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08/25) 교갱협 제2차 영성수련회 개회예배

로마서 2장 1-5절

제가 이 말씀을 마음으로 생각하고 준비하면서 많은 갈등을 가졌습니다. 교회갱신이라는 나름대로 우리의 순수한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서 뭔가 전국에서 뜻있는 주의 종들이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기도하고, 의논하는 이 자리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교회갱신이 과연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 그것을 감당하는 우리의 자세가 먼저 어떠해야 하는가? 그리고 우리가 처하고 있는 이 현실의 우리의 교단이나 교회의 분위기, 사회의 분위기는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괴로움과 갈등을 느낄 수밖에 없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서 이 말씀을 보면서 저에게 느껴지는 것은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남을 비판하고 있는 너 자신이 똑같은 일을 하면서 누가 누구를 비판할 수 있느냐는 바울사도의 지적입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비판하지 말아라"는 말씀과 상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비판을 받고 싶지 않거든 함부로 남을 비판하는 일을 삼가라는 뜻인데,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따지고 보면 더 모순된 것은 비판을 일삼는 네가 바로 똑같은 일을 행하고 있다는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의 사실을 너 자신이 알고 있느냐?

오늘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자기 허물은 덮어둔 채 남의 허물만을 바라보고 지적하는 이 모순이 어쩌면 바로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까? 이 말은 당시의 유대인이나 로마인들에게 하는 말인 듯 하지만, 사실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아닐까요? 틈만나면 성경읽고 기도하고 남을 가르치는 우리들이 바로 이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중심해서 우리는 우리들의 세계, 우리 자신의 모습을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남을 비판하는 사람은 많은데 실제로 비판을 받지 않을 사람은 몇이나 되는가? 이 문제입니다. 비판을 하기는 쉬워도 비판을 받지 않는 사람이 되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젊은 한 때 정의감에 불타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비록 운동권 학생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모두가 다 운동권학생처럼, 마치 의식화된 사람처럼, 한때 운동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마 우리들의 학창생활을 돌이켜 보면, 그 나름대로 그 시절에서는 가장 날카로운 비판을 했고, 가장 강한 정의감을 품고 뭔가 불의를 시정하기 위해서 불태웠던 그런 경험들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저도 학생 시절에 학우회 임원을 하면서 그때부터 벌써 무능교수 물러가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기성세대가 어떻고, 신학생의 입장에서 볼 때 선배 목사님들이 하는 일은 다 진부해 보이고, 다 고루해 보이고, 우리의 원론과는 안 맞는 그런 것들이 우리 신학생들의 눈에 좋게 보일 리가 없지 않아요? 그래서 앉으면 어느 목사 비판, 어느 교회 비판, 그런 것들이 우리 입에 회자되는 흔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혼자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렇다. 지금 이 나이에, 이 시점에 내가 남을 비판하기는 쉽지만, 과연 나는 그 나이가 되어서 그 자리에 앉아서, 나는 내 자신이 오늘 내 선배를 향해서 한 비판을 내 후배들로부터 받지 않을 수 있는 선배가 될 수 있겠는가?' 저는 그때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날카롭게 남을 비판하는 나 자신이 아니고, 세월이 흘러도 내가 내 후배들로부터, 다른 사람으로부터 비판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느냐, 안 되느냐? 이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는 직업상 언론인 못지 않게 남을 비판하고, 남의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계도적인 차원에서 어쩔 수 없는 하나의 우리의 사명이라는 말을 하기는 합니다만, 나도 모르게 이 일에 오랫동안 종사하다 보면 남을 비판하는 것이 체질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 언론인들은 교회 안에서도 상대를 해 보면, 교인들 가운데서도 언론계에 오래 종사한 사람들은 뭐든지 비판적입니다. 언론은 비판하는 글을 써야 되는 줄 아니까 그런 것들이 오래 젖다 보면 체질이 되어서 교회 안에서도 이것저것 비판합니다.

어제도 우리 교회에서 안수 집사 중에 언론계에 종사하는 한 분이 어쩌구저쩌구 했다고 장로님 한 분이 섭섭해 하셔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 그 분은 태생이 그렇습니다. 한 20년 되었지만 자기가 똑똑하다는 거지요. 똑똑한 사람이 문제입니다. 뭐, 나름대로 사회생활 속에서의 자부심이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 비판의식이 체질화되었을 때는 문제입니다. 목사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항상 설교가 뭡니까? 따지고 보면 성경에 나타난 선지자 선지자의 메시지가 뭡니까? 비판이나 경고나 정죄가 아닙니까? 오늘 우리를 일컬어서 선지자적인 사명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메시지도 대부분 사람들을 비판하고, 사회를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우리도 모르게 우리의 생각이나 우리의 말은 다 옳고, 상대방은 다 썩었고 잘못되었다는 그런 의식을 가질 수 있지 않겠는가? 돌이켜 보면 오늘 예수님께서 지적했던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눈만 뜨면 성경 읽고 기도하면서, 성경을 연구하고 해석해서 가르치는 그 사람들, 그 분위기 속에서 오래 살다 보니까 비판이 몸에 배어서 자기의 생각과 다른 사람은 무조건 자기의 자를 가지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서기관이었습니다.

오늘날 바로 그 계층이 우리들이 아닙니까? 오늘 이 시간, 우리는 바로 바리새인이라고 하면 아주 적개심을 가지고 있지만 실상은 그들은 오늘의 우리 자신입니다. 바로 우리의 직업이, 우리의 하는 일이 옛날 그들의 하는 일과 똑같았다고 한다면, 오늘 일반 사람들이 볼 때 말은 잘하고 이론은 바른데, 과연 그 이론과 생활이 실제적으로 합일한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는가 하는 반성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바리새인들이 가졌던 그 교만과 독선이 오늘 메시지를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고 하는 우리들 자신속에 의식화되고 체질화되어 있지 않은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봅니다.

다시 한 번 말합니다. 우리가 남을 비판하기는 쉽지만, 막상 우리가 그 입장이 되고 그 자리에 놓였을 때 비판을 받지 않을 사람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될 것입니다. 그 권력의 자리에 앉았을 때, 그 권력을 남용하거나 악용하지 않고 과연 황금을 보기를 그 자리에서도 돌 같이 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선생님들이 받은 촌지가 사회의 문제가 되어서 굉장했습니다. 저희 교회가 교육관을 지으면서 초등학교 운동장을 빌려쓰기로 약속을 하고, 교장선생님과 교감이 다 양해를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쓰려는 그 주일에 교감 선생님이 찾아왔습니다. 그때 촌지사건이 터진 때입니다. "목사님, 오늘 우리 학교장 회의에 갔다오는 길인데 특별히 교육청으로부터 지령이 내렸는데 조금이라도 의혹을 살 만한 일이 있거들랑 끊어라" 해서 순수한 마음으로 저희들은 교회에다가 운동장을 빌려주려고 했지만,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교장이나 교감을 꼬집어서 뭔가 받아먹고 운동장을 빌려주지 않느냐는 식으로 투서 한 장이 가면 사실은 아닐지라도 이미 그 자체만으로 데미지를 입으면 결정적인 부담이 된다는 겁니다. 촌지사건 때문에 운동장을 빌렸던 것을 거절당했습니다.

저는 그때 생각해 보았습니다. 봉투 좋아하는 사람이 흔한 말대로 세무공무원이나 일반관료들밖에 없을까요? 미안한 말이지만 내 스스로 생각해 볼 때 아마 봉투를 제일 좋아하는 사람중에 하나가 목사일 겁니다. 왜냐하면 맨날 봉투를 받는 게 습관이 되고, 대접을 받는 게 습관이 되어 있습니다. 시중에 떠도는 말중에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이 제일 짜다고 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세무공무원, 또하나는 선생님, 나머지가 목사랍니다. 식당하는 사람에게서도 들었고, 또 택시운전기사도 그럽디다. 팁 제일 짠 사람들이 주일날 교회에 가서 교회 마당에 내리는 사람이랍니다. 그래서 제가 한번은 그 소리를 듣고 슬그머니 팁을 한 2000원을 더 줬어요. '혹시 저 사람이 나를 목사로 알면 어쩔까' 그러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제가 아는 목사인데 심방가서 받는 헌금은 아예 도서비라는 명목으로 싹쓸이를 합니다. 그렇게 아예 정해버렸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목사님들은 주례를 하면서 여러분, 그 전에 하나 물어봅시다. 주례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을 우리가 하는 겁니까? 이것은 우리가 마땅히 할 일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형편 따라 하면 하는 대로 받고, 안 하면 그것도 당연한 것인데, 여전도사님을 시켜서 시시하게 와이셔츠나 넥타이 같은 것은 그냥 쌓여 있으니까 현찰로 가져오라고 하는 지령을 내려서 주례 전에 그 집에 전달이 됩니다. 실제로 내가 아는 친구의 경우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부흥사는 부흥회에 가서 사례를 받았는데, 그 앞에서 딱 펴보니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던지면서 나를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화를 냈답니다. 정말로 그런 해프닝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기도원에서 요즘은 덜하지만 한참 기도원 집회가 시세가 있을 때는 원장과 강사가 3:7이니 4:6이니 하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집회에서 나오는 헌금을 원장과 강사가 이것을 마치 자기의 인기의 척도인양 하는 것도 있었습니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오늘날 젊은이들이 락카페를 빌려서 장사를 해서 한 몫 챙기는 그런 것과 양상만 다를 뿐 본질상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죄송한 이야기지만 몇해 전, 제가 총회 서기에 출마해서 한 몇십 명 불러서 아침 식사대접을 하고 "미안하지만 교통비는 못 드립니다. 우리 깨끗하게 한 번 해봅시다." 내 나름대로 그렇게 생각하고 돌려보냈습니다. 집에 도착하니까 전화가 막 울리는데 "김 목사, 이럴 수 있어?" 자기들을 무시했고, 예의가 없고, 그리고 짜다는 겁니다. 여러분, 봉투를 받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 아니고, 자기 위치에 걸맞는 아주 당연한 예우를 받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봉투를 안 주면 깨끗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남을 무시하는 사람, 예의없는 사람, 짠 사람으로 간주되는 이런 풍토속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받으려는 사람들의 의식이 바뀌어지지 않는 한, 봉투의 근절은 암달러상을 없애는 거나, 극장 앞의 암표상을 없애는 만큼 어렵지 않을까?

전에 지방에 부흥회를 갔을 때의 일입니다. 그 지역의 목사님들이 20여 명 오셔서 같이 점심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저보고 말하기를 "김 목사님, 가을에 선거공영제 헌법소원을 하려고 합니다." 이유인즉슨 자신은 말하자면 가장 총대가 많은 곳 중의 한 봉건 영주나 마찬가지인데, 한마디로 말하면 재미가 없다는 겁니다. 과거에는 때가 되면 호텔에 자기 총대들을 불러놓고 자기 세 사람은 딴 방을 차려놓고 있으면 여기 저기서 봉투가 오는데 작년부터 그게 없어졌다는 거지요. 농담도 아니고 밥을 먹으면서 재미가 없다는 겁니다. 자기 나름대로 대주주의 주가를 인정도 못 받고, 또 시즌이 되면 나름대로 잘 팔리던 자기들의 몫이 별 볼일 없어지기 때문에 소원한다는 겁니다.

여러분, 선거공영제가 몇 사람 때문에 자기 지분에 상응하는 예우를 받지 못하고 그런 분위기가 조성되지 못하는 그 이유가 헌법소원의 이유가 될 수 있다면, 오늘 우리 교단의 장래는 어떻게 될까? 그렇다고 한다면 이분들의 이야기가 과연 이분들의 이야기만으로 그칠 것인가? 곳곳에서는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지 않을 것인가? 이러고도 우리가 입만 열면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 그 말들을 볼 때 정말로 우리 자신은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에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정말로 우리 자신이 비판을 받지 않을 사람이 될 수 있는 그것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 그런 자기 노력이 있어야 되지 않을까?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그 여인을 앞에 놓고 수많은 사람들이 돌을 들고 달려왔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할 때 물러갔던 그 군중들처럼, 오늘 우리는 어쩌면 남을 향해서 나는 옳고 너는 잘못되었어 하는 의식 속에서 손에 돌을 쥐고 남을 때리려고 하는 그런 자세는 아닌가? 예수님의 말씀에 깊이 반성을 하면서 돌을 놓고 돌아가서 스스로 내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그런 운동이 교회갱신운동이 아닐까? 교회갱신운동이 뭡니까? 이것은 개혁입니다. 개혁은 혁명이 아닙니다. 혁명은 하나의 물리적인 힘을 가지고 송두리째 뒤집어엎는 것이고, 개혁이라는 것은 하나 하나를 고쳐간다고 한다면, 오늘 우리가 추구하는 교회갱신운동은 정치적인 혁명이 아닙니다. '갱신'이라는 말은 교회로 하여금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자는 겁니다. 본래의 모습은 초대교회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이 교회갱신을 통해서 교회가 가지고 있는 교회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모습을 찾도록 하자는 자기 노력을 하자는 겁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누구입니까? 바로 그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이 목사와 교인들이 아닙니까? 우리 자신이 자기 모습을 찾아가고, 우리 자신이 본연의 자세로 돌아갈 때에 교회가 교회다운 옛 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 오늘 우리는 정말로 교인들을 보고 안타까워하지만 어쩌면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안타까워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늘 그런 생각이 듭니다. 교회마다 오늘 교회가 이 시대에 일하는 곳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오히려 교인들의 마음이 더 큽니다. 그러나 일하는 교회를 안 만들어 가는 것은 교인들이 브래이크를 걸어서가 아닙니다. 지도자의 의식이 깨어지지 못해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교인들 때문이 아니고 근본적으로 지도자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 국민들의 의식이 정치 일선에 있는 정치인들의 의식보다 앞서가듯이, 어쩌면 교인들의 의식도 우리 목회자들의 의식보다 앞서가는 것을 교회 현장에서 많이 느낍니다. 교회가 교회로서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하려고 할 때 여러분, 교인이 그것을 막는 확률이 더 높습니까? 지도자가 그것을 일부러 자기 교회가 지출되거나 자기 교회의 일이 있다는 핑계로 막는 확률이 더 높습니까? 양심적으로 우리가 한 번 반성해봐야 합니다.

두 번째로는 어떤 자리에 앉으려는 사람은 많아도 그 자리에서 자기의 책임을 다하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사회정치를 빗대어 하는 말 가운데 정치인이 거짓말을 못하는 것도 바보지만 정치가의 말을 믿는 사람은 더 바보라고 합니다. 책을 빌려주는 놈도 바보지만 빌린 책을 돌려주는 놈은 더 바보라는 소리를 듣고 저는 남의 책 많이 띄어 먹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정치인의 공약은 빌 空자, 空約이 될 확률이 더 높지 않습니까? 저는 그래서 공약이 화려한 사람일수록 믿음이 적게 갑니다.

오늘날의 교단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정책 발표니 뭐니 다 좋습니다. 그러나 1년 동안 있다가 나가는 그 자리에 거창한 공약을 발표한다고 해서, 그 1년 동안 실천된다고 믿는 사람이 솔직히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믿었다고 해도 못한다고 되돌려놓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제도가 있습니까? 그 사람은 그렇게 하고 끝나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정견이나 공약도 정말로 문제이지만, 그것보다도 우리 자신의 의식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론적으로는 누구보다도 제일 명예욕을 초월해야 할 사람이 목사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명예욕이 제일 강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나는 내 자신을 보면서 목사가 아닌가 합니다.

한때 조계종 총회가 모여서 거기 총무원장을 뽑고, 종장을 뽑고 하는 일에 깡패가 동원되고 각목부대가 동원되서 난동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일반사람들이 얼마나 그 조계종단을 비난했습니까? 그러나 따지고 보면 오늘 그들의 싸움을 과연 비웃고 말할 자격이 있습니까? 어떤 감투하나 때문에 친구간에 원수가 되는 것, 우리의 현장에서 많이 보이는 일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떤 자리에 앉기 위해서는 몇 년 전부터 공을 들여요. 어떤 분이 저한테 "김 목사님, 다음에 나올 겁니까? 나는 벌써 몇 년 동안 공을 들였는데 김 목사님 나오면 안 됩니다." 이렇게 몇 년 전부터 공을 들이고 기회를 노리는 겁니다.

여러분, 너무 그런데 신경쓰지 마세요. 몇 년 동안 그 한가지 집념은 좋지만 그 일에 그렇게 공을 들이고, 그 일을 위해서 그렇게 뛰어야 합니까? 그렇게 오늘 우리가 설정한 어떤 그런 목표를 위해서는 많은 사람을 만나고, 길바닥에다가 엄청난 돈을 뿌리면서 막상 교단장이 되고 나서는 단 돈 얼마도 교단을 위해서 쓰지 않는, 그런 지도자상을 우리가 바라보면서 우린 뭐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사람 만나서 밥 먹이고 교통비 주는 데는 몇 십만원, 몇 백만원도 안 아끼면서, 정말로 교단을 살리고 학교를 살려서 뭔가 이 교단을 이름만이 아니고 명실공히 장자교단으로 키워나가겠다는 그런 지도자의 의지가 무엇으로 표현되고 있느냐는 겁니다. 어디 나타나고 있습니까?

저는 안타까운 것은 바로 이 어떤 자리에 앉기를 바라는 사람은 많아도, 그 자리에 앉아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하며 노력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많은가? 오늘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지도자가 어떤 지도자입니까? 이 자리에 앉아있는 우리들이 바로 그런 의식은 없는지, 만약에 내 의식은 그렇지 않는지를 자기 비판하고 판단해보는 그런 모습이 있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우리가 함께 갖고 있는 병중에 어떤 모임이건 어떤 자리이건, 감투를 주면 일하고 어떤 자리 하나 안 주면 일을 안합니다. 우리 모임에 협동총무 숫자 많고 실행위원 숫자 많은 것은 아마도 한국밖에 없을 겁니다. 여러분, 어느 모임이건 간에 한 번 임원진을 보세요. 우리 총회 어떤 기관도 하기 전부터 여론이 뭐냐 하면 협동총무 늘리자, 실행위원 늘리자는 겁니다. 우리 교갱협도 예외는 아닙니다. 무엇인가 하려고 하면 그 사람 협동총무라도 넣어야 된다는 생각이 팽배합니다. 안 그러면 일을 안 하니까, 그것이 현실입니다. 우리 인간의 속성일 수도 있습니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교갱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