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11/16) 교갱협 청년목회자세미나 주제특강

들어가는 말

윤리란 영어로는 ethics, 독일어로는 ethik인데 이 말은 헬라어의 ethos에서 나왔다.  ethos라는 말은 관습이나 전통을 의미하고 율법에 의해 규정된 관습이나 실천을 의미하는 경우에 쓰인다.  ethos는 인간이 행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인간이 살아가는 '생활의 길, 행위 방법' 등을 의미할 때 사용된다.  '생활의 길'이란 의미로 사용될 때 언제나 좋은 의미로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적으로 살아갈 때도 사용되고 비기독교적으로 사용될 때도 사용된다.

윤리를 연구하는 학문을 윤리학이라 한다.  윤리학은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도덕 행위 전반에 대해서 비평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윤리학은 인간을 도덕을 행하는 자로 보고 인간의 행동과 습관과 성격의 선악을 검토하는 학문이다(D.S.Adam).

 

윤리와 기독교

윤리와 종교와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윤리와 기독교의 관계는 더욱 중요한 관계가 있다.  이 관계가 바르게 정립되지 않으면 바른 기독교와 바른 윤리가 존재하지 못한다.  "윤리는 종교에 기초하여 형성되어야 한다.  종교에 기초하지 않은 윤리는 참 윤리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종교에 입각한 윤리만이 인간의 윤리적 질문에 대해 대답할 수 있기 때문이다." (C.J.Baker), "헬라인의 잘못은 윤리가 종교 테두리 밖에서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Carl Henry), "기독교 윤리는 기독교의 기초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Paul Ramsey),  "기독교는 은총의 종교다.  은총이 없는 종교는 인간관계의 윤리문제에 아무런 효과가 없다."(W.P. Peterson)  윤리와 종교는 이와 같이 깊은 관계가 있고, 윤리는 종교를 기초로 하여 형성된다.

 

기독교윤리의 의미

기독교 윤리는 인간관계 즉 사회에서 일어나는 도덕적 행위에 대하여 비평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기독교 윤리는 기독교 신앙에 서서 인간의 도덕행위를 연구하는 것이다.  기독교 윤리는 하나님의 특별계시에 입각해 연구하기 때문에 다른 윤리보다 우월하며, 다른 종교 윤리의 심판자 역할을 하기도 하는데 이는 대단히 중요한 사명이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신앙의 기초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로 시작하고 그리스도로 결론을 맺는다.  모든 인간관계에 나타나는 도덕적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에 따라 생각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어떤 도덕적 문제에 직면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실 까 하는 문제로 시작해야 그 문제를 풀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에 의해 검토해야 한다.  그리고 그 행위가 그리스도께서 하시고자 하는 대로 되었는가를 살펴봐야 한다.

 

양심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며 도덕적 존재이다.  인간은 지성을 가졌으며 양심을 가졌다.  양심이란 인간이 과거, 현재, 미래간에 행위에 대하여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정하고, 그릇 되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죄하는 도덕의식을 말한다.

인간은 의식적 존재이다.  인간의 의식은 도덕에 민감하다.  도덕은 인간의 행위를 판단한다.  인간은 도덕적으로 행하려고 한다.  인간은 인간의 행위를 평가할 때 일정한 도덕표준에 의해 평가한다.  이와같이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의 행위를 판단하는 도덕적 의식을 양심이라고 한다.  자신의 행위의 잘잘못을 심판하는 도덕적 의식을 양심이라고 한다.  양심은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잘잘못을 가려내는 중요한 판단자가 된다.  양심이 어떤 행동을 수납하거나 비난할 때는 추상적으로 하지 않고 행위 그 자체에 대하여 냉정하게 한다.  자기 자신의 행동에 대해 자기 양심이 정죄하는 것은 그와 같은 행동을 다시 범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의 행동, 과거 역사인물 등의 잘못된 행동을 정죄하는 것은 나는 그와 같은 행위를 절대 범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양심의 판단은 즉시로 된다.  깊이 숙고한 후에 잘잘못을 가리지 않는다.  실재 행위에 대해 도덕 의식의 발작으로 판단을 할 때 양심은 즉시로 판단하고 말한다.

 

한국교회의 윤리적 상황

목회자의 윤리

지금의 한국교회처럼 부패하고 세상적이 된 개신교회가 역사적으로 과연 존재했었는지 의문이다.  교회가 오늘날 같이 부패하고 썩은 데에는 목회자들의 책임이 크다.  이는 목회자들이 성경말씀대로 목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 교회에 훌륭하신 목회자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교회에는 저사람은 절대로 목회자가 되어서는 안되는데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들어와 있다.  오늘날 사람들로부터 목회자가 무식하다는 얘기를 듣고 인격적으로는 미성숙하다는 말을 듣는다고 하는 것은 의식있는 목회자라면 용납할 수 없는 괴로운 일이다.  그런 사람들은 평신도로 그냥 남아있어야지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될 사람들이다.  오늘날 한국 목회자의 윤리적 상황은 매우 심각하다.  더욱이 그것이 부정적으로는 더더욱 그러하다.

목회자들에게 교인이 겉으로 하는 예의를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존경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오늘날의 목회자는 과거 우리 선배들처럼 그렇게 힘들고 무시받는 위치가 아니라 세상적으로도 비교적 우대받는 위치를 점하게 되었기 때문에 별로 소명감도 없고 희생당할 각오가 되어있지 않는 자가 엄청나게 많이 숨어 들어왔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  말하자면 목회자가 되는 것이 세상적으로 보아도 그렇게 나쁜 선택이 아닌 직업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단지 호구지책을 위해 목회자가 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다는 것이다.

무자격 목회자란 단순히 성경이나 신학지식이 부족하고 무인가 신학교를 나오고 설교를 제대로 못하는 사람을 뜻하지 않는다.  오늘날 설교를 잘해서 수많은 교인들을 사로잡고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를 이룩한 사람들 가운데도 진정한 의미에서 목회자의 자질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어느 정도 지적 능력만 있으면 성경과 신학을 알고 사람들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설교를 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믿음이 없어도 할 수 있고 지식만 가지고도 할 수 있다.  이것보다도 더 중요하고 어려운 것은 목회자가 갖추어야할 인격과 믿음과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적 지도력을 갖추는 것이다.

목회자들 가운데는 명예욕의 노예가 된 인사가 더러 있다.  총회장이 되기 위해서 돈을 뿌리는 목회자도 있고 노회장을 큰 벼슬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여기에서 교인들은 장로, 집사, 권사를 교회의 큰 벼슬로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고통하는 것이다.  그뿐인가?  목회자와 장로가 노회, 총회에서 거짓말을 하고 교인들을 속이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타락한 교단장 선거

현재 모교단 총회의 경우 어떤 입후보자는 선거를 위한 자금으로 1억원에서 2억원까지를 쓰고 있다고 한다.  몇 년전 모 교단에서는 총회장 입후보자가 10억원 이상의 돈을 뿌리며 선거운동을 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각 언론에 보도됨으로서 교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계속되는 교단장 선거에서 교단마다 돈 때문에 무리가 일어나기도 한다.

교단장 선거의 타락 양상은 지나친 과열 선거이다.  교단장 선거에 후보자가 된 것을 알리기 위해 총회 장소의 벽에는 물론 자기의 차량까지 선거 홍보물을 부착하고, 심지어는 스피커까지 동원하고 교인들을 동원해 후보를 홍보하기도 한다.  또한 선거를 하는 노회 대표 총대들을 대상으로 식사접대를 하는 일은 일반화되어 있으며, 총회기간 동안 총대들의 호텔비 지원, 교통비 지원 등의 이름으로 돈 봉투를 주고받는 비리가 교계 안에서 버젓이 행해지고 있다.

이렇게 한국 교회의 각 교단의 교단장 선거는 일반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 지방의회 의원 선거와 다를 바 없이 금권과 금품이 만연하고, 지역별·계층별·지연·학연 등의 지역감정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선거풍토로 치닫고 있어 개탄의 소리가 하늘 찌르고 있다.  이제 교회 선거는 공명하고 깨끗하게 해야한다는 선한 의견이 기독교 일각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래도 교권에 눈이 어둔 자는 이런 자성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일이 이토록 어렵게 되어가는 이유는 문제의 핵심이 '선거제도'에 있다기보다는 '선거에 임하는 사람들-총대들'에게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제도'보다는 '운영'에 더 큰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교회는 현재의 혼탁 과열된 선거풍토를 개선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거운동의 과열과 불법, 탈법 행위를 막을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하는 일과 선거에 임하는 사람들이 들뜬 선거 분위기에 편승해 흥분하지 않도록 억제하고 돈봉투를 주고받는 일이 없도록 뜻있는 사람들이 감시를 해야 한다.  이미 교단의 개혁을 바라는 목회자들의 모임들이 교단마다 일어나서 이 일을 우선 막아보려고 하니 다행이나, 그 수법이 너무 교묘하고 집요하고, 악랄하기 때문에 기대했던 것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각 교단의 과열·타락 선거 방지 운동은 처음에는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은 총대들에게 생소하고 의분까지 느끼게 하지만, 총대로 여러 번 참석하고 교단장 후보측으로부터 음식과 목욕, 향응, 거기다 두툼한 돈봉투까지 받다보면 그 짭짤한 맛에 해가 갈수록 타락한 취지에 동감하는 경우가 많아 점점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재미에 맛을 들인 총대는 노회 안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총회 총대가 되려고 총회에서 배운 불법, 탈법, 비리의 솜씨를 발휘한다.

교단장 후보자의 과욕은 불법적인 선거운동을 낳게 되고, 여기에 길이 든 총대들은 '보다 좋은 대우'를 찾아 여기저기 얼굴을 내밀게 되는 것이다.  심각한 것은 총대들 중에는 선거 브로커들이 있어 공공연히 돈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매년 있는 총회장 선거에서 후보들로부터 막대한 돈을 챙기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어 뜻있는 사람들을 슬프게 하고 주님을 슬프게 한다.  참으로 큰일이다.

어떤 교단의 총회나 노회 석상에서는 시장바닥에서 비루들이나 사용하는 용어와 목소리가 나와서 평신도들의 참관이 금지된 지 오래고, 각종 시험과 중요 결정에서는 문명사회에서 상상할 수 없을 수준의 편견과 부정과 비리가 빚어진다고 한다.

 

신학교교육의 문제점

교단장 선거가 이렇게 되고 목회자가 이렇게 된 데에는 목회자의 모판이라 할 수 있는 신학교가 병들었기 때문이다.  거듭된 교단의 분열과 이에 따른 신학교의 난립은 결국 오늘의 한국 교회를 낳았다.  그 수도 헤아릴 수 없는 교단, 비교단 신학교는 그 수만큼이나 많은 부작용을 낳고 있다.  특히 한국에 있는 모든 신학교에서 1년에 1만 5천명이 배출되는 목회자 후보생의 수용문제와 그 질적인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무인가 신학교의 경우, 교육내용과 교육환경의 문제가 또한 심각하다.  몇몇 신학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남의 건물 한 두 층에 세를 얻어 '신학교' 간판을 내걸고 있다.  요즘은 신학교라는 간판을 붙이지 못하게 함으로 ○○신학원이라는 간판을 걸어놓고 그 옆에는 영어로 ○○Seminary라고 써놓았다.  군소 신학교의 교육환경, 그리고 자격이 미달되는 교단 목회자들을 교수로 채용함으로써 생기는 교육내용의 질적 저하 등은 누구라도 예견할 수 있는 가슴아픈 문제들이다.

이와 더불어 다른 생업에 종사하다 어느 날 갑자기 '은혜 받고, 부름 받고, 변화 받아' 목회자가 되겠다는 학생들의 맹목적이고 근거없는 소명의식 등이 한데 얽혀 '사회의 지탄을 받는 교역자'를 양산하고 있는 게 이들 신학교의 현실이다.

 

신학생 전도사제도의 문제점

신학생 전도사 제도에도 문제가 있다.  신학생 전도사의 가장 큰 문제는 이 제도가 미래의 목회자 양성을 위한 교육에 심각한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신학대원생들이 장래의 목회를 위해 충실히 공부하고 준비해야 할 3년의 시간 가운데 많은 부분을 교회 사역에 할애하느라고 정작 신학생의 본분인 학문과 경건과 목회 훈련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

배워야 할 사람이 가르치겠다고 성급하게 나서는 것은 본인으로서도 올바른 태도가 아니고, 그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 편에서도 제대로 유익을 얻을 수 없다.  필자도 전도사 일을 해 보았지만 사역 중에 실수와 시행착오가 있었음을 자인한다.

외국의 어느 나라에서도 한국처럼 신학생들이 본격적으로 교역자가 거의 다된 것처럼 교회 일에 종사하는 경우는 없다.  미국의 경우 신학생들은 교회에서 단지 '신학생(seminarian)'이라 불리 운다.  아무도 이들을 목회자로 간주하지 않고 사역을 맡기지도 않는다.  특별한 경우 기껏해야 주일학교에서 한 반을 맡아 성경공부를 지도한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급료는 시간당 10불도 채 되지 않는다.  신학생들이 설교를 하거나 예배를 인도하는 것은 극히 예외적인 때를 제외하고는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신학대학원에서 공부를 부실하게 하고 목회현장에 나가는 목회자들이 과연 세계 수준의 경험과 영적 욕구를 가진 교인들의 필요를 능히 성공적으로 채워줄 수 있겠는가? 신학생들이 과중한 교회사역에 매이는 데는 현실적 이유가 있다.  그들 대부분이 신학교에 재학중이고 공부에 방해를 받으면서까지 교회에서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는 당장에 내야하는 학비, 그리고 기혼자의 경우 생활비를 조달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신학생들이 신학교에 다니는 동안 소속 교단은 학생들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로 하여금 학생시절에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하나님과 깊이 교제함으로서 지성과 영성을 개발하는데 전념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일을 아니할지라도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교회들이 마련해 주어야 한다.  그러면 불과 수년 후에는 한국교회 강단에서 내용있고 은혜스러운 설교가 넘쳐나게 될 것이요 교인들은 참으로 존경하고 따를 수 있는 많은 목사님들을 모실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학교의 학생수를 줄여야 하는데 이것이 난제중의 난제이다.  여기에는 지방신학교와 교단 신학교가 구조상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기가 막히는 얘기는 신학생이 신학교에서 시험을 볼 때 컨닝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졸업고사, 강도사고시까지도 이어진다고 한다.  이런 사람이 목회자가 된다니 가슴이 아프다.  하나님의 말씀을 수종들고 일할 사람이 하나님을 속이고 교수를 속이고 자신을 속이고 동료를 속이며 신학교를 나와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복음 전파를 가장한 사기꾼밖에 더 되겠는가!  저들은 컨닝을 하면서도 죄책감이 없는 듯하고 컨닝을 하는 사람을 본 동료 학우는 화를 내지 않고 화가 나지도 않는다고 한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부정을 저지르는 학생이 너무 많아서 그냥 체념해 버린 것일까?  그렇다면 한국 교회는 희망이 있는 것일까?

과제물을 제출할 때에는 동료가 만든 디스켓을 복사, 수정한 후 교수에게 제출한다고 한다.  신학교에는 선배들이 쓴 과목별 디스켓이 강의실에서 오고가고 있다고 한다.  이것도 컴퓨터의 음란물과 함께 영적 음란물은 아닌가?

1991년 한국의 신학교 수는 130여 개였다.  1998년에는 270여 개로 늘어났다고 한다.  이 많은 학교에서 신학생을 모아 교육을 하고 있다.  북한이 열리고 중국이 열리면 대비하기 위해서인가?  이는 교단별 목회자 수급계획에 의한 선발이 아니다.  이는 단지 학교운영을 위한 것이고, 교단 확장을 위한 것이리라 본다.  이것이 한국 교회의 당면한 목회자 문제요, 교회의 문제다.  아... 큰-일-이다.

 

준법정신 실종

기독교인은 두 가지의 법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세상을 살아가는 실정법과 관습법, 다시 말해서 '세상법'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도록 규정하는 '하나님의 법'이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산다는 것은 세상법에 위배되지 않게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목회자와 교인들은 세상의 법과 질서를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는 부정적인 얘기를 듣는다.  그 예로 목회자가 출입국 관리법이나 이민법을 어기고 미국에 불법체류자가 되는 사례가 너무 많아 미국 정부는 '한국 목사도 목사냐?' 라고 하면서 한국 목사들에게는 비자 발급을 꺼린다는 부끄러운 얘기를 들었다.  지금도 서류가 구비되지 못하는 목사에게는 미국 비자 발급이 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주일 낮 예배 시간에는 예배 드리러 온 교인들이 교회 주변에 아무렇게나 차를 세워 놓아 주민들에게 지탄을 받기도 한다.  이는 '하나님의 법'이라는 틀 속에 있는 사람들이 '세상의 법'을 하찮게 여기는 의식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만한 생각이요 죄악 된 행동이다.

목회자가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일반적으로 세상법에 대한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에 나오는 법 이외에도 분명히 현실 사회의 공동생활을 위해 지켜야 할 법이 있다는 것을 목회자는 기억하고 가르쳐야 한다.  일상생활에서의 규칙들을 기독교적 입장에서 정리하고 따르도록 해주어야 한다.  따라서 성경에 기초한 법과 세상법 사이에 종종 나타나는 혼란을 극복하도록 해주어야 한다.  이는 신앙인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곡해해서 이웃과 더불어 살기보다는 개인적인 욕심대로 살기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분명히 성숙한 신앙인은 세상 속에서 더불어 살아야 하고 공의와 사랑을 이웃과 공평하게 누려야 한다.  그럴 때 진정한 신앙인이 되는 것이다.

 

기독교인에 대한 의식조사

비기독교인을 대상으로 하여 기독교인에 대한 느낌을 물은 결과 "이기적인 경우가 많다"는 대답이 31%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으로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다"가 23%, "위선적이고 자기 중심적으로 보인다"가 19% 순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부정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의 모범적인 생활태도와 인격에 끌려 사귀고 싶었다"고 대답한 사람은 17%에 불과했다.  물론 이 설문조사에 대해 정확성의 문제를 제기할 사람도 있겠지만, 이 조사는 한국 교회의 현주소가 어디인가 다시 한번 되짚어볼 수 있게 해주고 있다.  또 한가지 이 설문조사 중 특히 기독교인들이 눈여겨볼 것은 생활 윤리와 관련된 것으로, 평신도의 21%가 자유로운 혼전 성관계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 낙태의 자유를 인정하는 사람도 13%나 됐다.  또한 평신도의 60%가 흡연, 음주 문제를 개인적 자유에 의한 선택사항으로 해야한다고 했다.

교회에 출석한지 25년만에 장로가 되었다는 김 모씨(45·서울 압구정동 J교회)는 주일날 성경과 찬송을 손에 들고 교회에 갈 때,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의 시선이 예전과 같지 않음을 실감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는 "어쩌다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이 선망이나 존경의 대상은커녕 멸시와 조소의 대상이 되었는지 모르겠다"라고 하며 한탄했다.

 

한국교회의 도덕성

극단적인 사건의 예이지만 1988년 9월 23일 장한모 목사는 권총 살인을 하여 강도살인 혐의로 구속됐다.  장 목사는 신도 30여 명으로 교회 운영이 어렵게 되자 타인의 금품을 강취하여 교회 재건을 마음먹고 범행했다고 자백했다고 한다. 1998년 2월 27일 홍제동 모 교회 목사(여)는 자신이 시무하던 교회의 젊은 여신도 4명을 술집에 고용시키고 2,400만원의 돈을 뜯어낸 혐의로 서울지검 남부지청에 의해 구속됐다. 

1998년 8월 "교회 후임자 구함. 호 조건이므로 빠른 연락 바람"이라고 교계 신문에 난 광고를 한 전도사가 보았다.  그는 전화를 걸고 위치를 확인한 뒤 찾아갔다.  3층 건물의 3층에 세들어 있는 60평 교회당이었다.  광고를 낸 교회측에서는 전세금과 시설비, 그리고 권리금으로 1,200만원을 내라고 했다.  교인수당 20만원씩 내야한다는 것이었다.  권리금은 교인을 넘겨받는 조건이라고 했다.  권리금을 받고 교회와 교인을 팔아넘기는 교역자가 있는 우리의 현실에 순진한 전도사는 개탄을 했다.  어쩌다 이처럼 목회자가 세속화 됐는지 모르겠다고 김 전도사는 한탄했다.  그는 돌아서서 나왔다.  김 전도사가 보름 후 그 교회 앞을 지나니 이미 다른 이름의 교회 간판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길목 좋은 곳(?)에 위치한 교회들은 이처럼 프리미엄이 붙어 거래된다고 한다.  교회당 매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합리화해야 하는가?  병들고 잘못된 자본주의 가치관을 오늘 한국 교회도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잘못을 바로 잡으려면 신학교육의 갱신과 교역자의 윤리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목회자의 재산윤리

위의 얘기는 재산 윤리의 일부분이다.  목회자들이 돈을 좋아한다는 말이 있다.  부흥사들이 들으면 서운하겠지만 부흥사들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는 말도 있다. 강사료 때문에 이런 말이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이들 가운데는 물질을 탐하는 탐욕형 부흥사가 있고, 남에게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여주려는 과시형 부흥사가 있고, 모든 돈을 자기 호주머니에 넣는 오리발형 부흥사가 있다고 한다.  이런 부흥사는 교인에게는 헌금하라고 하면서 자기는 헌금하지 않는다고 한다.  일부 목회자 중에는 부동산 투기를 하여 부를 늘려가는 기업가형 목회자도 있다고 한다.  이 일을 위해서 목회자 부인이 눈에 불을 켜고 다닌다고도 한다.  기독교인이 세상 사람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목회자와 그 가족이 세상 사람같이 사는 것이다.

 

목회자의 학위선호 풍토

한국교회는 목사보다 박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박사 목사를 선호하는 교회는 박사 목회자를 찾는다고 한다.  신학박사, 철학박사, 목회학박사, 문학박사, 명예박사 같은 직함을 목사 직함 앞에 넣고 다닌다고 한다.  이러다 보니 가짜박사, 엉터리 박사들이 있다고 한다.  엉터리 학교에서 엉터리 박사학위를 남발하는 것을 받는다고 한다.  공부도 하지 않고 돈(3000$)만 내면 학위를 받는 돈으로 산 박사도 있다고 한다.  한국교회는 대량으로 만들어낸 무자격 박사에 의해서 병들어 가고 있다.  한국 교계는 사회를 향해 포문을 열고 개혁을 말하기 전에, 목회자 내부에서부터 진정한 자정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무자격 가짜 박사를 없애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학위 선호풍토를 물리쳐야 한다.

 

비인격적 목회자

목회자는 성직자라고 해서 특별히 구별된 특권 의식에 사로잡힌 사람이 많다.  그래서 존대 받고, 높임 받고, 대접받기를 좋아한다.  목회자는 사역에 있어서 특별한 일을 하지만 특권의식에 빠져서는 안될 사람이다.  더구나 섬김을 받으려고만 한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목회자라고 할 수 없다.  총회장이 되려고 돈을 쓰는 목사, 가짜 박사학위를 매매한 목사, 외화를 밀반출 하려다 체포된 목사, 유부녀와 간통한 목사, 70억원을 사기친 목사, 도박을 한 목사, 살인한 목사 ...  모두가 다 열거하기조차 부끄러운 비인격적 목회자들이다.  그래서 한국갤럽연구소가 전국 남녀 1,500명을 대상으로 직업인들에 대한 정직과 윤리 수준을 평가한 적이 있는데, 그 결과 목회자에 대한 정직성과 윤리성이 19개 종류의 직업 가운데 제6위로 나타났다고 보고되었다.  1위 신부, 2위 방송매체 기자, 3위 승려, 4위 신문기자, 5위 초·중교 교사, 6위 목회자라고 했다.(1995년 조사)  목회자가 5위에도 못들어가고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뼈아프게 반성해야 한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성장을 멈추었고, 한국 사회는 부정 부패, 비리로 가득찼고, 정경유착, 기업 도산, 외환위기로 인한 IMF를 만난 것이다.

 

한국교회의 성장둔화

지난 5년간 한국 교회는 1%도 성장하지 못했다고 한다.  열심히 전도하지 않았고 전도하려고 생각지도 않았다.  이만하면 됐지 하는 자만심으로 가득했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 경기가 있을 때는 열심히 전도하는 듯 했으나 그후로 한국 교회는 모두 '열중쉬어' 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성장을 멈추었다.  70년대, 80년대의 한국 교회가 성장한 것처럼 90년대에도 교회 성장이 멈추지 않았다면 2000년에는 한국의 기독교 인구는 인구대비 50%가 될 것이라고 훌러 신학교의 선교학 교수 P. 와그너는 말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한국교회는 성장이 둔화되었고 지금은 거의 멈춘 상태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니 줄어들고 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첫째 목회자들에게 문제가 있었고, 둘째는 기독교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책임이 있었다.  제5공화국, 6공화국, 문민정부를 통해서 기독교인들이 국가의 중요한 공직에 대거 진출했었다.  장관에서부터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으로 믿었다.  그래서 기감사도 했다.  그러나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과 같이 국가공직 수행능력은 없었다.  부정부패 뇌물수수에 가담되어 재임 중에 체포 구속되어 불명예스럽게 퇴진한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분명히 장로인 줄 아는데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고 이를 악물고 있다가 부끄럽게 물러간 평신도 지도자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예수님께서 분명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저들로 하여금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지만 기독교 지도자들은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복음을 가로막는 죄를 저질렀다.  그래서 전도가 되지 않았고 교회는 성장하지 못한 것이었다.

 

한국사회의 부정부패

한국의 목회자들의 부패는 정치인들의 부패, 재계의 부패, 기업인들의 부패, 교육계의 부패, 군대의 부패, 백성들의 부패로 이어졌다.  그래서 나온 이름이 "부패공화국"이었다.  도무지 썪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한다.  성한곳, 제대로 된곳, 원칙대로 하는 곳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정경유착, 뇌물수수, 특혜대출, 돈이면 안 되는 일이 없는 썪은 나라가 되었다.  백성들의 생활은 무절제했고 말세기적인 향락산업이 번창하면서 인신매매, 성폭력이 도처에서 일어났고 가정이 파괴되기 시작했다.

이름을 대면 다 아는 기독교 기업인들까지 해외로 돈을 빼돌렸다는 얘기들이 무성하니 불신자들이야 오죽했겠는가?  그러다가 1997년 말에 외환 위기를 당하여 우리는 IMF를 만난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6.25 동란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고 한다. 결국 IMF의 책임은 거슬러 올라가면 목회자들의 목회 잘못이요, 평신도 지도자들의 잘못이요, 그리스도인들의 잘못이요, 온 백성들의 잘못이라는 것이다.

 

IMF 사태

이것은 올 것이 온 것에 불과하고 심은 대로 거둔 결과이다.  누구를 탓할 것 없다.  우선 목회자들과 교회의 잘못이 크다.  그러므로 목회자와 교회는 회개해야 한다.  회개가 무엇인가?  지난날의 생활을 뜯어고치는 것이다.  잘못된 집을 허물고 다시 짓는 것이다.  IMF로 이미 많은 기업이 도산했다.  그 후 구조조정, 외국 매각, 실업 등 어둡고 무거운 얘기들이 지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한국교회 윤리에 대한 목회자의 책임과 대처방안

이상의 고찰을 통해 볼 때 우리나라가 이렇게 된 데에는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의 책임이 너무나 큰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여기에서 목회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먼저 양심이 회복되어야 한다.  양심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양심은 (nous)로서, 옳고 그름을 통찰 이해하고, (sunei-desis), 선악을 통찰하고 이해하여 인정되는 것은 받아들이고 잘못된 것은 정죄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범죄하면 양심은 어떻게 되는가?  인간이 죄를 짖고 타락하였다고 양심이 죽거나, 없어지거나, 잃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양심에 의해 선과 악을 판단하는 판단력이 약화되고 둔화되고, 심지어는 양심의 감각이 마비가 되기도 한다.


중생과 양심의 회복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고 마음에 모시고 사는 중생한 성도가 되면 양심에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나는데, 첫째는 선과 악의 표준과 그 지식이 회복된다.  사람이 예수 믿고 중생 하면 선과 악의 표준을 다시 소유하게 된다.  그러나 중생함과 동시에 선과 악의 표준이 일시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점진적으로 그 지식이 회복되고 양심의 규범과 이상을 이해하고 양심적으로 실행하게 된다.

양심의 규범은 성경 말씀이다.  성경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중생자의 양심을 회복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양과 훈계를 받아야 한다.  성도는 성경 말씀을 배움으로 성화되고, 성화과정 중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되는데 이것을 양심의 회복이라 한다.  성도가 양심적으로 온전히 살 때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되는데 이것을 제2의 천성을 이룬다고 한다.  중생자의 양심은 더욱더 성경대로 행하고 성경의 이상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이것을 온전한 양심이라 한다.  둘째는 양심감각이 예민해 진다.  중생한 사람은 양심이 자극을 받을 때에 그 반응이 예민해진다.  그래서 불의와 죄에 대하여 강한 저항을 하고 선과 의에 대하여 전폭적 지지를 하고 자신도 양심적으로 행하려고 한다.

 

양심회복의 결과

* 자기수양을 한다 - 성경연구, 기도, 진실한 삶을 산다.  양심을 회복한 사람은 첫째, 진실을 말한다(Truth Telling). 즉 양심대로 말한다.  그래서 사실대로 말하고(reality), 본대로 말하고, 들은대로 말하고, 아는대로 말한다.  또한 일관되게 말을 함으로서(consistency)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말을 한다.  그리고 타당한 말만 함으로(justifiable) 옳은 말만 한다.  둘째, 약속을 지킨다(promise keeping).  즉 자기도 약속을 지키고 남도 지키게 한다.  약속한 양 당사자가 꼭 지키도록 한다.  또한 진실하고 정직하다(integrity).  나도 정직하고 남도 정직하게 한다.

손해를 보거나 번거롭더라도 사실대로 말한다.  그리고 비밀을 지킨다(security).  그래서 나도 안전하고 너도 안전하게 한다.  셋째, 덕행(bene-ficence)을 한다.  즉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고 유익이 되게 한다.  덕행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적극적 덕행인데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최대의 이익과 유익을 주는 것을 말한다(doing what is another's best interest).  다음은 소극적 덕행인데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지 않는 것을 말한다(no harming others).  넷째, 정의(justice)롭게 행한다.  이 사람은 올바르게 행한다(fairly).  그것이 올바른 것(right)이냐? 할 때 그렇다는 대답이 나오면 행한다.  그것이 나쁜 것(bad)이냐 할 때 그렇다고 하면 행치 않는다.  또한 자료에 의해 정당하게 분배한다(allocation).  그것이 틀린 것(w-rong)이냐? 할 때 그렇다고 하면 하던 일도 중단한다.  그리고 근거에 의해서 공정하게 상벌을 준다(re-ward).  "a right act consist of doing God's will"  올바른 행동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포함된다.

 

교단장 선거 문제

교단장 선거는 제도보다 운영이 문제이다.  총회의 선거과정에서 나타나는 여러가지 문제점들을 개선하기 위해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변화는 총회의 ‘의미’에 대한 인식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총회란 그동안 흩어져 있던 형제들이 한자리에 모여 그 신앙을 재확인하고 함께 여러가지 문제들을 의논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비록 오늘날에 와서는 교회의 수가 너무 많아져서 모든 형제가 모일 수 없기 때문에 '대표'로 선출된 일부 총대만이 참석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형제들의 모임'이라는 의미가 퇴색되는 것은 아니다.

'형제들의 모임'이란 곧 '사랑과 만남의 축제'를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기독교 각 교단들의 총회가 언제부터인지 그 '사랑과 축제적 의미'를 상실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  여기서 총회가 '정치 대결의 장이 아닌 사랑과 축제의 한마당'이 되도록 총회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일이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과열된 총회장 선거를 막을 방안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과열된 풍토를 개선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운영의 묘'를 살려 나가야 한다.  그리고 선거 운동의 과열과 탈법을 막을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하는 일과, 선거에 임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선거 분위기에 편승해 흥분하지 않도록 억제하는 일을 동시에 시도해 나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제도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모든 교단이 본격적인 선거관리를 하고, 선거과정 전체를 교단이 투명하게 관장 해야 한다.  선거 '공영제'가 실시된다 해서 탈법 선거가 없었던 것은 아니므로 보다 강력한 법적인 규제조항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각 교단은 선거공영제의 확립과 함께 선거 관계 특별법을 제정, 철저한 관리와 감시활동을 병행해야 할 것이다.

운영의 측면에 있어서는 현재 각 교단이 시행하고 있는 '지역 윤번제'나 '부총회장 자동 총회장 추대' 제도 등이 더 많은 교단으로 확산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교단의 총회장이 '실무자'가 아닌 교단의 '상징적인 대표'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같은 제도들의 올바른 운용을 위해서는 교단 내 위계질서를 분명하게 확립하고 이에 맞도록 총회장의 자격을 강화하는 방법도 강구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교단장이 되기를 원하는 후보들은 소속 교단 신학교 발전기금 또는 교단 발전을 위한 기금을 공탁금 형식으로 냈다가 당선된 사람 외에는 선거비용을 제외하고 다시 찾아가도록 하게 하는 방안도 모색해 볼 수 있겠다.  돈을 뜻있는 일에 써보자는 제안이다.

 

신학교와 학생 문제

한국의 신학교는 수도원식 경건의 훈련과 교육이 필요하다.  진정한 목회자 양성을 위해 신학대학원은 영성훈련을 강화해야 한다.  신학생들이 공부와 훈련에 전념하지 않고 지 교회 일에 매이고 있는 현실을 개선해 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만일 지역 교회들이 좋은 목회자를 청빙하는데 정말 관심이 있다면, 미리 자신들의 미래를 위한 좋은 목회자을 양성하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  즉 미래에 자신들의 목회자가 될 신학생들로 하여금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는 것이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자질을 향상시키는 근본적 방법이라 하겠다.  그리고 그 수를 줄이고 입학 사정을 엄격히 하여 인격적으로 목회자답지 않은 자를 막아야 한다.  각 교회는 신학생들에게 교육 전도사라는 명칭을 붙여 공식적 사역을 맡기지 말고, 그들이 장래의 목회를 위한 준비와 공부와 훈련에만 열중할 수 있도록 대가없이 장학금을 투자한다면 잘 준비된 좋은 목회자들이 각 교회로 공급될 것이다.  이 문제는 일차적으로 노회가 책임을 있다.  왜냐하면 원칙적으로 목사후보생은 노회의 관할 아래 있기 때문이다.  신대원생들을 노회가 관할한다는 것은 단지 일년에 한번 그들의 '신학계속청원'을 심사하는 감독의 역할뿐 아니라, 목사후보생들의 교육과 생활을 포함한 전반적인 면을 돌보고 적극적으로 지원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리고 지원은 기도와 관심이라는 정신적 수단과 함께 학비와 최소한의 생활보장이라는 물질적 차원에 대한 고려도 포함해야 한다.

신학생들의 학비와 기숙사비를 지원하기 위한 구체 적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각 지 교회에 할당된 상회 부담금을 노회가 받아 직접 지원할 수도 있고, 아니면 정선된 신학생들을 적정 인원만큼 지교회에 책임지울 수도 있다.  단 조건은 재학 중에는 신학생에게 직분과 공식 사역을 맡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주일학교 교사나 성가대원 같은 사역까지 금지시키자는 말은 아니다.  신학생도 신자인 만큼 기본적인 교회 봉사와 활동에는 참여해야 할 것이다.


준법정신 문제

기독교인들의 법의식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법'속에 '세상의 법'이 포함돼 있다는 생각과 더불어 세상에서 바르게 살기 위해서 실정법이건 관습법이건 '세상의 법'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주지시킬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같은 일을 위해서는 목회자들이 먼저 법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도로교통법과 같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보다 큰 의미의 법-건축법에 이르기까지 법을 지키는 것이 시민의 기본이라는 점을 목회자 스스로 보여 주어야 교인들의 법의식도 분명히 설 수 있을 것이다.

교회는 사회를 위해 봉사를 해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자신이 평화로운 사회건설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믿는 것을 자신의 삶에서 구 체적으로 실천하는 자원봉사 활동이야말로 정직한 삶, 준법정신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교회는 사회질서와 법규를 지켜야 한다.  초등학교 정도의 교육을 받은 모든 사회인은 사회질서와 법규를 지켜야 한다는 것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자신의 이익과 안전을 확보하기 위하여 사회질서와 법규를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사회생활에 있어서의 대표작인 부정직한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사람을 편견없이 대하여야 한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말에 우리는 원칙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나라에서는 지역차별 및 지방색이 망국병이라는 말을 너무나 자주 듣는 현실이다.  그러나 실제 삶에 있어서 과연 우리는 이러한 망국병을 극복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만약 입으로 모든 사람은 평등하므로 편견없이 대해야 한다고 하면, 마땅히 그 사람은 혈연, 학연, 지연으로 인하여 사람들을 차별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한 행위는 원칙적으로는 지방차별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도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그것과는 다른 행동을 한다는 점에서 부정직한 행위이다.

그리스도인은 세금을 정직하게 납부해야 한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국민의 4대 의무에 대하여 배워온 바가 있다.  그 중 하나가 납세의 의무이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는 어느덧 세금이란 자신의 소득을 부당하게 빼앗기는 것이라는 생각이 만연하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생각이 만연하게 되기까지에는 세제와 세무구조에 있어서의 모순과 부조리가 큰 원인을 제공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세금이란 한 국가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데 있어 필수적인 것이며, 국민으로서 기본의무인 납세를 성실히 수행하지 않는 사람은 국민된 권리를 행사할 권리도 그만큼 없다고 볼 수 있다.  특별히 구조적인 모순을 안고 있는 세무행정 및 세제를 개혁하는 작업에 참여할 도덕적 자격도 탈세자에게는 없다.

그리스도인은 개인적 이득을 위해 뇌물을 주거나 받지 않아야 한다.  직장생활에서의 뇌물주고 받기가 부정직의 문제와 관련이 있듯이 사회생활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특별히 쌍방간의 관계만이 아닌 다자간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사회생활에서 개인적인 이득을 위하여 뇌물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결국 이득을 보는 나를 제외한 사회공동체에 폐해를 끼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예컨대 교통경찰관에게 뇌물을 건네주고 당장의 불이익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은 결국 그 공무원 사회의 타락을 조장함으로써 사회공동체에 그러한 분위기를 확산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공공시설을 내것 처럼 아끼고 써야 한다.  정직이란 사고와 행위들 사이의 조화와 일관성을 의미함으로서 한 개인의 인격의 진실성(integrity)을 가늠하는 척도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공공시설을 내것처럼 아끼는 행위는 개인적인 삶과 사회적인 삶에 있어서의 일관성을 나타내어 준다는 의미에서 정직한 행위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환경보호에 대해 노력해야 한다.  정직이란 우리의 이웃들과 평화롭게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사회적 덕목이기도 하다.  소비문화가 극성을 부리고 있는 현대 사회는 극대화되어 가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환경이 최대의 희생물이 되고 있다.  물론 환경의 희생은 곧 인간에게도 회복하기 어려운 폐해로 돌아오게 된다.  이러한 환경파괴의 문제는 우리 세대만이 아닌 우리 후손들에게 더욱 치명적이라는 의미에서 전세대적인 각성이 요구된다.  이러한 엄연한 현실과 미래 예측에도 불구하고 당장의 개인적인, 혹은 우리 세대만의 유익을 위하여 환경을 파괴하는 것은 부정직한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목회자의 자질 문제

목회자는 성직자라고 해서 평신도에 비해 특별히 구별된 존재로만 생각해왔다.  그래서 목사 자신이 교회와 세상을 섬기는 봉사자로 서기보다 신도들로부터 대접받기를 좋아하고 존경만을 받 으려는 어떤 특권 의식에 사로잡혀 앞에서 신문지상에 발표된 사건으로 전도의 문을 막는 목회자의 비윤리적 사건이 얼마나 많았던가?  목회자가 총을 쏘아 사람을 죽이고, 사기를 치고, 음행을 저지르고, 돈을 탐한다고 하면 어찌 그를 목회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신앙적인 인격이 없는 목회는 종교활동가나 종교사업가에 불과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목회자는 그의 생활 속에서 목회자답지 못하게 살 때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는다.  디모데전서와 디도서를 통해 살펴볼 때 존경받을 만한 목회자의 자질은 다음과 같다.  목회자는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  일상생활 가운데서는 죄에서 멀어야하고 실족했을 때도 즉시 회개하고 전진해야 한다.  목회자는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야 하고 이혼을 해서도 안되고, 이혼을 당해도 안되고, 아내를 두고 다른 여자에게 마음이 끌려도 안된다.  목회자는 근신할 줄 알아야 하고 조심성이 있어야 한다.  목회자는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

목회자는 나그네를 잘 대접해야 한다.  목회자는 가르치길 잘하고 술을 즐겨서는 안되고 구타해서도 안된다.  목회자는 관용해야 하고 다투지 말아야 하고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목회자는 자기 가정을 잘 다스려야 하고 외인한테도 선한 증거를 얻어야 한다.  목회자는 인내할 줄 알아야 하고 고집을 부려서는 안되고 선을 좋 아해야 한다.  목회자는 절제할 줄 알아야 하고 거룩해야 하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  이상과 같은 목회자의 생활상의 자질들은 복음의 빛을 드러낼 수 있지만, 이러한 자질들이 결여될 때는 목회자 개인도 교회도 비난을 받게 된다.

오늘 목회자가 인격적인 면에서 성실한 삶을 사는 목회가 아니라, 현실적이고 물량적이며 기업주의의 이미지를 풍기는 목회를 하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병들어가고 있는 것이며 목회자들은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목회자의 바람직한 모습은 먼저 인격면에서부터 바로 되어야 한다.

목회자는 성경을 근거로 한 확고한 신앙속에서 목회에 필요한 전문적인 지식인 성경신학, 역사신학, 교의신학, 기독교윤리학, 종교심리학과 실천적 영역에 속하는 설교학, 예배학, 행정학, 목회학, 상담심리 등의 지식을 갖출 뿐만 아니라, 현대인을 이해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연구해야 한다.  목사가 학문적인 기반이 확고해야 사역하는 교회의 모든 부분에서 전문성을 가지고 자신 있는 목회를 할 것이다.

한국교회 교인들이 목사들에게 가장 기대하는 것은 설교를 잘해주기 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끝없이 연구하고 책과 더불어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  따라서 목회자는 그 어느 직업을 가진 사람보다도 열심히 공부하고 책을 읽는 일에 게을 러서는 안된다.  공부하지 않는 목회자는 직무를 유기하는 자이다.  그렇기에 공부하지 않는 목회자는 설교 때문에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

또한 목회자는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목회자는 크리스천의 영적 싸움에서 최고 선봉에 서야하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사셨으며(마3:16, 마4:1, 요8:29) 또한 그의 제자들에게 성령받기를 명하셨다(행1:8).  이에 대하여 스펄전(Charles H. Spurgeon)은 목회자의 영적 고갈상태를 심각하게 지적하면서 목회자의 영적상태는 목회자 자신과 교회에 심각한 영향을 준다고 말했다.  그래서 목회자가 영적 상태의 고갈을 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항상 서 있어야 한다(Richard Baxter).  첫째, 목회자 자신이 항상 구원의 확신에 차 있어야 한다.  둘째, 열성적인 믿음이 있어야 한다.  셋째, 성경 말씀에 능통해야 한다.  넷째, 항상 체험적 신앙을 갖고 있어야 한다.  다섯째, 항상 성령 충만해야 한다.

 

목회자의 학위선호 문제

교회가 학위 소지자를 선호하게 될 때 목회자가 여기에 미혹을 받는다.  그렇다고 목회자가 공부하여 학위받는 것을 문제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문제는 목사라는 이름만 가진 사람은 실력이 떨어지고 박사 학위를 받아야 실력이 있는 것처럼 되어 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공부도 안하고 목회도 시원치 않게 하면서 박사 학위를 돈주고 사려는 마음을 먹는 것은 더더욱 안된다.  정말 제대로 공부해서 훌륭하게 목회를 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교회의 도덕성 문제

빛과 소금으로서의 크리스챤의 삶은 항상 윤리적이어야 한다.  크리스챤에게는 이 사회가 기대하는 일반적이고도 상식적인 삶의 수준이 있다.  이 사회가 '요구하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때 혹은 이 기대를 저버렸을 경우, 이 사회는 냄새가 나고 어두워질 수밖에 없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윤리부재 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많은 목회자를 비롯한 교회 지도자들은 이를 걱정한다.  이러한 때 최근 들어 기독교 각 단체에서 벌이고 있는 '바른 삶 실천운동' 및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등이 다 허물어진 기독교 윤리의 집을 재건하는데 큰 역할을 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안에서 창조의 영성을 회복해야 한다.  창조의 영성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간에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며 이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환경간에 상호 공존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창조 영성의 회복은 곧 교회 중심의 폐쇄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우주적인 차원의 신앙고백이 이루어져야 하며, 이러한 고백의 결과는 나보다 연약한 이웃과 함께 하는 것이다.  교회 자체만을 위한 소비에서 눈을 돌려 환경선교, 지역선교, 사회선교에 관심을 갖고 줄 때 교회의 과소비 현상은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는 곧 '그리스도이 몸'이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하나의 거래 가능한 상품처럼 소명의식이 부족한 목회자들에 의해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매매되고 있다는 데 이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가장 성스럽고 사회의 모범이 돼야 할 교회에서 교회당을 임의적으로 사고 파는 행위는, 결국 물질만능주의로 물든 우리 사회의 가치관이 그대로 교회 내에 주입되어 물질 성장 위주의 교회로 치닫는 경향 때문이라고 확대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 목회자와 신학교수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이런 교회당 매매행위는 하루속히 근절되어야 한다.

 

맺는말

한국교회가 새로워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회자가 새로워져야 한다.  목회자가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신학교가 새로워져야하고 신학생이 시험 볼 때 컨닝이 없어져야 한다.  목회 윤리가 재정립되어야 한다.  목회자가 새로워져야 목장이 신선 해 지고 목장이 신선해져야 이 사회가 신선해진다.  그리고 교회 직분자들(장로, 집사, 권사, 교사)이 새로워져야 한다.  직분자들이 새로워질 때 그들이 일하는 일터가 새로워진다.  직분자들의 일터가 새로워질 때 우리 사회가 새로워진다.  우리사회가 새로워져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  사회가 새로워져야 부정, 부패, 비리가 없어진다.  그래야 살만한 세상이 되지 않겠는가!

얼마 전 ‘뉴욕타임스’는 한국의 경제 위기를 "위장된 축복"이라 보도했다.  경제 개혁에 대한 아이디어는 무성했지만 한번도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지 못한 한국이었다.  그렇게 경제학자가 많고 경제문제 연구소가 기업마다 있고 안기부가 있었지만, 우리 나라는 앉아서 외환위기를 맞았고 IMF를 시대를 만났다.  금번의 위기를 통하여 정부, 금융, 기업 등 사회 시스템이 제대로 개편, 개혁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는 다시 일어서게 될 뿐만 아니라 더 강한 체질을 가지고 뛸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된다고 본다.  오늘의 위기가 축복이 되기 위해서는 한국의 교회, 정부, 기업뿐만 아니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양심적이고 도덕적으로 바로 서서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  끝으로 바람직한 목회자와 그리스도인의 윤리실천사항을 제시함으로서 오늘의 이야기를 줄이려고 한다.

 

목회자의 기본윤리

1. 말씀연구와 기도생활에 전념한다.
2. 진실하고 공명정대하게 처신한다.
3. 절제, 검소한 생활을 한다.
4. 과도한 사유재산을 소유하지 아니한다.
5. 가정에 충실한다.
6. 지나친 기호와 취미활동을 삼가 한다.
7. 환경의 보존을  위한 운동에 솔선수범 한다.
8. 애경사(결혼, 혼수, 회갑, 장례)를 간소하게 한다.
9. 가난한 이웃과 굶주리는 북한동포를 돕는다.
10. 해외여행과 고급호텔 이용을 자제한다.

 

신자의 기본윤리

1. 부정부패한 행위를 하지 않는다.
2. 국가 사회의 법과 질서를 지킨다.
3. 세무, 건설, 건축, 군 입대에서 비리를 저지르지 않는다.
4. 허영과 사치를 물리친다.
5. 혼수와 결혼식은 간소하게 한다.
6. 불우이웃 돕기와 사랑을 실천한다.
7. 헌혈운동과 장기기증 운동에 적극 참여한다.
8. 장애우 복지에 힘쓴다.
9. 부모와 자녀간에 재산을 상속하고 받지 않는다.
10. 환경 보존을 위한 운동에 솔선수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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