부흥이 이 사회에 긍정적으로 끼치는 영향이 뭐냐는 겁니다. 정치계에 경제계에 교육계에 문화계에 모든 면을 다 보아도 믿는 사람은 많은 것 같은데 무슨 영향을 끼치고 있어요? 없쟎아요. 오늘 이런 상황을 놓고 우리가 목회자가 되어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우리는 스데반처럼 다시 한번 마음가짐을 바로 가져야 됩니다. 주를 위해서 생명받쳐 일하다가 죽는다. 나에게는 내일이 없다. 이 어려운 위기 상황에서 내 생명을 주의 재단에 올려놓겠다. 그래서 이 시대에 이 세대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 지도록 나의 한 번 밖에 없는 삶을 던져보겠다는 이런 필사의 각오, 그래서 그 일을 위해서 성령충만한 자 되기를 사모하고 그 일을 위해서 내가 예수님처럼 살고 싶고 예수님처럼 죽고싶다고 하는 열망을 가지고 우리가 주님 앞에 우리 삶을 드리면 역사의 암흑시대에 일어났던 놀라운 기적이 오늘 이 시대에도 일어날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바로 이것을 오늘 이곳에 우리가 모였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모였습니다. 이 자리에 모인 수 백명은 정말로 스데반처럼 영적으로 무장하고 나선다면, 정말 스데반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이 시대를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타오르는 불꽃이 되기를 소망한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를 통해서 이 한국교회를 다시 일으키실 줄 믿습니다. 갱신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다시 시작되는 새로운 장이 열릴 줄 믿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 쓰임받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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